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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설교자가 되는 비결이 있을까?


후배로부터 설교에 대한 조언을 부탁 받았다. 이런 부탁은, 일단 몹시 부담스럽다. 아직 그런 것을 말하기에는 내가 너무 부실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결국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여전히 어렵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그리고 내가 느끼고 품은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참 막연하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몇 자는 남겨도 될 것 같아서 간략하게 말하고자 한다.

우선, 이 글은 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둔다.


비결1, 좋은 설교자가 되라


좋은 설교는 좋은 설교자로부터 나온다. 예수님은, 좋은 나무에서 나쁜 열매를 거둘 수 없고,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없다고 하셨다. 결국 사람은 그 열매를 통해 자기를 증명하게 되어 있고, 그것은 설교자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설교를 전하고자 하는 노력이 좋은 설교자가 되고자 하는 노력과 다를 수 없다고 믿는다. 만약 그 둘이 서로 갈라서게 된다면, 그것은 더이상 설교가 아니라 '사기'일 것이다. 

때문에 좋은 설교자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 경건의 훈련을 통해 영적으로도 그러하고, 또한 지적인 발전을 계속해야 하며, 그 깨닫고 아는 것이 삶과 괴리되지 않도록 인격적인 성장도 노력해야 한다. 

사실은 이 부분이 설교자가 좋은 설교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노력이며 동시에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지점이라 하겠다. 영적인, 지적인, 그리고 인격적인 균형과 발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말씀을 흠 내지 않고 온전히 받아 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비결이다.


비결2, 성경을 경외하라


말씀에 대하여 충성심을 가져라. 성경은 암호문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고, 때문에 인간이 이해하는 범주를 훨씬 넘어서는 깊고 오묘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훌륭한 장인은 타인이 보기에는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작품에도 애정어린 손길을 몇 번 더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그의 눈길과 경험이 닿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완성하려는 열정이야말로 작품을 물건 그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준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는 마음(경외심)이 중요하다. 성경을 믿어야 한다.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내게 대답을 하고, 구하는 자에게는 열려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 성경에 귀를 기울이고 지극히 깊이까지 치열하게 파고 들어가는 훈련이 설교자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보편적으로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전도사 시절부터 4~5시간을 소모했다. 

설교할 분문을 결정하고, 그것을 분해하여 이해하고, 어의를 살피고, 개인적으로 메시지를 추출한다. 그리고 주석과 다른 책들을 통해서 나의 이해가 바른 것인지 확인하고, 혹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살핀다. 그리고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면, 그것을 글로 옮긴다. 

초고는 보통 세 번을 다시 손질한다. 처음에는 작성한 직후에 읽으며 수정하고, 다시 본문을 새로 묵상한 이후에 가감하고, 설교하는 아침이나 직전에 다시 확인하며 손질한다.

일본에 온 이후에는 한 편의 설교 준비시간이 더욱 길어졌다. 그것은 우리 교회의 경우, 주중에 전혀 모임이 없기 때문이고, 한 편의 설교로 하나의 주제를 제대로 설교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설교에 대한 준비 시간도 갑절로 늘어났다. 요즘은 보통 8시간 이상을 한 편의 설교준비에 사용하고 있다.


비결3, 좋은 귀를 가지라


좋은 귀를 가져라. 설교자는 대부분 말하는 입장에만 선다. 그것이 결국 자신에 대하여 무지하게 만든다. 설교자 만큼 좋은 설교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다. 훌륭한 설교를 개인적으로 듣고 은혜를 받을 때에, 그것이 마중물이 되어서 더 좋은 설교를 전할 수 있게 해준다.

요즘은 오픈되어 있는 세상이다. 마음만 있다면 좋은 설교자의 설교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마음의 멘토로 삼을 만한 목사님의 설교를 지속적으로 들으며, 설교자 자신도 주님의 양(羊)이라는 사실을 깊이 새기고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좋은 설교는 모방을 해도 나쁘지 않다. 책을 내는 일은 저작권의 문제가 있겠지만, 설교를 하는 일은 '복음'이라는 오픈소스를 사용하는 일이다. 때문에 어떤 설교를 모방한다고 하여서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제대로 해야 한다. 설교준비가 부족해서, 혹은 쉽게 설교를 때우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설교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도적질이다. 그러나 다른 분이 하신 한 편의 설교가 내것으로 깊이 용해되어서 설교자 자신의 목소리로 변하여 선포될 수 있다면, 그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또한 꼭 자기 설교를 들어봐라. 음색, 톤, 발음 같은 것들은 물론, 자기도 모르는 언어적 습관까지 고쳐야 할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요점을 흐리는 곁가지,  불필요한 농담, 심지어 성경을 잘못 인용하는 오류까지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나중이라도 양해를 구해 정정할 것은 정정하고, 개인적으로 고칠 습벽은 고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설교에 자기가 은혜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도 은혜 받지 못하는 말씀을 들고서 다른 사람들의 식어진 가슴에 불을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교가 해산의 수고를 통해 태어나는 옥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설교에 쉬운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것을 소개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모리배들이다.


비결4, 청중을 사랑하라


설교를 듣는 사람들(청중)을 사랑하라. 설교는 죽은 언어가 아니다. 단지 의미만을 전달하기 원하셨다면, 책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부르시고, 훈련하여, 강단에 세우시는 까닭은, 우리가 전하는 진리가 '사랑'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의미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 의미에 본래의 감정을 실어서 전달하는 것이 설교자의 의무이다. 

때문에 설교자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불타올라야 한다. 

그 심정이 무엇인가? 단 한 번이라도, 강단에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했다면, 그 심정이 바로 한 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설교자 앞에 놓여 있는 하나하나의 영혼을 깊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설교의 원인이고, 능력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그는 설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설교하기 전에는 항상 버릇처럼 그런 기도를 한다. 교훈이든, 책망이든... 오늘 전하는 말씀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게 해달라고... 그 사랑 없이는, 내가 어떤 지식을 동원하고 어떤 비밀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설교자는 설교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 그것은 정의를 가장한 흉기이며, 자기의 과시이고, 하나님을 빙자한 한(恨) 풀이다. 그런 설교자는 듣는 이의 영혼을 죽인다. 그런 설교자는 차라리 설교하지 않는 것이 자신과 교회를 위해 유익하다.


비결5, 농부의 마음을 가져라


내가 이해하기에, 설교는 농사다. 농부의 마음이 필요하다. 조급하면 망한다. 오늘 설교했다고 내일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면 큰 실망감에 사로 잡힌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식간에 사람을 건져 올리기도 하지만, 아주 오래 동안 숙성의 시간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나는 자주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을 어부 중에서 선택하셨을까? 그리고 왜 '사람 낚는 어부'라는 표현으로 부르셨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대개 자연을 상대로 하는 일차적 노동의 현장이 그러하지만, '인내'를 배경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음에도 실패하였지만 다시 말씀에 의지하여 한 번 더 내리는 그 마음, 그것이 바로 설교자가 품어야 하는 마음이다.  수 년 동안이나 거름을 주고 애정을 쏟아 가꾸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열매가 없어 도끼에 찍힐 위험에 처한 포도나무를 위해 간절하게 마지막 기회를 간청하는 농부의 마음이 바로 설교자의 마음이어야 한다.

농부에게는 믿음이 있기에 기다릴 수 있다. 흔히 땅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그 믿음의 내용이다. 

이와 같이 설교자는 마땅히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신뢰해야 하지 않겠는가! 비록 현실에서 사람들은 은혜를 모르고 거절하는 것처럼만 보이더라도, 전하게 하신 하나님이 마침내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강퍅한 마음보다 더 강하다는 신뢰를 품어야 하지 않겠는가!


비결6, 나를 관찰하라


설교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설교자는 말씀을 해석하게 된다. 그 해석의 옳고 그름과 얕고 깊음에 따라서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면 좋은 설교란 무엇인가? 두 가지 측면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여 전하는 것이고, 다음은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도록 전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설교자는 성경을 깊이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동시에 사람이 무엇이며 어떠한지를 이해해야 한다.

의외로 남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는 것에 비하여, 자기 자신을 놓치는 설교자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진정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그 시작이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자신을 위해 설교하라. 자신에게 들려주어야 할 메시지를 찾으라. 자신이 꼭 필요로 하는 설교를 준비하라. 그 과정이 의외로 많은 것을 얻게 한다. 


비결7, 은혜가 아니면 설교할 수 없다


모든 노력을 기울인 이후에도, 역시나 준비된 원고를 들고 강단에 서면 떨린다. 그리고 준비된 것도 못하고 내려오기도 하고, 준비된 것 이상을 전하고 내려오기도 한다. 이것이 단지 컨디션의 차이일까? 그날의 운(運) 때문일까? 

설교에는 사람이 설명할 수 없는 요소가 분명히 있다. 사실 그것이 핵심이다. 만약 그것을 놓치고 있다면 그는 아직 제대로 설교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완성한 이후에도, 하나님의 간섭과 임재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고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가난한 마음이야말로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이라 생각한다.

가끔은 사람의 탁월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 막는 것을 본다. 그들은 자기 재주에 취해서 그만 하나님을 가려 버린다. 사람들 또한 그들의 재주에 눈과 귀가 현혹될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 설교는 죽었고, 그의 재주는 사람을 모으기는 해도 살리지는 못한다. 

설교는 생명이 그 영광이다. 누군가 그 설교를 듣고 살아나야 한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면, 얼굴 표정이 밝아지고, 언어가 변하고, 행동이 달라진다. 그런 날이 거듭되면 인격이 변한다. 그렇게 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이야말로 설교자의 영광이요, 보람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은혜'라고 부른다. 

결코 설교자의 능력이 아니다. 훈육의 힘이 아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이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이것을 잊어버리는 순간, 그는 세상에서는 스타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늘에서는 추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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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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