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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1.23 예수님의 부끄러움, 자기를 외면했던 세상을 향한 복수
  2. 2012.07.10 정조의 활쏘기




01

(눅 9: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것도 설교 중에...

일단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첫째,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실제로 그런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자들이 존재했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의 생각을, 특별히 제자들의 생각을 통찰하셨으니까. 이 말씀은 결국 누군가 들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둘째, 누가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복음서에 기록하여 교회에 읽게 했다는 것은, 초대교회 안에서도 역시 그런 '부끄러움'을 가지는 신자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복음서는 교회를 위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목격하지 못한 신자들을 위한 기록이었다. 그렇다면 그 기록에는 분명히 기록의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아 마땅하다.



02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그리고 초대 교회의 신자들 사이에 예수님에 대하여, 혹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왜 그랬을까?

여기서도 몇 가지 추리가 가능하다. 

일단,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 사람으로 불려졌고,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나다나엘과의 만남을 떠올리더라도 그러한 예수님의 출신은 대중에게 호감을 주지 못했다. 결국 학벌도, 가문도 없는 예수님의 모습은 당시의 혼란한 시대 속에서 '자랑스러운 스승'이 되기에는 한없이 허술해 보였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예고하면서 이렇게 노래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2)

그의 예언이 사실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오늘날에야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예수를 '주님(Load)'이라고 부르고, 또한 그분을 위하여 거대한 성전들이 지어져 있지만, 그 시절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예수는 무명(無名)에 불과했다. 교회가 아직 사회적으로 마이너(minor)에 불과했을 때에, 신자들이 공개적으로 예수를 시인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그리고 중요한 신앙적 행위에 분명했다. 그러니 그것을 뒤집어 본다면, 당시에는 예수를 부끄러워 하기가 매우 쉬웠다는 뜻이 된다.



03

또한, 누가복음을 통하여 한 가지 더 특별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나와 내 말'이라고 언급하신 예수님의 목소리 속에 드러나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향한 믿음은 곧 예수의 말씀에 대한 실천을 내포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에는 신학이 발달하고, 다양한 체계가 개발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에 그런 복잡하고 세련된 지식의 구조와 조직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예배의 모임과 믿음의 내용에 있어 매우 단순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처음의 교회는 무엇에 주목하고 집중했을까? 당연히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복음서 중에서도 바로 예수님의 목소리가 담겨진 부분들이 더욱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읽어도,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리 수월하지 않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는 것은, 어쩌면 그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아직도 우리에게 난감한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를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거나, 원수를 위하여 사랑하고 기도하라거나, 예수님보다 자기 집안 식구들을 더 사랑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은, 지금도 우리를 충분히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 당혹감의 반응이, 일정 부분 '부끄러움'이라고 표현된 것이 아닐까?



04

부끄러움(수치심)은 결국 이성의 반응이다.

때문에 이성적으로 그것은 합리화 될 수 있으며, 또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성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동안, 믿음은 '저편의 무엇'에 지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믿음은 반(反) 이성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성을 초월하는 무엇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초대 교회의 신자들도 결단이 필요했다. 그것은 그들의 눈으로 보는 현실, 그들의 상식, 그들이 받았던 교육의 내용과 대비되는 예수 앞에서도 예수와 예수의 말씀을 선택할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제법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며, 또한 자기의 틀을 깨뜨리는 파격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때문에 사실 누가복음의 본문 속에서 나타나는 '부끄러움'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고, 오히려 예수와 예수의 말씀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그 시대에 매우 부자연스러운, 혹은 특별한 것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05

이제 기독교는 지구상에 메이저(major)가 되었다. 왠만하면 어디서도 예수의 이름이 수치심을 자극하는 초라한 행색을 가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다니고, 심지어 기독교적 문양을 문신으로 피부에 새기기도 한다. 집집마다 문패와 함께 예수의 이름을 내걸고 아이에게도 예수와 관련된 이름을 지어준다.

하지만 이게 과연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부끄러움을 극복한 현실일까? 

전혀 아니다. 여전히 예수의 말씀은 받아들이기 힘든 무엇, 사람들이 일부러 귀를 막고 외면하는 무엇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상식의 수준에서 보는 예수의 언행과 가르침은 촌스럽기만 하다. 그것은 전혀 매력적이 아니다. 화끈한 복수를 해도 시원찮은 판에 원수를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해 주라니! 

 


06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촌스러운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자기 경험과 상식,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예수의 말씀에 기꺼이 자기 인생을 걸어볼 것이다. 어차피 그런 결단이 아니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간단한 이름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예수의 발 앞에서 설교를 들었던 청중들도 그러했고,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들었던 초대 교회의 신자들에게도 그러했으며, 지금 우리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사실은 우리를 무척 당혹스럽거나 슬프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07

세상은 언젠가 뒤집어진다. 촌스럽다고 조롱했던 바로 그 예고된 장면, 예수가 천사들과 함께 영광으로 나타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예수와 예수의 가르침을 비웃었던 그 모든 사람들, 논리들, 주장들이 모두 추락할 것이다. 그 날에는 예수와 예수의 말씀 앞에서 결단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실로 통쾌한 복수가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허세를 부리며 꾸미고 포장했던 모든 것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그 날의 부끄러움은 우리가 스스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퍼붓는 것이다. 

예수는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다. 십자가의 조롱을 참고 인내했으며, 뿐만 아니라 자기를 부끄러워 하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조용히 침묵했다. 그러나 예수의 침묵이 납득이나 수용은 아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예고하셨고, 누가를 통해 그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와 예수의 말씀을 부끄러워 했던 자들, 그것을 개나 줘버렸던 자들에게 의로운 복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이것 역시 우리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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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0 목양칼럼

 

조선시대의 탁월했던 임금으로 정조가 있습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기도 했던 정조는 어려움의 유년시절을 통하여 마음이 단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학문에 있어서도 대신들을 압도하였고 무예에 있어서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정조에게는 매일 아침마다 특별한 수련이 있었는데, 그것은 활쏘기였다고 합니다.

모두 50발의 화살을 날렸는데, 40발은 제자리에 서서 쏘고 10발은 걸으면서 쏘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외 없이 거의 과녁에 명중하는 정도의 실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항상 49발 까지만 명중시켰습니다. 마지막 한 발은 손을 거두어 쏘지 않거나, 혹은 쏘아도 허공에 날렸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임금으로서 자기의 본분은 활쏘기가 아니니 모두 명중시키는 것은 과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누군가 불필요하게 경쟁의식을 느껴서 활쏘기로 겨루게 되는 것을 경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제일 큰 이유는, 과도한 자신감을 얻어 마음이 교만해질까 스스로 삼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재주를 뽐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잘하는 것을 드러내고 남에게 칭찬을 들으면 우쭐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경고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사람은 언제나 스스로 섰다고 생각할 때가 바로 넘어짐을 가장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약점을 알면서도 이것을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교훈은 한 번 마음에 새겨 충분한 것이 아니라, 매일 반복해서 마음에 새기고 결심을 새롭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조의 활쏘기는 그 나름대로의 기도요, 묵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실천이 있었기에 정조는 당파싸움의 어려운 시대 속에서도 조선의 중흥기를 만들고 역사에 이름이 남는 임금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대가를 마땅히 치러야 합니다.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역시 시간입니다. 일주일의 하루를 주님의 날로 구별하는 것도 이러한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듯, 우리의 하루를 무엇으로 시작하는지도 중요합니다.

꼭 아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하루의 시작을 해가 지는 오후로부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금요일 해가 지면서부터 안식일이 시작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아침에 강한 사람은 아침에, 아침에 약한 사람은 저녁에 하루를 여는 시간을 가지면 됩니다. 자기의 약점을 깊이 반성하고, 목표를 다시 확인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실천하기 위하여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없으면 사람은 인생을 허비하게 됩니다. 바쁘다고 의미 있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바쁘기 때문에 더욱 '의미'를 잡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기도와 실천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이름만 가졌을 뿐 정작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살다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권합니다.

매일 묵상하는 삶을 시작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당신을 위한 실천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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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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