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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1.24 소통하는 사람이 되려면
  2. 2012.07.15 여름 장마
  3. 2012.07.10 중용(中庸)의 지혜
  4. 2011.06.17 사람을 변화시키는 교회




2013-11-24 목양칼럼 


사람은 기계가 아닙니다.

간단하고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살아가는 일도 결코 간단하지 않은 것입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그럴 수가 없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 됩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고 넘어서지 않으면 우리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에 스스로 묶인 사람들은, 이런 차이를 넘어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자기를 이해하고,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지닌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고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만날 때까지 늘 비판과 불평을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만 옳고 주변의 사람들은 다들 너무하거나 모자란 사람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고독감이 찾아옵니다.

이런 사람에게도 물론 친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친구가 아니라 그의 친구일 뿐입니다. 그가 포용력이 있고 친화력이 깊어 나와 친구가 된 것이지 내가 잘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에 묶인 사람들은 이 점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가 항상 우주의 중심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 제일 중요한 역량은 ‘공감’입니다. 

공감이 있어야 소통이 일어납니다. 소통이 되어야 비로소 사귀고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공감이란, 상대방의 기분과 느낌, 더 나아가서는 그 가치관을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텔레파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관심과 관찰이 근간이 되고, 그 위에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깊이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내가 말하는 동안, 상대방의 눈빛을 살피고 그 기분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그는 눈치만 없는 것이 아니라 배려심도 없는 것입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내가 한 말과 행동으로 인하여 실례가 되거나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대범한 것이 아니라 사려 깊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태도들이 지나친 고뇌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들을 다 불편하게 해놓고 자기 뱃속만 편한 ‘아이’가 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사람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적당한 선을 배워가게 되고, 그 배움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수용하고 사귀는 자기만의 길을 여는 것입니다.

사람을 조심해서 다루십시오. 자기가 괜찮다고 그도 괜찮을 것이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언제나 되도록 상대방에게 맞추려고 노력하십시오. 그 노력 만큼 바로 여러분의 능력이 자라날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자보다 섬기는 자가 복된 이유입니다...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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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장마

혼자말/靑情 / 2012. 7. 15. 02:40

 

곱다는 빗소리에도

어디선가 사람이 쓸려간다

올해의 여름은

또 그렇게 누군가에게 잔인하다

 

먹먹한 가슴 한 켠에

기댈 어깨라도 들여놓고 산다면

덜 불행할 것이다, 사람아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풀은 눕고

머리는 헝클어지더라

그래도 살아야 하고 내일은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겠지

빗소리가 여전히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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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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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1 목양칼럼

 

요즘 中庸(중용)이라는 고대의 철학책이 주목을 받고 있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子思(자사)의 책으로 공자의 철학을 후대에 집대성한 것이다. 그 핵심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執其兩端, 用其中於民(집기양단, 용기중어민)이라 할 수 있다. '집기양단'은 어떤 주장에 있어 양쪽의 극단을 다 취하라는 것이고, '용기중어민'은 그 양단에서 가운데를 취하여 백성(사람)을 위하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옳다. 더구나 편이 갈라지기 시작하면, 사실 옳고 그름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편은 위하고 내편이 아니면 막무가내로 공격한다. 그 맹목적인 적대감은 이성보다 훨씬 강해서 배운 사람도, 못배운 사람도 바바리안(야만인)이 되게 한다. 그래서 미움이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언제나 논리와 설명이 부질없다.

설명한다고 오해가 풀리지 않는다. 이성적인 논리를 전개한다고 하여서 이해받게 되는 것도 아니다. 서로 말이 안 통한다고 하는데, 이유는 처음부터 상대방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단을 취하라는 '집기양단'은 쉽게 실천할 가르침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르침이 오늘에 다시 조명되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은, 지금 우리의 시대가 極端(극단)의 폐해에 질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을 떠올려 보라. 그들은 종교적 열심이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특별한 열심이 극단으로 작동하니까 결국에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보다 못한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손에 의하여 예수님이 불법적인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은, 두고두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이 아닐까?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선언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다. 결국 우리들이 주장하는 正義(정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하다. 때문에 定罪(정죄)는 사람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숙고하고 반성할 뿐이다. 혹시나 죄를 정하여 누군가를 處罰(처벌)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에 극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용의 지혜는 아름답다. 특별히 兩端(양단)을 다 버리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취하고 소화해서 가운데(中)의 길을 찾아내 (양편의) 사람들을 모두 이롭게 하라는 가르침은, 정말 탁월한 교훈이 아닌가!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사 구원하시기 위하여 직접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그 하나뿐인 사람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서 모든 사람을 위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때문에 복음을 이해하면 '사람'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감히 왜람되어 그렇게 주장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나님보다 사람이 귀하다고 선택하신 것이 십자가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사람을 죽이고, 불행에 빠뜨리고, 극단으로 몰아가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화려한 수사와 군중들의 감정적 흥분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소용없다. 아무리 편이 많고 다수의 견해라 하더라도 그것이야말로 異端(이단)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언제까지 사람을 희생시켜 하나님을 섬긴다 詐欺(사기)질 할 것이냐! 사람이 귀하다 하는 성경을 정녕 모른다는 말이냐? 부디, 성경을 모르겠으면 中庸(중용)이라도 배우라.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 하셨는데 상식도 없으니 오죽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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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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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9 목양칼럼

사람이 중요하다. 사람이 모든 문제의 본질이며, 해답이다.
그러나 완전한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용서를 필요로 하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용서 받지 못하는 사람은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친구의 도움이 없이는 누구도 위대해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여야만 하는 것이다.
사람은 평생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어쩌면 그게 교육의 본질이며, 사회생활의 요점이 아닌가 한다. 여기에는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위해 적절한 거리를 찾아내고, 조화를 유지하고, 나의 감정과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배려하는 것이 포함된다.
사람이 가깝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알고 항상 함께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과 상대방이 줄 수 있는 것 사이의 조절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귄다는 것은 설득과 이해의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설득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변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으면 내가 변하지 못한다.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감정이 아니라 설명이 필요하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 주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가 사랑의 관계에서 흔히 가지는 과욕(過慾)이다. 설사 사귐에서 그런 단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많은 설득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해도 중요하다. 인격적인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많이 좌절하고 힘들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며 인내할 때에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 요점이 있다. 결국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사람은 자신부터 변해야만 하는 것이다.
목회는 내가 생각해도 모순적이다. 비슷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변화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불완전함은 너무도 명백하다. 결과적으로 그가 말하는 논리, 주장, 신앙과 그의 삶은 어느 정도 부조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약점으로 인하여 교우들에게 갈등이 생기고 공격을 받는다는 것도 어느 정도 당연해 보인다. 목회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갈등의 상황에서 아파하고, 힘들어 하고, 자기 방어적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끝까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러한 부조리를 아시면서도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다는 사실이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섭리의 산물이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목회자와 교우들은 모두 자기의 정의를 고집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성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교회를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간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며, 미래의 희망이다.
그리스도인의 주권은 언제나 주님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성경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것만이 우리의 약점이 우리를 완전히 주관하지 못하도록 하고, 분열에서 교회를 지켜낼 수 있는 비결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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