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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7.18~24

(37:18)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37:19)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37: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37:21)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37:22)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37:23)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37: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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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7 주일예배

 

사도행전 16:6~10

(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16: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6: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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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31 주일예배

 

사도행전 2:37~41

(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2: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2: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주보찬양 PDF : bit.ly/2Anl8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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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4 주일예배



출애굽기 4:10~17

(4: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4: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4: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4: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4: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4: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4: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4: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주보찬양PDF : bit.ly/36bh5i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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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1 목양칼럼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십니다.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없는 것과 있는 것의 구별이 없습니다. 있는 것은 복종할 것이고, 없는 것은 창조될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신비로운 지경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이성은 이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 작고 초라하며 보잘 것 없습니다.
온 세상이 코로나19에 대한 답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 백, 수 천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현실은 우리를 너무 간절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로 인하여 온 세상이 멈추고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이제 각자의 집에서, 자기의 나라에서 고립된 사람들은 언제 다시 자유로운 여행과 만남을 계속할 수 있을지 갈망하고 있습니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작은 바이러스로 인하여 인간의 사회가 전 세계적으로 이처럼 공포를 느낀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스스로 위대해진 인간의 능력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 사실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내포하고 있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께서 이 질병의 치료제도 허락해 주시기를… 그래서 다시 부모와 자식이 만나고, 국경이 열리며, 예배가 계속되고, 삶의 소소한 일상과 행복들이 우리들 곁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여 다짐합니다. 이제 다시 은혜로운 일상을 찾는다면, 그것들에 대하여 더욱 감사하고 소중하게 여길 것을. 사랑하고 또 사랑할 것을. 무엇보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지렁이 같은 야곱이며,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며, 들판을 맴도는 아침의 안개일 뿐입니다.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리의 교만을 치유해 주소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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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5 목양칼럼

 

역시나 위기는 본질을 드러냅니다.
본래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는지 말로는 거창하고 그럴듯한 말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정말 다급한 상황이 벌어지자 여실히 그 진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진심은 본인도 모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은밀하고, 또한 남도 속이지만 자신도 속일 수 있을 만큼 교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급하고 어려운 때에 그 사람이 행동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진심이 결국에는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과 같은 위기의 상황 속에서 여러분 자신에 대하여 흡족한 감동을 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실히 평소와 다른 모습에 실망하거나 당황하고 있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거울과 같습니다. 깨끗이 닦였던 거울도 잠시 방치하면 무수한 손자국이 생기고 알 수 없는 얼룩에 흐릿해지잖아요. 우리 마음도 닦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혹여 실망스런 모습이 있더라도, 아직 주저앉지 마십시오. 내가 내 마음을 살피고 닦지 못했구나 반성하고,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보다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나누고, 더 중요하고 급한 것부터 먼저 실천하고, 의미 있는 일을 앞에 두고, 사람을 귀히 여기면 됩니다. 그러면 다시 마음이 맑아져서, 하나님의 말씀이 보이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날마다 넘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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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3 목양칼럼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합니다. 과연 내가 구원 받았을까? 나는 얼마나 좋은 그리스도인일까?
이런 질문이 나의 신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질문을 통해 나는 나의 영적인 건강을 체크하게 되고, 내 인생의 방향에 대하여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 빠진 동그라미 이야기가 있습니다. 완전한 원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이 동그라미는 아주 어려운 여행을 통해 마침내 자기의 빈 부분을 완전하게 채워줄 조각을 찾아냅니다. 그러나 그토록 원했던 완전한 동그라미가 되었을 때에 오히려 그는 행복을 잃습니다. 그 부족함이 사실은 동그라미에게 유익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었지만, 정작 자신의 질병에서는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이 일에 대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을 때에, 하나님은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약함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강함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내용의 말씀을 늘 묵상하고 찬양으로도 부릅니다. 설교로도 듣습니다. 그러나 정작 삶에서 이런 원리를 자신에게 적용하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는 질병이 없어야 합니다. 가난이 물러가야 합니다. 실패는 허용될 수 없습니다. 의심이란 불쾌한 무엇입니다. 승리와 형통만이 신앙의 정답입니다. 긍정으로, 긍정으로 신앙을 포장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사실은 욕심입니다. 

신앙적인 소망은 바울의 경우를 통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것은 간절히 바라기는 하지만, 그것이 거절된다고 하여서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불평, 원망, 의심, 분노와 같은 감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순종과 평안과 감사가 거절에도 불구하고 우러납니다. 소망은 본래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그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은 다릅니다. 욕심은 거절을 견디지 못합니다. 욕심은 항상 그 중심이 자기이기 때문에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는 우주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욕심은 바라는 것을 향해 진격할 뿐 그 어떤 타협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부족하기 때문에 유익한 것이 많습니다. 물질도 그러하고, 인격도 그러하고, 심지어 믿음도 그러합니다.
믿음이 크면 좋을 것 같지만, 그 커다란 믿음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조롱하는 교만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거절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이, 사실은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하시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욕심에서 벗어나 소망을 얻는 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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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1 목양칼럼  :: 달빛 같은 은혜

 

저녁에 산책을 나섰다가 달을 보았습니다.

거대한 아파트의 불빛 위로 달이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달빛은 어린 아이의 살결처럼 뽀얗게 속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저 달빛을 예수님도 보셨고, 중국의 시인 소동파도 보았고, 지금 고국에 계신 나의 어머니도 보시겠지요.

달빛은 그렇게 오래도록 변함없이 외로운 사람, 고민에 잠 못 드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왔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달을 보니 더욱 예뻐서 내 것으로 가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DSC01197

 

사람이 밝힌 조명과 하나님이 밝히신 달빛의 밞음은 느낌이 다릅니다.

조명이 자극적이라면, 달빛은 온유합니다. 달빛은 눈을 찌르지 않으면서도 마음 깊은 곳까지 들어오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달빛은 낭만적인 연인들의 사랑과 어울리며, 또한 슬픔에 가득 찬 사람들의 위로가 됩니다. 조명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흉내는 낼 수 있어도 달빛의 위력을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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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착한 것과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통해 선해지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모양은 비슷하지만, 그것은 달빛과 가로등의 불빛이 다른 것처럼 아주 먼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지식과 경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변화되어 가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을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힘이 들고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착하지도 않으면서 용서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듭니다.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굳게 믿는 것을 보면 심지어 마음이 슬퍼지기까지 합니다.

그게 아닌데… 신앙생활은 달빛 같은 것인데.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중심에 모시면 저절로 빛이 나오는데. 내 마음을 내 의지가 아니라 성령께 맡기면 쉽게 성장해가는 길이 있는데. 그걸 모르고 계속해서 혼자 일어서고 넘어지는 일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속이 상합니다.

 

DSC01191

 

그렇다고 노력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수영을 생각해 보세요. 물에 뜨는 것을 배워야 팔을 젓는 것이 의미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물에 뜨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힘을 빼야 합니다. 이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힘껏 팔을 움직이면서도 물에 빠져 죽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노력하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사람의 노력이 오히려 선함에 방해가 됩니다. 성령 없는 노력 때문에 망하는 사람들 정말로 많습니다.

 

부디,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구하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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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율법적인 태도가 싫다. 율법적이라는 말은 금지, 제한, 규제, 강제의 이미지를 가진다. 본래 율법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상과 벌을 통해 선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폭력이다.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 행동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다. 복음은 일단 모순적이다. 죄를 지은 분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처벌하지 않고 구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관용과 용서의 뒤편에는 오히려 행동만이 아니라 그 정서와 생각까지 판단하는 치밀함이 숨어 있다.

 

예수님의 설교를 가만히 들어 보라. 율법이 살인이라는 행위를 정죄하였다면, 예수님의 복음은 살인의 원인이 되는 미움에서부터 이미 간섭하기 시작한다. 다만 그 미움과 살인을 인하여 사람을 포기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통하여 속사람을 새로 창조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때문에 복음은 필연적으로 인내의 기다림과 무제한의 투자를 동반한다. 설사 은혜를 깨달은 죄인이 회개를 하더라도, 그 회개가 삶의 실천으로 이어지고 정서를 충만하게 하기까지는 시간과 돌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로교의 교리에서는 이를 ‘신자의 견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단 번에 완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변화라는 과정을 통해 다루어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의 신앙생활에서 사람들은 율법적 권위를 카리스마 혹은 리더십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신앙적 리더십이 신자들에게 금지, 제한, 규제, 강제를 효율적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세속적인 인사관리 형식을 그대로 교회 안에서도 차용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그래서 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반대로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페널티를 가해서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방식이 성경적인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루시는 방법에서, 초대교회가 보여준 리더십에서 이런 모범을 찾아볼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목회자가 강한 책망으로 금지할 행위들은 성경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예루살렘교회가 이방인의 교회들을 받아들이며 제시했던 최소한의 요건들을 고려하더라도, 1세기의 초대교회는 매우 열린 사고와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관용적이었다. 왜냐하면 교회를 탄생시킨 ‘복음’ 자체가 바로 관용의 바탕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신자들이 설교를 듣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고 믿는다. 비록 당장은 지지부진(遲遲不進)하고 답답하더라도 그런 과정을 통해 신자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책임감 있는 신앙을 성장시켜 가야 한다.

그래야 시간이 걸려도 좋은 그리스도인이 만들어지고 세상의 풍조에 요동하지 않는 든든한 신앙으로 세워질 것이다.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고 스스로 생각하라. 그 과정을 게을리 하는 자는 아무리 훌륭한 교회를 다녀도 결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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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9 목양칼럼


요즘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안철수씨의 경험담이다.

대학시절 가난한 동네로 의료봉사를 나갔다. 열심히 진료했지만 환자들이 잘 낫지를 않아서 아직은 미숙한 학생들이 진료를 해서 그런 줄로 알았단다. 그런데 어느 날, 진료소 앞마당에서 아이들이 알약으로 공기놀이를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의료봉사 차원에서 약을 공짜로 나누어주니 환자들이 약을 전혀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약을 복용하지 않으니 병도 낫지를 않았던 것이다.

결국 100원이라도 약값을 받았다. 그랬더니 자기 돈으로 산 약이라고 귀히 여기고 약을 복용했다. 얼마 후에는 환자들이 다 상태가 좋아져서 진료를 잘한다고 소문이 났고, 심지어는 두 세 시간씩 버스를 타고서 진료를 받기 위해 오는 환자들도 생겼다는 것이다.

공짜는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 그 말이 하루 종일 마음을 눌렀다. 

왜냐하면 내가 전하는 복음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죄’라는 지독한 질병에 빠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께서 처방하신 생명의 약이다. 그런데 그 값이 너무 귀해서 사람이 지불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그 값을 대신 지불하시고 ‘공짜’로 나누어 주시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셨다. 그래서 복음을 은혜(=공짜)라고 하는 것이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사람들이 그 약을 무시한다. 값진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알약으로 공기놀이를 하는 아이들처럼, 복음을 하찮게 여기고 당연시 한다.

세상에 당연한 은혜는 없다. 모든 은혜는 누군가의 희생과 선의가 담겨 있는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고 소홀하게 대우하는 사람은 부당하며 무례한 사람이고, 그런 자에게서 은혜의 기회가 박탈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안철수씨는 그 은혜의 소중함을 알게 하기 위하여 100원의 상징적인 가격을 정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복음에는 이런 설득이 불가능하다. 복음이 곧 은혜여야 한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너무 확고하셔서 인간적인 조작이 불허되기 때문이다. 억울하게 복음이 푸대접을 받더라도 복음을 통해 생명이 살아난다는 확신을 가지고 끈기 있게 싸우도록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명령하셨다.

그런데 좌우를 살피면, 돌팔이 약장사들이 난장(亂場)을 벌인다. 

목사에게 무조건 순종이라는 약값, 예배당 건축이라는 약값, 심지어는 나름대로 도덕적 삶의 규범들을 복음의 약값으로 둔갑시켜 팔아먹으니 오히려 공짜(=은혜)였을 때보다 장사도 더 잘 되고, 사람들의 반응도 뜨겁다. 

이 허탈한 현실을 뭐라 말해야 좋을까? 먹고 나으니(과연?) 다행인가? 아니면 결국에는 모두 불법을 행한 사람들이라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까 걱정해 주어야 할까? 

내가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분명 정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은혜는 값이 없는 것이지 값이 싼(저렴한) 것이 아니다. 더불어 복음은 자기 멋대로 아무렇게나 전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칙(rule)대로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복음은 엄격하다. 때문에 복음을 복음답게 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치열한 고민 속에 살수밖에 없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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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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