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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2.15 인치(人治)의 시대를 기다리며
  2. 2012.07.10 중용(中庸)의 지혜



오늘 노회찬 의원이 대법원의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삼성이라는 대기업이 검사들에게 ‘떡값’을 돌렸는데, 그 사실이 폭로되었다. 하지만 정보보안을 이유로 국회의원만 그 떡값을 받은 검사들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민의 대표로 국회에 들어간 노회찬 의원은 그 명단을 공익을 위해 공개했다.

그런데 이상한 재판이 진행된다. 떡값을 준 삼성도 무죄, 떡값을 받은 검사도 무죄… 하지만 그 명단을 공개한 국회의원과 그것을 보도한 언론인은 유죄. 

이 비상식적이 판결이 오늘,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까지 받았고, 그래서 노회찬 의원은 국회에서 쫓겨나야 했던 것이다. 참 몰상식의 시대라고 탄식하게 된다. 정녕 부끄러움도 모르나?



중용(中庸)에 애공문정(哀公問政)이라는 대목이 있다.

공자가 70세쯤 되어 노(魯)나라에 돌아왔을 때, 당시의 군주가 애공이었다.

애공은 10대에 치세를 시작하여 이미 10년쯤 나라를 다스렸고, 이제 20대에 들어선 청년이었다. 애공에게 있어 공자는 스승이었고 국부(國父)였다.

예를 다한 물음은 이것이다.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바르게 다스릴 지혜를 달라고 구하였던 솔로몬의 기도가 생각나는 물음이다. 청년이 허튼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군주(君主)이면서도 학생(學生)의 자세를 가졌으니 애공은 좋은 군주요, 애공과 같은 군주를 둔 노나라는 참 복된 나라임에 틀림 없다.

늙은 공자는 그 평생의 깨달음과 가르침을 한 마디로 이렇게 대답했다.


文, 武之政, 布在方策, 其人存, 則其政擧, 其人亡, 則其政息

문, 무지정, 포재방책, 기인존, 즉기정거, 기인망, 즉기정식


“문, 무왕의 바른 정치는 이미 책에 널려 있습니다. 그 사람[其人]이 있으면 정치는 일어나게 되고, 그 사람이 없으면 정치는 탄식하게 됩니다.”


여기서 기인(其人)은 중용의 덕을 구현한 사람, 사람다운 사람을 의미한다.

결국 정치는 사람의 문제라고 정의한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이 가르침을 가리켜 인치(人治)의 표방이라고 말한다. 

서양이 역사를 통해 표방하고 발전시킨 것이 법과 제도를 통한 통치[=법치(法治)]라면, 동양은 그 법과 제도의 위에 ‘사람’을 두고 바르게 정치할 사람을 찾아 세우기 위해 고심했던 것이다.


오늘 대한민국의 상황이 ‘그 사람(其人)’을 향한 애타는 목마름을 품게 한다.

수많은 노동자와 시골 촌부들이 거탑에, 종탑에, 크레인에 올라가 매서운 겨울을 나고 있다. 가진 자들의 탐욕은 도를 넘어서, 함께 살아야 할 사람들을 궁지(窮地)와 사지(死地)로 몰고 있으며, 그럼에도 일말의 가책과 부끄러움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공영방송의 사장은 파렴치한 사생활과 공금횡령이 명백한데도 여전히 버티고 있으며, 헌법재판소의 소장으로 내정되었던 사람 역시 공금을 내 주머니 돈처럼 여기던 과거가 들통나도 버티다가 결국 낙마하고 말았다. 

새 정부의 총리후보도 지명되자마자 검증을 견디지 못하고 자진사퇴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민족의 존립이 극한 위기에 처했는데도, 대통령은 그 소식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과 부인에게 스스로 훈장을 수여하는 그 짓을 꼭 그날에 국무회의에서 의결했다.

그리고 다음날, 사저문제로 대통령 일가에게 부당한 이익이 돌아가게 했던 청와대의 가신들이 법원에서 유죄를 판결 받았다. 이게 그들이 받을 판결인가? 아니면 대통령이 받을 판결인가? 이런 판결을 받으면서도 자신에게 ‘훈장’을 운운하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는가?

삼성과 그 삼성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수많은 검사들을 무혐의로 처리했던 사람은 새로운 정부의 법무부장관으로 간택되어 임명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법원은 일관되게 시민적 정서와 상반되는 판결로 법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스스로 깨뜨리고 있다.


제도는 민주주의요 법은 그대로지만, 우리는 마치 꿈 속과 같은 상황을 보고 있다.

그래서 사람다운 사람이 없으면 정치는 탄식으로 변하게 된다는 공자의 가르침이 큰 울림으로 이 현실에 살아나는 것이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렇게 안 해도 이미 충분히 누리며 살아갈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모르고 그 탐욕의 정점을 향해 치달아, 사회의 기초를 흔들고 모두와 함께 망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질주하는 이 시대를 보면서… 나는 하나님께서 이미 이 시대의 심판을 결정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무서운 생각마저 마음에 든다.


대통령이고 장관이고, 그 직책의 이름 이전에 사람다운 사람이어야 한다. 목사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먼저 되지 못하면 결과는 참혹하다. 그들이 어떤 거창한 비전을 들고 나오든지 간에, 그 열매는 ‘탄식’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뿐이다. 그리고 이 시대를 위해 가슴 치며 울 뿐이다. 간절한 소망 가슴에 품고서 ‘사람다운 그 사람(其人)’을 기다릴 뿐이다. 

부디, 너무 늦지 말기를.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전에, 내 조국 대한민국에 그 아름다운 사람, 요셉 같은 사람, 다윗 같은 사람이 제발 나타나 주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새벽을 맞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연하건데, 지금과 같은 시대에도 기도하지 않는 것은 틀림없이 죄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서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삼상 12:23)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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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1 목양칼럼

 

요즘 中庸(중용)이라는 고대의 철학책이 주목을 받고 있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子思(자사)의 책으로 공자의 철학을 후대에 집대성한 것이다. 그 핵심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執其兩端, 用其中於民(집기양단, 용기중어민)이라 할 수 있다. '집기양단'은 어떤 주장에 있어 양쪽의 극단을 다 취하라는 것이고, '용기중어민'은 그 양단에서 가운데를 취하여 백성(사람)을 위하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옳다. 더구나 편이 갈라지기 시작하면, 사실 옳고 그름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편은 위하고 내편이 아니면 막무가내로 공격한다. 그 맹목적인 적대감은 이성보다 훨씬 강해서 배운 사람도, 못배운 사람도 바바리안(야만인)이 되게 한다. 그래서 미움이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언제나 논리와 설명이 부질없다.

설명한다고 오해가 풀리지 않는다. 이성적인 논리를 전개한다고 하여서 이해받게 되는 것도 아니다. 서로 말이 안 통한다고 하는데, 이유는 처음부터 상대방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단을 취하라는 '집기양단'은 쉽게 실천할 가르침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르침이 오늘에 다시 조명되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은, 지금 우리의 시대가 極端(극단)의 폐해에 질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을 떠올려 보라. 그들은 종교적 열심이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특별한 열심이 극단으로 작동하니까 결국에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보다 못한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손에 의하여 예수님이 불법적인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은, 두고두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이 아닐까?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선언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다. 결국 우리들이 주장하는 正義(정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하다. 때문에 定罪(정죄)는 사람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숙고하고 반성할 뿐이다. 혹시나 죄를 정하여 누군가를 處罰(처벌)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에 극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용의 지혜는 아름답다. 특별히 兩端(양단)을 다 버리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취하고 소화해서 가운데(中)의 길을 찾아내 (양편의) 사람들을 모두 이롭게 하라는 가르침은, 정말 탁월한 교훈이 아닌가!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사 구원하시기 위하여 직접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그 하나뿐인 사람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서 모든 사람을 위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때문에 복음을 이해하면 '사람'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감히 왜람되어 그렇게 주장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나님보다 사람이 귀하다고 선택하신 것이 십자가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사람을 죽이고, 불행에 빠뜨리고, 극단으로 몰아가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화려한 수사와 군중들의 감정적 흥분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소용없다. 아무리 편이 많고 다수의 견해라 하더라도 그것이야말로 異端(이단)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언제까지 사람을 희생시켜 하나님을 섬긴다 詐欺(사기)질 할 것이냐! 사람이 귀하다 하는 성경을 정녕 모른다는 말이냐? 부디, 성경을 모르겠으면 中庸(중용)이라도 배우라.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 하셨는데 상식도 없으니 오죽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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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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