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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7.10 9회말 투아웃, 그리고 8번타자
  2. 2012.07.10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
  3. 2011.06.17 사람을 변화시키는 교회

2012-07-08 목양칼럼

 


하늘은 붉게 물들었다. 벌써 뉘엿뉘엿 해가 담장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투수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9회말의 그라운드에 들어설 때만 하더라도 경기는 맥없이 끝날 것만 같았다. 전광판의 숫자는3:0이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사실은 지난 8회의 이닝 동안 상대팀은 단 하나의 안타도 얻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투수는 완봉승을 노리고 있었다.

절묘하게도 마침 타순은 3번부터 시작되었다. 타자는 투수의 첫 공을 노렸다. 투수 옆을 스치는 직선의 타구가 원 바운드로 날아갔다. 잘 하면 빠질 수도 있는 공이었지만 유격수는 노련했다. 몸을 날려 그 공을 잡은 것도 모자라 거의 동시에 역동작으로 1루에 송구했고, 공은 정확하게 첫 타자를 아웃 시켰다. 투수의 눈이 승리의 확신으로 빛났다.

감독은 4번 타자를 거르고 다음 타자를 상대하라는 싸인을 냈고, 배터리는 캐치볼처럼 4개의 볼을 주고 받으며 감독의 명령을 수행했다. 불안감은 전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 타자가 들어섰다. 그는 5번이지만 오늘은 그의 방망이가 볼에 스치지도 못했다. 투수는 자신감이 넘쳤고 얼굴에 약간의 비웃음마저 감돌았다. 역시나 2개의 연속 스트라이크가 들어왔다. 타자는 타석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바튼 기침을 했다. 영리한 투수는 바깥으로 깊게 빠지는 유인구를 던졌다. 어이 없게도 타자의 손이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처럼 끌려나갔다. 타자는 속았다는 느낌에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 눈 감은 방망이에 볼이 걸렸다. 어설프게 맞은 공은 내야에서 불규칙 바운드를 일으켰다. 내야수들이 재빠르게 공을 처리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타자와 주자 모두 세이프가 되고 말았다.

6번 타자가 들어섰다. 좋은 분위기를 이어갈까? 운동장은 숨죽여 타자와 투수에게 집중했다. 투수는 주의 깊게 공을 던졌고 타자 역시 몇 개의 볼을 파울로 커트하며 투수와 겨루었다. 어느새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 이제 승부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투수는 최대한으로 바깥쪽 낮은 스트라이크존을 공략했다. 타자가 움찔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심판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포볼이었다. 타자가 1루로 걸어가는 동안 투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심판을 응시했다.

화가 났던 것일까? 투수는 7번 타자를 강속구로 몰아 부쳤다. 4개의 공이 지나도록 방망이를 흔들지 못하던 타자는 5번째 공을 향해 힘껏 스윙을 했다. 그러나 공은 높이 내야 위로 뜨고 말았다. 3루수가 약간 자리를 움직여 공을 잡았다. 마침내 9회말 투 아웃이 된 것이다.

감독은 이상하게도 대타를 세우지 않았다. 8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는 오늘 경기뿐만이 아니라 최근의 10여 경기에서 전혀 안타를 치지 못하고 있었다. 본래 5번이었던 그의 타석이 8번까지 밀린 것은, 부진에 부진을 거듭한 결과였다. 관중은 야유했다. 투수와 포수 역시 가벼운 웃음을 교환하며 빨리 경기를 끝내자는 모종의 싸인을 주고 받았다.

투수는 처음부터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낙차가 크면서도 빠른 스플리터(Splitter)였다. 공은 살아있는 뱀처럼 파고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타자의 허리가 부드럽게 돌았다. 팔과 다리의 근육들이 힘줄을 돋으며 제대로 힘을 실어낸 한 방이었다. 공은 직선으로 정확하게 운동장의 한 가운데를 뻗어나가 전광판의 상단을 때렸다. 홈런이었다… 9회말 투 아웃, 그리고 그 시즌에 가장 부진했던 선수의 팔에서 나온, 역전의 홈런이 운동장을 뒤집어 버렸다…

야구는 바로 이런 맛으로 즐긴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9회말 투 아웃,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포기하지 않는 한, 희망은 언제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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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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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0 목양칼럼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늘어간다. 태생적으로 수줍어하는 성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 수준의 도덕, 교양, 그리고 신앙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보편적이라는 말이 조금 모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회가 가지는 일반적 ‘보통’의 수준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에 부족하거나, 혹시 실수로 벗어났을 때에 부끄러워하는 것은 사람다운 미덕(美德)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이를테면 ‘배째라!’ 또는 ‘어쩌라고?’의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 이런 사람들은 참 난감하다. 이런 사람들로 인하여 사회가 분위기를 흐리고, 순진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오히려 답답한 사람들로 대우 받거나 피해를 입게 되는 것 같다.

진정한 용기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얼굴을 두껍게 하고서 부끄러우면서도 부끄럽지 않은 듯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끄러움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고 개선하여 보다 선하고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는 것이다. 되도록 같은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개선되지 못한다. 자신에게서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부끄러운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사람들이 많다. 남의 잘못에 대하여는 칼날 같이 예리하면서도 정작 자신에 대하여는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고서 살아간다. 그래서 정말 부끄럽게 살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처음에는 분노하다가도 결국에는 진한 슬픔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을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다.
“그런데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그리스도인은 평생에 자기를 개혁해 나가야 한다.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을, 그리고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신앙은 우리를 책망할 것이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이 책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마땅히 부끄러움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러한 바탕을 잃어가고 있다. 주장은 많은데 자기 고백과 반성이 없다. 남의 잘못은 아는데 나의 잘못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섬기고, 사랑하고, 기도해야 하는 의무는 가벼이 여기면서 자기가 받아야 하는 은혜, 권리, 이익에 대하여는 강경하기만 하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자기의 부족을 생각하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야말로 희망의 씨앗이다. 세상을 바꾸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놓여 있다면 이러한 생각의 틀은 당연하기만 하다.

언제나, 하나님과 먼 사람은 자기를 의인이라고 주장하고,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은 자기를 죄인이라고 주장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의 판단은 그 반대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당신도 알 것이다!)
당신은 요즘 무엇이 아프고 부끄러운가? 자신의 잘못과 부족이 보이는가? 만약 이러한 정서가 없다면 당신의 신앙은 위기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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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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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9 목양칼럼

사람이 중요하다. 사람이 모든 문제의 본질이며, 해답이다.
그러나 완전한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용서를 필요로 하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용서 받지 못하는 사람은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친구의 도움이 없이는 누구도 위대해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여야만 하는 것이다.
사람은 평생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어쩌면 그게 교육의 본질이며, 사회생활의 요점이 아닌가 한다. 여기에는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위해 적절한 거리를 찾아내고, 조화를 유지하고, 나의 감정과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배려하는 것이 포함된다.
사람이 가깝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알고 항상 함께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과 상대방이 줄 수 있는 것 사이의 조절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귄다는 것은 설득과 이해의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설득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변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으면 내가 변하지 못한다.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감정이 아니라 설명이 필요하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 주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가 사랑의 관계에서 흔히 가지는 과욕(過慾)이다. 설사 사귐에서 그런 단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많은 설득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해도 중요하다. 인격적인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많이 좌절하고 힘들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며 인내할 때에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 요점이 있다. 결국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사람은 자신부터 변해야만 하는 것이다.
목회는 내가 생각해도 모순적이다. 비슷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변화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불완전함은 너무도 명백하다. 결과적으로 그가 말하는 논리, 주장, 신앙과 그의 삶은 어느 정도 부조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약점으로 인하여 교우들에게 갈등이 생기고 공격을 받는다는 것도 어느 정도 당연해 보인다. 목회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갈등의 상황에서 아파하고, 힘들어 하고, 자기 방어적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끝까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러한 부조리를 아시면서도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다는 사실이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섭리의 산물이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목회자와 교우들은 모두 자기의 정의를 고집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성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교회를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간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며, 미래의 희망이다.
그리스도인의 주권은 언제나 주님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성경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것만이 우리의 약점이 우리를 완전히 주관하지 못하도록 하고, 분열에서 교회를 지켜낼 수 있는 비결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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