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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실패와 불행한 성공

2011-09-18 목양칼럼


인생은 반드시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시기가 있다. 자기가 누구이며, 또한 무엇을 향해 갈 것인지를 설명하지 못하면 인생은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배처럼 느껴지게 된다. 

미래를 선택하고, 자기를 설득하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불안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선택이 잘못 내려져서 시간을 낭비하고 마침내 불행에 빠지게 되면 어쩔까 하는 두려움 말이다.

목회자로서 상담자의 입장에 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렇지만 결국 중요한 결정은 내담자 자신이 내려야만 한다. 설사 실패하더라도 그것이 옳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파브르의 곤충기에 보면, 나비가 번데기에서 껍질을 깨고 나오는 순간을 돕기 위해서 그 껍질을 잘라 주었더니 나비가 날지 못하게 되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번데기의 껍질을 깨뜨리는 과정을 통해 안간힘을 쓰고, 그 고통이 오히려 나비의 날개를 펴지게 하고 날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을 회피하자 나비의 날개는 제대로 펴지지 못했다.

실패, 그것도 인생의 한 부분이다. 만약 실패하지 않는 길만을 고집한다면 그는 자기의 인생을 대부분 지루하게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패와 성공을 모두 인생의 내용으로 받아들이고, 성공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한다면 인생의 질은 확연하게 달라질 수 있다.

결국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그것이 바로 당신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다. 남의 탓을 해도 소용없고, 환경을 핑계 삼아도 소용없다. 선택은 그래서 중요하다. 선택, 하나 하나가 모여서 인생을 이루고,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나는 선택의 한 키(key)라고 생각한다. 선택의 순간에는 항상 잠겨진 문이 하나 놓여 있고, 그 문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열려진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의 선택은 같을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하루살이가 하루 너머를 모르는 것처럼, 개구리가 겨울의 눈꽃을 모르는 것과 같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볼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또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 있고, 그 문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열려진다. 

화려한 가난뱅이들이 보인다. 옷은 명품이고, 얼굴에는 부유한 기름이 흐른다. 그러나 믿음이 없다. 그래서 한 번도 그 잠겨진 문을 열어본 적이 없다. 때문에 자기 믿음에 대하여 늘 불안하다. ‘내가 과연 믿음이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이 젊은 동안에는 그렇게 절실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주름이 늘고, 머리가 희어 가는데, 막상 자기 안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없을 때, 그들이 알았던 성경은 무거운 짐처럼 마음을 버겁게 할 것이다. 그 불안은 명품으로도, 두둑한 지갑으로도 보상될 수 없다. 결국 그들은 불쌍한 사람일 뿐이다.

선택의 순간에 믿음을 생각하자. 그리스도의 마음과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자. 믿음 없는 세상의 선택이 아니라, 믿음으로 열리는 새로운 차원을 추구하자. 믿음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 안에서는 실패도 행복하지만, 믿음 밖으로 걸어가면 성공도 불행하다. 그리스도인은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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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다운 길을 가라


2011-09-11


사람은 자기의 과거에서 ‘자랑’을 끌어낸다. 그러나 업적(業績)이 그 사람을 이해하는 강력한 증거이기는 해도 그 사람 자체는 아니다. 과거의 호화로운 이력(履歷)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모두 말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 현실의 자신을 보상하려는 심리가 보인다. 오죽하면 그렇게 과거를 노래하며 평생을 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좋게 보이지만은 않는 것이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과거에 해봤다고 이번에도 같은 것은 절대 아니다. 경험은 참고의 대상이지 해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경험을 너무 과신하는 나머지 자신이 이미 해답을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다. 결국 일을 망치고 나서야 상황이 변했고,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쉽게 고쳐지지 않아서, 한참을 한탄한 후에는 다시 또 경험의 확신을 믿고 교만하게 된다.

지혜는 겸손하다. 한국의 속담에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다. 신중함을 강조하는 잠언이다. 그리고 신중함은 바로 겸손의 다른 얼굴이다.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항상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열린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들도 경솔한 사람을 불쾌하게 여기고 신중한 사람을 좋아한다. 생각이 걸러지지 않고 바로 말이 되는 사람은 신뢰를 주지 못한다. 싫고 좋은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사람은 존경을 얻지 못한다. 신뢰와 사랑을 얻으려면 사람 사이에도 깊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본성의 영역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인격의 깊이가 본래 깊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고민과 사색, 자기성찰과 노력을 통해 깊은 인격을 닦는다. 오늘의 얼굴이 어제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인생을 살면서 항상 새롭다고 느낀다. 20대의 고민이 다르고, 30대의 생각이 다르다. 40대가 되니 좀 더 인생 자체를, 세상의 근본적인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무엇으로 내 인생을 정의하고 완성할지를 다시 생각하고 더 생각하게 된다.

좋아하는 김남조의 시, <밤기도>에 이런 시구(詩句)가 있다. “이미 준 사랑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사도 바울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3:13~14)

그래서 생각한다. 인생은 마지막까지 자기를 증명하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는 인생을 살아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은 중간에 타협하고, 목표를 잃어버린다. 

하지만 끝까지 자기답게 사는 사람은 크지 않아도 크고, 자기의 자리에서 세상에 깊은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세상은 감동을 얻고, 하나님은 의미 있는 발전을 이루어 가신다. 

자기다운 길을 가라. 돌아보지 말고, 앞을 응시하라. 겸손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사용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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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5 목양칼럼


언젠가 아도니람 저드슨과 허드슨 테일러의 전기를 읽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내가 선교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일본행을 하게 되면서, 그 책이 그저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도니람 저드슨은 미국의 선교사이다. 미얀마(버어마)에서 평생을 헌신했고, 지금은 기독교가 미미하지만 그의 시절에는 제법 부흥을 시켰다고 한다. 당시 세계에는 영국의 선교사들이 주름을 잡았고, 미국의 교회는 상대적인 열등감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세계적인 선교사가 되자 사람들은 그를 향해 열광했다. 아도니람이 지병으로 휴양을 위하여 미국에 귀국하였을 때에, 교회들마다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안달했다. 그러나 강단에 올라간 아도니람은 성경으로만 설교하고 자기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기자가 물었다. “우리가 듣고 싶은 것은 당신이 선교지에서 겪었던 감동적인 이야기들입니다.” 그러자 아도니람이 대답했다. “나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이야기 외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나의 이야기는 그분의 이야기에 비할 수 없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영국의 선교사이다. 그는 중국에서 사역했고 그가 만든 선교단체가 아직도 존재하는 것으로 안다. 그는 철저하게 현지에 뿌리를 내리는 선교를 생각했다. 일체의 선교보조를 받지 않고 사도 바울처럼 스스로 일하고, 현지인의 땀과 눈물로 교회가 서야 한다고 믿었다. 결국 선교지에서 그의 자녀들과 아내가 죽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서양인이면서도 중국인과 똑같이 변발(몽고 머리)을 하고, 중국인의 옷을 입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결국 그의 헌신은 지금과 같은 중국선교의 토양이 되었다.


내가 직접 선교지에서 사역을 하게 되면서, 나는 두 분을 나의 롤모델(roll model)로 생각했다. 

첫째는 선교사라는 지위를 내세우거나 스스로 특별한 대접을 기대하지 말자는 결심이다. 단지 나는 이 땅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일뿐이다. 선교지에서 고생한 이야기를 할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내가 연구하고 깨달은 성경의 말씀을 한 마디라도 더 전하는 사람이 되어서,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의 사역자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둘째는 현지에 어떻게라도 뿌리를 내리고 자족하는 교회를 세우겠다는 결심이다. 타인의 도움에 의지하면 의존적이게 되고, 그러면 결국에는 ‘나의 교회 나의 사랑’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내 교인들과 이겨내고 스스로 교회를 세우겠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참 어려운 5년의 세월이 흘렀다. 교회는 아주 조금씩 늘어갔다. 10여명의 사람들이 모이던 교회가 겨우 30여명을 넘어섰다. 작년에 처음으로 자급하여 여름 수련회를 다녀오고, 주일학교를 개교했다. 청년부도 조직을 세워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지난 3월11일에 지진이 일어났다. 갑자기 그야말로 청년부가 모두 한국으로 귀국을 했고, 어린 아이를 키우던 주부들은 아이들과 함께 한국에 들어가서 아직도 피신하고 있다. 그 동안 교회는 급격하게 흔들렸다. 제일 어려운 문제는 역시 재정이었다. 매달 간신히 채워가던 월세와 지출들이 부족해 지면서, 결국에는 예배당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지금 예배당을 오는 10월 21일에는 비워 주어야 한다. 갈 곳이 예정되지 못했다. 다방면으로 길을 찾고 있지만, 아직은 막연하다. 어쩌면 정말 공원 나무 밑에서 예배를 드려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목사로서 참 맘이 아픈 요즘이다.


지난 주일에 회의를 했지만 역시나 서로 아무 말도 없다.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많이 외로웠다. 그래서 예배당에 혼자 들어서면 눈물이 난다. 교회의 구석구석을 향해 시선을 던질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한 동안 마음이 흔들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곧 기도하며 다잡았다. 그래서 회의 때에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현실을 보면 물러서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나로 인하여 여러분이 어쩔 수 없이 편한 길을 놔두고 고생만 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동안 내가 처음 일본에 오던 때를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이 교회는 무책임하게 사역지를 버린 목회자로 인하여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약속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앞으로는 절대 그렇게 여러분을 목사 없는 교인으로 만들지 않겠다고요. 그래서 저는 이번에도 물러서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 교회가 의연하게 세워지기까지 어떤 역경이 있어도 이겨내고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 목사로서의 저의 결정입니다.”


교우들은 각자 할 수 있는 역량 안에서 교회를 위한 길을 찾기로 했다.

구청의 음악실을 빌려 주일에만 사용하는 것도 고려하고, 사택과 교회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건물도 알아보려고 한다. 그 밖에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동경드림교회를 지켜내기 위한 싸움을 해보려고 한다. ㅂ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 했다. 미련하지 않으면 산을 옮길 수 없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가는 것이 쉽지는 않다. 사실은 두렵다. 약속한 것을 지키지 못하는 또 한 명의 목사가 될 까봐, 결국에는 내가 말했던 교회를 세우지 못할까 두렵다. 물론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더 간절해야만 한다는 것을.

내가 가진 원칙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이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지혜를 구한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그야말로 생존을 거는 목회를 해보고 싶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지만, 결코 실망시키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너무너무 두렵고, 힘들면서도 이 길을 가는 것이다. 폭풍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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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4 목양칼럼


북쪽으로는 쓰나미와 원전사고가 났고, 남쪽으로는 태풍에 물난리가 났다. 강이 범람할지도 모른다는 경고와 함께 1만4천 가구가 대피권고를 받았다. 어제의 뉴스이다. 지난(至難)한 2011년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사고 후에 일본을 방문하는 사람들마다 의외로 모든 것이 멀쩡하다고 놀란다. 특별히 동경은 더 멀쩡해 보인다고 한다. 쉽게 동요하지 않는 일본인의 냉정함이 감동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에 동화(同化)되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내 주변의 사람들도 놀랍다.

이 놀라운 냉정함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지역사회를 지키기 위한 성숙한 연대의식이다. 개인적으로는 도저히 찬성할 수 없지만, 후쿠시마산의 식품을 소비해서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응원하자는 캠페인도 따지고 보면 이와 같은 공동체 의식의 발로가 아닌가 생각한다. 순진하면서도 아름다운 마음이고 참 사람다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아직은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냉정한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은 의외로 시야가 좁다. 재난과 위험이 구체적으로 나의 일이 되기까지는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이 문제가 내 문제가 되기 시작하면 생각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영국의 한 과학자는 이번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결과로 앞으로 100만명이 목숨을 잃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물론 이것은 당장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앞으로 30년에서 50년 동안에 나타날 수 있는 끔찍한 시나리오다. 그리고 그 미지의 수에 나와 여러분도 조금은 들어가 있다. 이것은 2011년에 일본에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피할 수 없기에 잊으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계속해서 이 일은 적어도 나와 상관 없는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이것은 분명 여러분과 나의 문제이며, 우리 자식들의 문제이다. 이 시간과 장소를 피할 수 없다면 이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깊이 생각하는 대처가 필요하다. 

10월이면 교회의 건물을 내놓아야 한다. 어디로 갈지 아직은 기약이 없다. 같이 의논을 하겠지만 딱 부러지는 해결책이 나오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래도 어떻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사람이 있고 믿음이 있다면 길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길이 있다면 나는 그 길을 되도록 끝까지 가 볼 생각이다.

쉬울 거라고는 말 못 하겠다. 생각보다 어둠이 깊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참 어렵지만,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생각은 없다. 그리스도인은 이 사회적 문제와 영적으로 싸우고 치열하게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목회자로서 말한다. 기도하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라. 아직 자기 일이 아니라고 여기지 말라. 자기의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라. 하루를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라. 

지금은 분명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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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8 목양칼럼


성경을 연구하니 절대적인 운명은 없다. 

하나님의 계획도 가끔은 수정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의를 실현하시는 것보다 사랑을 베푸시는 것을 더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극악한 죄로 심판을 예고 받은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 살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성경에서도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건이 있는 것은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인생이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능력이 많다는 것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는 조건임에 틀림없지만,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의 조건은 아니다. 

하나님은 탁월한 사람을 사용하신다. 그것은 능력 이상의 것이며, 우리의 성품과 마음, 보다 근본적인 영혼의 상태에 뿌리를 두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탁월한 사람을 쉽게 알아보지 못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탁월한 사람들에게는 분명 그들만의 주요한 특징이 있다. 

첫째가 시선이다. 눈은 영혼의 창(窓)이라고 했다. 사람은 무엇을 보고 사느냐에 따라서 그의 생각이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생각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그 생각을 쉽게 다스릴 수 없고, 때문에 사람들은 바람 부는 들판의 갈대처럼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알면서도 어쩌지 못한다. 그런데 그 생각에 ‘고삐’가 있다. 바로 시선이다. 자신의 시선 앞에다 좋은 것을 두면 좋은 생각이 자연스레 솟아나고, 나쁜 것을 두고 살아가면 자연스레 생각이 탁해진다.

시선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육체적인 시선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시선도 있는데, 바로 마음의 시선이다. 생각으로 강렬한 열망을 느끼며 보는 것은 사람만의 특징이다.

노인은 과거를 응시하고, 청년은 미래를 응시한다. 죄인의 욕망을 응시하고,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응시한다. 일주일 동안에 우리가 주로 무엇을 보고 살았는지를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각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고, 어디로 끌려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둘째는 언어이다. 말은 밖으로 향하기 전에 안으로 스며든다. 자신의 입과 가장 가까운 귀는 타인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다. 그래서 말은 마음을 고정(固定)한다. 흔들리던 마음도 그것에 대하여 말을 하는 순간 확실해진다. 심지어 사람들은 자신의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을 위해 비싼 돈을 지불하지 않는가!

그래서 말은 생각의 보약이거나 독약이다. 입이 가벼운 사람들은 말은 하면 그만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말이 마음을 움직인다. 사람은 자기 말을 먹고 산다.


시편1편은 복 있는 사람의 비결을 설명하며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다. 여기서 ‘묵상’은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낮게 읊조린다는 뜻이다. 그래서 두 가지 조건이 함께 스며 있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보는 것과 그것을 입으로 낮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을 다잡는다. 탁월하게 한다. 영감이 떠오르고, 인생의 길이 보인다. 신기하고 확실한 사실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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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생각하고 화목을 힘쓰자

2011-08-21 목양칼럼


20대에는 세상에 분노하고, 30대에는 세상에 절망하며, 40대는 세상에 적응하고, 50대는 스스로 세상이 된다. 왜 ‘어리다’는 말이 ‘어리석다’는 말과 통하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인간은 지극히 경험적이고, 그래서 아직 어린 시절에는 결코 인생을 깊이 조망(眺望)할 수 없다. 모르기 때문에 용감하고, 용감하기 때문에 허물 많은 것이 ‘젊음’의 이면이 아니겠는가!


목회를 하는 친구와 통화를 하니, 갑자기 최근에 함께 사역을 하던 부교역자가 둘이나 곁을 떠났다고 한다. 한 명은 선교지로 떠나려고 준비 중이고, 다른 한 명은 아직도 사역지를 찾는가 보다. 

그러나 의외였다. 여름은 교회가 제일 바쁘게 움직이는 계절이 아니던가? 여름성경학교, 학생회와 청년부 수련회, 그리고 전교인 수련회 등으로 어느 교회든지 교회가 가지고 있는 힘을 다 기울이는 시기인데, 많지도 않은 사역자들 중에서 둘이 동시에 자리를 떠나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그렇게 힘든 결정을 했을까?

심상치가 않다. 우리도 부교역자 시절이 있었고, 그래서 담임목사와 교회의 무게감에 눌려 신음했던 때도 있었다. 어느새 우리 자신이 그 절망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갔다. 그들도 뭔가 맘에 맞지 않고, 나름 깊은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를 나갔을 것이다. 기도도 했을 것이고, 이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으며, 지금도 구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건 아니다.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순간, 사명은 목숨보다 귀하다. 아무리 맘이 상하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양(羊)무리를 생각하고 참는 것이 사명자의 길이다. 더구나 자신의 선택으로 인하여 교회가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다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만약 오히려 그 어려움을 조장하고 즐기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살피시고 판단하실 것이다.


목회자로서 꼭 얻기를 바라는 소망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좋은 교인을 만나 그 인생과 신앙의 성공을 함께 이루는 것이고, 둘째는 좋은 동역자를 만나 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모세가 여호수아와 그러했듯, 바울이 디모데와 그러했듯이 말이다. 

첫 번째 소원은 이루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교지에 나와 작은 교회를 섬기는 동안 두 번째 소원은 가슴에 묻어두고 애써 잊어야만 했다.

그래서 친구의 교회에 갔을 때에, 젊은 동역자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들을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며, 그들의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친구를 보면서도 감동스러웠다. 그런데 결과가 이리 되었다고 하니 멀리 있는 타인(他人)이면서도 마음이 아프고 쓰리다.


항상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최선을 원하시고, 결과는 별로 상관하지 않으신다고 말해 왔다. 하기사 하나님은 이미 완전하신 분인데 우리가 무엇을 더할 수 있으랴!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며, 이 소박한 진리 뒤에 교묘하게 숨어 있는 우리 자신의 위안과 변명을 깨닫게 된다. 신앙적인 결말에 이르지 못하면서 무엇을 최선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누가 그 ‘최선’을 결정하고 승인했는가? 자신인가, 아니면 하나님이신가?


양(羊)은 절대로 목회자를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사명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스스로 고독하고 평생 어려운 길이다. 원망도 많이 듣고, 비난도 많이 받는다. 다행스러운 것은, 성경을 봐도 영적 지도자들이 이런 취급을 늘 받아 왔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경우와 자신의 경우가 반드시 똑같다고 확신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잘 못 해서 비난 받는 것만은 아니며, 잘 해도 비난 받는 것이 사명의 길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인내하고 또 인내해야 한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스스로 자아를 죽이고 또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없고, 그분의 양떼를 돌보는 목회자가 될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친구 목사는 마음을 잘 추스르는 모양이다. 하지만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르기까지 이성과 감정 사이의 깊은 골을 경험할 것이다. 괘씸한 마음과 용서되지 않는 감정의 찌꺼기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기도를 방해할 것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가기 전에 잘 풀고 떠나기를 바란다. 서로 위하여 기도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간의 좋은 추억을 잘 간직할 수 있도록 성숙한 모습이었으면 한다.

예수님은 화목제물이 되셨다.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을 위해, 그리고 우리 서로의 화목을 위해 그분이 죽으셨다. 이 사실을 잠시라도 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신앙이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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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6 내 마음을 맡아 주세요


사람이 피곤하면 예민하게 되고, 예민하면 짜증스럽다. 육체적인 피곤함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정신적인 피곤함은 이런 경향이 더욱 강하다. 그래서 스트레스는 순환한다.

피곤한 사람의 주변에서는 피곤한 사람들이 양산된다. 말과 표정, 느낌의 찌꺼기가 오물처럼 사람들을 습격한다. 단지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힘들고 마음을 고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을 정말 피곤하게 만드는 원흉이라고나 할까!

세월은 사람을 좋게도 변하게 하고, 나쁘게도 변하게 한다. 그런데 스트레스는 병적이다. 한 번 그 흐름에 빠지면 헤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인생의 적이다. 좋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점점 나아지는 변화가 꼭 필요한데, 스트레스는 나쁜 변화를 주도한다.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이미 죄를 짓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기 때문에 충분히 나쁘다고 할 수 있다. 스트레스의 상황에 빠지면 사람은 대부분 나쁘게 변해간다. 아무에게나 짜증을 내고, 자기를 쉽게 변명하며, 반성하지 않고, 흥분하고, 때로는 우울하고, 심지어 웃으면서도 슬프다.

나는 스트레스가 사람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을 향하여 하나님은 땀 흘리는 노동과 땅의 엉겅퀴와 가시나무의 저주를 말씀하셨다. 쉽게 풀어 말한다면, 세상이 맘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노력해도 실패하고, 욕심 부리지 않아도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 맘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사람은 고민하고 힘겨워 하며 살게 된 것이다. 결국 아담 이후로 이 저주의 굴레에서 사람은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요즘 기도의 제목은 나의 마음의 주권을 주님께 위탁하는 것이 전부이다. 나이를 먹고, 언제부턴가 ‘문제’도 인생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산다는 것은 단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를 반응하게 하고, 생명의 의욕을 가지게 만든다. 배고픔을 모르면 먹는 즐거움도 모르게 되는 것처럼, 문제의 시기를 통해 우리는 평안의 가치를 발견한다. 그러니 문제도 필요한 것이며, 인생의 일부이다.

다만 그 문제를 통해 스트레스 상태에 휘말리는 마음이 진짜 문제이다. 실망과 좌절을 겪고서도 나중에 되돌아보면 얼마나 사소하고 부끄러운 옹졸함이던가! 좀 더 대범하고 강단 있게 대처했다면 문제의 시기가 오히려 자존감을 높이고 긍지를 주지 않았을까? 마음이 암울한 환상을 만들고, 행동이 그에 반응했기 때문에 실수했던 것은 또 얼마나 많은가!

아, 마음이 진짜 문제다. 산책길에 줄을 풀어주면 사방으로 날뛰며 뒹구는 강아지처럼, 문제를 기회 삼아 여실히 허접함을 드러내는 나의 마음이야말로 내 인생의 원수이다.

예수님, 내 마음을 좀 맡아주세요. 줄로 묶어 주세요. 그러나 다치지 않게 조금은 부드럽게 대해 주세요.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을 만져 주세요. 내가 바꿀 수 없는 부분을 안아 주세요. 미련하고 좁은 마음이 소중한 내 인생을 낭비하지 않도록 도와 주세요. 내 마음이 더 이상 나의 소유가 아니라 당신의 소유라고 말해 주세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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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31 화해, 공존의 비밀


사람이 서로 잘 지내는 비결은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잘 싸우고 잘 화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가치관이 다른 사람이 함께 지내면 필연적으로 갈등이 생긴다.

특별히 일본에 와서 그것을 더 확인하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한국에서 아주 친한 친구들이 함께 일본에 와서 룸메이트로 지내다가 문제를 겪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약간은 과장된 이야기가 되겠지만, 친구로 와서 원수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사람을 사귀는 것도 물론 어렵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깨어진 관계를 봉합하고 다시 친구가 되는 방법, 곧 ‘화해’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사소한 문제를 두고서도 극단적으로 대치하다가 결국에는 좋은 사람을 잃는 경우가 많은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화해(和解)’란 서로 조화를 찾고 문제를 푼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먼저 암묵적인 전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싸움을 했더라도 잘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뜻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서 충돌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잊지 못할 수준의 모욕이나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망각은 불편한 약점이기도 하지만 은혜로운 축복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에게 어떤 기억은 평생 잊혀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가해자는 잊더라도 피해자는 잊지 못하기 쉽다. 그리고 그런 기억을 남기게 되면 아무리 화해를 위해 노력해도 완전한 회복이 불가능할 수 있다. 물론 싸울 때에는 감정에 취해서 다시는 안 본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신중해야 한다.

‘만약’이라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에 두고 싸워야 한다. 좀 더 발전한다면, ‘화해’할 것을 미리 계산하면서 싸우는 노련함이 필요하다. 우리가 나중에 화해할 것을 미리 생각하면서 싸울 수 있다면, 우리의 표현과 방법이 당연히 많이 순화되게 될 것이다.

화해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니다. 사실은 화해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인격적인 결함이며, 모진 잘못이다. 어떤 사람에게서도 완전함을 기대할 수 없듯이, 우리가 만나는 갈등에서도 어느 한 편의 일방적인 잘못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많고 적음은 있겠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화해의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자기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성숙함이다. 미련한 사람은 갈등 속에서 상대방의 잘못만을 계속 생각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부족을 생각한다. 심지어 타인의 잘못이라도, 그것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는 것[타산지석(他山之石)]이 참된 지혜이다.

화해하라. 되도록이면 사람을 잃지 말아라. 설사 헤어지더라도 화해하고 헤어지라. 야곱과 에서도 화해했지만 그들이 이후로 함께 살지는 않더라. 하지만 계속 미워하며 떨어져 사는 것과 서로를 향한 좋은 감정을 가지고 떨어져 사는 것은 전혀 다르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화해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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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4 목양칼럼


여름이다. 더위에 지치면 입맛이 없기 쉽다.

입맛이 없을 때는 밥상에도 과거로의 회귀(回歸)가 일어난다. 화려한 것보다는 뭔가 복고풍(復古風)의 담백한 음식을 찾는다. 개인적으로 그 중의 하나가 깍두기이다.

새로 담근 깍두기가 아니라 잘 익었거나, 혹은 조금 신맛이 나는 깍두기가 좋다. 깍두기를 담글 때에 찹쌀이나 쌀로 풀을 쑤어 넣었다면 나중에 국물이 약간 걸쭉해서 밥을 비비기 좋다.

이 국물을 하얀 쌀밥에 듬뿍 얻는다. 물론 깍두기도 적당히 들어가야 한다. 수저로 밥을 비비기 시작하면, 신맛의 냄새가 코로 들어오면서 벌써 침이 꼴깍 넘어간다. 처음부터 완전하게 비빌 필요도 없다. 먹으면서 천천히 비벼가도 되니까… 당장 밥그릇의 윗부분을 벌겋게 비벼서는 깍두기와 함께 한 입 가득 베어 문다.

깍두기가 좀 매운 맛이 강하다면, 담백한 나물이나 생선 같은 반찬을 곁들여 먹으면 더 맛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그냥 시원한 냉수 한 잔만 있으면 뚝딱 밥 한 그릇을 해치우게 된다.

어린 시절에는 이렇게 밥을 먹는 어른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햄이나 장조림이 맛있지 깍두기에 무슨 찬사를 돌린단 말인가! 깍두기는 그저 촌스런 반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그 진가(眞價)를 저절로 알게 되었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 혼자서도 한 끼의 식사를 책임질 수 있는 저력, 그리고 숙성(熟成)의 과정을 통해 오묘하게 입맛을 끄는 매력까지…… 깍두기는 밥상의 지존이다!

사람이 그렇고, 인생이 다 그렇다. 처음에는 화려하고 달콤한 것이 좋지만, 그런 것은 오래 가지를 못한다.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화려한 것이 아니라 수수한 것이다. 평범해 보이고, 어떨 때는 지루해 보이는 것이 사실은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자극을 원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런 자극이 곧 충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평생을 그렇게만 살 수 있을까? 인생은 짧지 않고, 신앙은 평생의 문제이다. 결국 우리는 깊은 강을 건너 주님의 나라에 가야 한다. 그리고 이 순례의 길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아주 담백하고 평범해 보이는 원리의 실천이다.

하루에 한 번 마음을 기울여 기도하기, 그리고 성경을 늘 곁에 두고 묵상하며 살아가기, 주일은 예배에 빠지지 말기(덧붙여 늦지도 말기),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기, 밥을 먹을 때에는 늘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 이런 것들이 정말 간단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신앙에 있어서도 ‘깍두기’로 돌아가야 한다. 햄과 치즈, 장조림을 내려놓고, 내가 정말 시대와 환경에 상관없이 나를 입맛 돌게 하는 깍두기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여름철 입맛이 없다고 신앙까지 무력해지지는 말자. 계절에 맞는 입맛이 있듯이, 신앙에도 각각의 때에 적당한 은혜가 있기 마련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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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0 목양칼럼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본래 억울하고 슬프기만 한 일은 아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육신의 노쇠함 이상으로 그의 정신과 인격이 풍요할 수 있다면 나이를 먹어가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며 행복할 수도 있는 일이다.

결국 세월에 대한 한탄은 흘러간 세월에 비하여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다는 자각에서 나온다. 나이만 먹었지 도대체 인생에 발전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우리는 정신적으로 추락하는 비행기처럼 곤두박질친다.

성경에는 나이 먹은 사명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아브라함이 새출발을 결단한 것이 75세였고,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타는 사명의 나무를 보았던 것은 80세였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여호수아와 갈렙도 70세가 훨씬 넘어서 가나안 전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물론 더 일찍 믿음을 가지고 순종했다면 더 많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섭리와 사명의 준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극히 인간적인 생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셉과 다윗의 인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설사 아주 늙은 나이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압축된 세월 속에서 사명자를 ‘나이 먹게’ 하신다. 속된 말로 ‘애늙은이’를 만드시는 것이다. 이러한 숙성의 과정이 없이 사명자는 만들어질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준비이다. 하나님은 사명자에게 능력이 아니라 인격을, 지능이 아니라 지혜를, 기술(skill)이 아니라 경륜을 원하시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특별한 은혜 속에서, 보낸 세월(나이)보다 훨씬 깊은 것을 얻었으며, 그로 인하여 시대를 변화시키는 탁월한 사람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나이 먹는 것이 두렵지 않다. 이룬 것이 적지만, 그래도 괜찮다.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고 정리된 것이 늘어갈수록 언젠가는 이것들이 꼭 요긴하게 사용될 때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왜냐하면 사명자로서의 내 세월은 결국 하나님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하루는 목회로 인하여 많이 속상했다. 가슴에서 눈물이 났다. 속상함을 달랠 길이 없어 우두커니 창가에 서 있다가, 결국에는 기도자리에 앉았다. 가슴에서는 펌프질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이 말씀을 들었다.


(이사야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런 일들은 그냥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다. 나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세월일 뿐이다. 결국 이 슬픔도 내 재산이 될 것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내 인생의 상처들을 통해 오히려 목회의 진주들을 만드실 것이다.

깨달음의 순간에 나는 손을 들고 감사했다. 문제는 잊혀졌고, 은혜만 남아 빛이 났다.


흰머리에 부끄럽지 말자. 세월은 나를 익어가게 한다. 역경과 고난은 그분의 사랑이다. 내가 그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분은 나를 중요하게 사용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이 시대를 향한 내 안의 메시지이다. 공허한 말이 아니라, 피 묻은 복음이 필요하다. 비루한 것들을 단칼에 날릴 수 있는 날카로운 말씀의 검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지금 이 광야에서 나에게 그 검의 길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가치 있는 길을 가고 있다면 세월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세상이 무어라고 말하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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