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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눅 9: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것도 설교 중에...

일단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첫째,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실제로 그런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자들이 존재했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의 생각을, 특별히 제자들의 생각을 통찰하셨으니까. 이 말씀은 결국 누군가 들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둘째, 누가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복음서에 기록하여 교회에 읽게 했다는 것은, 초대교회 안에서도 역시 그런 '부끄러움'을 가지는 신자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복음서는 교회를 위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목격하지 못한 신자들을 위한 기록이었다. 그렇다면 그 기록에는 분명히 기록의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아 마땅하다.



02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그리고 초대 교회의 신자들 사이에 예수님에 대하여, 혹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왜 그랬을까?

여기서도 몇 가지 추리가 가능하다. 

일단,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 사람으로 불려졌고,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나다나엘과의 만남을 떠올리더라도 그러한 예수님의 출신은 대중에게 호감을 주지 못했다. 결국 학벌도, 가문도 없는 예수님의 모습은 당시의 혼란한 시대 속에서 '자랑스러운 스승'이 되기에는 한없이 허술해 보였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예고하면서 이렇게 노래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2)

그의 예언이 사실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오늘날에야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예수를 '주님(Load)'이라고 부르고, 또한 그분을 위하여 거대한 성전들이 지어져 있지만, 그 시절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예수는 무명(無名)에 불과했다. 교회가 아직 사회적으로 마이너(minor)에 불과했을 때에, 신자들이 공개적으로 예수를 시인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그리고 중요한 신앙적 행위에 분명했다. 그러니 그것을 뒤집어 본다면, 당시에는 예수를 부끄러워 하기가 매우 쉬웠다는 뜻이 된다.



03

또한, 누가복음을 통하여 한 가지 더 특별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나와 내 말'이라고 언급하신 예수님의 목소리 속에 드러나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향한 믿음은 곧 예수의 말씀에 대한 실천을 내포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에는 신학이 발달하고, 다양한 체계가 개발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에 그런 복잡하고 세련된 지식의 구조와 조직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예배의 모임과 믿음의 내용에 있어 매우 단순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처음의 교회는 무엇에 주목하고 집중했을까? 당연히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복음서 중에서도 바로 예수님의 목소리가 담겨진 부분들이 더욱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읽어도,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리 수월하지 않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는 것은, 어쩌면 그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아직도 우리에게 난감한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를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거나, 원수를 위하여 사랑하고 기도하라거나, 예수님보다 자기 집안 식구들을 더 사랑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은, 지금도 우리를 충분히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 당혹감의 반응이, 일정 부분 '부끄러움'이라고 표현된 것이 아닐까?



04

부끄러움(수치심)은 결국 이성의 반응이다.

때문에 이성적으로 그것은 합리화 될 수 있으며, 또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성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동안, 믿음은 '저편의 무엇'에 지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믿음은 반(反) 이성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성을 초월하는 무엇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초대 교회의 신자들도 결단이 필요했다. 그것은 그들의 눈으로 보는 현실, 그들의 상식, 그들이 받았던 교육의 내용과 대비되는 예수 앞에서도 예수와 예수의 말씀을 선택할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제법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며, 또한 자기의 틀을 깨뜨리는 파격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때문에 사실 누가복음의 본문 속에서 나타나는 '부끄러움'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고, 오히려 예수와 예수의 말씀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그 시대에 매우 부자연스러운, 혹은 특별한 것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05

이제 기독교는 지구상에 메이저(major)가 되었다. 왠만하면 어디서도 예수의 이름이 수치심을 자극하는 초라한 행색을 가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다니고, 심지어 기독교적 문양을 문신으로 피부에 새기기도 한다. 집집마다 문패와 함께 예수의 이름을 내걸고 아이에게도 예수와 관련된 이름을 지어준다.

하지만 이게 과연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부끄러움을 극복한 현실일까? 

전혀 아니다. 여전히 예수의 말씀은 받아들이기 힘든 무엇, 사람들이 일부러 귀를 막고 외면하는 무엇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상식의 수준에서 보는 예수의 언행과 가르침은 촌스럽기만 하다. 그것은 전혀 매력적이 아니다. 화끈한 복수를 해도 시원찮은 판에 원수를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해 주라니! 

 


06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촌스러운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자기 경험과 상식,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예수의 말씀에 기꺼이 자기 인생을 걸어볼 것이다. 어차피 그런 결단이 아니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간단한 이름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예수의 발 앞에서 설교를 들었던 청중들도 그러했고,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들었던 초대 교회의 신자들에게도 그러했으며, 지금 우리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사실은 우리를 무척 당혹스럽거나 슬프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07

세상은 언젠가 뒤집어진다. 촌스럽다고 조롱했던 바로 그 예고된 장면, 예수가 천사들과 함께 영광으로 나타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예수와 예수의 가르침을 비웃었던 그 모든 사람들, 논리들, 주장들이 모두 추락할 것이다. 그 날에는 예수와 예수의 말씀 앞에서 결단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실로 통쾌한 복수가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허세를 부리며 꾸미고 포장했던 모든 것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그 날의 부끄러움은 우리가 스스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퍼붓는 것이다. 

예수는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다. 십자가의 조롱을 참고 인내했으며, 뿐만 아니라 자기를 부끄러워 하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조용히 침묵했다. 그러나 예수의 침묵이 납득이나 수용은 아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예고하셨고, 누가를 통해 그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와 예수의 말씀을 부끄러워 했던 자들, 그것을 개나 줘버렸던 자들에게 의로운 복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이것 역시 우리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지 모르지만...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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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30 목양칼럼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늘어간다. 태생적으로 수줍어하는 성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 수준의 도덕, 교양, 그리고 신앙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보편적이라는 말이 조금 모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회가 가지는 일반적 ‘보통’의 수준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에 부족하거나, 혹시 실수로 벗어났을 때에 부끄러워하는 것은 사람다운 미덕(美德)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이를테면 ‘배째라!’ 또는 ‘어쩌라고?’의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 이런 사람들은 참 난감하다. 이런 사람들로 인하여 사회가 분위기를 흐리고, 순진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오히려 답답한 사람들로 대우 받거나 피해를 입게 되는 것 같다.

진정한 용기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얼굴을 두껍게 하고서 부끄러우면서도 부끄럽지 않은 듯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끄러움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고 개선하여 보다 선하고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는 것이다. 되도록 같은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개선되지 못한다. 자신에게서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부끄러운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사람들이 많다. 남의 잘못에 대하여는 칼날 같이 예리하면서도 정작 자신에 대하여는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고서 살아간다. 그래서 정말 부끄럽게 살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처음에는 분노하다가도 결국에는 진한 슬픔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을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다.
“그런데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그리스도인은 평생에 자기를 개혁해 나가야 한다.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을, 그리고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신앙은 우리를 책망할 것이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이 책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마땅히 부끄러움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러한 바탕을 잃어가고 있다. 주장은 많은데 자기 고백과 반성이 없다. 남의 잘못은 아는데 나의 잘못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섬기고, 사랑하고, 기도해야 하는 의무는 가벼이 여기면서 자기가 받아야 하는 은혜, 권리, 이익에 대하여는 강경하기만 하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자기의 부족을 생각하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야말로 희망의 씨앗이다. 세상을 바꾸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놓여 있다면 이러한 생각의 틀은 당연하기만 하다.

언제나, 하나님과 먼 사람은 자기를 의인이라고 주장하고,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은 자기를 죄인이라고 주장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의 판단은 그 반대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당신도 알 것이다!)
당신은 요즘 무엇이 아프고 부끄러운가? 자신의 잘못과 부족이 보이는가? 만약 이러한 정서가 없다면 당신의 신앙은 위기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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