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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0.11 그리스도를 본받아
  2. 2012.07.21 명예로운 권위
  3. 2012.07.15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베드로전서 2.16~21

(2: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2: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2: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2: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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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2 목양칼럼



자유와 평등. 그것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리며 추구한 가치이며, 동시에 성경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가치이다. 성경이 그토록 를 미워하는 이유도 그것이 사람의 영혼을 불행한 사슬에 묶는 굴레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그 죄의 사슬로부터 사람을 구원하고 해방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모든 억압에 항거하는 정신이 내포되어 있다 하겠다.

종교개혁과 더불어 만인제사장이라는 교리를 강조하게 된 것도 같은 이유다. 제사장은 본래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신앙적인 중재를 담당하고 대신하여 수고하는 헌신적인 직분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제사장이 하나님의 권위를 사칭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자기의 욕망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집단이 되고 말았다. 결국 만인제사장은 근본적으로 제사장이라는 역할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제사장이라는 이름을 남용하여 벌어지는 일체의 억압과 부조리에 항거한 교리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의 시작을, 1517년에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대학교회의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이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5년만 있으면 500주년을 맞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국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목사라는 이름의 제사장에 눌려 정신적 억압에 신음하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목사는 명예로운 직분이다. 목사의 명예는 성도들을 위해 수고하고, 성경을 실천하며, 신앙적 삶의 모델을 형성하는 것에 있다. 목사는 그러한 삶의 궤적 속에서 한 교회를 대표하고, 신자들을 양육하여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그것은 강요된 권위가 아니라, 동고동락(同苦同樂)의 동행 속에서 얻어지는 신뢰의 권위이다.

때문에 목사가 신뢰를 깨뜨리면 당연히 그 권위도 회수되어야 한다. 목사는 별종(別種)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평등한 신자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직분이 특별한 것이다. 직분은 그것을 감당할 때에 명예로운 것이지, 감당하지 못하는 자의 방패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에는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나온다. 그는 불행하게도 돈에 신앙과 양심을 팔았다. 모압의 왕을 위하여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고 시도했다. 하나님은 그가 가는 길을 막으셨다. 더 놀라운 것은 당나귀의 입을 열어 발람에게 교훈을 주신 것이다. 이것은 극단적인 가르침이다. 선지자의 직분이 귀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면 당나귀라도 대신할 수 있다는 교훈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명예롭게 여겼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타이틀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고 하셨던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 그러나 귀한 직분을 감당하는 사람은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반대로 그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에게까지 명예로운 권위를 내어줄 필요는 없다. 성경은 이 점에 대하여 매우 단호하며, 이것이 성경적 정의라고 나는 믿는다.

교회에서 섬기는 모든 사람들은, 마땅히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여겨야 한다. 억압의 굴레를 다시는 쓰지 말라. 하나님은 자유와 평등의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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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5 목양칼럼


 

영웅의 시대는 갔다. 전장의 빗발치는 화살 속에서 용감하게 선두를 달리는 용장(勇將)의 기백은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다.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일수록 비겁한 시대가 되었다. 아무런 위험도 감수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돌격'을 외치는 그런 사람들의 시대 말이다.


작년3월, 후쿠시마의 원전이 쓰나미의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 들려졌다. 처음에 그것은 수많은 피해지의 무너진 건물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원전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 오르다가 폭발하는 장면을 생중계로 방송했고, 그것은 또 다른 재난의 시작이었다. 연이어 방사능 누출이 매일 신기록을 쏟아냈다. 인근지역의 소개(疏開)가 시작되었고, 소방헬기가 바닷물을 퍼서 원전 위에 쏟아 붓는 사상 최악의 대응이 전세계에 중계되었다.

가슴이 떨렸다. 원전사고가 빨리 수습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거기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던 것이다. 동경전력의 안일한 태도가 매일 여론의 질타를 받았지만, 그것은 원전정책을 결정하고 그 혜택으로 막대한 부를 누렸던 사람들의 몫이지 당시 그곳에서 반강제로 발이 묶여 있는 사원들의 몫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나라의 위기를 위해 가족과 눈물로 이별을 하고 동경에서 후쿠시마까지 달려갔던 소방특공대원들의 모습은 실로 장엄했다. 그들이 목숨을 이 위기를 모면하는 값으로 내놓아야 한다면, 과연 그것이 감동만 해도 되는 일일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목숨과 자유를 중요하게 여긴다. 때문에 손해를 감수하게 될까 봐 다른 이의 위기를 외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외면은 결국 자기의 위기를 앞당긴다.


한 때 나치의 지지자였던 마르틴 니묄러라는 목사가 있다. 그는 나중에 나치의 반대운동에 나섰고 <그들이 왔다>는 아주 유명한 시를 남겼다. 이 시에서 '그들'은 나치이지만, 동시에 우리 시대의 '그들'이기도 하다.

"맨 먼저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지만 /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리고 그들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지만 나는 /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그리고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지만 /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마지막으로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지만 / 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개신교 기독교인들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부른다. 이 말은 '항의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중세의 암흑 속에서 왕이, 귀족이, 그리고 심지어 종교의 사제가 불의(不義)로 하나님을 사칭할 때에, 오직 손에 성경을 들고 진리를 위해 항의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항의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심지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을 거룩한 희생으로 받고 하늘의 보상을 믿으며 죽어갔기에 시대의 어둠을 걷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벌써 일본의 원전은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걸고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들은, 설사 다시 후쿠시마의 원전과 같은 사고가 일어나더라도 결코 그곳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도장을 찍고, 누군가를 그곳에 보낼 뿐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의 이름이 다음에는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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