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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LQ. 1. What is the chief and highest end of man?

A. Man's chief and highest end is to glorify God, and fully to enjoy him forever.

 

대1. 인간의 제일되며 가장 높은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의 제일되며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아담’은 고유명사이면서 일반명사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어원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붉은 흙(아다마)’에서 왔다는 견해를 나는 좋아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가장 훌륭한 해석이 아닐까 한다.

 

창조는 목적을 가진다. 그 이유는 창조주가 맹목의 비인격적 신이 아니라, 바로 깊은 지혜와 계획 가운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인격적 하나님이 아무 이유와 목적 없이 창조라는 거대한 일을 하실 리가 없지 않는가!

그 중에서도 ‘사람'의 목적은 모든 세상의 창조 목적을 수렴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바로 ‘사람’을 창조의 꽃으로, 모든 하나님의 창조의 핵심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심 되고(chief), 최고의(highest end) 목적이라는 언급 또한 깊이 새길 만하다.

이 말은 사람의 목적에는 근본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이 있음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말하는 답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필수적인 가치를 지닌다면,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사람을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는 주변적인 목적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예수님은 돌들로 떡을 만들라는 마귀의 시험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물론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이 사람을 살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는 사실에는 추호의 의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당장의 생존을 위하여 필요로 하는 ‘떡’의 존재 역시 부정되지 않는다.

자기가 믿는 믿음의 도리에 대하여 과도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모든 이외의 것을 배타적으로 보는 견해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런 견해는 대부분 세상을 망가지게 한다. 과격해진 주장은 분쟁을 만들며, 미움과 증오의 씨앗을 뿌린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열매를 통해 확증하건데 알곡이 아니라 가라지이다.

그런 점에서 폭력은 결코 정의를 이룰 수 없으며, 미움과 분노가 결코 선을 이룰 수 없다는 확신을 우리는 가져야 마땅하다.

 

반대로 진리의 자부심은 포용적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남편 다섯을 두었으나 지금도 역시 남편이 아닌 사내와 동거하고 있는 여인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셨을 때, 만약 그 여인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혹은 이후로 새 삶을 살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얼마나 불편한 입장이 되셨을까?

예수님의 주변에는 유난히 ‘용서받은 죄인들’이 많았다. 삭게오도, 마태도, 죄 많은 여인도… 모두 사회적으로 깊은 트라우마를 가져서 전혀 회복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친구가 되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모험이었다. 만약 그들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헌 신짝처럼 여기며 살게 된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얼마나 치명적인 모욕의 대상이 되었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모험하셨다. 자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음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그 어떤 편견과 굴레와도 상관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여셨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옳은 일에 대한 확신, 진리가 반드시 자유를 줄 것이라는 믿음… 그런 자신감이 없이 어떻게 미지의 영역을 향해 첫 발을 내디딜 수 있으랴! 예수님께서 자기와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믿음의 힘이었다.

 

사람은 복합적인 존재이다. 복합적이라는 것은, 많은 주변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정치적 결정에 민감하고, 어떤 사람은 이익에 민감하다. 어떤 사람은 감성적이고, 어떤 사람은 매우 현실적이다. 그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두 하나로 통일되고 획일적이 될 필요는 없다.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과 추구하는 목적은 존중 받아 마땅하다.

다만 성경은 그 모든 가치의 가장 중심에 계시된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통해 하나의 기둥을 세우기를 원한다. 그 기둥이 바로 믿음의 뿌리이며,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기초이다.

그리고 그것을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은 ‘중심 되고 최고의 목적’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의 제1문의 질문은, 이미 매우 함축적인 내용을 담아낸다.

첫째, 창조주 하나님이 인격적이고 지혜로운 분이라는 것.

둘째, 사람이 모든 창조물의 가장 대표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

셋째, 사람에게 있어 중심 되고 최고의 목적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성경의 목적이라는 것.

넷째, 사람은 이 목적을 중심으로 다른 모든 목적을 수렴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이번에는 대답을 보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토록 충만하게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두 개의 대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이다. 왜일까?

남산에서 최고로 높은 나무는 몇 그루인가? 높은 나무는 많지만 ‘최고로’(highest end)라고 한정하면 그것은 반드시 하나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중심 되며 최고의 목적은 하나이다. 다만 그것이 두 개의 문장처럼 보여지는 것은, 그 양편의 날개가 서로 보완하여 서로를 설명하고 온전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영원히 하나님을 향하여 충만한 기쁨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존귀하게, 합당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때문에 영광을 돌린다는 말과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말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로 묶여야만 하는 것이다.

왜 예배가 축제여야 할까? 실제로 성경은 구약부터 신약까지 계속해서 ‘잔치’의 이미지를 계속 천국과 연결시킨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필연적인 것이다.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에는 반드시 충만한 기쁨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회개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에서 주어지는 기쁨이 아니다. ‘회개’라는 말이 사람 안의 욕망을 죽이는 것이 아니던가.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속에서 사람이 얻게 되는 ‘충만한 기쁨’이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사람이 반응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최고의 예우요, 영광인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는 사람이 하나님의 노예로 창조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자유롭게 대우하셨으며, 그 결과 죄의 유혹과 타락조차 허용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아브라함과는 친구와 같다고 하셨고, 모세와는 얼굴을 대면하셨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셨다.

이 모든 것은 창조의 목적이 바로 ‘친밀한 교제’라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낙원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나님과 누리던 기쁨의 관계, 하나님의 보람이 되는 사람으로서 누리던 충만한 기쁨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다른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기쁨이며, 하나님과의 기쁨이다.

복음은 죄를 해결한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 자체는 아니다. 죄를 해결하는 까닭은, 그렇게 해서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목은 필연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기쁨을 가져오고, 그러한 사람의 반응은 곧 하나님을 지극히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 신앙에서 눈물은 극복의 대상이다. 눈물이 최상의 은혜가 아니다. 요한계시록에도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으신다고 되어 있다. 눈물은 아무리 긍정적인 것이라도 한시적인 과정이며 그 자체가 극복의 대상이다.

신앙에는 고통이 있다. 그러나 고통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사도들이 교회를 위한 핍박을 찬양하며 받아들인 것은, 그 핍박을 참고 인내했을 때에 주어지는 승리를 믿었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기쁨이 그 고통보다 훨씬 강하고 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실의 신앙을 보라. 은혜 받은 사람들은 가볍다. 무겁고 침울하며 한숨의 그늘에 살아가는 자는, 입으로 어떤 거룩한 언어를 내더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자가 아니다. 은혜는 사람을 아이처럼 만든다. 은혜는 삶의 질서를 단순화시키며, 복잡한 계산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 집중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그래서 범사에 감사한 것이며, 항상 기뻐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삶의 무게가 줄어들거나 모든 일이 형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더러 의인의 고난도 있어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십자가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는 고통보다 크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고통에, 절망에, 어둠에 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삶을 산다. 그것은 그들의 의지가 아니다. 그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때문에 하나님을 이기지 않는 이상 그들의 가슴에서 일어나는 열정과 소망을 꺾을 힘은 세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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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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