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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유래는 삼국지이다.

적벽대전에서 크게 패한 조조는 화용도(華容道)에 포위되었다. 이 때에 제갈량은 조조를 죽이도록 관우에게 명령을 내렸으나, 관우는 지난 날 조조에게 입은 은혜를 기억하고 그에게 퇴각할 길을 열어 주었다. 결국 조조를 놓친 제갈량은 관우를 참수하려고 할 정도로 격노하였지만, 유비가 중재를 나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에 제갈량이 유비에게 하는 말 중에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는 사람의 일을 열심히 한 후에는 하늘의 뜻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갈고 닦는다는 의미의 수(修)가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의 진(盡)으로 바꾸어진 것은, 사람의 노력을 한층 강조하는 변화라 하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자주 입에 올린다. 그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성경을 묵상하고 경건한 기도를 한참 드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의 경우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가끔은 신기할 정도로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정작 그들의 확신이 하나님의 뜻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욕망에서 나온 것인지 매우 의심스럽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는 한 건가?


우리들의 함정은, ‘대천명’은 잘하지만 ‘진인사’는 소홀히 하는데 있다.

묵상과 기도는 영혼의 노동이다. 그것은 결코 가볍지 않으며 쉽지도 않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은 순진한 착각이다. 

만약 그것으로 충분하다면,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이집트의 파라오를 찾아갈 것이 아니라, 시내산 자락에서 계속 기도하며 출애굽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셨다. 팔순의 노인이었던 모세가 지팡이를 짚고 이집트의 파라오를 찾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아니, 단순히 찾아갈 뿐만 아니라 모세는 길고 지루한 싸움을 해야 했다. 먼저는 이집트와 싸워야 했고, 나중에는 노예근성에 물든 이스라엘과 싸워야 했다. 무려 40년의 세월을 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간단하지 않다. 가볍지도 않다. 쉽지 않다. 순탄하지 않다. 

때때로 사람들은, 일이 순조롭게 풀려갈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을 하는데, 참으로 어리석은 말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우리의 진심을 시험하시는 것 같다. 

늘 내가 원하는 것의 대척점에 있어 팽팽하게 긴장감을 주고 갈등을 유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내 뜻과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 곤란하다. 그리고 아프다. 힘들다. 그래서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언제나 버겁다. 어느 정도까지는 곧잘 하던 사람도 결국에는 포기하고 싶어진다.

바로 그 때에 우리는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만나게 된다. 

과연 이것이 나의 최선인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서 과연 나의 한계까지 왔을까? 

이제는 정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도 좋은걸까?

진인사(盡人事). 

그 경지는 항상 팽팽한 긴장과 갈등의 저편에 있다. 이것은 편안한 자리에서는 결코 대면할 수 없는 벌거벗은 우리의 민낯이다. 우리는 내면에서 나오는 이런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한 후에야, 비로소 대천명(待天命)의 경지에 들어서는 것이다.


아프지 않고 옥동자를 낳는 어미가 있던가? 힘들지 않고 수확을 거두는 농부가 있던가? 

하물며 우리가 광대하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 어찌 쉽고 간단할 수 있겠는가? 

그 과정의 눈물과 땀을 감내하지 않고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뜻을 내 안에 담아낼 수 있겠는가?


신앙이 병드는 것은, 날로 먹으려는 병폐 때문이다. 

왕이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초대된 사람들은 오지 않았다. 왕은 파격을 결심했다. 길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데려다가 잔치의 자리를 채우라는 것이었다. 왕의 명령을 받은 하인들이 몰려나가 그야말로 사람들을 쓸어 담았다.

평소에는 왕궁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못하던 걸인, 장애인, 창부, 건달, 술주정뱅이들이 모두 왕의 잔치에 들어올 수 있었다.

드디어 잔치가 시작되었다. 왕은 성대한 음악에 맞추어 입장을 하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불같이 화를 내었다. 그가 감히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황스러운 전개이다. 

술주정뱅이와 건달도 손님으로 영접하는 마당에 예복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또한 그 자리의 다른 사람들이 예복을 입었으면 얼마나 변변한 예복을 입었겠는가? 

그러나 왕은 단호했다. 그를 끌어내어 잔치에서 내어 좇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데려올 때는 언제고, 옷이 맞지 않는다고 끌어내어 버리는 것은 또 뭔가?


왕이 요구한 ‘예복’은 최소한의 성의다. 그것은, 적어도 자신이 어떤 자리에 참여하고 있는지 알고, 또한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잊지 말고 생각하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부실함에 대한 자각이 곧 왕의 자비를 더 돋보이게 하고,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왕에게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그 염치조차 없었다. 그는 어차피 파격적으로 받아줄 것이라면, 이 따위 예복도 필요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왕의 진노를 샀다. 


하나님의 뜻을 기다린다면, 제일 중요한 것은 그 뜻을 섬길 각오가 먼저 서야 한다는 점이다.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식의 태도는, 미안하지만 사절이다. 왕은 내가 아니라 나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시다. 때문에 그분은 절대로 타협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태도를 시험하신다. 정말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가? 그 뜻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가? 그 뜻을 위해 자신을 버릴 각오가 있는가?

그런 내면의 변화와 결단 없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담아낸 사람을 나는 성경에서 만나보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과연 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했는가? 이것이 내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인가? 삽비라처럼 반은 숨겨 놓고, 반만 바치면서 경건을 사기 치고 있지는 않는가 말이다.

진인사(盡人事). 사람의 일을 먼저 다하라. 네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서 대천명(待天命).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라.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순종시켜라. 무척이나 어렵고 무거운 신앙의 원리가 아닐 수 없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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