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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출처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community/2148/read?bbsId=G005&articleId=24819557&objCate1=516&itemId=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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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단순화 하는 것,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그것을 가난이라고 미워하는 것은
잘못된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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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틀랜드 던디시 가까운 작은 병원 노인 병동에서 별로 소중한

물건이나 재산이라고는 없는 한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간호사들이 조촐한 그 할머니의 짐을 정리하다가 이 시를 보게 

되었답니다. 내용에 감동받은 간호사들에 의해 복사된 이시는 

병원의 모든 간호사들에게 전달 되었답니다.


한 간호사가 이시를 아이랜드로 가지고 갔고, 후세에 남길 

그 할머니의 하나밖에 없는 유산은 북 아일랜드 정신 건강 협회 

뉴스 잡지의 크리스트 마스 판에 올랐습니다. 간단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이시는 동영상으로 만들어져서 소개도 되었고, 

이세상에 남길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스콧틀랜드 할머니의 시는 

작가 불명의 시로서 인터넷을 통해 온세계로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An Old Lady’s Poem” 


When an old lady died in the geriatric ward of a small hospital 

near Dundee, Scotland, it was believed that she had nothing 

left of any value. Later, when the nurses were going through 

her meager possessions, they found this poem. 

Its quality and content so impressed the staff that copies 

were made and distributed to every nurse in the hospital.


 one nurse took her copy to Ireland. The old lady’s sole 

bequest to posterity has since appeared in the Christmas 

edition of the News Magazine of the North Ireland Association

for Mental Health. A slide presentation has also been made 

based on her simple, but eloquent, poem and this little 

old Scottish lady, with nothing left to give to the world, is now 

the author of this “anonymous” poem winging across the internet:



무엇을 보시나요, 간호사들? 무엇을 보시나요? 

당신이 나를 볼때 무슨 생각 하시나요?  

What do you see, nurses? What do you see?

What are you thinking when you're looking at me?


현명하지 못하고 투정 부리는 늙은이, 

변덕스런 성질과 촛점 없는 눈을 가진?

A crabby old woman, not very wise,

Uncertain of habit, with faraway eyes?


음식을 질질 흘리고 대답도 빨리 못하는 당신이 

목청높여 말할때면 “당신이 좀더 노력하기를 바랬다오!”

Who dribbles her food and makes long reply

When you say in a loud voice, "I do wish you'd try!"


보기에는 당신이 하는일을 모르는것 같고

양말짝이나 신발짝도 항상 잃어 버리는?

Who seems not to notice the thing that you do,

And forever is losing a stocking or shoe?

 

저항을 하던지 말던지, 당신의 뜻 데로

목욕도 시키고 음식도 먹이며 긴 하루를 채워야 하는?

Who, resisting or not, lets you do as you will, 

with bathing and feeding, the long day to fill?


당신은 그렇게 생각 하시나요? 당신은 그렇게 보시나요? 

그렇다면 눈을 뜨세요, 간호사, 당신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아요

Is that what you're thinking? Is that what you see?

Then open your eyes, nurse, you're not looking at me.



당신의 명으로 행동하고, 당신의 의지데로 먹으며

여기에 꼼짝 않고 앉아 내가 누군지 말해 줄께요

I'll tell you who I am as I sit here so still,

As I do at your bidding, as I eat at your will.



나는 열살된 작은 아이로 아버지와 어머니, 

남형제와 여형제들로 화목한 가족을 가졌다오

I'm a small child of ten with a father and mother,

Brothers and sisters, who love one another.



곧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행복으로

날아 갈것 같이 꿈 많은 소녀 열여섯

A young girl of sixteen with wings on her feet

Dreaming that soon now a lover she’ll meet 


평생 지키겠다 약속한 그 언약을 기억하며

가슴 설레이는 곧 스무살 될 신부

A bride soon at twenty, my heart gives a leap,

Remembering the vows that I promised to keep 



편안하고 행복한 가정으로 돌보아 주어야 할 

내 작은 아이들이 있는, 이제 스물 다섯

At twenty-five now, I have young of my own, 

who need me to guide and a secure happy home. 



삼십의 여인, 빠르게 자란 내 아이들은 

오래도록 남아있을 사랑의 끈으로 서로를 묶었고

A woman of thirty, my young now grown fast,

Bound to each other with ties that should last.



사십살에, 어렸던 아들들은 자라서 집을 떠났지만

내 남편이 옆에 함께 하기에 슬프하지 않았어요.

At forty, my young sons have grown and are gone,

But my man’s beside me to see I don’t mourn.



오십살에 다시 한번, 아기들은 내 무릎 밑에서 놀고 

내 사랑하는 그이와 나는 다시 아이들을 보았지요.

At fifty once more, babies play round my knee,

Again we know children, my loved one and me.



내게 침울한 날들은 다가왔고, 내 남편은 죽고

내 장래를 바라보며 난 두려움에 몸서리 쳤다오.

Dark days are upon me, my husband is dead,

I look at the future, I shudder with dread.



나의 아이들은 모두 자기들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고

난 내가 가졌던 사랑과 지난 날들을 회상 했지요.

For my young are all rearing young of their own,

And I think of the years and the love that I’ve known.



난 이제 늙은 여자, 현실은 잔혹하고

이 조롱거리 늙은이를 어리석게 만들지요.

I’m now an old woman and nature is cruel:

‘tis jest to make old age look like a fool. 



몸은 망가지고 우아함과 활기는 떠나, 

한때 심장이 있던곳은 이제 돌이 되었다오.

The body, it crumbles, grace and vigor depart,

There is now a stone where I once had a heart.



이 늙은 시체속에는 어린 소녀 아직도 살아 있고

지금 그리고 다시, 찌그러진 이 가슴 부풀어 온다오.

But inside this old carcass a young girl still dwells, 

And now and again, my battered heart swells.



즐거웠던 일들 기억하고 아팠던 때를 기억하며, 

나는 사랑하고 인생을 또 다시 살아 간다오.

I remember the joys, I remember the pain,

And I’m loving and living life over again.


너무나 짧고 빨리 지나간 지난날을 생각하며

아무것도 영원할수 없는 사실을 받아 들였다오.

I think of the years all too few, gone too fast,

And accept the stark fact that nothing can last.


그러니 눈을 뜨세요, 사람들, 눈을 뜨고 보세요.

투정부리는 늙은이로 보지말고; 가까이서 “나”를 보세요!!

So open your eyes, people, open and see,

Not a crabby old woman; look closer. see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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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기에 앞서, 이 게시물은 입문자용 입니다.  클래식을 입문하는데 있어서 모음집을 많이
건네주지만,  전 좀 다른 입장이라서 제대로 된 앨범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피아노 독주곡위주로  소개합니다.

"제대로 된 좋은 연주가의 좋은 음반 위주로 소개합니다"

또한 다른 음반을 초보자에게 추천하시고 싶은 분은 댓글로 부탁드립니다.
정말 환영합니다.

유튜브 링크라던가, 아니면 자켓 사진이라던가, 정도만 추가해줘도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럼 시작할께요. 









이건 첫번째 녹음 후입니다. 앨범은 2 번째 녹음입니다.


*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변주곡. Bach Goldberg Variationos / Andras Schiff *

1742년 "클라비어 연습곡" 제4권으로 출판된 작품으로 바흐 자신이 붙인 제목은 "2단 건반 클라비쳄발로를 위한 아리아와 변주곡들"이지만, 흔히 바흐의 제자였다는 골드베르크와의 얽힌 일화에 의해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 불린다.

그 일화인즉슨, 바흐에게 제자인 골드베르크에게 작센의 영주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주 러시아 대사였던 카이저링 공작이아 씨바 잠이 안온다. 나 잠오게 곡좀 써다오.라고 청탁을 했는데 골드베르크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내도 도무지기 카이저링 공작의 불면증을 고칠만한 곡이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골드베르크는 스승에게 찾아가서 " 헬프미 "를 외쳤고 바흐가 친히 제자를 위해서 아리아와 30곡의 변주곡으로 구성된 이 곡을 써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화는 사실성에 의혹을 받고 있다. 이 곡이 출판될 당시에 골드베르크의 나이가 불과 14살에 불과했다는게 알려지면서 과연 14살 소년에게 불면증을 고칠 음악을 청탁하는 귀족이 있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 

게다가 이 곡의 난이도가 보통 이상인 탓에 웬만한 건반 악기 연주자가 아니고서는 연주가 힘들다는 점도 이 일화의 신빙성을 의심받게 하는 요인이다.

바흐 자신의 제목에서도 알수 있듯이 원래 피아노가 나오기 이전의 건반악기였던 클라비쳄발로를 위한 작품이라 바흐에 대한 재평가 붐이 일었던 19세기에도 이 작품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20세기에 이르러 쳄발로를 복원한 모던 쳄발로가 등장하면서 쳄발로를 위한 연주곡들이 발굴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도 주목을 받게 되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쳄발로 연주자인 반다 란도프스카가 쳄발로로 연주한 녹음이 대표적인 녹음으로 알려졌었다.

이것을 뒤집었던 것이 글렌 굴드로, 굴드는 1955년 이 곡을 피아노로 연주해서 녹음하려 했다. 음반사는 여기에 반대했지만 굴드의 고집을 꺾지 못해 결국 녹음을 하게 되었는데 크게 히트를 치게 되었고 

골드베르크 변주곡 하면 다들 먼저 굴드를 떠올릴 정도가 되었다. 굴드도 이 곡에 애착이 있었던지 같은곡을 두번 녹음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1981년에 다시 재녹음을 하기도 했다.

건반악기 연주 외에 여러 형태의 편곡도 있다. 러시아 출신의 영국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 드미트리 시트코베츠키는 1980년대 초반에 현악 3중주를 위한 편곡을 만들었는데, 이후 현악 합주를 위한 편곡판도 발표했다. 후자의 경우 2단 건반을 가진 하프시코드 특유의 구조를 반영해 전후반의 아리아와 1단 만으로 연주하는 변주들은 단촐한 현악 5중주 편성으로, 1단과 2단을 모두 사용하는 변주들은 좀 더 풍성한 울림의 현악 합주로 연주하도록 했다.

여러가지로 보았을때 디트리히 북스테후데의 "라 카프리치오사" 주제에 의한 32개의 변주곡과 유사한 측면이 있는데 아리아가 g장조로 시작한다는점, 변주곡의 개수가 30개라는 점에서 북스테후데를 참조한것으로 보인다.

워낙 유명한 음악이라 대중문화에서도 자주 활용된다. 

1.영화 양들의 침묵에서는 한니발 렉터가 경관을 죽일때 이 곡의 아리아 부분이 흘렀고

2.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는 제1변주가 여러번 흘러 나온다. 

3. 그 남자! 그 여자!의 애니메이션 판에서 주인공 커플이 첫 섹스를 할 때도 아리아가 배경음악으로 나온다. 

4. 한편 게임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2편의 위저드 성 배경음악은 제1변주를 변형한 곡이다. 

5. 드라마 눈의 여왕에서는 한태웅(현빈)이 죽은 친구 정규를 그리워하며 간혹 듣던 곡이다. 정규가 가장 좋아했던 곡으로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6.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13년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는 아예 굴드의 연주로 엔딩 크레딧에 흘러나오고, 작품 여기저기에서도 연주된다.

from 엔하위키

클래식을 접하려는 분은 글드를 피하시고 시프를 들으시는것을 추천합니다. 결국 나중에는 시프를 더 듣게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시프도 2 번을 녹음했느느데요. 이 음반은 2 번째 녹음으로 머리가 백발이 된 외모 만큼이나 성숙함이 묻어나오는 연주입니다. 골드베르그의 최고의 연주중 하나임이 틀림없습니다.
(사실 굴드는 여기 게시다보면 1 주일에 한번씩 올라옵니다. 쉬프도 자주 올라오지만 굴드가 가장 자주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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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youtu.be/jL2lFqo_b0c
미드나잇~~ 블루~~~~ 하는 그 노래
비창

이 소나타는 베토벤 자신이 "비창적 대 소나타(Grande Sonate pathetique)"라고 명명한 작품이다. 처음 듣는 순간부터 곡이 끝날 때 까지 한 순간도 귀를 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8번 소나타의 작곡양식 자체가 대단히 충격적인 것이다.8번 소나타는 그의 모든 작품들 중에서 가장 호모포닉(단선율을 위주로하는 화성진행)한 곡이다. 선율은 명쾌하고 왼손의 반주도 극히 단순하다. 두터운 화음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곡의 구성이 너무나 극적이고, 맹렬한 분위기와 감미로운 노래, 연주하는데 필요로 하는 기교를 훨씬 상회하는 압도적인 연주효과로 인해 극히 산뜻한 효과를 얻어 내었고 나아가 대중적인 인기까지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8번 소나타가 파격적이라고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작곡양식의 변화가 아니고 1악장의 제시부 앞에 커다란 서주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가장 느린 속도를 지시하는 Grave라는 악상기호와 곡을 개시하는 c단조의 으뜸화음은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이 곡의 제목인 '비창 (혹은 비애)'라는 말은 이 서주의 분위기에 의한 것이다. 서주는 점차 고조되어 오른손의 레치타티보, 빠르게 하강하는 선율로 변화하면서 Allegro di molto e con brio의 소나타형식 제시부로 돌입하게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서주의 재료가 소나타형식의 발전부와 코다에 다시 등장한다는 점이다. 왼손의 맹렬한 트레몰로를 타고 등장하는 1주제는 그 예가 없을정도로 공격적이며, 이 주제를 발전시키는 과정은 더욱 극적이다. 2주제는 1주제의 분위기와 대조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한 긴장감을 가지고 있으며, 정석대로라면 C단조의 관계장조인 E-flat장조로 작곡되어야 하지만 e-flat단조를 취해 어두운 느낌을 지속시키고 있어 소나타 작곡양식의 전형적인 형태를 조금 벗어나 있다. 하지만 2주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결국 E-flat장조가 나타나게 된다. 곡의 마무리부분에 다시 서주의 주제가 등장하고 제 1주제만을 이용해 악장을 끝맺는다.

2악장은 전형적인 가요 형식의 악장으로 나른하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인상적이다. A-B-A의 전형적인 세도막형식, 주제의 멜로디는 대중음악에서도 자주 인용하는 친근한 것이다.3악장 역시 전형적인 론도이다. A-B-A-C-A-B-A-coda라는 명확하고 교과서적인 론도이며 첫 악장과 같은 조성이지만 어둡고 비극적인 느낌은 찾아볼 수 없다. 선율은 어떤 것이나 쉽고, 화성적으로 교묘한 지연(delay)이 이루어져있기는 하지만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해도 음악을 감상하는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 from 고클래식)



1악장

    드라마 어느 멋진 날에서 서하늘 (성유리)가 부모의 강권으로 만든 자리인 피아노 독주회에서 연주하다 울면서 뛰쳐나갔을 때 연주하던 곡. 참고로 성유리는 이 곡을 대역 없이 소화하기 위해 한 달동안 이 곡을 연습했다고 한다.


2악장

    일본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주인공 노다메가 치는 곡이기도 하다. 노다메의 연주를 듣고 치아키가 흥미를 가지게 된다.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 폐기물 13호에서 폐기물 13호를 유도하는 카세트 테이프의 음악으로 쓰였다.
    메모리즈 오프 2nd에서 시라카와 호타루가 피아노로 연주하는 곡 중 하나로 등장한다.
    공지영과 츠지 히토나리의 소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에서 둘이 서로 사랑했던 추억을 상징하는 소재로 중요하게 언급된다. 작가 양반들이 소설의 영상화를 노린 듯 하지만 냉정과 열정 사이 때문에 안 될거야
 
   각종 대중가요 샘플링
        휘성 - 사랑은 맛있다
        7공주 - 소중한 사랑
        마리아 - 내 영혼을 그대에게 (Feat. G.고릴라)
        Louise Turker - Midnight Blue
        Key's Piano - Remember
        J-walk - 일년째 프로포즈
        Chen Min - Phoenix
        Noela - Happiness
        Joseph McManners - Music of the Angels
        스즈키 아이 - そっと。


3악장

    그 유명한 베토벤 바이러스의 원곡이다.
    동방 프로젝트에서 레밀리아 스칼렛의 BGM인 죽은 왕녀를 위한 셉텟[1]이 이 곡의 편곡이다.
    홍성흔 선수가 롯데 자이언츠에서 뛰던 시절, 이 소나타를 빠른 리듬으로 변형한 음악을 타석에 등장할 때 사용하였다.


 출처:엔하위키미러




월광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곡 중 이른바 <3대 소나타(8번 비창, 14번 월광, 23번 열정)>로 손꼽히는 세 작품 중의 하나이다.

'월광(月光, Moonlight)소나타'는 별칭이고, 원제는 피아노 소나타 14번 c#단조 "환상곡풍으로(Quasi una fantasia)", 작품번호 27의 2이다. 이 표제는 같은 해에 작곡된 피아노 소나타 제13번 E#장조(작품번호 27의 1)도 함께 붙어 있는데, 낭만파의 몽상적인 것이 아닌 즉흥적인 성격을 지님으로서 당시의 소나타 형식을 타파한 새로운 작품으로 알려져 있고 많은 음악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

    1악장 (올림 다단조): 음을 끌면서 매우 느리게 (2악장 속행), Adagio sostenuto (attacca)
    2악장 (내림 라장조): 조금 빠르게, Allegretto
    3악장 (올림 다단조): 매우 빠르고 격렬하게, Presto agitato

1801년에 작곡되어 애인 줄리에타 귀치아르디에게 선물로 주었다. 작곡 배경에 대해서는 음악을 사랑하는 눈먼 처녀를 위해서, 빈 교외 귀족의 저택에서 달빛에 감동하여, 연인에 대한 이별의 편지로 작곡한 곡이라는 등의 일화가 붙어 있다. 그러나 '월광'이라는 이름은 베를린의 음악평론가 렐슈타프[1]가 베토벤 사후에 "제1악장의 분위기가 스위스 루체른 호수의 달빛과 같다" 하여 붙인 것이다. 즉, "월광"이라는 제목과 베토벤의 개인적 경험은 관계가 없다.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악장은 단연 1악장. 분위기가 웅장하면서도 비극적인 성향을 띠고 있고 비극적인 대치, 소중한 사람의 죽음, 공포스러운 장면이 나올 때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격한 분위기의 3악장도 그에 못지않게 널리 알려져있으나 1악장에 비하면 콩라인이다. 반면 2악장은 콩라인도 되지 못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공기라인.


2. 이 곡이 쓰인 곳들 

    검은방 - 오프닝으로 쓰였는데, 1편은 원곡을 사용하였고 2편부터는 약간 어레인지화 시켰다.
    공익광고협의회 - 마약추방(2002) 꽤나 공포감이 드는 광고다.
    노다메 칸타빌레 애니메이션 - 갈등상황등에서 많이 쓰인다.
    리듬스타
    리턴 투 캐슬 울펜슈타인 - Assult 맵에서 벌어지는 멀티플레이 미션의 총탄과 수류탄이 작렬하는 어두운 전장을 배경으로 1악장이 계속 반복되면서 흐른다.
    메탈 맥스 4 월광의 디바
    명탐정 코난 - 월광소나타 살인사건
    바이오하자드 1편 - 질 발렌타인이 피아노 연습으로 쳤다.
    드라마 카이스트 - 호러 컨셉의 에피소드인 <초대받지 않은 손님> 편에 이은주(구지원 역)의 어린 시절 환영이 끊임없이 연주하는 곡으로 등장한다.
    어스웜 짐 2편
    크라잉 넛 2집 수록곡인 '다죽자' - 도입부에서 멀쩡하게 이 곡을 치다가 건반을 한꺼번에 눌러서 불협화음을 내버린 다음에 본 곡으로 넘어간다,
    크림슨 타이드 - 램지 함장이 부장 후보인 헌터 소령을 면접할 때 배경음악으로 쓰였다.
    테그저
    파이어 호크
    Sweetbox - 'Don't Push Me'에서 빠른 비트로 연주된 이 곡이 샘플링되었다. 이 노래는 이효리 돼지바 CF나 여러 예능 프로그램의 댄스 타임 단골 BGM으로 널리 애용되었다.
    K-19 - 함내 방송으로 연주되면서 함내 승무원들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원자로 냉각수 파이프가 파열되는 장면과 함께 제1악장이 끝난다.


출처 엔하위키미러



열정 소나타

베토벤의 모든 피아노 소나타가운데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반면 그 내용이 쉽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어서 처음 베토벤의 소나타를 접하는 사람에게 있어 8번이나 14번처럼 빨리 친해질 수 있는 곡도 아니다.이 곡은 연주하기도 무척 어렵다. 이 곡을 칠 때는 건반도 별나게 무겁게 느껴지고(느낌만이 아닌 것 같다) 요구되는 손가락 기교도 상당히 고도의 것이다. 1악장과 3악장의 폭발하는 듯 한 코다는 상당한 팔힘을 필요로 하며 무엇보다 이 곡이 가지고 있는 불타는 듯한 에너지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정말 고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이 곡을 연주해낼수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할 정도로 이 소나타는 훌륭하다. 연주하는 사람에게나 듣는 사람에게나 금욕적일 정도의 마음가짐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고클래식



연주자 Freddy Kempf 는 나중에 특집으로 따로 다루겠습니다.
좋은 연주자임이 틀림 없습니다.
21세기 호로비츠라는 엄청난 연주자입니다.
한국에 또와주세요.ㅠ.ㅠ 꼭갈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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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은 루빈스타인입니다. 본문의 연주자와 다른 사람입니다.



쇼팽

1810년 3월 1일 생으로 알려졌으나, 젤라조바 볼라 마을의 성당 기록에는 2월 22일에 유아세례를 받은걸로 나와있기 때문에 아마 실제 생일은 2월 중인걸로 보인다. 아버지는 프랑스인으로 폴란드에 와서 귀족의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원래 귀족이었지만 집안이 몰락하여 다른 귀족의 집안에서 일하던중 가정교사와 만나 결혼하게 된 사이였다.

쇼팽은 위로 누나 셋이 있었고 아버지를 제외하면 집안에 남자는 쇼팽 한사람뿐이었다. 이런 환경은 쇼팽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 남성임에도 어딘지 모르게 섬세하고 연약해보이는 쇼팽의 기질과 스타일이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볼수있다.

어릴때부터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으며 7살때는 두개의 폴로네이즈를 작곡할 정도였다. 어린 쇼팽의 재능은 바르샤바의 귀족들에게 까지 알려져 그들 앞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하도 잘쳤는지 그 당시 폴란드 언론은, "천재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만 태어나는줄 알았지만 우리나라에도 드디어 천재가 태어났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것은 1816년으로 지브니라는 피아니스트에게 배우게 되었다.지브니는 보드카 중독자에 엄청난 꼴초였지만 쇼팽의 첫연주를 듣자마자 그를 천재로 보고 의욕적으로 가르쳐주게 되었다. 훗날 쇼팽이 말하기를 "지브니 선생님 앞이라면 노새도 천재가 될껍니다."라고 했었을 정도. 1818년에 기로체프의 협주곡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쇼팽을 보고 지브니는 더이상 가르칠게 없다면서 쇼팽이 자유롭게 성장하도록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이후 1822년, 바르샤바 음악원의 창설자인 엘스너에게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우게 되고 중학생때는 러시아 황제앞에서 연주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후 피아니스트 뷔르너를 사사하며 바르샤바 음악원을 다녔다. 바르샤바 음악원을 졸업한 후, 1828~29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면서 음악의 중심지인 빈으로 가서 피아니스트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다.

1830년 다시 한 번 빈에 간다. 이 때 그를 위한 고별 연주회에 그가 연모했던 콘스탄티아 그라도코프스카가 찬조 출연하는데 사실 그가 빈에 유학가는 이유는 그녀에게 고백하지 못하자 고민 끝에 그녀가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라는데 그대로 믿긴 좀 어렵고 아마 부가적인 이유가 아닐까 싶다. 쇼팽이 무슨 3류 순정만화 주인공도 아니고 그의 곡 중 에튀드 3번 '이별의 곡'과 협주곡 1,2번은 사실 그녀를 위해 작곡한 곡이라는 소문이 있다.

빈에 다시 한번 가서 카를 체르니, 훔멜등과 교류했지만 빈의 청중들은 쇼팽에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던중 폴란드에서 러시아에 대항해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빈을 떠나 슈트트가르트에 도착했을때 러시아군의 잔혹한 진압으로 혁명이 실패로 끝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때 겪은 분노와 조국과 집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등이 뒤엉켜서 쓰게된 곡이 에튀드 "혁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쇼팽은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그러나 파리에서도 신통치 않은 결과만을 얻었고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불리던자칭 칼크브렌너에게 피아노를 더 배울까 생각했지만 칼크브렌너의 피상적인 연주 스타일이 쇼팽의 개성을 상실할까 우려한 친구 프란츠 리스트와 펠릭스 멘델스존, 힐러 등이 만류하였고, 3년이나 배워야 한다는 말에 그만두게 되었다.

파리에서도 별 소득이 없자 쇼팽은 미국으로 건너갈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약 파리 길거리에서 고향의 귀족을 만나지 못했다면 쇼팽은 미국으로 건너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향 귀족을 만난 일로 귀족들과 당대 유명인사들이 드나드는 살롱에 소개되었고 살롱에서의 연주회로 호평을 받아 쇼팽은 파리에 정착하기로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후대에 널리 알려진 많은 피아노곡을 작곡하게 되었다. 쇼팽은 꽤나 베스트 드레서였다고 하며명품중독자였으며 이따금씩 건반에 피아노 헝겊을 덮고 연주를 하는 묘기도 보여주었다고 한다.(하지만 본인은 이런걸 별로 좋아하진 않았다고도 한다.)

1836년, 드레스덴을 여행하던중 바르샤바에서 사귀었던 여자친구 마리아 보진스카와 다시 만나게 된 쇼팽은 보진스카와 비밀리에 약혼했지만 쇼팽의 건강이 나쁜것을 눈치챈 보진스카 주변의 반대로 결국 파혼하고 만다.

이후 마리아 다구백작부인이 주최한 파티에서 당대 화제의 인물이었던 여류 소설가 조르주 상드(1804~1876)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사랑에 빠져 수년간 그녀와 연인이 된다.상드는 그 시대에 성공한 소설가로, 여성인권옹호자였으며, 남자처럼 차려입고 살롱에 출입하며, 남편 외에도 많은 남자들과 염문을 벌인 여러가지 일로 화제가 되던 인물이었는데 보수적인 성향이 있던 쇼팽은 그런 상드의 보이쉬함을 보고 처음에는 혐오했지만 점점 그녀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병으로 인해 성적인 능력은 상실한 쇼팽이었지만 상드의 모성애적인 돌봄으로 그녀와의 관계는 약 10여년간 유지되었다.

쇼팽의 건강이 좋지 않자, 쇼팽과 상드는 요양차 1838년 지중해의 마요르카섬으로 가게 된다. 버려진 발데모사 수도원 근처의 오두막집에서 보냈는데 하필 그곳에 유례없는 추위가 몰려온 탓에(...) 쇼팽의 건강은 더 악화되고 말았다. 오두막의 환경이 최악으로 지하실 내지 다락을 방불케 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사육제에 코스튬을 한 사람들을 보고 진짜로 몬스터로 착각할 정도. 그런 중에도 쇼팽은 파리에서 마요르카까지 피아노를 옮겨와 수도원에서 피아노를 치며 작곡을 했다.

그러나 상드와의 관계는 점점 악화된다. 자유분방한 상드는 쇼팽과의 연애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타인들의 시선을 무시했지만 쇼팽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쇼팽의 건강이 악화되고 상드의 큰 딸 결혼문제를 둘러싸고 두 사람은 크게 다투게 되었다. 결국 상드는 쇼팽을 떠났고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나고 만다.

파리에서의 쇼팽의 입지도 많이 좁아져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사정이 좋지 않아 쇼팽은 제자의 초청을 받아 영국과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가게된다. 그러나 영국에서도 쇼팽은 큰 굴욕을 당해야만 했다. 영국 왕과 귀족,명사들이 참석한 파티에서 연주를 하게 되었지만 쇼팽 혼자 어두운 옆방에서 연주해야 했고 왕과 귀족들은 쇼팽의 연주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쇼팽 정도의 음악가가 한마디로 배경음악 취급을 받은 굴욕을 당한 셈이다.

더욱이 영국의 기후는 쇼팽에겐 치명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팽은 런던에서 어렵게 사는 폴란드인들을 위해 열린 자선연주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파리로 돌아온 쇼팽은 개인교수말고는 일체 다른 연주활동도 못할만큼 중병에 걸려있었다. 침대에서 화장실까지 가는것도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면도와 옷매무새만큼은 단정히 했을 정도.

결국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결핵 으로 세상을 떠났다. 죽으면서 쇼팽은 "어머니...나의 어머니..."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일각에선 어머니를 조국 폴란드로 해석하기도 한다.

쇼팽의 소망대로 지인들은 쇼팽의 장례식때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연주하려 했지만 쇼팽의 장례식을 치룰 예정이었던 성 마들렌 성당에서 여자가수가 성당안에서 연주할 수 없다라고 반대하여 2주동안 장례가 미뤄졌지만 쇼팽의 간절한 마지막 소원이라는 지인들의 적극적인 설득에 성당측이 양보하여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되는 가운데 쇼팽의 장례식이 치뤄졌다. 쇼팽의 묘에는 쇼팽이 폴란드를 떠나기 전 은잔에 담아온 폴란드의 흙이 뿌려졌고,후에 쇼팽의 심장은 바르샤바로 보내져 바르샤바의 성당에 안치되었다. 이 부분은 11월 30일자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뤘다.


3. 음악 성향 

쇼팽은 일평생 거의 피아노를 위한 곡만을 작곡했다. 물론 가곡이나 다른 악기의 솔로 곡 같은 다른 장르의 작품도 있긴 하지만 피아노곡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당대는 낭만주의 음악의 시대였음에도 쇼팽은 자신의 음악이 낭만주의로 평가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초기에는 몇몇 사람들에겐 낭만주의자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대담한 전조나 그 당시 절대 허용되지 않았다시피 한 불협화음, 기교 등은 그를 음악사에서 완전한 돌연변이로 만들다시피 했고, 심지어 때로는 그를 아마추어 음악가로 오해하고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의 음악은 당시에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을 정도의 음악이어서 그와 비슷한 곡을 작곡한 몇 사람은 쇼팽 사후 쇼팽에겐 불명예스럽겠지만 그와 대등한 명성을 얻기도 했다(대표적으로 고트샬크(가초크)와 스테판 헬러 정도가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엔 낭만주의 작품의 대명사처럼 불리며, 대중들이 가장 잘 아는 낭만주의 피아노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다.

그의 작품에선 피아노로 다양한 음색의 창조를 위한 페달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지휘자나 연주자의 재량에 따라 템포를 의도적으로 조금 빠르거나 느린 듯이 연주하는 기법인 루바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으며, 당시 장식음이 대부분 기교적이기만 한 악절 정도로 취급됐다면 쇼팽은 장식음을 기능적으로 사용하여 선율의 하나로서 취급하기도 했다.

동시대의 작곡가이자 쇼팽의 동료이기도 했던 리스트의 음악에 비해 난이도 면에서는 왠지 모르게 어렵다는 평가를 하지 않는 듯하지만 피아노를 치다가 피아노를 박살내고싶을정도로 "애매하게" "왠지모르게" 어려운 페시지가 눈에 엄청 자주 띈다. 리스트와는 다르게 왠지 어렵게 들리지는 않으나 상당히 어려운 곡들이 많다. 이유를 따지기에 먼저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리스트의 작곡 스타일 자체가 웅장한 효과, 화려함만을 부각시키기 위한 악절들을 상당히 많이 썼다. 즉 나쁘게 말하자면 곡 전체에 있어서 안 써도 될 부분을 남발했다는 점이다. 쇼팽은 그런 악절들을 거의 쓰지 않았고 기교 자체를 중시하는게 아니라 내용적인 측면에서 기교적인 악절을 단순히 도구로 취급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리스트보단 기교적인 효과를 중시하는 악절들이 상대적으로 눈에 덜 띄거나, 어떤 부분은 단순하게 봐선 어려운 악절인지 아닌지 파악하기 어렵게도 쓰여있다. 그런 면에서 슈만이나 쇼팽의 몇몇 곡들은 리스트보다 훨씬 치기 어려운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단지 악보를 읽고 손놀리는 부분을 익히는 데에서만 어려움을 느끼는 것으로 테크닉적인 난이도를 평가하는건 절대 금물이다.


4. 쇼팽이 피아노사에 있어서 가졌던 그의 업적

그는 작곡 면에서는 베버 등의 영향을 받았을 진 몰라도 피아니스트적인 면(기교적인 부분으로도 해석가능함)에서는 그는 누구의 도움도 거의 받지 않고 당시 세대의 아무도 상상치 못한 혁신을 일으켰다.

그의 에튀드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의 곡과는 거의 완전히 다른 기법과 기교를 넣어 구세대식 교육을 받긴 했지만 훌륭한 예술가였던 모셀레스는 한 때 그의 에튀드를 쳐보곤'기교적으로 어렵고 비예술적인 부분에서 나의 손가락은 돌아가지 않았다.'라고 썼다.
그러나 쇼팽은 그의 곡을 자신이 직접 연주하면서 악기로서의 피아노 연주방식을 고려하지 않아 불가능해 보이는 부분과 비예술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어떤 식으로 가능하게 연주할 수 있고 비예술적인 부분이 아니라는걸 증명해 보였고,  슈만 같은 훌륭한 음악가들이 그의 음악의 우수성을 끊임없이 주장하면서 평론가와 음악가들은 서서히 돌아섰고, 이 후 그가 완성하고 제시한 테크닉은 리스트에 의해 보급되고 향상되어 금세 낭만주의의 중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드뷔시와 프로코피예프가 등장하기 전까지 피아노 기교와 페달링 면에서는 본질적인 혁신은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쇼팽에 의해 거의 피아노에 의한 모든 근본적인 것들이 정립되었다.

출처 엔하위키


Andrzej Wasowski 의 녹턴은 당대의 어떤 피아니스트의 녹턴에 뒤지지 않는
절대 서정성을 가진 녹음입니다.
손수건을 준비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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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영상은 다른분이에요. 곡이 더 중요해서 곡위주로 올립니다.

모차르트 터키행진곡 K .331 

원제는 '피아노 소나타 11번 A장조 3악장 KV 331'이고, 별명인 '터키 행진곡'은 지시어 Rondo Alla Turca(터키풍으로)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터키란 익히 알려진 그 터키가 아니고 오스만 제국 전반을 일컬으며, 당시 유행하던 예니체리 군단의 행진이 모티브이다. 1990년대 후반에 코레일 수도권 전철의 종착역 안내방송 배경음악으로 쓰인 적이 있다. 
그외에 정말 엄청나게 여기 저기 쓰인곡 3 악장을 들으면 바로 알 수 있다.




반짝반짝 작은별  K.265
(아 어머니께 말씀 드릴께요)

연주여행을 다니던 모차르트가 1778년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의 민요인 이 노래를 듣고 이 노래의 멜로디를 바탕으로 12곡으로 이루어진 변주곡을 작곡한것이다.

그런데 모차르트가 이 변주곡을 작곡하면서 멜로디가 유명해졌고 영어권의 동시 반짝반짝 작은 별이 이 변주곡의 주제가 되는 멜로디에 동시를 가사로 붙이면서 동아시아에는 반짝반짝 작은별 변주곡, 혹은 작은별 변주곡으로 알려지게 된것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모차르트의 페이크곡 중 하나로, 듣기엔 "아 이거 뭐 쉽네" 싶지만 실제로 쳐보면 만만치 않다. 변주곡이 원래 간단한 멜로디에서 출발해서 온갖 기교를 더해 복잡하게 전개되는 것인 만큼 이 곡도 멜로디는 단순하지만 테마를 바탕으로 다양하고 복잡하게 전개되어 나가는 게 백미라고 할 수 있다. 특히 6변주는 왼손 연습이 충분히 되어 있지 않으면 와장창!!하게 된다


출처 엔하위키

Kristian Bezuidenhout 의 포르테 피아노로 듣는 모차르트는 현대의 피아노보다 더 모차르트
본연의 느낌을 잘 전달해준다고 할 수 있어요.
보통 포르테 피아노는 먼가 좀 답답한 면이 있는데
그런 부분을 싸그리 날려버리는 하모니아문디의 녹음과 그의 실력이 돋 보입니다.
한마디로 짱 좋은 앨범
기회가 된다면 나머지 앨범도 소개할게요.


Mozart Keyboard Music Vol. 5 and 6.jpg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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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하나때문에 올린 입문자용 피아노 솔로곡 게시물이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좀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이왕 시작한거
하루에 한 종류씩 하기로 했어요.
1 주일정도 걸릴듯 합니다.응원 부탁해요.^^
그럼 시작 할께요.^^


바흐 바이올린 협주곡 무터 & 아카르도


 Johann Sebastian Bach - Violin Concertos & Two Violin concertos

바흐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은 

쾨텐 궁정에서 머물며 음악 활동을 하던 1717년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1723년에 완성한 작품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이 노래는 쉽게 말하면 

"돌림노래를 바이올린으로 한겁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로 천상의 소린인것이. 선율이 기가 막히게 아름답고 바흐의
2성부 3 성부따위는 상관없이
귀를 후벼파고 애간장을 녹여 놉니다.

1042 협주곡 3 악장은 영화 러브 스토리에서
여주인공이 리허설 하는 장면에 나옵니다.
러브 스토리 참 좋은 영홥니다. 다시 봅시다!

그 이외에도 바흐의 협주곡은 여기 저기 쓰였습니다.

1041 은 레오폴드경이 이태리 여행을 갔다와서는
해외 물 먹었다고 재면서
바흐한테 "야.. 이태리는 이런게 유행인데 말이야"
해서 작곡한 거라서
선율이 이태리풍이고 비발디 냄새가 납니다.

차후 바흐는 이걸 1058 쳄발로 협주곡으로 편곡했음.



소피무터가 정말 파릇 했을 무렵 20 세기의 파가니니라는
초절정 기교파 아카르도와 함께한 이녹음은
저한테 큰 의미가 있는 앨범입니다.

어쩌든 이 음악의 녹음중에서 최고중에 하나임을 보증합니다.
사실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걸 올릴까?  딴걸 올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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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Patricia Kopatchinskaya



아..도대체 바이올린은 언제 나오나요?
~~~~~~~~~~~~~~~~~~~~~~
~~~~~~~ 
(밥먹고 이빨 딱고 누워서 티비좀 보다 일어나면)

꼬물 꼬물 꼬물...... 시작하는 바이올린 연주. 바로 그 협주곡


Beethoven Violin Concerto 

베토벤이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을 하나밖에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쉬운 지점이기도 합니다. 바로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61>입니다. 베토벤은 피아노 협주곡을 다섯 곡 썼지만, 
바이올린 협주곡으로는 오늘 들을 D장조 협주곡이 유일합니다.

하지만 이 하나뿐인 협주곡은 풍부한 서정미와 우아한 품격을 두루 갖춘, 연주시간 약 45분에 달하는 대곡입니다. 게다가 독주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의 주고받음이 그야말로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 팽팽한 대치야말로 베토벤 중기 협주곡들에서 나타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요. 베토벤은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를 완성하기 직전에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썼고, 그 다음 협주곡으로는 ‘황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피아노 협주곡 5번을 작곡했습니다. 특히 우리는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와 피아노 협주곡 ‘황제’에서 독주악기의 ‘영웅성’과 대면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곡에서 독주악기는 마치 작곡가(베토벤)의 분신이기라도 하듯이 ‘거대한 어떤 것’에 저항하고 투쟁합니다. 그것은 체제일 수도 있고 운명일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마침내 베토벤 음악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드라마틱한 장관이 펼쳐집니다.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던 때는 베토벤이 서른여섯 살이던 1806년입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점령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베토벤은 그 해 가을, 자신의 후원자인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집에 잠시 머물고 있었지요. 어느 날 공작이 점령군들을 위한 파티와 연주회를 준비했는데, 그날 연주회에는 당연히 베토벤의 연주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토벤은 연주할 시간을 얼마 앞두고 사라졌습니다.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베토벤은 리히노프스키에게 이런 편지를 남겼지요. “당신이 공작일 수 있는 것은 가문과 우연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의 힘으로 이뤄졌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리고 미래에도, 수많은 공작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베토벤은 오직 나 한 명뿐입니다.”

초연은 같은 해 12월 23일, 안 데어 빈 극장에서 열렸습니다. 프란츠 클레멘트(1780~1842)라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회였는데, 베토벤은 연주회 직전에야 독주 파트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클레멘트는 이 곡을 연습 없이 초견 연주했다고 전해집니다. 한데 그날 이후에 베토벤의 이 곡은 거의 연주되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는 유례없이 긴 1악장을 연주자들이 부담스러워 했기 때문이라는 것. 또 하나는 베토벤 이후 낭만주의가 본격화하면서 파가니니 풍의 화려한 기교적 연주가 유행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바이올리니스트가 이 곡을 연주하기는 결코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중에게 신들린 듯한 기교를 보여줄 만한 패시지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가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는 겉으로 드러나는 테크닉의 화려함보다는 내면적인 고상함을 느끼게 하는 곡입니다. 아울러 매우 격조 있는 서정성이 물결치는 곡입니다. 세월이 거의 40년쯤 흐른 뒤에, 브람스의 막역한 친구였던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1831~1907)이 이 곡의 진정한 가치를 음악사에 아로새기게 됩니다.

출처: 채널예스 문학수님



Naive 의 신예 Patricia Kopatchinskaya 의 베토벤은
그 무거움과 고뇌속에 화려함과 영롱함을
섞어놓은 수준높은 연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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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고 바딤레핀



아마도 혈액형이 트리플 A 였을 소심남 브람스의
천재적인 협주곡. 브람스는 곡을 내 놓기 전에
남에게 평가받는것을 극도로 두려워해서
벌벌 떨면서 수천번을 다시 작업하는 극 소심한 사람 이었습니다.

아마 그가 좀만 대범했으면 베토벤을 능가하는 다작을
내놓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하지만 그렌 굴드가 말했듯이

"브람스 음악은 섹쉬합니다"

Brahms Violin concero & double Concerto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 작품77은 1878년 작곡된 것으로, 브람스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단 1곡밖에 작곡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곡은 베토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동렬에 서서 고금의 3대 협주곡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바이올린의 대가 요아힘의 유익한 조언도 주효하여, 바이올린 연주의 기교도 무리없이 쓰여지며, 전통적인 3악장 형식을 취하고, 고전적인 충실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내용적으로도 철저하게 파내려간 깊이와 밀도가 있는 작품으로서, 원숙하고 참된 브람스의 모습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Vadim Repin 의 브람스는 정말 훌륭합니다.
워낙 전체적인 완성도 자체를 높이기가 힘든곡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연주가 이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게 해 주고 있습니다.
명반의 반열에 오르겠군요.
커플링된 더블 협주곡도 중요한 협주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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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흐 바이올린 협주곡 1 번 정경화


너무 훌륭한 곡을 작곡한 나머지 그 곡에 평생 갇혀 산 비운의 작곡가

Bruch : Violin concerto

브루흐는 일생동안 3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남기고 있는데, 그 중 이 바이올린 제1번이 그의 대표적인 걸작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명인 아우어는 이 곡이 많은 사람들에게 애호되고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우선 선율이 독창적이고, 기교적인 면에서 쉽지는 않으나 결코 무리가 없는 특성이 독주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좋아할 만한 연주 효과를 다분히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866년 그의 나이 28세에 작곡한 이 곡은 브루흐가 바라보는 음악적 색깔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낭만적인 정서가 곡 전체를 끈적끈적하게 맴도는데 바로 우수에 찬 듯 하면서도 로맨틱한 분위기는 브루흐 음악만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음악의 친화력이 멜로디의 아름다움에서 시작된다고 보았고 이 곡은 이러한 특성이 더욱 두드러진 작품이다. 19세기 후반 독일에서 가장 위대한 오라토리오 작곡가로서 주로 그의 합창 작품으로 전 유럽에 명성이 자자했던 브루흐는 멘델스존의 영향을 많이 받아 멘델스존의 독특한 낭만적이고 자유스러운 스타일을 따르고 있다.

브루흐는 19세 때 명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하임의 연주회에서 충격을 받고 영감을 얻게 된다. 당시 젊은 브루흐는 이 헝가리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를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작품을 쓰기로 결심하고 작곡에 착수한 지 9년 만에 이 협주곡을 완성한다. 이렇게 탄생한 이 작품은 브루흐 자신의 지휘와 오토 폰 슬뢰프의 독주로 초연했지만 결과가 썩 만족스럽지 못해 브루흐는 당대 최고 바이올린니스트 요하임의 조언을 받아 수정판을 내면서 요하임에게 헌정하였고 2년 후 그의 독주로 초연하여 성공하게 된다.

82세에 세상을 떠난 브루흐는 평생 이 곡과 유사한 곡을 써달라는 요청에 시달려야 했는데 이렇게 한 작품에 작곡가가 가려진 현상은 안타까울 뿐이다. 어느 날 브루흐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들은 내게 `바이올린협주곡 1번'을 외치고 있어. 마치 내가 작곡한 바이올린협주곡이 그것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난 그런 인간들의 타령에 미칠 지경이야. 내겐 바이올린협주곡 제2번, 제3번도 제1번만큼 훌륭한데 말이지.”하고 불평했다. 그러나 그는 죽는 순간까지 바이올린협주곡 제1번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조국이 패전하는 것과 새로운 조류 음악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교향곡〉이 초연되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실감하였다. 사실 브루흐는 이 바이올린협주곡 외에도 협주곡풍의 〈스코틀랜드 환상곡〉, 〈콜 리드라이〉 등 그만의 색채가 흠뻑 묻어나는 훌륭한 현악협주곡들이 있다.

협주곡의 구성은 3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제1악장이 전주곡이라 불릴 만큼 일반적인 협주곡의 형식에 비해 자유로운 형식이며, 선율이 감상적이고 달콤하여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출처 : 의사신문



동양의 신비한 마녀에서
바이올린의 여신이 된 한국의 자랑스런 연주가 정경화
브르흐에서는 거의 독보적입니다. 

가슴을 펴고 자랑스러워 해도 좋을 연주.
커플링 스카티쉬 판타지도 대표적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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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스죤 바이올린 협주고 카프콘


시대의 아이돌

엄친아 

 멘델스존의 고뇌와 슬픔이 가득한

mendelssohn Violin Concerto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협주곡이 되다.

멘델스존이 지휘를 맡고 있었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악장이었던 바이올리니스트 페르디난트 다비트(1810~1873)는 멘델스존의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멘델스존이 그 친구에게 바이올린 협주곡 작곡에 관해 의견을 구한 것은 1838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6년 뒤에 곡을 완성해 페르디난트 다비트에게 헌정.
이듬해 다비트에 의해서 초연 되었습니다.


이이 협주곡은 바이올리니스트라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이곡은 여러 바이올리니스트 들에 의해 자주 연주되는 곡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형식의 세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에는 종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혁신적인 기법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모든악장이 쉼없이 계속 연주되는것등 이 있다.



요즘 잘나가는 capucon 집안의 바이올린연주자 Renaud 매력적인 톤과 불꽃같은 화려함으로

희대의 명곡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커플링된 슈만도 명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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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스죤******************

1. 개요 


성명 야코프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 Bartholdy, 1809년 2월 3일 ~ 1847년 11월 4일). 독일의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로서 초기 낭만파 시대의 음악가이다.

창작성 면에선 모짜르트를 상회한다는 신동이었으며, 요절한 것만 빼면 가장 완벽한 인생의 승리자. 음악으로 대성공해서 부와 명예를 얻은 음악가는 많지만, 멘델스존만큼 환경이 완벽한 음악가는 없었다.

작곡 뿐만 아니라 연주와 지휘도 했다. 당시 유명한 피아노와 오르간 연주자, 지휘자였다고 한다. 자신의 작품 및 다른 작곡자의 작품 모두 지휘했다.

그 밖에도 시나 그림도 꽤 재주가 있었으며, 영어 및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라틴어까지 자유롭게 구사했다. 그리고 잊혀졌던 바흐의 악보를 거액으로 수집하며 바흐의 음악을 다시 재평가하며 알리기도 했다.


2. 모자랄 것 없었던 생애 
북부 독일 함부르크의 명망있는 유태인 집안에서 4남매 중 2째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하였다. 할아버지는 독일 계몽시대의 철학자이자 라이프니츠-볼프학파의 한 사람인 모제스 멘델스존, 아버지는 부유한 은행장. 다만 멘델스존의 부친과 조부는 사이가 소원했는데, 아마도 몇백 년 전 조상 중 한 명이 유태인일 뿐 본인을 독일인으로 보았으며 개신교로 개종하기까지 한 부친과 달리 조부는 유태계 혈통에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두 사람의 각각 자신들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있었다.

어머니는 아마추어 음악가이자 영문학/불문학/이탈리아 문학가. 또한 누이들과도 화목하게 지냈는데, 특히 누나인 파니 멘델스존에게 꽤 의지했다. 커서도 왠지 시스콘 같다. 역시 음악가였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홀대받았다.

여기에 아름다운 아내, 다섯 명의 자녀와 더불어 행복한 결혼 생활까지 누렸던 것을 생각하면, 음악가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었던 행운아였다. 멘델스존 자신의 재능을 제쳐두고서라도 축복받은 인생. 당대 최고의 문호인 괴테가 어린 멘델스존의 천재성을 보고 축복해 주었었다는 점만 봐도, 괴테를 만날 수 있을 만한 집안의 아들, 그리고 빛나는 천재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들의 생일선물로 아버지가 아들이 단장인 악단까지 만들어 주었는데, 당시 음악가들에선 흔치 않은 경우라 질투도 많이 받았다.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면 역시 리하르트 바그너. 여기에 대해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체코 프라하의 루돌피눔 건물 꼭대기에는 헨델, 바흐, 모차르트, 드보르자크 등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등지에 있었던 유명 음악가들의 동상이 있었다.(물론 지금도 있다.) 그런데 나치의 체코 점령 시절, 당시 체코를 담당하였던 체코 총독 대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그 중에 있었던 멘델스존 동상을 보고 유대인 음악가 동상이 있다는 것에 대해 매우 불쾌해하면서 이를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당시 일을 맡았던 인부들이 어느 것이 멘델스존의 동상인지 몰라서 그만 바그너의 동상을 파괴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멘델스존의 동상은 여전히 있지만 바그너의 동상은 그 자리에 없다고. 이렇듯 바그너가 반유태주의라는 오명까지 쓰며 나치의 찬양까지 받았지만, 정작 바그너는 유태인 음악가 레비를 후원하였으며 그가 유대교 신자였음에도 개의치 않았던 점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위에 언급한 바그너의 예 말고도 생전에 열폭 비스무리한 까임을 당한 적이 많았다. 그 예로 '음악이 지나치게 분위기가 밝기만 하고 깊이가 없다', '평범한 음악가들의 생계 문제에 대해 신경쓰지도 않는 거만한 도련님' 등등. 첫 번째는 말 그대로 열폭 수준이고 두 번째도 멘델스존 입장에선 억울한 주장. 왜냐하면 멘델스존 자신은 가난한 연주자들의 복지 문제에 상당히 관심을 가졌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꽤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까임은 유복한 환경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의 성격은 어릴 때부터 안 좋은 쪽으로 남달랐다. 어린 시절 그가 화를 내면 어미니 외에는 아무도 말릴 수 없었으며, 그나마 어머니도 손을 잡고 재우는 방법만이 유일했다라는 이야기가 있으며, 커서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데, 라이프치히 음악학교 교수 재임시절에 그의 제자를 인격적으로 모욕하고, 그것을 낙서해서 동료 교수들과 낄낄거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매우 한정된 사람에게만 사교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다. 즉, 동시대 음악가들한테 부러움의 시샘이 아닌 진짜 미움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천재성은 음악을 작곡하는 것 보다는 독일의 음악적 위상을 높이는 곳에 더 많이 쓰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지도 모르겠다. 라이프치히 음악 학교의 이름이 라이프치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 예술 대학이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 학교의 설립자이자 교수였고, 슈만 등과 함께 경제적으로 어려운 음악가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등 수 많은 일을 했고, 실제로 독일의 음악적 위상은 높아졌다. 당대 트로이카 중 한 명이던 쇼팽에게도 높은 금액의 공연료를 주면서 연주할 기회를 주기도 했다.

이렇듯 많은 업적을 남긴 음악가였지만, 아깝게도 만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죽기 전에는 악화된 건강으로 고생을 했는데, 과로가 건강을 더욱 악화시킨 듯하다. 그 와중에 누나 파니(1805~1847)의 급작스런 죽음이 멘델스존에게 큰 슬픔을 주었고, 이후 6개월이 채 안되어 그 또한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3. 작품세계 
행복한 환경 때문인지, 인생을 사랑하며 사람 친화적인 그의 성격 탓인지, 그는 밝고 아름다운 음악을 많이 작곡했다. 그의 음악은 장르에 따라 성격이 많이 달라지김 하지만 유명한 곡들이 대부분 밝고 표제적이긴 하다. 그의 작품은 선율. 리듬. 화성에서는 고전파 양식을 따랐으나 내용 면에서는 표제적이고 묘사적이라는 낭만파의 특징을 띠면서 대표적 낭만주의 작곡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노래의 날개 위에 (Auf Flügeln des Gesanges, Op. 34-2)
    성악곡 중 가장 잘 알려진 노래 중 하나이다. 가사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
    한여름 밤의 꿈 (Ein Sommernachtstraum) Op. 61
    부수 음악(incidental music). 서곡(Op. 21)만 썼다가 17년 후인 1843년에 완성된다. 결혼행진곡[8]이 이 중 한 곡이다
    핑갈의 동굴 서곡 (Die Fingalshöhle, 정식명칭 '헤브리디스 서곡, Die Hebriden') Op. 26
    멘델스존이 유럽을 여행하던 중 들른 스코틀랜드 헤브라이즈 군도의 핑갈의 동굴에서 깊은 인상을 받고 1830년에 작곡한 연주회용 서곡이다. 표제 음악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겠다라는 식으로, 음악의 풍경화이다. 브람스는 '이런 작품을 쓸 수만 있다면 내 모든 작품을 던져버려도 좋다'고 말했다.
    오라토리오 엘리야 (Elias) Op. 70
    무언가 (無言歌, Lieder ohne Worte)
    멘델스존은 48곡의 무언가(無言歌)를 작곡해 6곡짜리 8권으로 출판했다. '말이 없는 노래'란 뜻처럼 사물과 느낌을 표현하는 노래 같은 피아노 곡이며, 3분을 넘지 않는 짧은 소품이다. 5권(Op. 62) 6번째 곡 "봄 노래(Frühlingslied)"가 가장 유명하다.
    교향곡 3번 a단조 "스코틀랜드" Op. 56
    1842년에 완성된 곡으로, 멘델스존이 스코틀랜드 여행을 갔을 때 영감을 받아 그 때의 느낌을 토대로 작곡했다. 멘델스존 교향곡 중 매우 자주 연주되는 작품이다.
    교향곡 4번 A장조 "이탈리아" Op. 90
    이탈리아를 여행했을 때 느낌을 그린 작품 1833년 초연된 작품으로, 매우 밝고 경쾌한 느낌의 곡이다.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 64
    1844년에 완성된 그의 마지막 대규모 관현악곡. 베토벤, 브람스의 곡과 함께 3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손꼽히며, 바이올린 협주곡의 여왕이라 불리는 걸작이다. 이 협주곡은 아름다운 멜로디와 정열적인 감성이 곡 전반에 흐르면서도 형식미가 조화된 명작이다. 대중적 인기 또한 가장 높아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연주 시간도 30분 이내로 길지 않고 멜로디도 쉬워 1악장 전반부만 들어도 금세 친숙해진다.
        1악장: Allegro molto appassionato(빠르고 매우 열정적으로), e단조
        2악장: Andante(느리게), C장조
        3악장: Allegretto non troppo(지나치지 않을 정도로만 조금 빠르게) – Allegro molto vivace(빠르고 매우 생기있게), e단조

4. 트리비아 

    멘델스존의 둘째 아들인 화학자 파울 멘델스존이 설립한 회사는 2005년까지 이어져 왔다. 바로 아그파 필름이다.
    파니 멘델스존은 그녀의 할아버지처럼 곱추였다는 설이 있다.


출처:엔하위키미러




사라사테 찌고이네르바이젠 장영주



클래식의 클자는 몰라도
이 노래는 안다.  지고이네르바이젠

Sarasate  

바이올린 곡 중 가장 유명한 곡을 꼽으다면 그것은 단연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이라고 할 수 있다. 비단 바이올리니스트 뿐만 아니라 바이올린의 바자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도 이 곡의 강렬하고도 비장한 도입부는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CF나 방송에도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이 곡은 19세기 스페인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파블로 사라사테에 의해 작곡되었다. 7세 때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으로부터 스트라디바리를 하사받을 정도의 천재성을 보였던 그는, 총 50여 곡의 바이올린 곡을 작곡했는데, 대부분이 조국 스페인의 민속적 색채를 짙게 드리우는 소품으로,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이 지고이네르바이젠이다. 지고이네르바이젠이란 독일어로 집시의 노래라는 뜻인데 정처없이 유랑하며 떠도는 집시의 삶의 애환, 그리고 기쁨을 묘사하고 있다. 이 곡은 전형적인 집시 음악인 차르다시의 형태를 따르고 있는데, 강렬한 카덴차 풍의 도입부에 이은 느리고 애수에 찬 라산과, 끝나기가 무섭게 정신없이 몰아치는 프리스카가 연속해서 연주된다. 바이올린사적으로 특별히 중요하다거나 음악적 깊이면에서 본다면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을지 모르나, 인류가 남긴 수많은 바이올린 명곡 중의 명곡인 것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사라사테는  사라장의 연주가 베스트에 속합니다.
벌써 이름이 사라!!

또한명의 자랑 스러운 우리나라 연주자입니다.
수록된 
칼멘환타지., 라벨의 치간느, 마스네 타이스명상곡, 베토벤 로망스도
정말로 귀에 익숙한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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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카바코스



북구의 오로라 속의
푸른 기운 같은 서늘한 고독의  영혼을 아우르는 한 천재작곡가의
나르시즘의 극한을 보여주는 협주곡


자신이 연주할 요량으로 작곡했지만 게속되는 공연 실패로 시벨리우스는 큰 좌절도 
느꼈다고 합니다.


보통 이곡은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그닥 연주를 선호하지 안습니다.
이게 이상하게 어렵기 때문이에요.
아마도 시벨리우스의 저주일듯....ㅡ,ㅡ.





시벨리우스가 남긴 단 하나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면 우리들은 흔히 문학 작품을 읽을 때 빠져드는 고요와 같은 감상에 젖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이 협주곡은 그 격정적이며 까다롭고 어려운 특성을 뚜렷하게 밖으로 드러내지 않은 가운데 북유럽의 순수한 서정을 담은 아름다운 선율에 감싸여 있는 것이다. 


물론 1904년 2월 8일 헬싱키에서 초연되었던 이 협주곡 처음의 악보는 다소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의 작품 평가에 무척 엄격하였던 시벨리우스도 이 곡에 대해서는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였으며 다시 수정을 하여 개정된 작품을 1905년에 새로이 선보였다. 그런데 1903년 처음 작곡된 것돠 1905년에 개정한 것은 모두 버머스터(Willy Burmester)를 위하여 작곡된 작품이었다. 그렇지만 시벨리우스는 이 바이올린 협주곡이 두번이나 무시되는 것에 몹시 불쾌해 있었으며 더욱 훌륭한 연주를 위하여 이 곡은 또 다른 음악가에게 헌정되어졌다.





카바코스의 이 앨범은 수정 전과 수정 후의 모든 녹음을 아우르는 
진정한 시벨리우스 협주곡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카바코스는 이 앨범 한장으로 슈퍼 스타가 되었습니다.
우리와 같이 호흡하는 동시대 최고의 연주를 들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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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벨리우스 *****************

1. 생애 
시벨리우스는 1865년 핀란드의 타바스테후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핀란드계 군의관, 어머니는 스웨덴계였는데, 2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피아노와 작곡을 배워 9살때부터 작곡을 시작했으나, 특별한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후에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작곡에 소질을 보이기 시작하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음대 대신 법대에 입학한다.

하지만, 법대에 입학하자마자 헬싱키 음악원에도 입학,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웠고, 법대는 중퇴했다. 1889년 음악원을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갔지만, 낯선 환경과 스승의 성향에 적응하지 못한데다 당시 그곳 음악계를 휩쓸던 리하르트 바그너, 구스타프 말러 등의 음악 사조에 상당한 부담을 느껴 빈으로 떠난다. 빈에서 시벨리우스는 그가 존경하는 요하네스 브람스를 만날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1892년,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헬싱키 음악원의 교수로 취임하고, 결혼도 하게 된다. 같은 해 쿨레르보 교향곡을 완성, 초연하여 인정을 받기 시작한 후 연달아 교향시 '엔 사가'(전설), '카렐리아 모음곡', '네 개의 전설'을 발표, 명성을 쌓아갔고, 1899년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교향시 핀란디아를 발표하게 된다.

핀란디아의 성공으로 그는 국민작곡가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국가로부터 연금도 지급받게 된다. 그가 말년에 창작활동을 중단한 이유로도 제기되고 있다. 생활이 안정되자 교수직에서도 물러나고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교향곡 1,2번의 완성으로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귓병을 앓았고, 귓병은 4년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1904년 헬싱키 교외의 얘르벤패로 집을 옮기고, 저택의 이름을 아내 '아이노(Aino)'의 이름을 따 아이놀라로 한다. 이후 핀란드 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면서 꾸준히 교향곡 3,4번, 현악사중주 D단조 등을 작곡하고, 영국, 미국으로 연주여행을 다니며 전세계로 이름을 알렸다.

1915년, 그의 50세 생일을 맞아 핀란드 전국에서 축하를 받았고, 연금도 50,000마르크로 증액된다. 교향곡 제 5번도 완성되어 탄생 축하 공연에서 초연된다. 그러나 그는 기존 교향곡 형식을 벗어나 새로운 형식을 지향하였고 5번 교향곡도 개정을 거듭하였다. 한편, 교향곡 6,7번 역시 구상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핀란드가 독립을 하게 되고 이때의 혼란 속에서 그는 잠시 창작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생활도 다시 안정되었고, 다시 창작 활동을 시작, 1923년 교향곡 6,7번을 잇달아 완성한다. 특히 7번은 기존의 교향곡 형식을 탈피, 시벨리우스만의 형식으로 그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걸작으로 불려진다.

그리고 1925년, 그의 나이 60세를 기념, 연금이 다시 증액되었고 국민들의 모금으로 27만 마르크가 모아졌다. 그뿐만 아니라 훈장도 받았고, 전 세계로부터 축하 메세지도 받았다. 그리고 1930년, 그의 나이 65세에 마지막 교향시 '타피올라'를 끝으로 그는 이후 27년간 창작활동을 중단한다. 다만 30년대 중반까지도 시벨리우스가 교향곡 8번을 만들려고 시도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그의 인기는 식지 않아 70세, 80세 생일에도 큰 환영을 받았으며, 1957년 자택에서 92세의 장수를 누리고 숨을 거둔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뤄졌으며, 성대한 장례식을 치룬 후 그의 자택 앞뜰에 묻혔다.

2. 작곡 특징 

그가 일생의 3분의 2가까이를 20세기에 살았음에도 불구, 그는 후기 낭만주의에 기반한 국민악파 특유의 음악만을 작곡했다.화성이나 기타 음악적 형식에서 현대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유일하게 그가 거부한 전통이 있었으니 그게 소나타 형식이었다.

그는 기존의 소나타 형식이나 교향곡 형식을 거부, 하나의 선율을 바탕으로 음악을 전개, 장대한 피날레로 이르는 자신만의 형식을 발전시켜 나갔고, 교향곡에 있어서도 점차로 형식을 파괴, 7번에 이르러서는 아예 4악장을 포기하고 1악장으로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봐서는 시벨리우스는 20세기에 한물간 낭만파와 국민주의 음악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한 구태의연한 작곡가로 보이지만, 자신만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는 당시 음악계와는 다른, 독특한 작곡가로 봐야 할 것이다.



3. 사생활 

술, 담배를 매우 좋아하여 항상 손에서 떼지 않았고, 그 결과 43세에 후두암 진단을 받았다. 이 때 금주, 금연을 선언했으나, 수술로 암이 완쾌되자 난 살아 있다구, 이 니기미 씨부랄것들아!바로 다시 술, 담배를 시작했다고. 

음악원에 있을 때, 원래는 바이올리니스트를 목표로 작곡보다는 바이올린을 주로 했고, 교내 현악사중주에서 제2바이올린을 맡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바이올린을 그만둔 일화가 있는데, 교내 연주회에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독주를 맡게 되었는데, 너무 긴장한데다 흥분한 탓에 공연을 망친 것. 결국 자신은 바이올린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하고 작곡과로 과를 옮긴 것.


4. 미스터리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시벨리우스는 1930년 이후로 죽을 때까지 곡을 발표하지 않다시피 했는데, 그가 왜 작곡을 중단했는지는 아직도 논란거리이다. 아니 65세면 은퇴할 때 됐잖아 소나타 형식을 능가하는 자신만의 형식을 만들고자 했으나 한계에 부딪혀 작곡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연금만으로도 생활이 안정되자 배가 불러서작곡을 그만두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설로는 말년에 들어서 성격이 내성적으로 변하고, 자기 작품에 대한 자신감도 줄어 창작 의욕이 줄었다는 것이 있다. 이런 이유는 당시 급변하던 음악계의 엄청난 조류에 시벨리우스가 따라가지를 못해서라는 설명이 있다.시벨리우스는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유치찬란하다고 맹비난한바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시벨리우스는 급변하는 조류들을 이끄는 음악가들을 부러워 하기도 한듯 하다. 자신의 일기에 누구나 다 혁신적인 천재가 될수 있는건 아니다라고 적은걸로 보면 역으로 늙은 자신은 이제 혁신적인 천재가 되는건 불가능하다고 한탄한듯 해보인다.

시벨리우스의 아내 아이노의 회고에 의하면 1940년대 초에 시벨리우스가 갑자기 카렐리아 모음곡의 일부를 비롯한 다수의 악보들을 마당으로 들고 나가서는 불을 싸질러버렸다라고 한다.

또한 시벨리우스는 본질적으로 영웅으로 추앙받는것을 몹시 부담스러워 했는데 핀란드의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미국에서도 열광적인 인기를 얻게 되자 이것이 되려 창작의지를 꺽어버린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미국에서의 시벨리우스의 인기는 비유하자면 한류 스타의 인기만큼이나 대단한것이었고 시벨리우스의 교향곡은 여러 오케스트라들에서 단골로 연주할정도였다. 얼마나 연주가 많았는지 "로라"라는 영화에서 다나 앤드류스가 연기한 탐정 왈 "그들은 연주 직전에 프로그램을 바꿔서 오직 시벨리우스만 연주했다구요!"라는 대사가 나왔을 정도다.

특히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였던 세르게이 쿠세비츠키는 시벨리우스 스페셜리스트로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곡을 연주했을 정도였다. 이런 미국의 시벨리우스 인기에는 난해한 현대음악에 대한 반동적인 성격도 어느정도 있었다. 이를 간파한 (말러-쇤베르크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시벨리우스 음악이 훌륭한거면 음악의 표준을 바꿔야 된다라고 대차게 깠을 정도였다. 너무 과격하게 깐 나머지 같은 시벨리우스까들이 님하 그렇게 까면 님만 욕먹으니 수위좀 낮추삼하고 충고했을 정도였다고.

쿠세비츠키는 30년부터 32년까지 시벨리우스에게 8번 교향곡이 언제 완성되느냐고 들들 볶았다. 실제로 시벨리우스는 8번 교향곡을 완성하려고 시도했고 쿠세비츠키에게 보낸 편지에 저작권 문제를 걱정할 정도였다. 31년에는 베를린에 다녀온 후에 새 교향곡을 32년 봄에 연주할수도 있을것이라고 편지를 써보내기도 했다. 이 정보가 새서 보스턴 언론에서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결국 그 소식을 접한 시벨리우스는 공황상태에 빠졌고 8번을 만들려던 생각을 접은듯 해보였다.

결국 결론적으로 시벨리우스의 창작이 중단된 미스터리의 요인에는 현대음악의 조류에 대한 갈등, 미국의 엄청난 인기에서 비롯된 창작의 고뇌가 가장 중심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물론 시벨리우스 자신이 침묵한 탓에 정확한 진상이야 알수 없겠지만 말이다.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고 3 악장 바이바 스크라이드

바이올린 협주곡의 대명사.
귀족들에게 이용당하고 끝내 독살당한 비운의 작곡가의  
슬픔,기쁨, 배신,사랑을 다 아우르는
러시아 클래식의 정수!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협주곡 No.1 D장조 op. 35

누가 붙인 별명인지는 알 수 없으나 베토벤, 브람스, 멘델스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들은 '4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는 칭호를 누리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멘델스죤 (E단조)을 제외한 세 곡의 협주곡이 모두 D장조로 쓰여진 것인데, 이것은 아마도 바이올린이 가장 아름다운 울림을 낼 수 있는 조성이 D장조이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 화려함과 애절한 멜로디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곡이며,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비해 이 장르의 작품을 처음 접하기에 좀 더 적당하다고 생각된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마찬가지로 처음 작곡될 당시 많은 말썽을 일으켰었던 작품이었다. 이 곡은 차이코프스키가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심한 우울증 증세에 빠져서 이탈리아와 스위스 등에서 요양생활을 하던 중에 작곡되었다 (1878년, 당시 38세). 이 기간은 그가 교향곡 제 4번과 "에프게니 오네긴" 등을 작곡한 시기이기도 한데, 이 때 그는 바이올리니스트인 코데크라는 친구와 함께 지내게 되면서 그의 도움으로 이 곡을 완성할 수 있었다. 초고가 완성된 후 차이코프스키는 당대 러시아 바이올린계의 거장이었던 레오폴드 아우어 교수에게 헌정할 목적으로 그에게 작품에 대한 자문 및 초연을 맡아줄 것을 구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답변은 차갑기만 했다. 아우어는 차이코프스키에게 "기교적으로 보아 도저히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초연을 거부했던 것이다. 

실망한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을 3년 동안이나 발표하지 않고 묻어두었는데, 아돌프 브로드스키라는 러시아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이 곡을 칭찬하면서 발표할 것을 적극 권하여 1881년 12월에 빈 필과 한스 리히터의 반주로 브로드스키에 의하여 초연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초연당시의 평은 무척 나빴다. 지휘자나 오케스트라 단원들부터 이 곡에 호의적이지 못했고 브로드스키의 완성되지 못한 기교는 청중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으며, 결정적으로 독설가였던 평론가 한슬리크는 이 곡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혹평하였다. 

"우리는 천하고 품위없는 얼굴만 봤고 거칠은 고함소리만 들었으며, 싸구려 보드카의 냄새만 맡았다. 프리트리히 피셔는 짜임새없는 그림을 비평할 때 '보고 있노라면 냄새가 나는 그림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차이코프스키의 이 곡은 음악작품에도 들어서 냄새가 나는 작품이 있을수 있다는 두려운 생각을 우리에게 처음으로 알려주었다." 

한슬리크의 혹평을 들은 차이콥스키는 실망을 금치 못했으나 이 곡의 가치를 굳게 믿고 있던 브로드스키는 유럽 각지에서 이 곡을 계속 연주하여 결국 청중들의 인기를 얻는데 성공하였고, 나중에는 아우어 교수도 이 곡의 가치를 인정하여 스스로도 연주함으로써 대성공을 거두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적극적으로 가르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곡은 많은 공로를 가진 브로드스키에게 헌정되었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한슬리크가 말한 것처럼 강렬한 러시아적인 냄새가 나는 것이 특징이다. 1악장의 야성적인 주제나 2악장의 슬라브적 애수가 어린 선율, 3악장의 광포한 리듬과 열정적인 끝맺음 등은 러시아외의 유럽 작곡가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민족색채가 넘치는 것들이다. 또한 아우어 교수가 처음에 연주가 불가능할것이라 예견했을 정도로 어려운 기교를 요구하는 난곡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의 신예 바이올리스트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 곡을 자유자재로 연주함으로써 자신의 기교를 세상에 과시하고 있으니 세월이 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출처 : 클래식코리아




펭귄가이드 로젯마크!

말이 필요없는 최고의 명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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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이코프스키 *****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차이콥스키가 맞다. 그런데 2005년에 외래어 표기법에 러시아어 한글 표기법이 추가되기 전까지는 죄다 '차이코프스키'로 써서 오히려 '차이콥스키'가 어색할 지경이다. 그런데 러시아인들은 '취콥스키'에 가까운 발음으로 읽는다. 이는 위의 이름표기에서도 보이듯이 그의 성인 차이콥스키에 역점이 가운데(чайк'о'вский)에 위치하면서 모음인 а의 발음이 약화되는 현상 때문.(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а가 и발음 음가를 가지는 경우는 ч,ш 뒤에 위치한 강세없는 а에 한정한다. 대표적인 예로 시계를 뜻하는 단어인 часы. 치씌 정도로 읽는다. 물론 남부방언에선 차이콥스키라고 그냥 부르기도하고...)

러시아의 우랄 지방 캄스코보트킨스크에서 출생. 아버지는 광산 감독관으로 우랄 지방 곳곳의 광산을 전전했고 그 때문에 가족들도 아버지를 따라서 이곳 저곳으로 이사하면서 살았다.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으로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지만, 아버지나 어머니는 차이콥스키가 별로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가 법률가로 키우려고 했었다.

185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법률 학교에 입학하여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되었다. 여기서 그의 동성애적인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성애는 차이콥스키의 인생과 음악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는 법률학교 안의 합창단에 들어가서 음악 공부도 이어나갔다.

1859년, 법률학교를 졸업한 후 법무성의 1등 서기관으로 근무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끊지 못하던 중 1860년에 안톤 루빈슈타인 형제가 제안하여 러시아 최초 음악원의 1기 학생으로 입학해 음악가의 길을 가게 된다. 초반에는 안톤 루빈슈타인과 절친한 사이였지만 음악적 노선의 갈등으로 결국 안톤 루빈슈타인과 불화를 일으킨다. 루빈슈타인 형제는 서유럽의 음악을 중시하고 소위 러시아 국민악파라 불리는 "러시아 5인조"의 음악을 수준이 낮다고 절하했다. 그러데 차이콥스키가 이 "5인조"의 음악적 성향에 접근한 작품인 "폭풍우"라는 관현악곡을 작곡하니 루빈슈타인이 격노하고, 이것이 불화의 요인이 되고 만다.

결국 차이콥스키는 안톤 루빈슈타인의 동생인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이 설립한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페테르부르크를 떠난다. 차이콥스키는 발라키레프의 소개로 국민악파 "5인조"와 친분을 나누지만 차이콥스키의 음악적 성향이 리스트나 바그너의 영향으로 서유럽쪽으로 기울면서 국민악파와는 결국 결별하게 된다.
1874년에는 차이콥스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피아노 협주곡 제1번 B단조"를 작곡했다. 당초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에게 연주를 의뢰했으나 니콜라이는 이 작품이 난해하고 연주 불가능한 곡이라며 거절했다. 결국 한스 폰 뷜로의 지휘로 보스턴에서 다른 피아니스트와의 협연으로 초연되었지만 당대의 평가는 니콜라이의 평가와 썩 다르지는 않았다.(최근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아파트 광고에도 나오는 이야기다)

이후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서 1878년까지 근무하며 작곡활동을 병행하다가 러시아 철도왕의 미망인 나즈데다 폰 메크 부인의 후원을 받게 되면서 교수직을 사임하고 작곡에만 전념하게 된다. 폰메크 부인은 약 15년동안 차이콥스키를 후원해 주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이 서로의 실물을 본 것은 오직 2~3번 뿐이라고 한다. 이는 폰메크 부인이 차이콥스키를 후원하기로 했을 때 서로 한 약속 때문이었다. 또한 차이콥스키는 폰메크 부인과 약 15년간 12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 받으며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차이콥스키의 동성애 성향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인물들이 연상의 여인에게 정신적 사랑을 바라고 어머니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은 사실 꽤 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1890년에 폰메크 부인은 파산을 이유로 더이상 차이콥스키를 후원할 수 없다고 통보한다. 폰메크 부인의 일방적인 결별 선언에 차이콥스키는 극심한 괴로움에 휩싸이게 되었고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차이콥스키가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폰메크 부인은 더이상 답장을 보내지 않았고 사실상 둘의 관계는 끝난 것이다. 이 때문에 차이콥스키는 죽는 순간까지 폰메크 부인에 대해 강한 애증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임종 직전에도 폰메크 부인의 이름을 부르며 '저주받을 여자'라고 외쳤다고 한다. 흠좀무…

동성애에 대한 죄책감 등으로 여성과의 정상적인 연애나 결혼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차이콥스키는 10살이나 어리고 음악원 제자였던 안토니나 미류코바의 열성적인 구애에 시달리다가 미류로바가 결혼해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까지 한 탓에 결국 맘에 없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음에도 없는 결혼인 탓에 결혼생활은 행복할 리가 없었고 차이콥스키는 석달을 못 버티고 도망쳐버려 결혼생활은 파탄으로 끝났다. 이 결혼 사건은 차이콥스키의 음악의 분위기까지 바꿀 정도로 중대한 사건이었다. 결국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된 그는 신경쇠약으로 이어진 후 유럽으로 도피성 요양여행을 떠나서 이탈리아에 이르러서야 겨우 심신을 회복할 수 있었다.



1878년, 귀국한 차이콥스키는 명작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고 1888년에는 발레음악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완성했다. 이 때에 이르러 차이콥스키는 세계적인 음악가의 명성을 얻게 된다. 1890년 그간 차이콥스키를 후원하던 폰 메크 부인이 갑자기 후원을 중단해버렸다. 차이콥스키는 후원이 끊긴 후에도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폰메크 부인과의 교류가 끊기게 되면서 큰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차이콥스키는 미국 여행후, 오페라 "욜란타"와 발레음악 "호두까기 인형"을 작곡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해가 된 1893년,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작품 중 최후 걸작이 된 "교향곡 제6번 비창"을 작곡했다. 그리고 11월 6일, 의문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으로는 끓이지 않은 물을 들이켜서 콜레라로 죽었다라고 발표됐지만 당시에도 그런 엉터리같은 소리를 하느냐! 비난이 적지않았다. 왜냐고?


콜레라는 당시 불치병이나 다름없었기에 이걸로 죽었다면 격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무려 6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였으며 러시아 모스크바 정교회 주교를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이 장례식 미사까지 하고 음악 동료,친구들,지인들,친척들도 죄다 참석했다. 그래서 지인들은 콜레라로 죽었다는 당국 발표에 대하여 장례식에서 무척 기분나뻐하며 이래놓고도 콜레라라고 허풍을 치네요? 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더불어 장례식 끝나고 콜레라라 유행했다는 것도 없었다. 그리고 차이콥스키는 위에 서술된 걸 봐도 꽤 부유하게 살았으며 활동 영역도 부유층.귀족층에게 살았다. 이들은 깨끗한 물을 마시고 당시 콜레라는 더럽고 가난한 빈민층이나 걸리는 병이었고 사실이었다.(지저분한 물을 마시고 그런 환경에서 살아갔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콜레라에 걸려죽었다? 지인들이나 당시 친척들도 참 어이없어 했다.

일각에서는 차이콥스키가 당대의 실권자인 스텐본크 톨몰 공작의 조카와 동성애 관계를 맺었고, 이것을 알아차린 공작에 의해서 자살을 강요당해서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또한 다른 주장으로는 공작이 황제에게 차이콥스키를 고소하였으며 정교회 국가인 러시아에서 동성애는 죽음의 죄였기 때문에 이 고소장을 넘겨받은 검찰부총장이자 챠이코프스키와는 법률학교 동창인 니콜라이 야코비가 차라리 명예로운 자살을 종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은 콜레라의 증거로 언급되는 쌀뜨물 같은 설사가 비소를 먹은 경우에도 나타나는 증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백한 증거가 없는 탓에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러시아 고전주의 음악을 완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 대해서는 당대에 평가가 엇갈렸다. 서유럽에서는 그의 음악을 대중적이라고 평가절하했고, 러시아에서는 민족주의적인 경향과 거리가 있다고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쉬우면서도 깊은 울림을 가진 것으로 오늘날에 클래식 애호가들의 깊은 사랑을 받는 작곡가가 되었다.

피아노, 바이올린의 연주기법에 있어서 당대 음악가들을 능가하는 진보를 이뤘는데 이 때문에 그의 피아노, 바이올린 협주곡들은 난해하고 음악형식에 맞지 않는다는 평가를 당대에 받았다. 다양한 작품들을 남겼는데 "예브게니 오네긴" 같은 오페라, "백조의 호수" 같은 발레음악 등의 무대음악부터 6곡의 교향곡, 다양한 표제음악적 성격의 교향시와 관현악곡들, 피아노 음악과 실내악곡 등에서 여러 걸작들을 남겼다.



비발디 사계 비온디


비발디 사계로 중요한 부분을 배우고 넘어가 봅시다
보통 일정한 정도의 음악을 감상하고
어느정도 음악을 가추게 되면
본인이 좋아하는 음악의 스타일이 정해집니다.
피아노라던가, 오케스트라던가, 성악곡, 바로크.
그후에는
같은 노래라도 연주자에 따라 다르다는걸 배우게 되는데요.
클래식은 그 즐거움이 거의 80%를 넘게 차지하게 됩니다.
그 예를 비발디 사계로 한번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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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께 유명한 이무지치 아요 입니다.
방송이나 매체에서 비발디 사계나온다 싶으면 90%는 저 음반입니다.
아래껀 그보다 더 정격연주(원전악기를 쓰고 예전 악보에 충실한)이면서
더 과격합니다.
두개를 비교하시면 확연히 다르다라는걸 느끼실수 있어요.
이렇게 재미를 붙여가시면 
클래식을 10배 더 즐기실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씩 레파토리도 넓혀가시고,
취향에 맞는 음악도 찾으시면 좋겠네요..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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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 연습씬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감동적인 영화 "샤인" 입니다. 
교수에게 라흐마니노프 3 번 을 연주하겠다고 했더니
너 미친거냐? 이건 악마의 노래야...
라고 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연습을 돕습니다.

주인공(헬프갓)은 의지를 불태우며 극한의 상황에서 연습을 매진합니다.
(3분 보시면 됩니다.)


샤인 공연씬

발표 당일입니다.! 
이건 한글 자막이 나옵니다. 그냥 보시면 됩니다.
 여기엔 안나오지만 연주를 마추고 헬프갓은 쓰러지고 
정신병을 앓게 됩니다.(분열정동장애)


악마가 건내준 음악
피아니스트 황금기의 걸작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 번



러시아계 미국인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1873년 4월 1일 러시아 벨리키노보고로드에서 출생, 1943년 3월 28일 미국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에서 사망. 국민악파가 주를 이루던 시절에 활동한 후기 낭만파 음악가로, 부조니,호프만과 함께 사실상 낭만주의의 마지막 세대였으며 현대 악파 성립에 상당히 공헌한 인물이다. 

10대부터 작곡을 했고, 그 시기에 이미 그 끔찍한 난이도의 스크리아빈의 에튀드 5번을 고작 한 시간만에(...) 다 완성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초견력을 가졌으며 그의 협주곡 1번은 작품번호 1번으로(거의 첫 작품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17세에 작곡했는데 자신의 말론 2,3악장의 경우 고작 이틀 반만에 완성했다고(...) 24살에 교향곡 1번을 발표하지만 평단의 압도적인 비판을 받으며 그 충격으로 후 3~4년간 아무 곡도 작곡하지 못한 채 엄청난 슬럼프에 빠진다. 생전에 연주 자체가 이루어지질 않았으니 뭔 설명이 필요한지? 이 시기에 사촌과 결혼했다가 러시아 정교회의 비난을 받아 우울증이 심해졌다고 한다.

이때의 우울증을 극복하면서 작곡한 것이 바로 노다메 칸타빌레에 등장한 회심의 역작 피아노 협주곡 2번이며,이 곡으로 평단의 고른 호평을 받으며 재기에 성공한다. 기존의 협주곡에서는 오케스트라가 곡을 시작했다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은 저음으로 시작하는 피아노가 마치 반주로 들리며 오케스트라가 주 멜로디를 연주한다. 현대 이전의 곡으로는 드물게 라흐마니노프 본인의 연주가 녹음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우울증을 고치는 방법은 최면술이었고 결과는 매우 좋았다는데, 이 곡 1악장은 우울증을 치료한 것치곤 매우 격정적이며 무겁고 우울한 분위기의 악절이 상당히 많다.

뒤이어 1909년에 '피아니스트의 무덤'이라 불리는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발표했다.  극악의 난이도와 난해함으로 많은 피아니스트 지망생들, 심지어는 프로 연주가들마저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는 곡. 심지어 라흐마니노프 본인에게서 이 곡을 헌정받은 당대의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조차도 '나를 위한 곡이 아닌 것 같다'며 도망갔을 거절했을 정도였다!

 물론 본인 역시도 이 곡을 어렵지 않게 소화해낸 것처럼 이러한 묘사에는 과장이 있기 마련이며, 20세기가 피아니스트들의 황금기로 여겨지는 만큼 여러 뛰어난 피아니스트들의 레코딩이 존재한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를 떠나 노르웨이로 향했다가 1918년 미국으로 이민한다. 1928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를 만나 이후 평생 음악적 동료이자 친구로 지냈으며, 호로비츠의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에 대하여 "내 피아노 협주곡은 바로 이렇게 연주되어야 한다고 항상 꿈꿔왔지만, 살아서 이런 연주를 들을 줄은 기대치도 않았다"며 극찬했다. 호로비츠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작품도 다수 남아있다.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니스트로도 굉장히 유명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후에는 작곡보다도 연주회에 더 신경을 썼을 정도. 극악의 난이도의 피아노 곡들을 써대면서도 본인은 스스로 작곡한 곡들을 쉽게 소화해냈는데, 손이 매우 크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알려져있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녹음한 것을 들어보면 안그래도 빠른 초반의 피아노 전개가 워낙 빨라 산만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마르팡 증후군을 앓아 손가락이 길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일설에 따르면 엄지로 '도'를 짚은 상태에서 새끼손가락으로 다음 옥타브의 '라'를 짚을 만큼 길었다고 한다. 손가락을 완전히 펼쳤을 때 대략 30cm 정도의 길이가 나왔다는 얘기. 그래서인지 유튜브 등지에서는 극악한 난이도의 피아노곡 동영상이 올라올 때 댓글에 종종 '라흐마니노프 사이즈의 손만이 칠 수 있다'는 말이 종종 보인다.

러시아 혁명 때문에 떠난 조국을 잊지 못해 소련이 독일에게 두들겨 맞을 때쯤 모금 활동을 벌이기도 했으며, 소련 당국의 권유로 귀국준비를 하던 중 흑색종이 생겨 사망했다......고 원래 게시물에는 그렇게 써있었는데 기록상으로는 연주여행 중에 암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게 더 신빙성이 높은 듯, 당시 미국에서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는 라흐마니노프가 일회성 방문이면 몰라도 귀국권유까지 받아들였다는 상상은 하기 어렵다.

작곡가로서는 드물게 본인의 곡을 본인이 연주한 레코딩 전집이 남아있다. 보통 작곡가의 악보를 두고 서로 자기 해석이 짱이다 그러는 곳이 클래식인데[ 클래식 작곡가 본인이 남긴 레코딩이라면... 다 버로우지 뭐. 음질은 그리 좋지 않은 게 흠이지만, 1920년대의 피아노 곡에 이 정도의 음질이 남아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보다 좋은 음질의 연주를 찾고 싶다면 연주가 녹음된 자동피아노에서 롤 형태의 천공 카드를 재생시킨 버전도 있다. 위에도 언급되듯이 본인의 연주는 현재의 해석된 연주보다 훨씬 빠른 전개를 보여준다.
(그당시 녹음은 속도가 지맘대로다 믿을께 못된다)
출처:엔하위키미러

유자왕의 라흐마니노프는 당분간 그 상대를 찾지 못할 정도로
눈부시게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시작부터 깊은 동굴에서 걸어나오는 거인의 움직임같은
울림과 함께 상상하는 그 이상의 놀라운 연주가 계속됩니다.
같이 커플링된 프로코피에프도 압권.(프로코피에프가 어렵게 느껴지시면 나중에 들으세요.^^)
CVR.jpg


노다메칸타빌레

노다메 칸타빌레의 치아키 협주곡 부분, 노다메는 이 곡을 듣고 피아니스트로서 각성하게 됩니다.
이후 노다메는 미쳐 날뛰고 2 대의 피아노로 치아키와 이곡을 연주하게 되죠.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아노 협주곡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 번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전통적인 멜랑콜리의 정서를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는 음악입니다. 대중음악에 비유하자면 ‘발라드’인 셈이지요. 하지만 이 곡으로 재기에 성공해 작곡가로서 황금기를 구가하던 라흐마니노프는 1917년 혁명이 일어나자 더 이상 조국에 머물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그는 특별한 정치적 견해를 밝힌 적은 없었지만, 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혁명 직후의 러시아를 떠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조부와 부친은 차르 군대의 장교였고 어머니도 장군의 딸이었습니다.

결국 10월 혁명이 발발하고 3주 후, 스웨덴으로부터 연주 요청을 받은 라흐마니노프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기차를 탑니다. 그후 다시는 고국 땅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스톡홀름 연주를 마친 이듬해에 미국으로 망명, 1928년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이후 프랑스와 스위스에 잠시 체류하다가 1935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러시아계 미국인’으로 살았지요.

그렇다고 라흐마니노프가 미국을 ‘자유의 땅’으로 생각하며 동경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미국 망명 전에 가족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적이 있지요. “이 정 떨어지는 나라에는 미국인들만 들끓는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일만 하려고 하는지, 비즈니스를 외치면서 사람을 들볶고 강행군시키는구나. 나는 지쳤다. 성격도 많이 나빠진 것 같구나.” 하지만 라흐마니노프는 1918년부터 그 “끔찍한 나라”에 발붙이고 살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45세의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습니다.

결국 이 지점에서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의 생애가 시작됩니다. 물론 그는 러시아에서도 종종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그것은 ‘작곡가’로서의 연주에 가까웠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미국에서의 라흐마니노프는 자작곡뿐 아니라 베토벤과 슈베르트, 쇼팽과 그리그까지 연주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작곡가로서의 활동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미국 망명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라흐마니노프가 완성한 곡은 고작 6곡에 불과합니다. 그의 음악적 생애는 그렇게, 45세 이전과 이후로 크게 나뉩니다.

하지만 피아니스트로 ‘전직’했던 라흐마니노프의 존재감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었지요. 적어도 1920~30년대의 라흐마니노프는 요제프 호프만(1876~1957)과 쌍벽을 이루던 최고의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손가락을 쫘악 폈을 때 손의 크기가 자그마치 30㎝에 달했다는 그는 건반을 완전히 장악한 채 육중하고 화려한 연주를 선보였고, 콘서트홀의 청중은 그의 초인적 기교에 완전히 열광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에 대해서는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1887~1982)의 언급이 전해집니다. “(라흐마니노프의) 황금색 비밀을 간직한 살아있는 피아노 음색은 가슴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화려하게 건반을 질주하는 그의 손가락과 흉내 내기 어려운 거대한 루바토에 홀려 시름을 잊고 빠져들었다.”

그렇게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얻고 돈도 벌었습니다. 비버리힐즈에 저택을 구입했고 두 딸에게는 프랑스 파리에 출판사를 차려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행복했을까요? 별로 그랬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미국 망명 후 혹독한 연주 스케줄에 시달리면서 요통과 관절염을 끼고 살았고 늘 피로를 호소했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더 심각했던 것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였을 겁니다.
출처:체널예스

시작부터 대범한 지머만의 명연주
감동의 극한까지 몰고가선 메몰차게
돌아섭니다. 아쉬움속에 한숨만 나오는
엄청난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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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불세출의 명곡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차이코프스키는 일생동안 3곡의 피아노협주곡을 작곡했다. 1875년에 op23의 1번, 1880년에 op44의 2번(G장조), 그리고 op75의 E플랫장조의 세 번째 피아노협주곡은 1893년에 작곡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이라고 하면 가장 우선적으로 떠올리는 것은 1번이며 다른 두 곡의 협주곡은 녹음이나 연주되는 경우가 무척 드물다. 앞에서 말한 슈만이나 쇼팽, 브람스의 협주곡들은 비록 그 수는 적지만 그 수준이 매우 높은 것으로서 연주되는 기회도 매우 많지만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은 대중적인 인지도에 있어서 앞의 협주곡들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정말 대중적인 의미에서는 1악장의 도입부만이 인지도가 높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4대의 호른으로 시작하는 포르티시모의 충격적인 느낌, 그리고 러시아의 토속적인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서주 주제의 친근함 때문이 아닐까 하는데 사실 이 서주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매우 개성적이고 완성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1악장이 다소 산만한 것은 논외로 하고)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것도 사실이다. 낭만주의 시대의 피아노 협주곡들은 도입부가 충격적인 것이 많은데 - 리스트, 슈만, 차이코프스키,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을 생각해 보라 - 그 중에서도 가장 대규모적이고 화려한 시작을 보이는 것이 바로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이다. 아마 이전에 베토벤의 5번 협주곡이 화려한 피아노의 카덴짜로 시작된 것 만큼이나 충격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작곡과 초연
이 곡이 작곡된 것은 1874년 12월 무렵이다. 이 해는 차이코프스키에게 있어서 비교적 조용했던 시절로, 1월에 현악 4중주 2번을 작곡했고, 6월부터 3개월정도 오페라인 '대장장이 바쿨라'에 전념하였다. 그 후 당분간 창작활동을 하지 않던 차이코프스키는 12월 부터 약 1개월 남짓한 짧은 기간에 이 피아노 협주곡을 완성하였으나, 초연은 의외로 1년 가까이나 지난 1875년 10월 25일 보스턴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에 얽힌 일화는 영화나 여러 문헌에 자세히 나타나 있는 대로 당시 모스크바음악원의 교장이며 차이코프스키의 친구였던 니콜라이 루빈시타인(1835-1881)과의 불화에 의한 것이다.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은 유명한 피아니스트이며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스승이었던 안톤 루빈시타인(1829-1894)의 동생으로서 당시 형 못지 않은 상당히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고 하는데, 곡을 완성한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첫번째 협주곡이기도 한 이 곡의 피아노 파트에 대해 조언을 듣기 위해 12월 24일 밤에 루빈시타인과 그의 동료인 프베르트(1840-1888, 당시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를 초청하여 이 곡을 직접 연주하여 들려 주었던 것이다. 차이코프스키는 피아노파트의 완성도는 어떻든 곡의 전체적인 완성도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평을 기대했었지만 루빈시타인은 그 자리에서 혹독한 평가를 내렸던 것이다. 이 부분은 동석했던 프베르트의 기록에도 남아 있지만, 1877년 차이코프스키가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쓰여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은 차이코프스키가 이 때 받은 심적인 충격을 어느 정도 보여 주고 있다

    '나의 피아노협주곡은 연주가 불가능한 듯이 보였으며, 쓰레기 같은 것이었다. 곡을 구성하는 패시지들은 어색하고 서투른 것이어서 구제불능이었다. 작품 자체가 좋지못하고 천한 것이라는 말이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의 작품을 그대로 사보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이 협주곡은 두 세 페이지만을 건질 수 있을 뿐 나머지는 완전히 다시 써야 했다.' 

이러한 평가를 받고 격분한 차이코프스키는 방을 뛰쳐나갔으며 당황한 루빈시타인은 뒤따라나가서 몇몇 부분을 수정하면 자신이 연주해 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는 '단 하나의 음표도 고칠 수 없다'고 고집을 세웠으며, 당시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치던 한스 폰 뷜로에게 이 곡의 초연을 의뢰하였다. 한스 폰 뷜로는 이 곡을 살펴보고 매우 만족해 했으며,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보스턴에서 가진 초연은 뷜로의 확신대로 대 성공을 거두었으며 뷜로는 이 사실을 전보를 통해 모스크바에 있는 차이코프스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모스크바와 보스턴 사이의 최초의 전보가 바로 이것이라는 후문도 있다). 모스크바에서의 초연은 루빈시타인이 지휘를 맡아 1878년 3월 22일에 이루어 졌다.

헌정과 수정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이유로 원래 헌정받기로 되어 있었던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이 아니라 당시 거의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던 젊은 피아니스트인 세르게이 타네예프에게 바쳐졌으며, 1875년 오케스트라 파트의 수정을 마친 후 다시 헌사를 한스 폰 뷜로로 수정하였다.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의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한 음표도 바꿀 수 없다'라고 고집을 피우던 차이코프스키이지만 나중에 이 곡의 기술적인 부분을 약간 수정하게 되었다. 현재와 같은 형태의 악보로 수정된 것은 작곡된 지 약 15년이 지난 1889년 경이며 이 곡을 런던에서 초연한 영국의 피아니스트 에드워드 단로이터에게 기술상의 조언을 받았다. 이미 오래전에 사망한 니콜라이 루빈시타인에 대해서 조금쯤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법도 하다. 현재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로 되어 있는 1악장의 서주도 원래는 '안단테'로 되어 있었으며 3악장의 코다 도입부 직전에 나타나는 'Tempo primo, ma tranquilo(원전에는 Tempo I ma piu plus lent)'의 속도지시를 비롯한 다양한 속도변화 지시는 거의가 나중에 추가된 것이다. 코다의 튜티가 시작되지 전의 피아노가 연주하는 맹렬한 옥타브 역시 대폭 수정되었는데, 원래 상당히 단순하고 직선적이던 이 부분이 수정에 의해 매우 극적이고 화려한 효과를 가질 수 있도록 변화하였다.
출처 : 고클래식
막판까지 드리프노브와 저울질 했는데 드리프노브의 화려함보다는 Matsue 의 진중함을 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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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만 협주곡 키신

시간이 흐를수록 세월이 쌓일수록 더 가슴에 남는 협주곡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원래 피아노 환상곡으로 발표할 예정이였던 곡을
클라라와의 결혼으로 안정을 찾은 슈만이
나머지 악장을 4 년에 걸처 작곡하여 세상에 탄생했습니다.

슈만 곡에서 특이한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1악장의 중요 주제가 2 악장 3 악장에서 변형 되어
다시 등장한다는 점인데요. 

이제 여러분은 주제와 변주 그리고 반복이라는 중요한 틀을 느낄수 있게 된겁니다.

키신의3 악장은 인간이 칠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공포에 가까운 명연입니다.
줄리니의 의연한 뒷받침도 젊고 혈기 넘치는 키신을 잘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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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눈보라 치는 추운 겨울
끝없이 뻣은 도로위로 걸어가는
얇은 걷옷을 걸친 나그네의 쓸쓸함 같은 슬픔과 오열의 협주곡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가단조는 그리그가 작곡한 소나타 형식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노르웨이풍의 서정과 리스트풍의 화려한 연주회 효과가 3악 중에 교묘하게 어울린다. 그리그를 낳은 베르겐 항구 근처는 비외른손의 소설에도 묘사되어 있듯이 암석이 많은 황량한 산악이 피요르드의 해안 가까이까지 뻗치고 있으나 그러한 풍토나 짙은 조수의 내음, 또 안개가 많은 노르웨이의 기후가 낳은 환괴적(幻怪的)인 옛이야기 같은 분위기 등에 그리그가 강하게 이끌려 있던 것을 이야기하는 명곡이다.

자유로운 영혼(?)의 피아니스트 Leif Ove Andsnes 의 주특기.
현시대의 거장중 한명으로 우뚝선 그의 명연주를 즐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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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피아노협주곡 2 번 2악장

가슴으로 쓰는 피아노의 시
쇼팽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1번 e 단조(Op. 11)는 프레데리크 쇼팽이 1830년에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이다. 쇼팽이 폴란드를 떠나기 직전인 1830년 10월 11일 바르샤바의 국립 극장(Teatr Narodowy)에서 열린 그의 고별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다.

작품에 “1번”이라고 번호가 붙어 있지만, 실제로는 피아노 협주곡 2번보다 나중에 완성된 곡이다. 폴랜드를 떠나 파리에 정착한 쇼팽이 그의 피아노 협주곡 두 곡을 출판하기 위해 출판업자에게 의뢰하였으나, 지금의 피아노 협주곡 2번(Op. 21, 작곡일자는 더 빠름)이 아마추어 피아노 연주자들이 "(집에서) 개인적으로 연주하기에는" 너무 난이도가 높았기 때문에 피아노 협주곡 1번(Op. 11)만 먼저 출판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의 두 번째 악장은 짐 캐리가 주연한 영화 더 트루먼 쇼에서 사용되었으며, 그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는 그 악장 전체가 연주된다.
    이 작품의 두 번째 악장은 대한민국 드라마 천국의 계단의 삽입곡으로 사용되었다.

아르헨티나 태생의 쇼팽 스페셜리스트 잉그리드 플리터는 2000년 바르샤바 쇼팽 국제 대회에서 2위를 수상한 이후 쇼팽스페셜리스트가 되었습니다. 남미특유의 기질과 우아한 프레이징과 속도감 넘치는 테크닉으로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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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 협주곡 하일라이트

베토벤 팬보이 브람스의 회심의 걸작
여친에게 잘 보이려고 만든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알려져 있듯이 브람스는 1번을 작곡하고 20년이 넘어서야 2번을 쓸 수 있게 됩니다. 사실 브람스는 1번을 완성한 직후에 2번을 쓸 의사를 이미 표명했었지요. 하지만 1번이 라이프치히 연주회에서 엄청난 혹평(물론 지난 회에서도 말했듯이 거기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개입돼 있었습니다)을 받자 곧바로 작곡에 착수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브람스는 분노를 속으로 삭이면서 “두번째 협주곡은 더 좋은 곡을 쓰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라이프치히에서 겪었던 모욕은 자존심 강한 브람스의 마음에 상처를 줬던 것 같습니다. 물론 브람스가 두번째 피아노 협주곡을 한참 뒤에야 작곡한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정황상 유추가 가능할 뿐이지요. 하지만 오랜 친구인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에게 “두번째 협주곡은 다른 울림의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던 적은 있습니다.

<피아노 협주곡 2번 B플랫장조>를 쓸 무렵, 브람스는 음악적으로 원숙기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1878년부터 작곡을 시작해 1881년에 마무리했으니, 말하자면 브람스가 쉰살을 눈앞에 두고 완성한 곡이지요. 이 때쯤이면 생활도 많이 안정되고 음악가로서의 사회적 명성도 상당히 얻었을 때였습니다. <독일 레퀴엠> 같은 걸작을 비롯해 교향곡 1번과 2번,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이미 완성해 초연한 뒤였지요. 그리고 브람스는 이 무렵부터 수염을 기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브람스의 덥수룩한 모습은 이때부터입니다. 그전에는 아주 말쑥하고 단정했지요. 꽃미남 청년이었던 브람스는 수염이 북실북실한 중년의 모습으로 점점 변해갔고 체중도 많이 불어났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는 술과 담배, 커피를 무척이나 즐겼다고 하지요. 그래서 점점 더, 배가 불뚝 나온 털북숭이의 모습으로 변해 갑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브람스의 전형적인 이미지입니다.

결국 두번째 피아노 협주곡은 중년의 브람스가 20년의 장고 끝에 날린 회심의 강펀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질풍노도처럼 격정적인 곡은 아닙니다. 오히려 청년기에 작곡했던 1번이 더 격렬하지요. 쉰살을 바라보는 브람스는 매우 신중해져 있었고, 그의 관현악법은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곡은 1번에 비해 음악적으로 더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브람스는 이 곡을 완성한 직후에 엘리자베스 폰 헤르초겐베르크에게 “사랑스럽고 연약한 스케르초를 가진 정말 작은 피아노 협주곡을 썼다”는 편지를 보내지요. 참, 이 여성은 누굴까요? 그녀는 브람스의 피아노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던 여성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브람스는 빼어난 외모의 그녀에게 마음이 끌릴까봐 두려워 제자로 받아들이길 거절했다고 전해집니다. 사실일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브람스는 클라라를 마음에 품은 채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간 인물로 그려질 때가 많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사실과 좀 다릅니다. 실제로 브람스는 여러 여성과 교제를 했지요. 하지만 결혼 직전에 번번이 관계를 단절하곤 했다고 합니다. 한데 그것이 꼭 클라라 때문이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냥 브람스라는 남자의 기질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헤르초겐베르크는 브람스와 ‘우정’을 나눈 여자 친구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친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람스가 협주곡 2번의 특징을 “사랑스럽고 연약한” “정말 작은” 등으로 표현한 것에 대해 후대의 음악사가들은 대체로 ‘브람스적 역설’이라고 해석합니다. 브람스 본인의 표현과는 달리, 이 협주곡이 중후장대한 분위기를 짙게 풍기기 때문이지요. 1번보다 곡의 길이도 긴데다 당시의 협주곡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4악장의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고도의 피아노 테크닉을 구사하고 있어서 피아니스트들에게 이래저래 부담이 되는 곡입니다. 하지만 피아노의 존재감을 화려하게 부각시키는 1번과 달리, 중년의 브람스는 이 두번째 피아노 협주곡에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대등한 조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출처:체널예스 문학수님

꽃미남 Freire 가 이리 늙다니.ㅠ.ㅠ
하지만 연주는 신의 영역에 들어섰군요.
브람스 협주곡 1, 2 번 다 압도적인 연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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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빵~~~하는  시작과 폭포처럼 쏫아지는 피아노 소리로 사람 기를 죽이고 시작하는

협주곡의 황제 피아노 협주곡의 모든것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자신의 후견자 겸 제자인 루돌프 대공을 위해, 1809년에 프랑스 군대의 포격이 쏟아지던 빈에서 완성한 작품으로, 작곡한지 약 2년 반 뒤인 1811년 11월 28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에서 성공리에 초연됐다.

초연 당시에, 피아노 파트는 프리드리히 슈나이더 (1786 - 1853)가 협연했으나, 지휘는 베토벤 자신이 직접 맡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한 베토벤의 제자인 카를 체르니 (1791 - 1857)가 협연한 빈 에서의 첫 연주(1812년 2월 11일 밤)때에는 무지한 청중의 무덤덤한 반응을 받았으나, 그 이후로 피아노 협주곡 역사상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월광' 소나타 또는 '운명' 교향곡 등의 별칭은 대체로 베토벤의 뜻과 무관하게 그의 사후에 후세 사람들이 붙인 것이나, 이 피아노 협주곡의 '황제'라는 별칭은, 베토벤의 막역한 친구인 독일계 영국인 피아니스트 겸 출판업자 요한 B. 크라머 가 런던에서의 출판을 위해 넣은 것으로  사전에 베토벤과의 교감이 이뤄졌다고 볼 수도 있다.

곡의 구성은 다음과 같으며, 총 연주 시간은 38분 정도이다.

    Allegro
    Adagio un poco mosso
    Rondo - Allegro ma non troppo

베토벤의 다른 마지막 협주곡들처럼, 피아노 협주곡 5번의 첫 번째 악장 역시 꽤 길다. 이 협주곡의 제1 악장 도입부분에서 피아노 카덴차는 즉흥이 아니라 악보대로 연주되며, 제2 악장과 제3 악장 사이는 쉬임 없이(즉 attacca 로) 연주된다.
출처:위키

러시아의 샛별 Sudbin 의 연주는
담백하고 세밀하며 그의 카덴차는 오케스트라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윈윈 하는 
멋진 모습으르 보여줍니다.
상당히 많이 연구한 모양. 녹음 또한 훌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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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키보드 협주곡중 라르고

내가 살아 있음을 감사하게하는 신이 만들어 적어준 악보
바흐 키보드 협주곡 "라르고"


바흐의 협주곡 열세 곡은 한 대 이상의 하프시코드와 현악기를 위한 곡들로, 라이프치히 시대의 작품이다. 아마 1729년에서 1744년경에 음악 감독으로 있던 콜레기움 무지쿰을 위해 이 작품들을 썼을 것이다. 이 작품들은 이전에 쓴 현악 협주곡을 편곡한 것들로, 가끔 아들들인 빌헬름 프리데만과 카를 필립 엠마누엘이 콜레기움 무지쿰에서 연주를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바흐의 하프시코드 협주곡은 훗날 건반 협주곡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설령 이 작품들 중에 C장조 협주곡(BWV 1061)만이 유일하게 원래부터 두 대의 하프시코드를 위한 건반곡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바흐의 전기 작가인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은 이 작품에 대해 “바로 어제 작곡한 것처럼 신선하다. 마지막 알레그로는 정석을 그대로 따르는 훌륭한 푸가이다.”라고 했다.

1,2 두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바흐 스페셜 리스트중 한분이십니다.
투명한 물속에서 유리구술을 건져 올릴때의 그 느낌. 그대로 연주 하시는분.

[네이버 지식백과] 하프시코드 협주곡 [Harpsichord Concertos]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클래식 1001, 2009.6.1, 마로니에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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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가 첼로 협주곡


검은 템즈강 저 밑에서붙어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억누르고 영혼으로 써내려간 
엘가의 첼로 협주곡

엘가의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인 첼로 협주곡입니다.

이 곡은 굉장히 슬픈 곡입니다 어째 곡 전체가 다 멜랑꼴리한 선율을 가지고 있지요

단 한번도 밝은 느낌을 주지 않아요 하지만 그래서 더 좋은 곡인거 같습니다

특히 첼로 협주곡인 만큼 첼로의 소리가 정말 매력적인 곡이죠

출처:골든이어

엘가의 첼로 협주곡이 이자리에 서기까지 뒤프레를 빼고 이야기 할 수 가 없습니다.

나중에 꼭 이 분의 연주를 찾아서 들어보시고

그 슬픈 이야기도 찾아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Queyras Belohlavek 자체가 복합적인 연주 스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역시나 엘레강스하고 나이스한 스타일이 이 어둡고 습한 곡을

잘 해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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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르작 첼로 협주곡

촌스러움이 세계를 정복하다.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

1894년 가을, 드보르작은 자신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 될 첼로 협주곡(B단조)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이미 피아노 협주곡을 비롯한 다양한 악기들을 위한 협주곡들을 작곡했고 그 모든 경험이 이 작품 속에 녹아 들어가 있다. 사실,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은 몇 달 전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느낀 강렬한 체험에서 출발했다. 그때 빅터 허버트(Victor Herbert)라는 작곡가의 첼로 협주곡 2번을 처음 듣게 된 드보르작은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경험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드문 편성인 세 대의 트롬본을 사용한 점이 드보르작이 받은 감동을 증명하고 있다. 작곡가의 미국 체류 경험은 이 첼로 협주곡에 새로운 영감을 제시했으며, 미국의 아프로-아메리칸 문화가 체코의 슬라브 문화와 만나서 의미 있는 형식을 이끌어냈다. 만약 드보르작이 유럽에서만 활동했다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로 협주곡은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첼로 협주곡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이 작품의 초연은 작곡가와 찰떡 궁합을 자랑하던 첼리스트 하누슈 비한(Hanuš Wihan)과의 관계에 균열이 일어나면서 복잡해졌다. 런던 필하모니는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 초연자로 첼리스트 레오 스턴(Leo Stern)을 강력하게 밀어부쳤고 작곡가는 격렬하게 반응했다. “미안합니다만 이 첼로 협주곡을 지휘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오랜 친구인 비한에게 초연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런던 필하모니가 나의 첼로 협주곡을 그 날 꼭 연주해야 한다면, 저는 함께할 수가 없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요. 다른 기회가 또 있을겁니다.”

드보르작 자신은 이 말을 지킬 수가 없었다. 결국 런던 퀸즈 홀에서 1896년 3월 19일에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런던 필하모니와 레오 스턴이 세계 초연의 영광을 안았기 때문이다(같은 해 4월 17일에 이루어진 프라하 초연 때도 스턴이 연주했다). 이 일로 인해 체코 음악계의 거물이었던 비한과의 사이는 더욱 틀어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드보르작의 마음 속에는 이 작품을 위해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애썼던 스턴이 아니라 계속 딴지를 걸었던 비한을 향해 열려 있었던 것 같다. 첼로 협주곡의 헌정을 비한에게 바쳤던 것을 보면 말이다.

이 작품에 대한 브람스의 반응은 잘 알려져 있다. “누군가가 이와 같은 첼로 협주곡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벌써 오래 전에 이와 같은 작품을 썼을 것이다” 그만큼 드보르작의 이 작품은 19세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첼로 협주곡이다. 영국의 첼리스트 줄리어스 해리슨은 “나는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이 낭만 음악이라는 넓은 정원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꽃이라 생각한다” 라고 말하며 이 곡의 위대함을 칭찬했다.

이시대에 가장 로맨틱한 체리스트

카프송의 전매특허 레퍼토리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한느 첼리스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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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만첼로협주곡

첼로를 독주 악기로 성공시킨 행복했던 슈만의 추억
슈만 첼로 협주곡


슈만 역시 첼로를 위한 협주곡을 작곡하는 데 많은 고민과 시간을 거쳤음이 분명하다. 협주곡을 작곡하지 않았던 슈베르트는 예외로 치더라도, 그의 선배격인 모차르트나 베토벤은 물론이려니와 동시대 동료인 리스트나 쇼팽, 멘델스죤, 브람스 등등 역시 첼로 협주곡을 작곡하지 않았다. 19세기에 들어서자 바이올린과 마찬가지로 첼로를 위한 작품 수는 점차 감소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낭만주의 시대의 작곡가들은 당시에 유행했던 피아노를 반주로 사용함으로써 첼로라는 악기의 가능성을 독주악기로서 개성을 발휘하게끔 이끌었다.

베토벤, 브람스, 쇼팽 등이 작곡한 첼로 소나타들의 경우가 바로 그 예다. 첼로는 독주악기로서, 그리고 오케스트라에서 사용되는 가장 서정적인 악기가 되었다.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에서의 환상적인 레치타티보도 그러하거니와 브람스의 교향곡에서도 선율을 주도하는 악기는 바로 첼로였다. 더군다나 브람스는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2중 협주곡]에서도 첼로의 역할과 비중을 높게 할애해 독주 악기로서 첼로가 가진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했다.

19세기 초중반은 첼로라는 악기에 대한 비르투오소적인 관점이 팽배해지던 시기였다.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 이후 첼로에 대한 관심은 본격적으로 증폭되기 시작했다. 생상스, 랄로를 비롯하여 미요, 뒤티외, 포레, 댕디, 미요, 뿔랑,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 브리튼 등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첼로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었다. 특히 드뷔시의 [첼로 소나타]와 코다이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 달라피콜라와 크세나키스 등의 작품들은 첼로에 대한 풍부한 가능성과 표현력을 확장시킨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가운데 슈만의 [첼로 협주곡]이야말로 그 기법과 표현력, 형식면에 있어서 선구자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첼로라는 악기는 첼로 협주곡을 작곡하기 이전부터 슈만에게 있어서 대단히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슈만과 첼로는 대단히 극적이며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그 인연은 슈만의 마지막 작품과 관련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마지막 작품은 피아노 작품으로, 1853년 10월 15일부터 18일 사이에 작곡한 [아침의 노래 gesänge der frühe] Op.133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작 슈만의 마지막 관심 대상은 바로 첼로였다. 1853년 11월 뒤셀도르프에서 작곡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로망스]라는 작품이 슈만의 진실된 마지막 작품인 것이다. 슈만이 세상을 뜬 뒤 40여 년이 지난 1893년에 클라라 슈만은 요하임의 권유로 이 작품을 불에 태워 파기해버렸는데 만약 이 작품이 지금까지 전해졌다면 슈만의 천재성이 최고도로 발휘된 감동적인 걸작으로 평가받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사망 전마지막 행복한 시기에 작곡된 작품

1849년에 슈만은 괴테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드레스덴에서 체류하고 있었다. 슈만은 오랫동안 공을 들였던 괴테의 [파우스트]에 의한 같은 제목의 극음악을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바이마르에서 공연했다. 당시는 슈만에게 있어서 풍부한 결실의 해로서 수많은 합창곡과 관악기용 작품이 탄생했다. [피아노와 호른을 위한 네 개의 행진곡] Op.76, [피아노와 클라리넷을 위한 환상 소곡집] Op.73, [네 개의 호른과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체르트슈튀크] Op.86 등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동안슈만은 마음 속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진정한 음악가를 만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도시를 떠난 슈만 부부는 운 좋게도 1850년 가을 뒤셀도르프에 새로운 음악 감독으로 부임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라인란트 지방의 자유롭고 친절한 분위기가 슈만 부부로 하여금 행복한 나날을 꿈꾸게 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클라라는 남편이 지휘대에 오르게 된 것을 진정으로 기뻐했다. 이렇게 작곡과 연주 모두에서 로베르트는 진정한 음악적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 이분의 모음을 한번 소개한적이 있습니다.
독일출신의 세계적 첼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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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히터.호로비츠.루빈스타인.제르킨,켐프,에밀길레스.프랑소와즈.미켈란젤리.아르헤리치.
폴리니,박하우스,리파티,코로토,브렌델,아라우,뒤프레,로스트로비치,카잘스,푸르니에,장드롱 등은
일부러 포함하지 안았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비까 번쩍한 저분들의 녹음은 나중에 찾아서 들어보세요.^

저는 키신 빠돌이입니다.
솔직히 저기 추천 리스트 전부 키신으로 채우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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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량이 부족해서 더 정보를 넣고 싶지만 넣지 못하네요.
그럼..


à la belle étoile


모짜르트를 빼고 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다려주세요.^

공간이 조금 남는것 같으니 보너스 영상

정명훈+키신 라흐마니노프 2번 전곡

예프게니 키신 라흐마니노프2번 지휘정명훈 + 비창 교향곡 까지.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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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세븐중 도서관 씬



 에반게리온 아스카 라스트 전투씬 


세상의 모든것을 포용한 바흐 관현악 조곡
  
 바흐가 30대 쯤에 작곡에 미쳐 있을때, 자고 일어나면 작곡만 하던 그 시절.
    교회, 영주등 그당시 상위 계급의 빨때꼽고 곡을 써내라고 했지만,
    거침 없이 작곡하여 다 만족 시켰던 그시절 만들어진 곡입니다.
    당연히 창작열 최고조 일때라서 곡의 수준이 엄청납니다.
    오늘날의 조곡이 모음집을 뜻하는데, 바흐시대는 조곡 형식이란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로크 시대는 무슨 조곡 어쩌구 조곡 하는게 무진장 많아요.
    각설하고 이 음반은 1 번의 그 장엄함으로 시작해서
    3 번으로 넘어가면 그 유명한 "AIR" 가 납옵니다.
    우리가 "지 선상의 아리아"라고 알고 있는 곡이 이겁니다.
    아마 편곡만 한 1 천가지는 될듯.
     
     프랑스풍의 스케일 큰 서곡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독일에서 '서곡들'이라고 불리우는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타일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결합했다. 라이프치히의 칸토르 바흐는 그의 콜레기움 무지쿰을 위해 단순히 춤곡들을 엮어놓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대조의 효과를 강조하고, 관현악을 세련되게 다듬었으며, 대위법적인 요소를 강화하여 자신만의 스타일로 이 장르를 재창조했다. 2세기가 지났지만, 바흐의 이 걸작은 대체 불가능한 바로크 시대의 보물로 남아있다.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는 시대 악기 연주로서는 쉽사리 도달하기 힘든 세련미와 기교적 완벽함을 바탕으로 바흐의 이 걸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모든 시도의 새로운 종착역 같은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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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수상음악

바로크음악의 화려함의 끝판왕 수상음악

《수상 음악》(水上 音樂, Water Music)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이 작곡하여 여러 관현악 악장을 모은 곡으로, 흔히 세 모음곡으로 여겨진다. 조지 1세 임금이 템스 강에서 연주회를 요청하여 1717년 6월 17일 초연되었다. 이 연주회는 왕의 유람선 선상에서 임금과 측근들이 듣는 가운데 50명의 악사들이 공연하였다. (여기에 참석한 왕의 측근 가운데는 볼튼 공작부인, 뉴캐슬 공작부인, 고돌핀 백작부인, 킬마르노크 부인, 오크니 백작 등이 있었다) 조지 1세는 이 곡을 무척 좋아하여 지친 악사들로 하여금 이 곡을 세 번이나 더 연주하도록 명령하였다고 한다.


자곡가의 의도와 다르게 사용된 귀족의 선전음악 왕궁의 불꽃놀이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王宮의─音樂, Music for the Royal Fireworks, HWV 351번)은 1749년 조지 프리드릭 핸델이 작곡한 모음곡으로, 1749년 4월 27일 런던의 그린 파크에서 불꽃놀이를 열기 위하여 영국의 조지 2세 임금이 요청하여 만든 음악이다. 이때 불꽃놀이 행사는 1748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종식되고 엑스라샤펠 조약이 체결되었음을 축하하기 위해 알렸다.

연주 악사들은 극장 설계자인 세르반도니가 고안한 특별 건물에서 연주를 하였다. 이 음악은 토머스 드굴리에(Thomas Desguliers)[1]가 계획한 왕궁 불꽃놀이 행사의 배경 음악이었다. 그러나 음악에 비해 불꽃놀이는 제대로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조지 2세의 부조가 무너지고 난 뒤 거대한 목조 건물에 불이 붙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은 행사 6일 전인 4월 21일에 벅스홀 가든에서 리허설을 해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공연한 바 있었다. 1만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각자 2실링 6펜스를 내고 공연에 몰려들어, 당시 새로이 건설했던 런던 다리의 중앙 아치가 무너져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어 이곳으로 가는 주요 도로가 마차로 3시간 동안 교통 정체를 일으켰다.

출판 당시 헨델은 이 곡을 서곡으로 내놓길 바랐으나, 왕실에서는 인기 없던 조약과 군주를 위한 선전 수단으로 삼고자 이 곡을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이라고 명명하도록 하였다.
출처 : 위키


호른과 오케스트라가 화려한 대화를 펼치는 1곡에서부터 지휘자 사발의 빼어난 해석이 돋보인다. 참으로 나긋나긋하면서도 상쾌하다. 제 3곡 프랑스풍의 춤곡 부레도 우아하기 그지없는데, 특히 애조띤 표현에서의 오묘한 표정이 일품이다. 사발의 지휘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넘친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하지만  절대로 과장하지 않고 바로크 양식에 매우 충실한 연주를 들려준다.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에 관한 한, 사발의 연주가 지금까지 나온 모든 음반의 연주를 통틀어 가장 매혹적인 것이 아닐까! 
물론 다른 명반도 많지만
워터랑 불이랑 같이 있고 게다가 사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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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브란덴부르크

글쓴이가 젤 먼저  돈 주고 샀던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안는 음악!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작곡한 총 여섯 곡의 협주곡 세트. 떡밥처럼 되어 있는 제목에 낚이거나 키워를 벌일 가능성이 충만한 곡인데, 실제로 이 곡에 대한 학술적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예 이 곡만을 파고든 책까지 나와 있을 정도.


1. 개요 
바흐는 수백 곡에 달하는 칸타타나 성경의 복음서를 기본으로 한 수난곡을 비롯한 종교음악 작곡가로 일컬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소나타나 협주곡, 독주곡 등 세속 기악곡도 꽤 여러 종류를 작곡했다. 1721년에 완성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협주곡 세트는 그 중 가장 유명한 축에 속하는데, 다만 제목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이 세트는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공작이었던 크리스티안 루트비히에게 헌정되었는데, 곡의 이름도 공작의 영지였던 브란덴부르크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작곡될 때부터 브란덴부르크 공작에게 헌정하겠다고 마음먹고 쓴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실제로 악기 편성을 살펴보면 오히려 브란덴부르크 공작 소속의 악단보다는 자신이 일하고 있던 쾨텐 궁정악단의 편제에 더 적합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협주곡' 이라는 명칭도 고전 시대 이후 확립된 것과 꽤 차이가 많은데, 온전히 이해하려면 바로크 시대의 협주곡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곡을 관현악 장르에 넣을지, 아니면 실내악의 범주에 놓고 볼 것인지에 대해서도 꽤 논란이 많았다.


2. 각 곡에 대해 
일단 곡에 따라 다양하게 첨가되는 독주악기나 관악기 등을 제외하면 현악 파트의 기본 편제는 현악 5부(바이올린 I&II-비올라-첼로-비올로네를 택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을 현대 관현악처럼 한 파트에 여러 명이 들어가는 현악 합주로 보느냐, 아니면 파트 당 한 사람씩 쓰는 경제적인 실내악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연주 편성이 크게 달라진다. 그리고 3번이나 6번같이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그리고 바로크 음악의 감초인 통주저음도 물론 쓰이는데, 대개 하프시코드(독일어로는 쳄발로)가 맡는다. 독주 악기나 그에 준하는 파트가 앞에 나서는 대목이나 느린 악장에서는 모든 현악 파트가 쉬고 첼로 한 대만이 따라붙는 경우가 많은데, 모든 곡이 다 그런 것도 아니다. 독주 악기의 선택에 관한 문제도 있어서, 연주하는 입장에서는 꽤 골치아픈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 듯. 물론 이것을 다양한 선택의 여지로 해석하고 즐기는 쪽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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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엔하위키미러

생명력과 기쁨이 흘러 넘치는 이탈리아적 미감의 극상!

알렉산드리니는 마치 바흐가 원하는 최고의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 수없는 연습을 통해서 이 음반을 만들었다. 

*그라모폰 에디터스 초이스
*인터내셔널 레코드 리뷰 - 커버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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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이랑 딱 떨이지진 안지만 참고하시라고, 연주가는 같은팀


세상의 모든 아침. 그 노래 그 작곡가 마랭마레

1656년, 파리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음악공부를 시작했고 성가대에서 노래
했다. 호트만(Hotman)과 쌩콜롱브(Sainte-Colombe)에게 비올을 사사하고
20살 때 왕실 오케스트라에 독주자로 입단해서 연주했다. 같은 무렵에 장 밥티
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가 이끌고 있었던 왕립 음악 아카데미 오케스
트라에서도 연주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륄리로부터 작곡기법을 익혔다.
륄리에게 배우는 동안 그의 오페라를 지휘하기도 했다. 1676년에 궁정음악가
로 시작해서 1725년까지 루이 14세와 15세를 위해서 근 50여년간 봉직 했다.

작곡가로서는 5권의 비올 소품집을 썼고(이 곡집엔 550곡 이상의 다양한 비올
작품이 있다), 그 작품들이 당시 궁정에서 대단한 인기를 차지했다. 심지어는
“비올 제국을 세웠다”는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이밖에 륄리의 영향으로 4곡
의 오페라 <알시드, Alcide>, <아리아드네와 바카스, Ariadne et Bacchus>,
<알시오네, Alcione>, <세밀레,  Semélé>를 썼고, 트리오 소나타, 테 데움 등
의 작품이 있다. 이들 작품들은 그가 활동하던 시대에 도처에서 자주 연주되었
다. 마랭 마레는 당시 이탈리아의 음악적 영향 아래 있었던 프랑스 음악을 독
창적인 프랑스 음악으로 만드는데 이바지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비올은 17세기와 18세기에 널리 연주된 악기로 크기에 따라서 모두 9종이 있었
다. 그 모든 비올을 통칭해서 비올라 다 감바(viola da gamba)라고 불렀다. 마
렝 마레의 연주가 얼마나 신기에 가까웠는지 블랑(Hubert le Blanc)은 “천사처
럼 연주했다”고 썼고, 요한 발터(Johann Gottfried Walther)는 “비교할 자 없
는 프랑스 비올리스트”라고 놀라워했다. 또한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유럽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작품”이라고 요아힘 네마이트(Joachim Christoph
Nemeit)가 평가했고, 티톤(Titon)은 “풍요롭고도 우아한 재능이 넘쳐나는 작
품. 어디에서건 훌륭한 맛과 놀라운 다양성이 있다”고 말했다.

마레는 카트리느 다미쿠르와 결혼하여 19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의 음악인생
은 1991년에 제작된 영화 <세상의 모든 음악, Tous les matins du monde>에
서 잘 그려졌다.  

출처:곽근수의 음악 이야기

마리안 뮬러는 제가 특집으로 다룬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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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첼로 조곡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작곡한 여섯 개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역사상 무반주 첼로 솔로를 위해 쓰인 최고의 작품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곡들은 바흐가 en:Köthen에서 카펠마이스터로 활동했을 때인 1717년부터 1723년 사이에 쓰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모음곡들은 다양한 기술적 요소, 풍부한 감정적 표현, 그리고 바흐의 호소력 짙은 음색을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음곡들을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바흐의 작품으로 만들어준 것은 바로 '친근함'이 아닌가 싶은데, 이는 각각의 스타일을 열령하게 추종하는 애호가들이 원하는 만큼 다양한 음악적 해석을 바탕으로 녹음한 곡들이 많다는 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원래 이 모음곡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다리 사이에 놓고 연주하는 다 감바 스타일의 첼로가 아닌 바이올린처럼 어깨에 얹고 연주하는 다 스팔라 악기를 위해 작곡되었다고 한다. Sigiswald Kuijken과 Ryo Terakado는 오늘날 비올론첼로 다 스팔라로 알려진 이 악기로 연주한 첼로 모음곡 음반을 발표했는데 이 악기들은 악기 제작자 Dmitri Badiarov에 의해 복원되었다. 그 당시의 악기들을 일컫는 용어의 범람은 오늘날 큰 혼란을 유발했으며, 이 덕분에 "바흐가 의도했던" 악기가 무엇인지에 관한 토론은 현재진행형이다.

모음곡들은 바이올린, 비올라, 더블 베이스, 비올라 다 감바, 만돌린, 피아노, 마림바, 클래식 기타, 리코더, 프렌치 호른, 색소폰, 베이스 클라리넷, 바순, 트럼펫, 트롬본, 유포니움, 그리고 튜바와 같은 다양한 악기들로 편곡되어왔다.

모음곡들이 작곡된 연도를 완벽히 정립하는 것은 모음곡들이 작곡된 순서와 바이올린 소나타와의 전후관계를 고려해보면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작품들의 스타일을 비교분석했을 때, 첼로 모음곡들은 바이올린 소나타들이 작곡된 1720년 이전에 쓰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중론이다.

첼로 모음곡들은 1900년대 이전에는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았고 보통 이 작품들이 에튀드의 목적으로 쓰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는 13세 때,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헌책방에서 그뤼츠마허판본의 첼로 모음곡 악보를 발견했다. 그가 이 곡을 공개적으로 연주한 것은 그의 나이 48세였던 1925년이었다. 그는 그의 연주를 녹음하는 것을 동의했고, 처음으로 여섯개의 조곡 전부를 녹음한 그의 음반은 곧 유명세를 탔고 지금도 여전히 사랑받는 연주 중 하나이다.

무반주 첼로 조곡에 피아노 반주를 작곡하려는 시도는 슈만에 의해서 상당히 진전되었고, 1923년 레오폴드 고도프스키는 모음곡 2번과 3번, 5번을 솔로 피아노를 위해 대위법을 사용한 편곡을 완성했다.

바흐의 바이올린 소나타와는 다르게,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자필 서명된 악보는 현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작곡가의 의도를 완벽하게 반영하는 연주용 원본 악보는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바흐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안나 막달레나의 자필본을 포함한 2차 자료들을 분석해서 슬러나 기타 아티큘레이션 기호를 제외한 많은 부분에서 원본 악보에 상당히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단독 인정된 버전이 아닌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다윈시에 위치한 찰스 다윈 대학교 음악 대학의 Martin Jarvis 교수의 최근 연구 결과는 안나 막달레나가 그녀의 남편의 이름으로 된 이름의 작품 중 몇몇 곡을 직접 작곡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Jarvis는 막달레나가 여섯 개의 첼로 모음곡을 쓴 장본인이며, 골드베르크 변주곡 (BMV 988)의 '아리아'를 작곡하는데 관여했다고 주장한다. 많은 수의 음악학자들과 연주자들은 이러한 가정의 근거가 빈약함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카잘스가 생전에 사용했던 첼로, 마태오 고플리러와 스승 레오나드
로즈의 활로 연주하는 그의 바흐는 
가슴 넘치는 감동이 있습니다.
현대 음악 전문가신데, 그가 보케리니로 데뷔하던
시절이 떠오르면서, 역시나 시대의 첼리스트임이
여지 없이 들어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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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CD 입니다.



쿠푸랭 키보드


몇 백년전 작곡한 그곡이 오늘날 더 세련되게 들리는 마술 쿠프랭
쿠프랭의 키보드 워크


프랑수아 쿠프랭 (François Couperin, 1668년 ~ 1733년) 은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오르간 연주자이다. 대(大) 쿠프랭이라고도 한다.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에 걸쳐 파리에서 알려진 음악가의 가계(家系)인 쿠프랭 일족(一族) 가운데에서 최대존재라는 점과, 그의 백부(伯父) 역시 같은 이름 프랑수아이기에 구별하기 위하여 그렇게 부르며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생애

쿠프랭가(家)는 루이, 프랑수아, 샤를의 3형제가 장크 샹폴 드 샹포니엘(1602-1672, 프랑스 클라브생 음악의 창시자라고도 한다)에 의하여 파리에 초대받은 후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루이, 그리고 그가 죽은 후는 샤를이 생 제르베 성당의 오르간 주자로 있었으나 대(大) 쿠프랭은 샤를의 아들로 그도 역시 이 성당의 오르간 주자로 있었다(샤를이 죽은 후는 이 직책을 대행하고 있던 랄랑드에게서 1685년 내지 1686년에 이어받아 1723년에 조카인 니콜라스에게 양도했다). 1693년 콩쿠르 결과, 그를 부친과 함께 가르친 토므랑의 후임으로 왕궁 교회당의 4인과 오르가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혔다. 그 뒤 부르고뉴공에게 클라브생과 작곡을 가르친 것을 계기로 왕족·귀족의 음악교사가 되었고 이름 높은 루이 왕가의 신임도 두터웠으나 끝내 별로 높은 지위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작품 세계

그는 오르간 음악, 종교음악, 나아가서는 실내음악의 작곡가로서도 뛰어났으나 특히 그의 이름을 영원토록 한 것은 클라브생을 위한 작품군(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샹보니엘에서 루이 쿠프랭, 장앙리 당글베르(1628-1691), 니콜 르베그(1631-1702, 오르가니스트), 리자베트클로드 자케 드 라 게르(1664경-1729), 대(大) 쿠프랭, 루이 마르샹(1669-1732, 오르가니스트), 루이 니콜라스 크레랭보(1679-1749, 오르가니스트), 라모, 루이 클로드 다캉(1694-1772)으로 계속되는 베르사유 악파 클라브생 음악가의 빛나는 계보에서 대(大) 쿠프랭이야말로 뛰어난 거장임에 틀림없다. 그는 4곡에서 수십곡에 이르는 소곡을 모음곡으로 정리하여 오르돌이라 했다. 한곡 한곡의 각 소곡은 전통적인 춤곡적인 요소를 남기고는 있으나 문학적 내지 회화적인 표제를 지니며 암시적으로써 듣는 이의 상상력을 한층 활발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섬세한 울림과 우아한 꾸밈음(裝飾音)으로 장식된 유려한 멜로디는 이른바 로코코의 세련된 감각미로 넘쳐흐르나 밑바닥에는 때때로 깊은 우수가 간직되고 또한 기지(機智)와 풍자를 간직하고 있다. 더구나 항상 절도가 있는 억제가 오히려 감성의 풍요함을 돋보이게 한다. 억제와 고귀한 질서에 의한 애호(愛好)로 쿠프랭의 고전주의적인 성격은 뚜렷하며 그는 라모와 함께 프랑스 클라브생 음악을 절정으로 쌓아올렸으며 '이성(理性)과 감정의 약동 사이의 올바른 균형에 두어진 표정적인 감성'으로 바흐나 헨델과 같은 이국(異國)의 거장들에게도 널리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大) 쿠프랭의 클라브생곡은 1713, 1717, 1722, 1730년에 출판된 4권의 곡집에 수록되어 있는 240곡(27오르돌)에 덧붙여 1716-17년의 전주곡 6곡이 있다. 이 밖에도 모테토나 종교곡을 주로 하는 성악곡, 오르간을 위한 2개의 미사곡, 코렐리의 영향을 보이며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종합하려는 듯한 여러 가지 실내악곡 등, 어느 작품이나 모두 거장 대 쿠프랭의 이름에 손색이 없다고 하겠다.

출처:위키

틱 톡 쇽, 쿠프랭, 배회하는 망령, 편물짜는 여자, 키타이롱의 자명종, 선발된 뮈제트, 아탈랑트, 파사칼리아, 
뮤즈 플랭탱, 전리품에 계속되는 노래, 전쟁의 소음, 자장가 또는 요람에의 향수, 몽상가, 귀여운 어린이 또는 사랑스런 라주르 외 

바로크 음악 해석에 탁월한 선택! 라벨의 솔로 피아노 전곡집과 장 필립 라모 헌정 녹음의 호평으로 ‘디아파종 도르’, ‘르몽드 드 라 뮈지크’의 쇼크상 외에도 BBC 뮤직 매거진, ‘스탠더드’ 지에서 각종 상을 수상하며 세계 피아노 음악계에 큰 기대를 모으고 있는 알렉상드르 타로는 2006년 11월에 한.불 수교 120주년을 기념한 내한 공연에서 순도 높은 음악세계를 들려준바 있다. 매우 지적이고, 스타일리시한 연주를 들려주는 그는 HMF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서 2006년 5월 파리 상젤리제 극장에서의 공연은 그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크게 드높이게 된 연주회였다.. 특히 그의 라모 등의 바로크 음악 해석은 클라브생 연주자도 인정할 만큼 뛰어난 해석을 하고 있다. 쿠프랭의 클라브생 모음집은 그의 실력이 유감없이 드러난 음반으로 현대악기와 고악기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속에서 타로의 연주는 그런 논쟁이 다 필요없음을 역설하고 있다. 올해를 빛낼 가장 휼륭한 음반 중에 하나이다. *음악의 세계 쇼크, 클래식투데이 만점, 스케르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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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델 키보드 조곡


달빛흐르는 푸른밤을 날아서 추억을 마주하는 시간
헨델의 키보드 조곡


<런던 모음곡>으로도 알려져 있는 1720년 헨델이 직접 출판한 건반을 위한 8개의 대 모음곡은 풍부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가득한 작곡가의 초기 걸작이다. 모스크바 출신으로 비엔나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리사 스미르노바는 헨델, 바흐에서 하이든, 슈베르트, 그리고 슈체드린, 실베스트로프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스팩트럼의 레퍼토리를 자랑하고 있는데, 그렇기에 최근 유행하는 시대악기 연주의 흐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피아노의 풍성한 울림으로 작품의 아름다움을 한껏 펼쳐내고 있다. 특히 모음곡 2번 아다지오의 청아한 선율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연주를 전면에 내세움으로 그 차별화를 분명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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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시대의 대세 음악은 이것

"라 폴리아"

그윽한 품격으로 승화된 격정적 무곡


원래 포르투갈의 격렬한 무곡이었던 폴리아는 16,17,18세기를 거치는 동안 대중들의 인기를 독차지했고, 작곡가들은 이 선율을 가지고 많은 변주곡을 남겼다. 그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유명한 것은, 이 음반에서도 압권이지만, 단연 코렐리의 것이다. 코렐리의 작품같은 경우 우리는 오늘날 세련되고 달콤하게 편곡된 것에 익숙해있지만, 도저히 옛 악기, 옛 편성, 옛 방식으로 들려주는 그윽한 옛맛을 내지는 못한다.

* 디아파종 '황금상'
* 음악의 세계 '충격적인 명연주'
* 레페르트와르 '최고의 평점'

여러 작곡가의 라폴리아를 모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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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비노니 파헬벨.코렐리,바흐.헨델.비발디. 기타등등
바로크 대표곡 모음


원래 모음집은 이 시리즈에 넣지 안으려고 했으나
바로크의 특성상 곡이 짤막한게 툭튀어 나오는 식으로 한곡씩 있는 경우가 많아서
넣습니다.

이왕 넣는거 비교도 되고 서로 빠진것도 챙길겸 다양하게 4 개 넣었습니다.
다들 특성도 있고 연주도 훌륭합니다.

그랑사라방드만 mp3 입니다.
헨델의 사라방드(락음악에도 쓰임)가 여기에만 있어서..제대로 된것이..


현과 오르간 통주저음을 위한 아다지오 사 단조는 레모 자조토가 1958년 발표한 곡이다. 흔히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자조토가 작곡한 것이다.

레모 자조토는 알비노니의 작품을 연구한 사람으로, 2차 세계 대전 때 피폭된 드레스덴의 작센 주립 도서관의 잔해에서 알비노니의 이 작품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1998년 사망할 때까지 필사본을 공개하지 않았고, 그가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아, 자조토 자신이 쓴 작품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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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다울랜드가 흘렸을 눈물의 한조각
퍼셀의 보석같은 노래들.


헨리 퍼셀(영어: Henry Purcell, 1659년 9월 10일 ~ 1695년 11월 21일)은 영국의 작곡가이다.
 퍼셀의 대표 작품으로는 오페라,《디도와 에네아스》가 있다.


런던 출신으로 가수와 작곡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때부터 가곡을 쓸 만큼 재능이 풍부했지만 집안이 어려워 왕실 소년성가대에 들어가 하프시코드를 조율하거나 악기를 손질하는 일을 했다.[1] 존 블로에게 사사했으며 1677년에는 궁정의 상임 작곡가 및 지휘자가 되었다. 1679년부터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고 더 나아가 왕실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로도 활약했다. 그는 격무에 시달리다가 36세의 젊은 나이로 유언을 남기지 못할 만큼 쇠약해져 죽었다.[1] 짧은 생애 동안 400곡이 넘는 다수의 교회 음악과 기악곡을 남겼으며, 이 밖에도 《디도와 아이네아스 Dido and Aeneas》(1689)를 비롯한 《아더왕 King Arthur》 《요정의 여왕》 《인도의 여왕》 등의 오페라를 씀으로써 영국 바로크음악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곡은 메리 2세를 위한 장례 음악이었다.[1]

퍼셀의 작품들은 기수(奇數)의 소절(小節)로 이루어진 주제(主題), 불규칙한 프레징, 박자와 리듬의 충돌 등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것들로서 왕정복고(王政復古) 후의 영국음악은 그의 창작에 의하여 비로소 국제적 수준에 도달하였다.


O Solitude 란 재목으로 나오는 음반이 상당수가 됩니다.
이 제목 달고 나오면 잘팔려서...
이음반은 그중 당연 훌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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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당시 혁명과도 같았던 작곡가가 지금은 고전중의 고전이 된 경우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이탈리아어: 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년 1월 4일 ~ 1736년 3월 16일)은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 오르간 연주자였다. 그는 장중한 바로크 음악양식으로부터 명쾌한 고전파양식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활약하고 27의 나이로 단명한 천재적 작곡가로 오페라 부파의 초기의 중요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생애

중부 이탈리아 출신으로 소년 시대에 현저한 재능을 보였기 때문에 영주의 경제적 원조를 얻어 나폴리에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웠다. 그는 바이올린에 뛰어났으며 특히 교사들이 감탄해 마지 않는 즉흥 연주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1731년 21세로 음악원을 졸업하였다. 오페라 및 종교음악의 작곡가로서 데뷔했으나 그 뒤 불과 5년간 작곡가로 활약한 데 지나지 않았다. 한동안 나폴리 귀족의 악장으로 일했으나 그 동안 나폴리의 오페라 극장에도 진출하여 1733년에 발표한 막간극(幕間劇) <마님이 된 하녀>의 성공으로 페르골레시의 이름은 곧 전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죽은 후 파리에서 상연된 <마님이 된 하녀>가 루소를 중심으로 이른바 '부퐁 논쟁'을 야기시킨 일은 유명하다. 1734년 2월, 24세의 젊은 나이로 나폴리시의 예배당 악장 대리에 취임했다. 그러나 1735년경부터 지병(持病)인 폐병이 악화되어 다음해 2월 의사의 권유로 전지요양을 떠났으나 3월 16일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작풍은 장대한 구성력이 부족다는 평이 있지만 멜로디의 매끄러움, 신선한 아름다움과 풍부한 화성의 뉘앙스, 그리고 섬세함으로 걸출하다. 특히 성악의 텍스처(書法)는 광채를 느낄 수 있다.

    마님이 된 하녀

    그의 일생일대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18세기 후반에 볼 수 있는 오페라 부파의 전성 계기를 만든 역사적 작품이다. 등장 인물은 불과 세 사람이고 게다가 한 사람은 벙어리여서 전혀 노래를 하지 못한다. 오케스트라도 현악기만으로 된 소규모이다. 전부가 2막으로 되었다. 나폴리의 부호 우베르트는 하녀인 세르피나가 너무나 횡포를 부려, 결혼하여 세르피나를 내보내려고 결혼상대를 구해 오라고 세르피나에게 명령한다. 세르피나는 한 계략을 생각하여, 벙어리 하인 베스포네의 힘을 빌려 멋지게 우베르트의 부인으로 들어앉는다는 줄거리이다. 
출처:위키

바르톨리의 스테파니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디에고 파솔리스와 이 바로키스티가 우리시대 가장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는 카운터테너 필립 야로우스키와 데카에 데뷔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율리아 레즈네바와 함께 페르골레지 <스타바트 마테르>를 들려준다. 진정 최고의 기량이라고 할수 있는 야로우스키와 레즈네바의 하모니는 소름끼치는 서늘한 감동을 안겨주며, 파솔리스의 지휘는 명료하면서도 과도한 감정을 자제하여 페르골레지 <스타바트 마테르>의 영적 깊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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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학의 대가, 신비의 작곡가였던 라모

장-필리프 라모(프랑스어: Jean-Philippe Rameau, 1683년 9월 25일 ~ 1764년 9월 12일)는 프랑스의 작곡가이다. 
그는 후기 바로크를 대표하는 이론가이기도 하며, 
프랑스의 국민적 오페라, 발레 양식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음악이론가로서 근대화성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일대기와 작품

프랑스 디종에서 태어난 장-필리프 라모는 디종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인 아버지 밑에서 음악을 배웠다. 일찍부터 하프시코드와 오르간 연주자로 활약하였으며, 1706년 <클라브생곡집 제1권>을 출판하였다. 1715년에는 리용에서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으며, 여기에서 유명한 <화성론-Traize de l'harmonie>의 저술을 시작하고 1722년 파리에서 출판하여 세상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1723년부터 파리에서 거주하면서부터는 극장에 내놓을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클라브생 제2권>을 출간하여 호평을 받았다.

만년에는 프랑스의 악단을 통솔하는 궁정실내악작곡가가 되었고, 죽기 직전에 귀족으로 봉해졌는데 이 때에는 그의 명성이 점차로 높아져 1739년 걸작 <다르다누스-Dardanus>가 공연되고 있었다. 라모는 이론가 및 작곡가로서 역사상의 중대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화성론>의 발표이후 화음의 전위음악에 대한 이론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현대 기능화성법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는 주춧돌이 되었다 J.S.바흐와 더불어 12평균율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최초의 대가였다. 프랑스 궁정 오페라의 옹호자로서의 그는 륄리의 방법을 더욱 발전시켜서 이탈리아 오페라의 선율주의. 성악중심주의에 대항하여 후일의 글루크과 더욱이 바그너의 오페라 개혁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악작곡가로서의 그는 F.쿠프랭과 함께 표제적 경향의 모음곡을 다수 작곡하였는데 이 곡들은 오늘날 연주회 레퍼터리에 널리 애용되고 있다. 이들은 쿠프랭의 선율성과 장식인 세련보다도 더욱 근대적인, 힘찬 합리적인 화성의 표현을 가지고 있으며, J.S.바흐 등 많은 음악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발레, 오페라 분야에서는 J. B. 륄리에 의해 기초가 확립된 프랑스의 국민적 오페라-발레양식을 더욱 발전시켜, 음악적으로 보다 우월하게 만드는 데 공헌하였다.

그는 바흐나 헨델과 더불어 후기 바로크를 대표하기에 충분하나 프랑스적인 특성과 그의 작품을 계몽하기에 부족했던 프랑스악파로 인해 프랑스 밖으로 그의 작품들이 전해지지 못했다. 독일의 지휘자 니키시는 만일 “그가 독일인었다면 바흐보다도 더욱 위대한 음악가로 인정받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오페라로는 라모의 데뷔작인 서정 비극인 《이폴리트와 아리시》(Hippolyte et Arici)와 오페라-발레인《우아한 인도의 나라들》(Les Indes galantes)이 있다. 주요 저서로는화성론(Traize de l'harmonie, 1722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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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CD 입니다.

여러분은 어느새 하프시코드를 듣고 즐기고 게십니다.




소나타의 모든것을 확립한 스카르라티

나폴리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부터 당대 오페라와 오라토리오의 본좌 작곡가였던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였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음악을 매우 쉽게 접하고 배울 수 있었다. 아버지를 비롯해 당대 작곡가이자 음악이론가, 교사들이었던 가에타노 그레코,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 베르나르도 파스키니 등에게 하프시코드 연주법과 작곡, 이론, 화성법, 대위법을 배운 뒤 1701년에 나폴리 궁정 예배당 전속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로 부임했다.

1704년에 아버지 알레산드로는 아들을 이탈리아 반도 북동부의 베네치아로 보내 음악적인 경험을 더 쌓도록 했는데, 이 시기 동안 초기 건반 소나타를 비롯한 작품을 작곡하기는 했지만 정확한 활동 양상이나 일화는 잘 알려지고 있지 않다. 이후 1709년에 로마에 거주하고 있던 폴란드 망명 왕실의 여왕 마리 카시미르의 전속 쳄발리스트 겸 작곡가로 부임했고, 이 시기 동안 하프시코드 명연주자로 명성을 떨치면서 심지어 독일 출신의 동년배 라이벌 조지 프레드릭 헨델과 현피연주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다만 이 연주 대결은 그냥 높으신 분들의 여흥을 위한 것이었고, 이후에도 두 거장은 서로의 음악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계로 남았다.

로마 부임기에는 건반 소나타 외에도 여왕이 운영하던 사설 극장을 위해 여러 편의 오페라를 작곡했고, 1715년부터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성가대장을 역임했다. 이 시기에 영국 런던에서 자작 오페라를 상연하는 등 명망있는 작곡가로 입지를 굳혔고, 1719년 포르투갈 왕실에서 초빙 제의를 받고 성가대장을 사임한 뒤 리스본에서 당시 포르투갈 공주였던 마리아 막달레나 바르바라의 전속 음악교사 겸 쳄발리스트로 활동했다.

1727~28년에는 잠시 로마로 돌아가 일하면서 첫 아내 마리아 카테리나 젠틸리와 결혼했고, 1729년에 다시 스페인의 세비야로 가 4년 동안 부임하면서 그 지방의 민속 춤곡인 플라멩코를 비롯한 스페인 전통 음악의 강한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1733년에는 이전 고용주였고 1729년 스페인 왕세자와 결혼해 스페인 왕가의 일원이 된 바르바라 공주의 부름을 받고 왕실 전속 쳄발리스트 겸 작곡가로 부임했고, 이후 평생 동안 직책을 유임하면서 수백 편에 이르는 건반 소나타를 비롯한 작품들을 창작했다.

1742년에 첫 아내와 사별한 뒤에는 스페인 여성인 아나스타시아 마하르티 히메네스와 재혼해 여생을 보냈고, 당대 본좌 카스트라토였던 파리넬리와 친교를 맺고 그를 위해 성악 작품들을 써주기도 했다. 1757년에 마드리드에서 향년 71세로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산 노르베르토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앙타이는 마술을 부려서 자기만 따로 쓰는 
하프시코드를 만들어 낸다.

오색창연 이란 말은
이런 연주를 위해서 쓰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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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팡티에는 몰라도 이노래는 안다!

마르크앙투안 샤르팡티에(Marc-Antoine Charpentier, 1643년~1704년 2월 24일)는 프랑스의 작곡가이다. 
랄랑드와 비견되는 17세기 후반의 프랑스 종교 음악가인 동시에 몰리에르나 코르네유 등과 협력을 하여 코메디 프랑세즈를 위한 음악을 작곡하였고 오페라《메데》(1693)로 갈채를 받았다. 이탈리아에서 카리시미에게 사사하였을 뿐이나 륄리의 사망 후 이탈리아풍 부활의 움직임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만년은 교육과 종교음악 활동에 전념하였으며 100곡이 넘는 모테토 외에 많은 종교 음악이 있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힘찬 표현을 보이는 24곡의 《성스러운 이야기》는 카리시미의 오라토리오를 프랑스에 이입(移入)한 것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샤르팡티에의 ‘테 데움’은 텔레비전과 럭비에 의하여 더욱 유명해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유럽 방송 연맹이 방송 테마 음악으로 이 작품의 전주곡을 사용하고 있고, 6개국 럭비 토너먼트의 찬가로도 사용되고 있어 그 어떤 클래식 작품보다 대중적이라 할 수 있다. 

밝고 경쾌하며, 희망을 주는 듯한 느낌이 듣는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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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디 조화의 영감

지하철 환승역에서 울리는 멜로디
가 바로 비발디의 조화의 영감입니다.
 비발디의 조화의 영감은 CD로 2장 분량이 되는 꽤나 긴 곡입니다. 

간단히 곡 설명을 하자면
조화의 영감 -L’estro armonico-
비발디는 평생 쓴 500여개의 협주곡 중 절반 이상이 바이올린 협주곡입니다. 화성의 영감 no.6는 작품번호로는 RV356에 속합니다만, 비발디의 경우 작품 번호를 Ryom이란 사람이 정리한 RV를 사용하는데, RV의 경우 일반적인 op와는 달리, 작곡가가 작곡한 순서별이 아니라, 조성별로 정리했기 때문에 작곡 시기와는 관계 없습니다. 그리고 비발디가 클래식중에서도 정말 고전인지라, 정확한 작곡시기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이 바이올린 협주곡이지만, 조화의 영감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L’estro armonico'라는 부제 때문인데,  간단히 해석하면'estro'는 ‘영감’을 의미하고 'armonico'는 ‘조화의, 화성의’ 또는 ‘음악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합쳐서 '조화의 영감' 혹은 '화성의 영감'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출처:유명한 클래식이야기

그렇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때 본넘들입니다.
포첼의 신보도 좋지만 그녀는 제 스타일이 아니라서
이게 좀더 씨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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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CD 입니다.



텔레만

밥먹고 X 싸는 시간까지  아마도 양손으로 작곡해댔을  바로크의 핵심! 텔레만
자면서도 작곡했을듯...



"...코렐리와 쟝 바티스트 륄리는 단지 명예를 얻었지만, 텔레만은 모든 찬사 위에 있다."
 
- 요한 마테존(J.Mattheson), 작곡가이자 음악 평론가, 건반 악기 주자



1. 설명 
독일 태생의 바로크 작곡가이자 악장.

독일 마그데부르크(Magdeburg)에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법학을 공부했지만 뒤늦게 음악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처음에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이후에는 함부르크에서 악장을 맡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라이프치히 쪽의 악장 자리에 티오가 나자 거기에도 지원했지만 사실 이것은 훼이크로, 함부르크에게 자신의 봉급을 높여달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던 것.(…) 텔레만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함부르크의 악장으로 지냈다.

오늘날에는 클래식덕후가 아닌 이상 생소한 이름이지만 적어도 바로크 시대 당시만 해도 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선의의 경쟁을 펼칠 만큼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었다. 다만 바흐의 음악이 음악학적으로 파고들 만한 건덕지가 있는 대신 그만큼 일반 대중들에게는 진입장벽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고, 충분한 식견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도 즐길 수 있는 텔레만의 음악이 대중성 측면에서는 좀 더 유리했다.

바흐와 헨델에 비하면 4세 연상이었는데, 사적으로는 바흐와 상당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가 태어났을 때 그의 이름을 지어준 것도 텔레만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C.P.E.바흐와 텔레만의 끈끈한 인연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서 텔레만 사후 공석이 된 함부르크 악장 자리에 C.P.E.바흐가 임명되기까지 쭈욱 이르렀다.


2. 작품세계 
음악학적으로 텔레만은 후기 바로크를 빛낸 인물로 평가되며, 그의 일부 작품들은 고전파적 성향까지도 예견했다는 해석도 있다. 작곡에 있어서는 장르를 거의 가리지 않아서, 교회 음악과 세속 음악 양쪽에 모두 많은 공헌을 했으며, 오페라, 성악곡, 관현악곡, 실내악곡, 건반 악기용 소품, 모음곡, 협주곡 등등 별의별 분야에 손을 댔다. 독일뿐 아니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다른 지역에서 발흥하는 바로크 음악들도 한꺼번에 모아서 녹여냈으니 가히 바로크 음악세계의 도가니라고 부를 수도 있을 듯하다.

텔레만의 작품들은 듣기에 부담이 없고 간결하며 직관적인 선율을 지니고 있다. 복잡하고 현학적인 대위법이나 고난이도의 기교는 반대로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다르게 말하면 아마추어도 금세 연주가 가능할 만큼 대중적이고 무난한 악풍을 보여준다. 한 예를 들자면 36개의 건반 환상곡(TWV.33:1~33:36) 같은 경우는 바흐의 인벤션과 신포니아보다도 더 쉬운 내용이며, 유튜브에 7~8세 꼬꼬마들이 연주하는 영상들이 수두룩할 정도이다. 그 외에도 하프시코드를 위한 작은 푸가(TWV.30:21~30:26),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카논적 소나타(TWV.40:118~40:123), 네 대의 바이올린만을 위한 협주곡(TWV.40:201~40:204) 등등, 정말 기본적인 기량만을 갖춘 아마추어 하나, 둘, 셋, 넷 정도만 모이면 연주할 수 있는 작품들이 숱하게 많다.


3. 작곡하기 시작해서... 그냥 많이 작곡했습니다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 (기악곡 부문) 역사상 최다 다작 작곡가.

텔레만의 작품들은 당대에 많은 인기를 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거의 대부분이 잊혀졌으나, 음악학자들의 노력으로 인해 현재까지 상당수가 발굴된 상태이다. 그리고 그 작품의 수는 확인된 것만 무려 3,000~4,000여 곡(!)에 달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들이 발견되고 있다. 일부는 텔레만의 작품들이 아마 6,000~8,000여 곡에 달하지 않을까 예상하기도 할 정도이다. 아무튼 동시대의 다른 인물들 중, 아침마다 가볍게 푸가 한 곡씩 쓰면서 하루를 시작했다는 바흐는 천여 곡 넘는 수준으로 작품들이 정리되어 있으며, 의뢰를 받을 때마다 거의 비슷비슷한 수준으로 협주곡들을 마구 휘갈겨 써내려 간 비발디가 800여 곡 정도를 작곡했다고 알려진 걸 생각하면 흠좀무할 따름.(…)

사실 여기에는 안습한 속사정이 있는데, 텔레만이 이렇게 작품을 열심히 작곡해야 했던 건 그의 재혼한 아내였던 마리아 카테리나(Maria Catherina)가 도박 중독자라서(…) 어마어마한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작품을 출판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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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a Alta Ripa - Telemann - Overtures, Sonatas, Concertos Vol.3 - Musica Alta Ripa.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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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바로크 언저리에 걸쳐지면 다 바로크로 몰아서 넣었습니다.

바흐의 키보드 음악들.
얼리뮤직에 가까운 몬테베르디, 그레고리안찬트, 바흐의 칸타다와
요한 빠숑, 마테빠숑, 헨델의 수많은 오라토리오,
 먼가 바스락 거리기만해도 눈물을 흘렸다는 존 다울랜드는 
제가 지쳐서....빼버렸어요. 용량도 너무 많아요 .

칼리히터,호그우드,마리너,가디너,카라얀, 기타등등 기라성 같은
지휘자,고음악 지휘자등의 음반을
하나씩 찾아서 들어보시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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à la belle étoile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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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분 정도하는 동영상입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전체 화면으로 바꾸시고, 볼륨을 조금 높이신후 감상하세요.

정결한 여신 그 이름 마리아.
Maria Callas. 1923.12.2~1977.9.16
그리스어 풀네임은 '마리아 안나 소피아 카이킬리아 칼로게로풀루. 하지만 예명으로 축약한 이 항목의 이름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클래식 오페라의 소프라노 가수들 중 그야말로 왕본좌 누님.
개인으로서의 카리스마, 예술적 성취, 화려함과 비극이 뒤엉켜 이야기 거리가 풍부한 개인사, 그리고 세대에 걸친 거대 팬덤을 모두 갖춘 전설적 아이콘. 20세기들 대표하는 소프라노

 유년기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 있는 한 병원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그리스 이민자 부부였던 조지 칼로게로풀로스와 에반젤리아 디미트리아두였는데, 불행히도 부부 관계는 꽤 막장이었다. 가족에 별 관심이 없었고 매사에 의욕이 없던 아버지와 아이들의 장래에 지나치게 간섭하고자 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식들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는데, 칼라스의 경우 세 살때부터 노래에 재능이 있다고 여긴 에반젤리아의 강요 때문에 성악을 비롯한 음악 공부를 억지로 해야 했다.
실제로 칼라스의 노래 실력은 또래 아이들과 비교해도 꽤 괜찮은 편이었고, 뉴욕에서 열린 어린이 노래 경연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칼라스는 훗날 이 시절을 보람없고 지긋지긋한 고생의 나날이라고 부정적으로 회고했다. 게다가 아이들에게 성악 공부시키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던 조지도 시도때도 없이 부부싸움을 일으켰고, 결국 1937년에 에반젤리아가 두 딸을 데리고 그리스로 귀국하면서 별거에 들어갔다.

그리스 시절 
하지만 그리스에서는 그 동안 휘둘리고 살았던 딸들이 어머니와 자주 다투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내켜하지 않는 칼라스를 데리고 아테네 음악원에 입학 원서를 내 오디션을 보게 했다. 하지만 기초 성악 기교가 전무하다는 이유로 곧장 퇴짜맞았고, 이어 그리스 국립 음악원에서 두 번째로 오디션을 봤다. 오디션을 주관했던 성악 교수 마리아 트리벨라도 아직 다듬어지지 않아 거칠다고 인정하면서도, 가능성을 훨씬 높게 점쳐 입학 자격을 인정했다.

음악원에 입학한 칼라스는 트리벨라의 문하생이 되었는데, 트리벨라는 다소 어두운 목소리의 질감 때문에 종종 알토 음역이 적합하다는 주위의 평과 반대로, 소프라노 음역으로 테시투라(해당 성역의 가수에게 자주 요구되는 음역대를 일컫는 단어 )를 높이는데 중점을 두고 훈련시켰다. 칼라스는 이 과정에서 서양 성악의 기본 창법인 벨 칸토를 상당 수준까지 터득했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단히 서툴게 불렀던 어려운 오페라 아리아들도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또 어머니의 치맛바람이 불어닥쳤는데, 1938년에 공식 데뷰 무대에 출연한 직후 전에 뻰찌먹인 아테네 음악원으로 편입시킨다며 딸을 다시 데려가 오디션을 보게 했다. 이번에 오디션을 주관한 교수는 스페인 출신의 엘비라 데 이달고였는데, 교육 활동에 전념하기 전까지는 매우 뛰어난 기교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가수였다.

이달고는 칼라스의 목소리가 매우 열정적이고 극적이라고 긍정적인 평을 내렸고, 노래가 끝나자마자 합격 판정을 내렸다. 다만 즉시 입학하지는 못했고, 일단 아테네 국립음악원을 졸업하면 입학시켜달라는 어머니의 요구 때문에 1년 유예되었다. 아테네 음악원 입학 직전이었던 1939년 4월 2일에는 국립음악원 학생들이 제작한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공연에 산투차 역으로 출연해 오페라 무대에도 데뷰했다.

같은 해 가을에 아테네 음악원에서 두 번째 성악 전공을 시작했는데, 물론 지도 교수는 오디션 때 만났던 이달고였다. 이달고는 칼라스의 기교가 매우 출중하고 표현력도 훌륭하지만, 고음역이 약간 모자란다는 판단으로 자신의 콜로라투라 창법을 집중적으로 전수해 주었다. 국립음악원 시절에도 그랬지만, 칼라스는 제일 먼저 등교해 제일 늦게 하교하는 일이 예사였고 다른 교수들의 수업도 빠짐없이 청강하는 등 독종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칼라스, 무서운 아이...

아테네 음악원에서 졸업할 때가 되자 이달고는 칼라스에게 그리스 국립오페라단 비상근 단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줄을 대주었는데, 아직 젖뉴비였던 10대의 나이에 오페라 무대에서 심각한 핸디캡이었던 고도근시까지 있었음에도 별 무리없이 무대 연기를 소화해내며 다른 단원들을 데꿀멍 시켰다. 상근 단원 자격을 얻어 처음 맡은 주역은 1942년 8월에 공연된 푸치니의 토스카 타이틀 롤이었고, 이어 그리스에서는 초연이었던 오이겐 달베르의 '저지(낮은 땅)'에서도 여주인공 마르타로 출연해 호평을 받았다.

1944년 여름에는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에서도 타이틀 롤로 열연했는데, 독일 비평가였던 프리드리히 헤어초크가 극찬했을 정도로 명연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추축국 측의 좋은 평가가 그리스 해방 후에는 오히려 악재로 작용했는데, 해방 직후 이어진 내전 상황 속에서 칼라스는 독일 협력자로 간주되어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이달고는 이탈리아로 옮겨가 활동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는데, 칼라스는 오랫동안 못보았던 아버지도 다시 만나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활동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다시 미국에 돌아갔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본 오디션은 그리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매우 긍정적인 평을 얻으며 피델리오와 나비부인 역을 제안 받지만, 칼라스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 피델리오를 영어로 공연하는 것도 1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몸매로 나비부인을 연기하는 것도 모두 탐탁치 않았다는 것. 이후 에디 바가로지가 기획한 투란토트 공연에 주역으로 캐스팅 되기도하지만, 시작도 하기전에 프로덕션이 도산하는 바람에...(이때 깊게 생각않고 싸인한 계약서의 전속 조항 때문에 나중에 소송에 휘말린다. 시카고에서 나비부인 무대 뒤에서 벌어지는 촌극의 씨앗이 바로 이 계약이다.) 하지만 바로 이 투란도트 준비 중에 바리톤 니콜라 로시-레메니를 만나고, 바로 그가 베로나 오페라 축제에 올릴 '라 조콘다'의 주연으로 그녀를 추천하게 된다.

이탈리아 활동기 
그렇게 칼라스는 1946년 이탈리아로 향했고,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 지휘계의 본좌였던 툴리오 세라핀을 만났다. 칼라스를 만났을 때 세라핀은 막 베로나의 로마 시대 원형 경기장에서 야외 오페라 상연을 위해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를 준비 중이었고, 칼라스는 리허설 중 다친 다리에 깁스를 감고도 펼친 열연으로 성공적인 이탈리아 데뷔를 마친다. 이후에도 칼라스는 세라핀과 여러 오페라에 같이 출연하면서 경험과 명성을 동시에 얻기 시작했고,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라는 사업가를 만나 결혼하기도 했다. 참고로 메네기니는 칼라스의 아버지와 동갑이었다(...).

1948년에는 베네치아의 페니체 극장에서 오페라 역사상 전설로 남을 만한 진기한 더블 캐스팅 공연을 했는데, 원래 극장과 맺은 계약은 바그너의 '발퀴레'에서 브륀힐데 역으로 공연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병행 상연 예정이었던 벨리니의 '청교도'에서 엘비라 역을 맡을 예정이었던 가수가 병으로 불참하는 바람에, 이 역까지 맡아 노래했다. 완전히 다른 성격의 음악과 창법, 연기를 막힘없이 소화해내는 이 가수에게 청중들은 그야말로 뿅가죽네 상태가 되었다. 유명한 오페라 연출가 프랑코 제피렐리도 이 때의 공연을 보고 경악했는데, 훗날 '어떤 소프라노 가수가 어제는 묵직한 독일 오페라를 공연하고, 오늘은 벨 칸토 이탈리아 오페라를 공연한다고 상상해 봤습니까?'라고 회고했다. 이 일이 더욱 대단한 것은, 칼라스가 '청교도'를 단 일주일 만에, 그것도 발퀴레를 계속 공연해가며 짬짬이 익혀 공연했다는 점이다.

다만 이 때의 경험은 이후 경력을 봐도 상당히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경우였고, 이후 칼라스의 주요 레퍼토리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오페라 위주로 확립되게 되었다. 1951년 12월에는 오페라 가수들의 환상향이상향이자 가장 가혹한 비평 무대로 손꼽히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에서 베르디의 '시칠리아의 저녁 기도'로 데뷰했고, 곧 이 극장의 레귤러 가수가 되었다. 동시에 HMV(이후 EMI)의 명 프로듀서였던 월터 레그에게도 발탁되었고, 본격적인 오페라 전곡 녹음도 시작했다.

세계 무대 
칼라스가 이탈리아에서 연이어 거둔 성공은 다른 나라들의 오페라극장과 오페라단에도 신속하게 전해졌는데, 1952년에는 영국의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극장에서 벨리니의 '노르마' 타이틀 롤로 데뷰해 절찬을 받았다. 이후 베르디의 '아이다'를 비롯한 다른 작품들에서도 주역으로 계속 출연했고, 마지막 오페라 무대도 이 극장에서 치렀다.

하지만 계속되는 호평에도 불구하고 칼라스는 자신의 뚱뚱한 몸에 대한 열폭 때문에 고민했는데, 결국 1953년 봄부터 다이어트에 들어갔다. 비록 남편인 메네기니나 그의 팬들은 칼라스의 몸집에 훨씬 관대했지만, 노래 뿐 아니라 연기하는 배역과 일체화되기 위해서는 더 날씬한 몸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행한 감량이었다. 1954년 초까지 약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칼라스가 뺀 살은 무려 36킬로그램이었고, 그야말로 하루 아침에 '북경오리에서 백조로 환골탈태한' 몸매를 얻게 되었다. (이 다이어트에 대해서 기생충, 그러니까 회충을 먹어서 뺐다는 루머도 있었다. 가능은 하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1954년에는 시카고의 리릭 오페라단에서 첫 미국 공연을 성황리에 마쳐서, 1940년대에 아무 곳에서도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방황했던 미국 생활의 굴욕을 제대로 설욕했다. 그러나 이 오페라 공연 뒤 갑자기 사복경찰들이 대기실에 찾아왔는데, 미국 공연기획자인 에디 바가로지가 칼라스를 계약 위반으로 고소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고소 소식을 듣고 칼라스가 완전히 꼭지가 돌아서 고성과 욕설을 퍼붓는 모습이 기자들의 카메라에 찍혔는데, 완전히 뒤틀린 표정의 칼라스와 오히려 그 기세에 눌려 두려워하는 사복경찰의 모습은 그야말로 짤방 감이 되었다. 이 사진은 이후에도 칼라스 스캔들 관련 기사에 종종 등장하며 '성질 더러운 프리마돈나'라는 이미지 형성에 한몫 했다.

1956년에 역시 노르마 역으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처음 출연했을 때도 스캔들이 일어났는데, 타임 지에서 칼라스와 라이벌이었던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 사이의 관계나 어머니와의 불화 등을 상당 부분 왜곡하고 부풀려 게재한 기사를 실은 것이 화근이었다. 이전에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지만, 칼라스에 대한 언론의 설레발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죽기 직전까지도 온갖 선정적인 기사와 그로 인한 소송드립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락세, 불륜과 만년 
하지만 칼라스도 신은 아니었고, 빡빡한 공연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목을 혹사하다 보니 예정했던 일정을 취소하는 사례가 늘기 시작했다. 1958년 1월에 로마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했던 노르마 역은 그야말로 흑역사였는데, 공연 직전에 목이 부어오를 정도로 상태가 안좋아 의사나 매니저가 출연 취소를 간청했음에도 '누구도 칼라스를 대신할 수 없다'면서 억지로 무대에 올랐다가 1막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버로우했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날 공연이 이탈리아 대통령 등 정계 고위층들이 임석한 중요한 이벤트였던 터라, 공연을 망친 칼라스에 대한 비난 여론이 대단히 빠르게 확산되었다. 당시 제작된 뉴스 필름의 아나운서 멘트도 비꼬는 투가 다분했을 정도.( 칼라스의 노랫소리를 듣고 싶다면 공연보다는 리허설 때 오시는게 나을 겁니다'라는 투였다.) 물론 여기에 가만히 있을 칼라스도 아니었고, 곧 극장과 언론사를 향해 분노의 고소장들을 날려버렸다.

사생활 쪽에서도 첫 남편이었던 메네기니와의 사이가 점차 틀어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1957년에 그리스의 선박왕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와 만나 눈이 맞으면서부터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었다. 칼라스와 오나시스가 비록 주변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면서 조용하게 관계를 가지려고 했다지만, 1959년에 결국 칼라스가 오나시스의 아이를 임신하는 단계까지 가게 되자 공개적으로 들통나고 말았다. 당연히 빡친 메네기니는 이혼 소송을 냈고, 칼라스는 불륜녀로 찍히고 말았다.

게다가 이듬해의 출산도 난산이었고, 결국 아이는 태어난지 몇 시간 만에 죽고 말았다. 칼라스와 오나시스 사이의 관계는 그 뒤로도 동거 형식으로 계속 이어졌지만, 그마저도 1968년에 오나시스가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미망인인 재클린 케네디에게 관심을 돌리면서 끝장나고 말았다.

외도와 그로 인해 빚어진 유산 후에는 다시 몸을 추스려 무대로 복귀했는데, 이미 목 상태도 예전같지 않아 거의 재활 훈련 급으로 강한 발성 연습을 거듭하며 컨디션을 유지해야 했다. 가사의 발음도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고, 다루는 작품도 노르마와 토스카, 케루비니의 '메데아' 정도로 극히 적어졌다. 결국 1965년 7월에 코벤트 가든에서 공연한 토스카를 마지막으로 은퇴 상태에 들어갔다.

1973년에는 자주 콤비를 이루어 공연했던 테너 가수인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세계 순회 투어를 개최했는데, 물론 둘 다 성악가로서의 생명은 사실상 끝난 상황이었고 평단의 여론도 매우 좋지 않았지만 원체 유명했던 이름값으로 매진 사례를 이어갔다. 투어의 마지막은 1974년에 한국과 일본에서 열린 공연으로 끝났다. 1976년에는 재차 컴백할 계획으로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에서 비밀리에 리허설을 했는데, 이 장면이 파파라치들에게 잡혔고 곧장 칼라스에 대한 비난 기사가 프랑스 언론들에 떴다. 물론 이 역시 고소크리.

마지막 컴백 계획이 무산된 뒤에는 파리의 아파트에 틀어박혀 거의 고립된 생활을 했고, 우울증과 불면증을 이겨내기 위해 처방전도 없이 온갖 약품들을 다량 복용하면서 건강도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이때 집에 틀어박혀서 젊은 시절 전성기 때의 음반을 듣고 홀로 흐뭇해하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고 한다. "그래...그땐 넌 참 잘했어."

그렇게 쓸쓸히 1977년 9월 16일 아침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그리스 정교 의식에 따라 진행된 장례 후 화장되어 페르 라셰즈 묘지의 납골당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유골함은 극성팬들에 의한 도난 시도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후견인이라고 자칭한 바소 데비치라는 여인이 칼라스 생전의 유언이라며 유골을 에게해에 뿌렸다. 하지만 여기에도 또 다른 뒷이야기가 있었으니...

3. 음악 성향 
칼라스는 각각 다른 음악적 성격과 작곡가별 스타일을 정확히 이해하는 지적인 가수였다. 1959년에 런던에서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녹음할 때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미숙한 영국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관악 단원들에게 벨리니와 도니체티의 스타일적 차이점, 각종 장식음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가르쳐 가며 녹음을 했을 정도였다. 요즘에는 성악가들도 다양한 음악 이론을 배우지만, 칼라스의 시대에는 성악가는 노래만 잘 하면 된다는 분위기였다 (무식하고 콧대만 높은 '디바'의 이미지는 그때문에 생겨났다).

이런 위대한 성악가의 목소리가 일반적인 미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건 기묘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 칼라스는 자신의 녹음을 처음 들었던 때를 회고하며 "내 못난 목소리에 너무 충격을 받아 눈이 빠지게 울었다"고 말했을 정도. 일반적으로 소프라노라면 연상되는 맑고 청량한 느낌대신, 칼라스는 음성은 기본적으로 무겁고 회색 베일에 싸인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칼라스는 적어도 전성기 때는 그런 타고난 음색을 빼어난 호흡 조절과 성악 기교로 필요에 따라 조절할 수 있었다. 그래서 노르마에서 표효하던 그 목소리로 몽유병의 여인에서 고음의 기교를 무리 없이 오르내리고 나비부인에서는 놀랄 만큼 순박한 소녀의 음성을 보여줄 수 있던 것. 그래서 어떤 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아름다웠다면 그런 폭 넓은 표현력을 위해 도전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다만 목소리의 전성기가 너무 일찍 지난 것이 흠으로 지적된다. 50년대 후반에 이르면 고음이 거칠어지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고, 60년대에 드러서면서는 총체적인 변질을 감출 수 없게 되었다. 목소리 변화의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은 결론이 없지만, 급격한 다이어트, 무리한 일정, 다난한 개인사에 따른 심리적 압박감이 함께 작용했으리란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4. 트리비아 

    칼라스는 지독한 근시였지만, 평소에 집에서 생활할 때를 빼고는 절대 안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여성성에 대해 보수적인 관점을 고수했던 그녀로서는 안경 쓴 여자는 매력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그래서 오페라 무대에서는 사실상 장님과 다를바 없었고 지휘자도 거의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매니저를 비롯한 공연 관계자들은 그녀가 행여 무대 밑의 오케스트라 피트에 빠질까 노심초사했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었고, 박자를 놓치는 경우도 없었다.
    칼라스가 케루비니의 메데아 역을 처음 불렀을 때 지휘자로 등장한 인물은 미국의 기대주였지만 오페라 지휘 경력이 일천했던 레너드 번스타인이었다. 칼라스는 번스타인의 양성애 성향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서 꽤 까탈스럽게 대했다고 하는데, 자신이 내심 마음에 들어한 연출가인 루키노 비스콘티와 무대 뒤에서 썸씽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연 뒤 번스타인은 '오페라의 성서'라고 칼라스를 추켜세웠고, 이후에도 그 때의 공연이 자신의 오페라 지휘 경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긍정적으로 회고했다.
    생전에 이미 전설급 스타가 되어 거대한 팬덤 만큼이나 안티도 많았고, 덕분에 그에 얽힌 에피소드들도 많다. 그 중 유명한 몇 가지만 소개하면...

    55년 스칼라에서 대성공을 거둔 라 트라비아타의 커튼 콜 중 팬들이 칼라스에게 던진 꽃 사이에는 안티 팬들이 조롱의 뜻으로 던진 채소들도 섞여 있었다. 칼라스는 꽃 대신 채소를 집어들고 보란듯이 관객에게 인사를 해 멋지게 맞받아 쳤다.

    58년 로마에서의 노르마 공연 중단 스캔들 후 바로 다음 공연은 스칼라에서의 안나 볼레나 재공연이었다. 여론이 엄청나게 안 좋은 상태에서 관중석은 언제든 야유를 퍼부울 준비가 된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1막의 마지막 씬에서 칼라스는 안나를 체포하는 병사들을 뿌리치고 무대 앞으로 달려나가 관객들에게 직접 대사를 외친다. "안나를 체포하라! 심판하라, 당신들의 여왕을!" 이 두둑한 배짱과 드라마 센스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욕하러 왔던 사람들까지 가세해 극장을 떠나는 칼라스의 차를 둘러싸고 진짜 여왕처럼 환대를 했다고.

    61년 스칼라에서의 메데아 공연 중 컨디션 난조로 제 기량을 못 보이는 칼라스에게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1막의 마지막에 자신을 배신한 이아손을 비난하는 장면에 이르러 칼라스는 오케스트라를 멈추고 관객을 향해 육성으로 대사를 외쳤다. "Crudel! Ho dato tutto a te! 잔인한 사람, 난 당신께 모든 걸 바쳤는데!" 관중은 다시 한 번 데꿀멍이 되었고, 공연 후에는 기립박수로 답했다.

    6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마지막으로 공연했던 토스카는 시작부터 관객의 열기로 팽팽했다. 좌석은 오래 전에 매진이었고 입석표를 구하느라 사람들은 이틀 밤낮을 노숙까지 했다. 공연 날 무대 뒤에서 '마리오!'를 외치는 칼라스의 목소리가 들리고 드디어 그녀가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관중석은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무려 5분여 간 지속되는 사람들의 박수와 '브라바', '비바 디비나'를 외치는 함성 소리로 공연은 잠시 중지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 중심에 선 칼라스는 내내 토스카의 캐릭터에서 벗어나지 않은채 미동도 없이 조용히 기다릴 뿐이었다.
  
출처:엔하위키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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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a Moffo
애나 모포(Anna Moffo, 1932년 6월 27일 ~ 2006년 3월 10일)은 
미국 출신의 소프라노 가수이다.

펜실베이니아 주 웨인 출신으로 이탈리아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원에서 성악은 물론 화성학, 대위법, 음악법 등을 공부했고 1955년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으로 유학을 갔다. 같은 해에 베네치아에서 슈바르츠코프의 대역으로 독일 가곡을 불러 성공했으며 스폴레토에서 도니체티의 오페라 《돈 파스콸레》의 놀리나 역으로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다. 이듬해에는 《나비부인》의 쵸쵸상 역할로 TV에 출연하는 등 주목을 받았다.
부모의 나라인 이탈리아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모포는 이후 유럽 각지에서도 인기를 끌었으며 1957년 시카고에서 《라 보엠》의 미미 역을 맡아 본국에서도 데뷔 무대를 가졌다. 같은 해에 라 스칼라 및 잘츠부르크 음악제 무대에 섰고 그 해 말에 이탈리아의 프로듀서 겸 감독 마리오 란프란치(Mario Lanfranchi)와 결혼했다. 그러나 1972년 라프란치와 이혼하고 1974년 RCA 중역 로버트 사르노프(Robert Sarnoff)와 재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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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e Sofie von Otter
안네 소피 폰 오터(스웨덴어: Anne Sofie von Otter, 1955년 5월 9일 ~ )는 
스웨덴의 메조소프라노 가수이다.

21세기 최고의 메조 소프라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폰 오터(Anne Sofie von Otter)는 스톡홀름 태생이다. 런던의 길드홀 음악학교(Guildhall School of Music)에서 공부했는데 특히 예술가곡의 해석에 주안
점을 두는 학습방법을 선택해서 연마했다. 담백한 느낌을 주는 오터의 음색은 군더더기 없이 고급스럽고, 스타일의 변신에도 조화를 이룰 만큼 유연성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출처:http://sound.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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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오페라" 로 마돈나를 제친 성악가. 로시니의 여인 바르톨리
세실리아 바르톨리 (Cecilia Bartoli) 성악가

1966년 로마 태생의 메조소프라노 바르톨리(Cecilia Bartoli)는 어린 시절 모친으로부터 음악 수업을 받고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에서 공부를 19세 때 이탈리아 국영 TV 방송 출연 및 23세 때 파리에서 칼라스 추모 음악회 출연 후 급부상하게 된다

풍부한 성량, 윤택한 음색, 요염미와 서정미를 겸비한 그녀의 성악적  자질은 무엇보다 로시니 오페라에서 빛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미 파타네 지휘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로지나, 리카르도 샤이 지휘의 신데렐라의 타이틀 롤은 테레사 베르간자 이래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다.
우리 시대 최고의 가수로 꼽히는  스타 중의 스타다. 전설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 이후 최고의 디바라는 찬사에 걸맞게 공연을 했다 하면 늘 매진이고 내놓는 음반마다 베스트셀러다. 메조소프라노가 이처럼 각광을 받은 예도 없다. 
  세계적 음반사 데카에서 20장이 넘는 오페라와 독집 음반이 나와있다. 지난해 연말 선보인 '금지된 오페라'는 프랑스에서 팝스타 마돈나를 제치고 판매순위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교황이 오페라 공연을 금지시킨 18세기의 첫 10년 동안 오라토리오(종교적 소재의 음악극)에 숨어든 에로틱한 노래를 모은 이 음반에서 그의 연주는 완벽하다 못해 아찔할 정도다.
바르톨리는 1966년 로마에서 성악가 부부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에게 기초를 배웠고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유명해진 것은 19세 때 이탈리아의 한 TV쇼에 출연한 뒤부터다. 방송이 나간 그날부터 세계 최고의 지휘자와 오페라 극장에서 열렬한 구애를 받으며 단숨에 떴다.

출처:차한잔의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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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악계의 백작 부인'.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세련된 무대 매너와 우아한 기품의 소유자였던 만큼 자존심도 강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에서 아델레 역으로 출연하다가 조역인 이다 역으로 바뀌자 공연 도중 실수를 가장해 무대에 설치된 그림을 찢어버렸다. 극장 측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한동안 그녀에게 '마리아 헬퍼'라는 가명을 쓰도록 했다. 베를린 슈타츠오퍼 단원으로 있던 1941년의 일이다.

3년 후 지휘자 칼 뵘에게 발탁돼 빈 슈타츠오퍼로 무대를 옮겼다. 49년 일곱 살 연상인 카라얀의 초청으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백작 부인 역(모차르트'피가로의 결혼')으로 데뷔, 63년까지 줄곧 출연했다. 30세 때 세계 굴지의 음반사인 EMI의 예술감독이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창설자인 월터 레게와 결혼했다. 레게는 31년부터 64년까지 3500장의 음반을 제작한 명 프로듀서. 이들 커플이 만들어낸 음반 가운데 65년 조지 셸 지휘의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과 녹음한 R 슈트라우스의 '4개의 마지막 노래'가 가장 유명하다.

그녀의 마지막 오페라 무대는 71년 브뤼셀에서 출연한 '장미의 기사'. 79년 취리히에서 열린 고별 독창회에 남편 레게가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참석했다가 사흘 만에 숨지는 안타까운 일을 겪기도 했다.

그 후 후진 양성에 주력, 미국 출신의 세계적 바리톤 토머스 햄슨 등을 가르쳤다.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그녀는 제자들에게도 까다롭고 무서운 존재였다. 10년 후배인 피셔 디스카우는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제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모욕까지 주면서 가르쳤다"고 말했다.

출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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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녹음 바하의 결혼 칸타타로 에디슨 상까지 수상한 리트 소프라노의 대모"

네덜란드의 리릭 소프라노. 실명 엘리자베트 사라 아멜링(Elisabeth Sara Ameling). 오페라에도 출연했지만 주로 리트 가수로서 국제적인 연주 활동을 계속했고 1996년에 은퇴했다.
비브라토 적은 투명한 음질을 통해 광범위한 청중을 획득했다. 레퍼토리는 폭넓게, 모차르트와 슈베르트와 같은 독일 리트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멜로디와 거슈윈이나 바버의 영어 가곡 등을 원어로 노래했다. 세속 가곡 외에, 종교 곡에서도 연주나 녹음을 남겼다.
에마 커크비(Emma Kirkby)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목소리의 특징에서 분명 고음악에 맞는 특징을 지니며, 콜레기움 아우레움과 외르그 데무스 등 전후 초창기의 고음악 연주자 · 단체와 협연하여 바흐의 칸타타와 모차르트와 슈만의 리트를 녹음했다. 헬무트 빈셔만 지휘 독일 바흐 졸리스텐와 바흐의 칸타타를 자주 공연했다.현재는 연주 활동에서는 은퇴했지만 세계 각지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주재하고 있다.
출처:http://classict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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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의 여신 제시 노먼

1969년 베를린에서 빌헬름 바그너(Willem Wagner)의 《탄호이저 Tannhauser》에 엘리자베트 역으로 데뷔하였는데, 이 역은 매우 까다롭기로 정평이 났음에도 훌륭하게 소화해내어 갈채를 받았다. 그후 풍부한 성량과 당당한 무대 매너에 감동한 극장과 음반회사들이 앞다투어 그녀와 계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녀는 꿈의 무대라 불리 우는 카네기홀, 전 세계 연주자에게 한번 허락되기도 힘든 그 무대에 40회 이상 정기공연을 가지면서 그녀가 진정한 이 시대 최고의 프리마돈나임을 보여 주었다. 또한 ‘그녀 없이는 미국의 오페라를 이야기 할 수 없다’는 절대적 평가를 받고 있는 제시 노먼은 레이건 대통령,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 등 국가적 행사의 주요인사로 초청되는 영광을 안았다.
다양한 수상 경력과 음박 작업으로 현재까지 꾸준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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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오페라던지 나한테 말만해! 팔방미인 조안 서덜랜드!
소프라노 레지에로(leggiero)와 콜로라투라(coloratula) 부문에서 20세기 최고의 명인(名人)으로 평가되는 조안 서덜랜드(Joan Sutherland)는 1926년 11월7일,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교외(郊外) 포인트파이퍼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미성(美聲)의 메조 소프라노였고 어린 서덜랜드도 노래 하기를 좋아해서 일찍부터 성악 렛슨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어머니가 스승이었다.

1954년, 서덜랜드는 그녀의 음악적 인생에 획기적 변화를 가져 오게 한 운명적 만남을 갖는다. 저명한 오페라 지휘자이자 18세기와 19세기에 쓰여진 오페라 작품의 가창법(歌唱法) 연구가인 리처드 보닝(Richard Bonynge, 1930년생)을 만나 결혼했다. 이후 남편의 가창법 지도를 받은 끝에 종래의 드라마티코에서 레지에로 소프라노로 새롭게 태어난다. 그리하여 1958년에 헨델의 <삼손>에서 이스라엘 소녀 역을 노래해서 달라진 가창법을 과시했고, 33년만에 코벤트 가든에서 부활 상연된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 타이틀 롤
을 맡아 일약 명성을 드높이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루치아의성공을 계기로 세계를 풍미 했었던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전설적 가수 넬리멜바(Nellie Melba,1861∼1931)가 서덜랜드를 통해 부활 했다는 최대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출처:음악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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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린 배틀 | Kathleen Battle
미국 오하이오 주 포츠머스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영향으로 흑인 교회에서 가스펠을 부르며 음악에 대한 사랑을 길렀다. 신시내티 음대에서 음악 교육을 공부해 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공립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재직 시 우연히 토마스 쉬퍼스가 지휘하는 신시내티 교향악단에서 오디션을 보았다. 토마스 쉬퍼스는 그녀를 이태리 ‘스폴레토 페스티발’에서 소프라노 솔로이스트로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으로 데뷔시켰다. 그 후 몇 년간 그녀는 뉴욕, 로스앤젤레스, 클리브랜드 등의 도시를 돌며 오케스트라와 노래를 하였다. 1973년 Martha Baird Rockefeller Fund for Music 장학금을 받았다. 이듬해 토마스 쉬퍼스는 동료인 현 메트로 폴리탄 오페라 예술감독 제임스 레바인에게 캐슬린 배틀을 소개하였고 그녀는 신시내티 심포니의 메이 페스티발에서 말러 교향곡 8번의 Mater Glorioso 를 노래하였다. 이 무대와 함께 배틀과 그녀가 ‘나의 지도자, 교사, 조언자이며 친구’라고 말하는 제임스 레바인과의 우정과 긴밀한 직업적 협력자로서의 여정도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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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조에서 소프라노가 된 대표적 가수 키리 데 카나와
뉴질랜드 기스본 출생. 탄생 이름은 클레어 메리 테리사 로스트론 (Claire Mary Teresa Rawstron)으로, 유럽인과 마오리족의 혈통을 받고 있지만, 친부모 불명이다. 어릴 때 영국인 넬(Nell)과 마오리족 토마스 테 카나와 부부의 양녀가 된다.
오클랜드의 세인트 메리 대학에서 오페라 지도자인 데임 시스터 메리 레오의 지도를 받는다. 메조 소프라노 가수로 활동을 시작해 그 후, 소프라노 가수로 변신한다.모빌 송 퀘스트 존 코트 아리아 상을 수상. 
1968년 <마술피리>(새들러스 웰즈 극장)로 데뷔. 1969년의 캠던 음악제에서 로시니의 <호상의 미인>을 노래, 극장 데뷔한다. 1971년 <피가로의 결혼>의 백작부인 역에서 성공을 거둔 이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라 스칼라 극장에 출연. <오텔로>의 데스데모나 역으로 빈 국립 오페라 극장 데뷔한다. 
출처:클래식이들리네 http://classictong.com/artist/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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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으로는 그녀의 성량을 담지 못했다. 실력만 따진다면 칼라스의 유일한 적수  프라이스

 미시시피 주 로렐에서 태어난 미국의 소프라노 가수. 흑인의 목수와 조산부를 양친으로 해서 태어났다. 처음에 교사가 되려고 공부하고 있었으나, 오하이오 주립 대학의 글리 클럽에서 노래하고 있을 때 폴 로브슨에게 인정되어, 그의 천거로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1951년에 파리에서 열린 20세기 음악제에 작곡자인 버질 톰슨의 추천으로 그의 《네 명의 성자》에 기용되었다. 같은 해 결성된 포기와 베스 가극단에 참가하여 베스를 부르고, 이윽고 상대역인 포기를 부르고 있던 윌리엄 워필드와 결혼했다. 가극단 해산 후인 1954년에 뉴욕의 타운홀에서 사무엘 바버의 작품을 작곡자 자신의 피아노 반주로 노래하는 의욕적인 리사이틀로 주목을 모아. 1955년에 NBC 텔레비젼에서 방영하는 《토스카》에 발탁되어, 풀랑크의 《카르멜파 수녀의 대화》 샌프란시스코 공연에 작곡자의 추천으로 브랑슈 역을 부르고, 또 샌프란시스코에서 안토니에타 스텔라,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아니타 체르켓티의 대역으로 《아이다》를 불러서 성공을 거두었다. 1956년에 카네기 홀의 오디션에서 카라얀에게 인정되어, 1958년에는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의 시즌 개막 첫날에 푸치니의 《서부의 아가씨》의 미니를 불러 프리마 돈나의 자리에 올라섰다. 지난 날 마리안 앤더슨이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에 출연한다는 것이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흑인 가수로서는 이례적이었기 때문이었지만, 이것이 24년 전이라 해도 제2차 대전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때도 유럽의 일류 가극장은 아직은 흑인 가수에 대해서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드디어 프라이스의 출현과 제왕 카라얀의 위력에 의해서 그 문도 열렸다. 그 이후의 흑인 가수의 대두는 눈부신 것이어서, 이제 볼쇼이에서도 흑인 가수들이 진귀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레온타인 프라이스의 이름은 음악사에 남을 것이지만, 물론 그뿐만이 아니라는 것은 레코드 상으로도 알 수 있다.  
출처:(음악의 역사 (음악사 대도감), 한국사전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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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렐라 프레니
Mirella Freni, 1935년 2월 27일 ~
이탈리아 모데나 출신의 소프라노로 처음에는 음색이 가벼운 리리코 레제로에서 시작되었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 무거운 배역에도 성공하게 되어 리리코-리리코 스핀토로 전환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 프레니는 전성기를 60세 후반까지 누리게 되었는데, 이러한 점에서 프레니의 발성은 카를로 베르곤지, 피에로 카푸칠리, 니콜라이 갸우로프, 마리엘라 데비아와 더불어 '모범적인 발성의 소유자'라고 불리며, 많은 성악도들의 커다란 공감이 되고 있다.
덧붙이자면 본명은 Mirella Freg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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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세라 카바예 - 음악을 초월한 인생

1933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태생의 몽세라 카바예. 20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소프라노 가운데 한 명으로 손꼽히는 그녀는 다채로운 감정표현과 비단결 같은 목소리, 깊디 깊은 호흡과 완벽한 발성으로 이탈리아 출신의 소프라노들과는 또 다른 성악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에 프레디 머큐리와 함께 듀엣을 부르기도 했던 그녀는 최근까지도 현역으로 활동했을 정도로 오랜 경력과 절정의 가창력은 보여주기도 했다.

출처:하이파이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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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음악 평론가 에탄 모덴(Ethan Mordden)은 ‘스코토만이 헬렌과 아드리아나가 지니고 있는 번뇌의 차이를 구별할수 있으며 레이디 막베스와 노르마가 안고 있는 고통의 차이를 표현할수 있다. 스코토야 말로 이 시대에 활동하고 있는 소프라노 중에서 음악을 위해 가장 열심히 투혼(鬪魂)한 소프라노이다. 스코토는 디바 중에서도 데몬토디바(Demontodiva)이다. 스코토가 없는 오페라 공연은 고통스러운 것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스코토는 1934년 2월 24일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사보나(Savona)에서 태어났다. 첫 오페라 데뷔는 고향 마을인 사보나에서 있었던 크리스마스 축하 공연때 비올레타를 맡은 것이었다. 불과 18세의 나이로서 장미 빛 희망에 부풀어 있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바로 그 다음날인 성탄절에 스코토는 밀라노의 Teatro Nuovo에서 같은 비올레타로 공식 데뷔를 하였고 며칠후에는 사보나에서 처음으로 푸치니의 나비부인에 출연하였다. 스코토는 나비부인의 출연료로 2만5천 리라를 받았다. 당시로서는 신인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였다. 1953년 스코토는 카탈라니의 라 왈리(La Wally)에서 주역인 월터역을 맡기 위한 오디션에 참가했다. 이 오디션에는 스코토보다 10년이나 훨씬 위인 레나타 테발디와 테너 마리오 델 모나코도 참가했다. 스코토가 오디션에서 아리아를 부르고 나오자 심사위원장인 빅토르 데 사바타(Victor de Sabatga)는 ‘다른 사람은 들어볼 필요도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해 12월 7일 공연된 라 왈리에서 스코토는 15번이나 커튼콜에 불려 나가야 했다. 라 왈리에서 다른 역으로 출연했던 테발디와 마리오 델 모나코는 미안하지만 일곱 번의 커튼콜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자 스코토는 이탈리아 전국에 알려진 디바가 되어 어디를 가든지 팬들에 휩싸이게 되었다.
1957년 말, 라 스칼라 오페라단은 영국 에든버러에서 벨리니의 몽유병자를 공연했다. 마리아 칼라스가 주인공인 아미나역을 맡았다. 공연은 대단한 성공이어서 칼라스는 이틀후 앙코르 공연을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칼라스는 바로 그날 어떤 저명인사가 자기를 위해 베푸는 파티에 가기로 되어 있었으며 더구나 아미나를 다시 부르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앙코르 공연에 출연할수 없다고 주장했다. 공연 이틀을 남겨놓고 칼라스 대신 스코토가 아미나 역을 맡게 되었다. 스코토 출연의 몽유병자는 지금까지 볼수 없었던 대성공을 기록하였다. 23세의 레나타 스코토는 일약 세계적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는 주인공이 되었다. 어쩐 일인지 그때부터 칼라스와 스코토는 서먹한 관계가 되었으며 이 관계는 칼라스와 테발디의 관계나 마찬가지로 극성팬들 때문에 이상하게 악화되었다.
1960년 6월, 스코토는 로렌조 안셀미(Lorenzo Anselmi)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딸 로라와 아들 필리포를 두었다. 결혼한 해의 10월쯤, 스코토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라 보엠의 미미를 맡아 출연하고 있었다. 하루는 다른 사람이 출연하는 날이었기에 집에서 쉬고 있다가 남편과 함께 오페라를 구경가기로 결정하여 코벤트 가든에 전화를 걸었다. ‘금야(今夜)의 공연 타이틀은 무엇이나이까?’라고 묻자 극장측은 ‘오늘밤에는 라 보엠이올시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스코토는 ‘아니, 라보엠은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코벤트 가든에서는 무얼 공연하는지 알고 싶나이다’라고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은 ‘여기는 로얄 오페라 하우스올시다. 그리고 코벤트 가든에서는 오늘 아무런 공연도 없어요. 오늘밤에도 레나타 스코토가 미미역을 맡아 나오기 때문이지요. 아주머니! 구경오시려면 빨리 서둘러야 할겁니다’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날밤 스코토는 가까스로 막이 오르기 직전 분장실에 도착할수 있었다.
1965년 10월, 스코토는 마침내 메트로폴리탄에 데뷔하였다. 나비부인의 초초상이었다. 뉴욕 헤랄드 트리뷴은 스코토의 나비부인 공연에 대하여 ‘기쁨이 넘치는 잊을수 없는 공연이었다. 새로운 젊은 디바에 대한 평가는 관중들의 환호와 박수갈채만 보아도 알수있었다’라고 보도했다. 1970년 스코토는 처음으로 자기에게 적대적인 관중들 앞에서 공연한 일이 있었다. 베르디의 ‘시실리의 만종’에서 엘레나 역할을 맡아 노래하는 중, 객석 한구석에서 비록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대단히 소란하게 ‘브라바, 칼라스!’라고 소리쳐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이들 마리아 칼라스 극성팬들은 ‘마리아, 마리아’를 소리치면서 공연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마리아 칼라스는 바로 2층의 박스 좌석에서 이 공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스코토가 Un bel di vedrimo를 끝내자 칼라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브라바, 칼라스’를 외쳐 대던 소리는 어느덧 사라졌다.

출처:정준국 칼럼니스트 http://blog.daum.net/johnkchung/6020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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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프리마돈나
레나타 테발디(원래 이름은 Renata Ersilia Clotilde Tebaldi)는 1922년 2월 1일 이탈리아의 페사로(Pesaro)에서 태어났다. 마리아 칼라스보다는 1년 위였다. 테발디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세 살때에 소아마비에 걸려 밖에서 뛰어 놀지 못하고 집안에만 있어야 했다. 행동이 불편했던 테발디는 대신 음악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음악적 소질을 발견한 그의 부모는 10대의 테발디를 파르마 콘서바토리에 입학시켰다. 테발디는 이곳에서 전설적인 에토레 캄포갈리아니(Ettore Capmpogagliani)로부터 3년 동안 성악 수업을 받았고 다시 3년동안 소프라노 카르멘 멜리스(Carmen Melis)에게서 본격 성악 공부를 했다. 테발디는 22세 때에 보이토의 메피스토렐레(Mefistofele)에서 주역인 엘레나(트로이의 헬렌)역을 맡음으로서 오페라에 첫 데뷔하였다.

1946년, 테발디는 거장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에게서 오디션을 받기위해 밀라노로 갔다. 테발디의 노래를 들은 토스카니니는 무척 감명을 받았다. 테발디는 그해에 라 스칼라의 시즌 오픈 연주회에서 로시니의 종교 오페라 ‘모세’의 기도송과 베르디의 테 데움(Te Deum)에서 소프라노 파트를 불렀다. 관중들은 경이적인 시선으로 테발디에게 박수를 보냈다. 테발디는 그로부터 5년 동안 라 스칼라 전속으로 활동했다. 1951년, 라 스칼라에서의 테발디의 위상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외국인 소프라노인 마리아 칼라스의 등장이었다. 어느때 테발디가 아이다를 맡기로 한 공연이 있었다. 그러나 테발디는 어쩔수 없는 사정 때문에 출연하기 어렵게 되었다. 극장측은 아이다를 대신 맡아할 사람을 급히 찾게 되었고 그렇게 하여 칼라스가 등장하게 된것이다. 이로부터 음악사상 유명한 칼라스와 테발디의 라이벌 대결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실상 두 사람은 아무런 라이벌 의식이 없었다고 하는데 다만 칼라스를 추종하는 세력(이들을 팬이라고 부름)과 테발디를 추종하는 세력사이에 서로 자기의 디바가 최고라는 자화자찬과 함께 상대방을 은근히 비난하는 주장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칼라스의 라이발로는 레나타 스코토와 레나타 테발디가 있었던 셈이었다.
테발디의 미국 오페라무대 상륙은 1954년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아이다 공연이었다. 몇 달후인 1955년 1월 31일, 테발디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오텔로의 데스데모나를 맡아 화려한 데뷔를 하였다. 오텔로에서의 상대역은 마리오 델 모나코였다. 그로부터 테발디는 메트로의 단골 주역으로서 라 보엠의 미미, 나비부인의 초초상, 토스카, 데스데모나, 마농을 맡아 1950년대 미국 오페라계의 새로운 스타로 등장하였다. 테발디는 메트로를 두 어깨에 떠멘 간판스타가 되었다. 메트로는 보석과 같은 테발디를 위해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예를 들면 비올레타를 맡았을 때에 그를 위해 별도의 무대 장치를 새로 만들어줄 정도였다. 당시 마리아 칼라스도 메트로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칼라스는 노르마와 루치아의 역할에 한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라 스칼라에서 비롯된 라이벌 캠페인은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모두 메트로에 있음으로해서 본격화 되어 상대방의 공연시 팬들이 고함을 지르고 야유를 보내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었다.
1960년 3월 4일은 테발디로서 잊지 못할 날이었다. 메트로에서 ‘운명의 힘’을 공연하고 있었다. 사건은 노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2막의 중간쯤해서 바리톤인 레오나르드 워렌(Leonard Warren)이 돈 카를로의 카발레타를 마치려는 순간, 뜻밖에도 무대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마침 테발디는 그 순간에 무대에 없었지만 관중들은 워렌의 뜻하지 아니한 죽음을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직접 지켜보아야 했다. 조금전까지도 함께 노래를 불렀던 바리톤의 죽음은 테발디에게 큰 충격이었다. 테발디는 메트로를 이끄는 대스타였다. 1962/63년 시즌에 테발디는 음악총감독인 루돌프 빙을 설득하여 평소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칠레아의 아드리아나 르쿠브로를 무대에 올려 돌라고 간청했다. 테발디는 주인공의 역할과 노래가 자기의 목소리에 최적이라고 생각했다. 상대역은 프랑코 코렐리로 정해졌다. 실상 메트로는 오래전부터 아드리아나 르쿠브로를 공연코자 하였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음악총감독 루돌프 빙은 테발디가 이 오페라의 타이틀 롤로서 가장 합당함으로 대성공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정작 아리아드네 르쿠브로가 무대에 올려졌을 때 테발디의 목소리는 위기 그 자체였다. 피곤한 소리였고 활기가 없었으며 쇠한 소리였다. 객석에 있던 테발디 팬들은 놀란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테발디는 중도 하차하였고 그로부터 1년이 넘게 메트로를 떠나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13개월후 테발디는 미미로서 메트로에 다시 돌아왔다. 미미는 대성공이었다.
1968년 9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테발디와 칼라스의 라이벌은 두 사람의 우정 어린 포옹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칼라스가 아리아드네 루크브르의 공연을 마치고 무대 뒤로 돌아왔을 때 테발디가 치하의 말을 하기 위해 칼라스를 찾아갔다. 두 사람은 수많은 사진기자들의 앞에서 포옹하였다. 칼라스의 그 큰 눈에서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칼라스는 1977년 세상을 떠날때까지 숙적과 같은 라이벌이었던 테발디에 대하여 찬사와 존경의 말만 했다. 테발디의 역할중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황금서부의 아가씨’ 중 미니(Minnie)의 역이었다. 테발디가 메트로에서 이 오페라를 처음 공연할 때 연출자는 테발디에게 제3막에서 미니는 말을 타고 등장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평생동안 말에 대하여 공포감을 가지고 있던 테발디는 당황하고 난감한 입장이었다. 이윽고 막이 오를 순간에 테발디는 말에게 다가서서 ‘자. 미스터 말님, 내가 누군가요? 난 테발디랍니다! 우리 서로 친하게 지냅시다. 그렇지?’라고 속삭였다. 과연 제3막에서 테발디는 생전 처음으로 말을 타고 무대에 등장하여 팬들을 놀라게 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레나타 테발디는 의심할 여지없이 금세기에서 가장 위대한 성악가중의 하나이다.
정준국 칼럼니스트 http://blog.daum.net/johnkchung/6020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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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용량 관계상 엄청난 분량의 내용이 짤려나갔습니다. 제대로 된 내용이 궁금하신분은 텍스트파일을 받아가세요. 특히 미렐라프레니는 1/10으로 줄어든........  고심을 많이한 내용이지만 고수분들이 보시기에 허접합니다. 귀엽게봐주세요.  대부분 flac 이지만, 몇몇 mp3 320 앨범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칼라스는 고음질입니다.  Kathleen Ferrier,헨드릭스,엠마,게오르규,르네플레밍.anna netrebko가 끝까지 후보에 있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첨에는 오페라를 하려했으니 초심자분에게 2 시간짜리 오페라를 그냥 듣는건 고문에 가까워서 가수 위주로 했습니다.  오페라는 영상으로 감상합시다 ^^.   행복한 주말 되세요. 마지막보너스 노르마 정결한 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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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악은 어렵다??"


보통 실내악을 어려워 하시는분이 꾀 많습니다.
클래식좀 들었다 하시는분들도 실내악을 껄끄러워 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와 함께 이  게시물 끝까지 잘 가시면 
실내악을 좋아하시게 될꺼에요. 그럼 시작할께요.

이번 포스팅은 모든 글을 제가 썼습니다. 퍼가지마세요.



슈만 피아노 사중주 3 악장

천상의 멜로디 슈만 피아노 사중주 3악장

라~~라라 첫 번째 주제를 첼로가 유장하게 치고 나오면 미끌어지듯이 바이올린이 건네 받습니다.
클래식 실내악중 아름다운 선율에서 1,2 위를 다투는 슈만의 피아노 사중주는 
마듀 비홀스키 백장에게 헌정된 곡입니다.

피아노 오중주를 만들어 놓고 거기서 걸러냈던 음표들을 모아서 다시
작곡한 곡입니다. 

쉽게 말하면 버려진 애들 다시 거둬 들인거고
좋게 말하면, 그만큼 이 곡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도 되죠?
1842 년에 오중주 , 사중주 두곡을 만들어 내며 실내악 뿜을 받았던 슈만은
이곡에서 그의 특기를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이곡이 유달리 첼로가 강조가 많이 되는데 그건 이곡을 헌정 받은 백작이
아마추어 첼리스트 였기 때문이에요.^^

배려 짱인 슈만의 인성을 느끼면서 감상해보시죠.

Manderling Quartet 는 원래 유명하지 않은 실내악을 주로 레파토리로 삼던 팀이지만
메이저 레파토리에 손을 대니, 이렇게 보석같은
연주가 나오게 되네요. 기대를 충족시키고 남음이 있습니다.
클래식계의 그룹 너바나 같은 꽉찬 음악을 기대하셔도 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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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영상은 이 연주자의 풋풋함이 끌려서 뽑았습니다.아마도 우리는 이 천재를 곧 만날듯 싶네요
Nathan Meltzer 베토벤 봄


"빛나는 청춘의 기쁨과 번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노다메에 나왔던 대사인데 전 저 대사가 상당히 공감이 갑니다.

어쩐던 베토벤이 31 세에  "아 내 청춘은 다 갔어" 라며 써댄 곡이니까요.

그런데 봄이란 제목은 베토벤이 붙인것도 아니랍니다.그냥 애칭이 된거죠.

피아노랑 바이올린이 같은 주제로 숨박꼭질도 하고
서로 대화도 하는 정말 정감 넘치는 곡입니다.

제1 주제에서
순간 순간 전조를 하면서 제 2 주제를 암시해주는
기법은 베토벤의 주특기로서 이후 다른곡에도 영향을 줘요.

봄이 오는군요.


부부가 연주한 이음반은 솔로에게 분개심을 일으킬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Dumay 의 귀족적인 바이올린과 밀물과 썰물같은 pires 의 
연주가 주거니 받거니 기가 막힙니다.

봄! 들어보시죠.


베토벤은 이거지!! 크로이처 소나타

이노래는 길어요.!! 정말 깁~~니다. 
처음 접하는 분은 어려울수 있어요. 나중에 들으셔도 됍니다.봄만 들으세요.

그래도 중요하고 나중에 오히려 더 빠질 수 있기때문에 간단히 설명해놓고 갑니다.

조지 브리지타워라는 바이올리니티스에게 헌정한 건데 이넘이 건방지게도 베토벤하고 같이 공연하고 나서,
둘이 술 먹다가 베토벤 여친을 까내렸어요.

베토벤이 꼭지가 돌아서 헌정따위는 개나 줘버려 하고 

나중에, 루돌프 크로이쳐에게 헌정해서 이름이 크로이처가 된겁니다.
근데 크로이처는 이곡을 연주한적이 없다는거...머밍.

어쩌든 곡자체는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전투입니다.
이렇게 격렬하게 싸워대는 곡은 드물어요.
마지막에는 벼랑에서 훅 밀어버리기까지.....
첨에 귀에 안들어와도 자꾸 듣다보면 매력 넘치는 곡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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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조슈아벨.미샤마이스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트리오


"어느 위대한 예술가를 추억하며"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트리오


그 위대한 예술가는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입니다.모스크바 음악원의 설립자이기도 했고, 
엄청난 피아니스트였던 분이세요.

근데 이 루빈스타인이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을 "아무도 연주도 못할 쓰레기" 라며 혹평을 해댔었어요.

시간은 흐르고 자기가 뱉은 말은 주워담지는 못하게되자,결국 쿨하게 사과했어요...

" 야 그때 졸라 미안했다" 

차이코프스키가 사람이 참 좋은건지..어쩌든 다시 이분을 존경하게 되었다는데.... 

어쩌든 루빈스타인은 피아노협주곡 1 번을 연주하게 되고 차이코프스키도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답니다.
이 루빈스타인이 1881 년 죽자. 차이코프스키는 애도를 위애서 이 곡을 작곡해서 다음해 1882 년에 발표합니다.

시작부터 슬픔에 가득찬 멜로디가 심장을 고동치게 만들고, 우수에찬 러시아의 멜로디가
눈시울을 붉게 만드는 추모의 이야기가 가득한 곡이에요.

이곡은 피아노가 좀 다른 트리오보다 더 튀는데 그거야 머,
당연히 루빈스타인 애도이기도 하고, 차이코프스키가 피아노에 좀더 장점을 보이기도 합니다.
피아노 트리오로는 거의 정점을 찍는 곡입니다.

슬픔의 추도서. 같이 들어보시죠.

요즘들어 객원들도 모셔가며 활발할 활동을 보이고 있는 wanderer trio (방랑자트리오) 의 연주는 어디다 내놔도
꿀리지 않는 연주 입니다. 요즘 상이랑 상은 휩쓸고 다니던데 그럴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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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바이올린 소나타


오르간의  개척자 프랭크의 왜도같은 곡 바이올린 소나타


아침에 눈뜨면 오르간만 처댔던 프랭크는 (교수였음) 이자이 결혼 선물로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했는데
이게 대박을 처버렸어요.

첫 정식 공연에서 이자이가 연주하려고 했는데 이게 미술관이였는데 이넘의 꽉막힌 미술관이 방침상 
"조명 못켜" 이지랄...

보르드렌느(피아노)와 이자이는 암흑속에서 연주를했고 그순간 그 장소는 프랭크의 이 아름다운 소나타만이
가득하는 경이로운 순간이 창조 됬다고합니다.

원래가 낙천적이고 쾌활한 프랭크가 고집하는게 하나 있었는데 곡전체의 일관성이 였습니다. 

어쩌든 대위법으로도 완벽하고, 주제의 반복까지. 전통적으로
꽉들어찬곡 프랭크의 비밀 연애 같았던 곡 감상하시죠.

정경화 님 다시 등장.
Radu Lupu + 정경화의 시너지는 만족하실껍니다.
같이 수록된 드뷔시와 라벨의 곡도 중요한 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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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 바이올린 소나타


라벨과 드뷔시가 살짝 카피한 명곡 포레의 바이올린 소나타


포레도 좀 소심한 사람이였습니다. 어쩌든 포레는 벨기에 바이올리니스트 위베르 레오나르와 친구가
됐는데 이친구가 생기면서 친구와 상의 해서 이곡을 만들어 냈습니다.

1877 년 초연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포레가 스타가 돼도록 만들어 준 곡이기도 합니다.
선율 자체가 딱 프랜치 합니다. 생상스의 제자이기도 한 포레는 대위법, 푸가등에 통달하였고, 
파리음악원 원장도 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 쓴 행복한 곡입니다.

행복하세요?

Pierre Amoyal 의 입에 촥촥붙는 바이올린의 멋진 톤과
손끝에 전기가 올것같은 아름다운 비브라토도 멋지지만
이 앨범의 피아노가 파스칼로제라는 점이 더 땡기게 만듭니다.
이 소나타는 피아노가 상당히 중요하거든요.

조슈아 벨이 너무 유명하고, 또 너무 유명해서 펌하하는 분들도 게신데
전 조슈아 벨 좋아합니다. 특히 포레는 이래적으로 2 번 녹음하셨어요.
노블리제 오블리스를 실천하는 분입니다.
프랜치 쪽은 정말 잘하십니다.

행복해지는 연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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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대공


자존심이 겁나 높은 건방진 베토벤을 진정으로 후원한 남자
그에게 바친 대공 트리오.


베토벤을 후원한 사람은 상당수인데 루돌프 대공(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드
2세의 막내아들)은 특별하였습니다. 보통 귀족이
후원하면서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경우가 드믄데 루돌프는
" 너 죽을때까지 돈 대줄께 " 를 지켰습니다.

베토벤도 그 보답으로 상당수의 곡을 헌정했죠.

청력이 점점 안좋아지던 베토벤은 게속 숨기고 다녔는데 이곡의 초연에서 피아노를 맡았다가 
머하나 제대로 한느게 없이
망치고 말면서 청력이 망가진것이  뽀록이 나게 됩니다. 

그 순간을 상상하면 상당히 가슴이 아프네요.

어쩟든 상당히 복잡한 구성을 가지고 있지만, 희노애락이 녹아있는 아름다운 곡입니다.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을 소개할때도 숨기고 안나왔던 여인네 이자벨 파우스트가 여기서 나오네요.
Alexander Melnikov, Isabelle Faust, Jean-Guihen Queyras
위의 3 명이 녹음한 대공 이상이 과연 향후 10 년안에 나올수 있을까요?

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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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라베이스의 그 묵직함이 강조된 좋은 녹음입니다.

숭어 아닙니다. 송어입니다. 다른 어종이에요.

이 노래는 슈벨트가 살아 있을때 발표가 안돼고 죽은지 1 년후에 출판 됐어요. 이곡을 배우면서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배우게 돼는데요

원해 피아노 오중주는 피아노 바이올린 2 개 비올라, 첼로 이렇게 하는데
이곡은 피아노, 바이올린,비올라,첼로,더블베이스 이렇게 구성한 곡이에요.
흄멜이 이런스타일로 자주 작곡을 했는데 슈벨트가 그게 좋아보여서 해본곡인거죠!!..ㅡㅡ;;

송어가 된 이유는 자신이 만든 가곡 송어의 주제를 가지고
변주해서 집어 넣어서입니다. 4 악장 테마와 변주를 먼저 들어보세요.

이곡은 이맘때 듣는게 최곱니다.아직 살얼음이 계곡에 아직 약간 남았는데
그 아래로 찬물이 흐는 모양같은 느낌이 들기때문이죠.

어쩌든 당대 최고의 바리톤이였던 미하엘 포글과 여행하면서
그 즐거움으로 작곡된 곡이기때문에 곡자체가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어요.
창문을 열곡 봄을 받아들여 보죠.^^

보자르 트리오의 이앨범은 송어가 퍼득 퍼득 할듯이 생동감이 넘치는 훌륭한 앨범입니다.
게다가 이 앨범에 또다른 중요한 베토벤의 트리오인 유령
들어 있어요. 송어 앨범은 아마 한 1 천개는 될텐데 그중에 이 앨범은
후회 없는 선택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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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플룻 소나타 시칠리아노

천상의 멜로디 시칠리아노 바흐 플룻 소나타

이 앨범에서 젤 유명한건 시칠리아노 인데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서 생겨난 무곡입니다. 
클래식의 클자를 몰라도 이노래는 대부분 알고 게십니다.
하이페리온에서 최근에 나온 앨범이 열풍이긴 한데...아쉬움이자 맘에드는게 피아노라는 점이고
근데 피아노가 안젤라휴잇이고.....

제임스 골웨이의 이 앨범은 그런 모든점을 완벽하게 커버하는 끝장판입니다.
골웨이를 폄하하는분도 게신데 크로스 오버를 많이하셔서그렇치 요즘 난리치는 엠마뉴엘파후드 빰을 후려치실
실력자십니다.

다른곡도 워낙에 좋은 앨범입니다.
플룻은 형태의 변형이 없이 가장 오래된 악기중에 하나입니다.
조금 모자른듯한 바람빠진 소리가 플룻의 매력이겠죠?

아름다운 앨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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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 육중주 2악장


브람스의 사랑의 결정  현악 육중주

2바이올린 2 비올라 2첼로로 이루어진 이 노래는 특이하게 주제를 비올라가 연주하는데
브람스가 이부분을 기가막히게 처리해서 비올라가 가진 악기의 특수성을 배가 시킨 곡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쩌든 브람스는 이곡를 썻을때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합니다.

혹자들은 이곡을 브람스의 눈물이라고 한느데 2악장의 워낙 유명한 선율때문일 듯 합니다.
전체적으로보면 우수에 찬 곡이기도 하지만 기쁨도 많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곡을 완성해놓고
클라라한테는 피아노로 편곡해서 따로보냈다능....
소심하게도 "작품에 대해 긴 답장을 부탁해요. 친구로서.."
라는 거짓부렁의 편지를 보냈다네요.

아우~~ 보는 제가 속이 다 터지네요

루이말의 영화 "연인들"에서 이노래가 나옵니다. 연인들의 복잡한 심정과 노래가 잘 어울립니다.
100만년전 영화이지만 재밌어요 한번 보시길...

Talich Quartet 의 이 앨범은 품격과 실력에서
부족함이 없는 멋진 연주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어렵게 느껴지시면 1 번 2악장부터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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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 종달새


내가 고향곡만 많이 작곡했는지 알지? 천만에 사중주도 내가 짱이야
하이든의 현악 사중주들


하이든이 한 일이 바로크시대에 유행했던 모음곡따위를 현재의 현악 사중주의 틀로 확립시킨건데요. 음...장던점이 있죠
어쩌든 사중주는 이때부터 무지하게 발달했습니다.
종달새는 사중주를 몰라도 이노래만은 들어보셨을꺼에요.

에스테르하지 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 페터 토스트의 청탁으로 작곡해서 토스트 사중주곡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이야 
아무도 그렇게 안부르고 걍 종달새라 합니다.
봄에 날아오르는 종달새 같은 선율때문에 후세에 부쳐진 별명입니다.

즐거움? 설레임? 같은 기분좋은 기분이 가득 한  행복한 곡입니다. 서서 가볍게 춤이라도 춰야 할 ....

아마데우스쿼테의 하이든은 그냥 교과서 그자체 입니다. 완벽해요.
다른 2 개의 커플링 곡도
유명한 곡입니다. 후에 모짜르트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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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 트리오,슈베르트 죽음과 소녀, 베토벤 현악은 후보까지만..
그리그 바이올린 소나타, 베토벤 첼로 소나타, 라흐마니노프 첼로소나타,브람스 크라리넷
멘델스죤 트리오, 바흐의 바이올린 소나타, 기타 바로크 실내악
등등 후보에 올랐다 제외됀 음악이 많이 있습니다.
너무 양 위주로한 게시물이 될까봐 걱정되서 였어요.
이 정도로 시작하셔도 재밌을 꺼에요.

이번에도 모짜르트는 빼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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