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쉬운 길로 가지 마라! makarios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896)
목회 (632)
인생 (179)
동경in일본 (35)
혼자말 (50)
추천 (0)
04-30 04:36
Total
Today
Yesterday

달력

« » 2024.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 뉴욕타임즈 (미)

- 씨엔엔 (미)

- 씨비에스 뉴스 (미)

- 유에스에이 투데이 (미)

- 에이비씨 뉴스 (미)

- 타임지 (미)

- 폭스 뉴스 (미)

- 워싱턴 포스트 (미)

- 블룸버그 (미)

- 월스트리트 저널 (미)

- 비비씨 뉴스 (영)

- 가디언 (영)

- 인디펜던스 (영)

- 텔레그래프 (영)

- 알자지라 (아랍)


'인생 > 세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가별 부채비율  (0) 2020.03.20
김명수 대법원장 담화  (0) 2018.05.31
포항에서 지진이 있었습니다.  (0) 2017.11.15
김제동의 시사IN 인터뷰 Show  (0) 2016.11.17
대구시국선언 여고생의 자유발언  (0) 2016.11.08
Posted by makarios
, |

오늘 포항에 지진이 있었습니다.

역시나 지진에 매우 취약하네요. 더이상 피해가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모두 같이 기도해 주세요. 



Posted by makarios
, |

우동 한 그릇

인생/책이야기 / 2017. 1. 11. 09:39





一杯のかけそば / 구리 료헤이(栗良平)의 단편소설

해마다 섣달 그믐날이 되면 일본의 우동집들은 일년중 가장 바쁩니다.
삿포로에 있는 우동집 <북해정>도 이 날은 아침부터 눈코뜰새 없이 바빴습니다.

이 날은 일 년중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밤이 깊어지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빨라졌습니다.
그러더니 10시가 지나자 손님도 뜸해졌습니다.

무뚝뚝한 성격의 우동집 주인 아저씨는 입을 꾹 다문채
주방의 그릇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편과는 달리 상냥해서 손님들에게 인기가 많은 주인여자는,
"이제 두 시간도 안되어 새해가 시작되겠구나, 정말 바쁜 한 해였어."하고 
혼잣말을 하며 밖에 세워둔 간판을 거두기 위해 문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출입문이 드르륵~,하고 열리더니
두 명의 아이를 데리고 한 여자가 들어섰습니다.

여섯 살과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애들은 새로 산 듯한 옷을 입고 있었고,
여자는 낡고 오래 된 체크 무늬 반코트를 입고 있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주인 여자는 늘 그런 것처럼 반갑게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렇지만 여자는 선뜻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머뭇 머뭇 말했습니다.

"저…우동…1인분만 시켜도 괜찮을까요?……"
뒤에서는 두 아이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세 사람은, 다 늦은 저녁에 우동 한 그릇 때문에
주인 내외를 귀찮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해서 조심스러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주인 아주머니는
얼굴을 찡그리기는커녕 환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네... 자~, 이 쪽으로..." 난로 바로 옆의 2번 식탁으로 안내하면서
주방 안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여기, 우동 1인분이요!"

갑작스런 주문을 받은 주인 아저씨는 그릇을 정리하다 말고
놀라서 잠깐 일행 세 사람에게 눈길을 보내다가 곧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우동 1인분!" 그는 아내 모르게 1인분에 우동 반 덩어리를 더 넣어서 삶았습니다.
그는 세 사람의 행색을 보고 우동을 한 그릇밖에 시킬 수 없는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 여기 우동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가득 담긴 우동을 식탁 가운데 두고, 이마를 맞대며 오순도순 먹고 있는
세 사람의 이야기 소리가 계산대 있는 곳까지 들려왔습니다.

"국물이 따뜻하고 맛있네요."
형이 국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습니다. "엄마도 잡수세요."
 
동생은 젓가락으로 국수를 한 가닥 집어서 어머니의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비록 한 그릇의 우동이지만 세 식구는 맛있게 나누어 먹었습니다.

이윽고 다 먹고 난 뒤 150엔(한화 약 1,500원)의 값을 지불하며, "맛있게 먹었습니다."라고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나가는 세 사사람에게 주인내외는 목청을 돋워 인사를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 후, 새해를 맞이했던 <북해정>은 변함없이 바쁜 날들 속에서
한 해를 보내고 또 다시 12월 31일 섣달 그믐날을 맞이했습니다.

지난해 이상으로 몹시 바쁜 하루를 보내고 10시가 지나 가게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더니, 두 명의 사내아이를 데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습니다.

주인 여자는 그 여자가 입고 있는 체크 무늬의 반코트를 본 순간,
일년 전 섣달 그믐날 문 닫기 직전에 와서 우동 한 그릇을 먹고 갔던그 손님들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여자는 그 날처럼 조심스럽고 예의바르게 말했습니다.

"저…우동…1인분입니다만…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주인 여자는 작년과 같이 2번 식탁으로 안내하면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기 우동 1인분이요!"
주방 안에서, 역시 세 사람을 알아 본 주인 아저씨는 "네엣! 우동 1인분!"
그러고 나서 막 꺼버린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였습니다.

물을 끓이고 있는데 주인 여자가 주방으로 들어와 남편에게 속삭였습니다.

"저 여보, 그냥 공짜로 3인분의 우동을 만들어 줍시다." 그 말에 남편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안돼요. 그렇게 하면 도리어 부담스러워서 다신 우리 집에 오지 못할 거요."
그러면서 남편은 지난해처럼 둥근 우동 하나 반을 더 넣어 삶았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내는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보, 매일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인정도 없으려니 했는데 이렇게 좋은 면이 있었구려." 남편은 들은 척도 않고입을 다문 채 삶아진 우동을 그릇에 담아 세 사람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식탁 위에 놓인 한 그릇의 우동을 둘러싸고 도란도란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 소리가 주방 안의 두 부부에게 들려왔습니다.
"아…맛있어요…"
 
동생이 우동 가락을 우물거리고 씹으며 말했습니다. "올해에도 이 가게의 우동을 먹게 되네요."
동생의 먹는 모습을 대견하게 바라보던 형이 말했습니다."내년에도 먹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주인 내외는 순식간에 비워진 우동 그릇과 대견스러운 두 아들을
번갈아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이번에도, 우동값을 내고 나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향해
주인 내외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 말은, 그날 내내 되풀이한 인사였지만 주인 내외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크고 따뜻함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의 섣달 그믐날 밤은
<북해정>의 주인 내외는 누가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밤 9시 반이 지날 무렵부터 안절부절 못하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0시가 지나자 벽에 붙어 있던 메뉴를 차례차례 뒤집었습니다.

금년 여름부터 값을 올려 <우동 200엔>이라고 씌어져 있던 메뉴가 
150엔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번 식탁 위에는 이미 30분 전부터 '예약석'이란 팻말이 놓여졌습니다.

이윽고 10시 반이 되자,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와 두 아들, 그 세사람이 들어왔습니다.
형은 중학생 교복, 동생은 작년에 형이 입고 있던 점퍼를 헐렁하게 입고 있었습니다.

두 형제 다 몰라볼 정도로 성장해 있었는데,
아이들의 엄마는 여전히 색이 바랜 체크 무늬 반코트 차림이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저…우동…2인분인데도…괜찮겠죠?" "넷!…어서 어서 자, 이쪽으로……"

세 사람을 2번 식탁으로 안내하면서, 주인 여자는
거기에 놓여있던 <예약석>이란 팻말을 슬그머니 감추고
주방을 향해서 소리쳤습니다. "여기 우동 2인분이요!"

그 말을 받아 주방 안에서 이미 국물을 끓이며 기다리고 있던
주인 아저씨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네! 우동 2인분, 금방 나갑니다!".

그는 끓는 국물에 이번에는 우동 세 덩어리를 던져 넣었습니다.
두 그릇의 우동을 함께 먹는 세 모자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어느 해보다도 활기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들에게 방해될까봐 조용히 주방 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주인 내외는
우연히 눈이 마주치자 서로에게 미소를 지으며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였습니다.

세 사람의 대화는 계속되었습니다.
"시로도야, 그리고 쥰아~ 오늘은 너희 들에게 엄마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구나."
"고맙다니요?…무슨 말씀이세요?"

"너희들도 알다시피 돌아가신 아빠가 일으킨 사고로 여덟명이나 되는 사람이 부상을 입었잖니?.
일부는 보험금으로 보상해 줄 수 있었지만 보상비가 모자라 그만큼 빚을 얻어 지불하고
매월 그 빚을 나누어 갚아왔단다."

"네…알고 있어요."
"그 빚은 내년 3월이 되어야 다 갚을 수 있는데, 실은 오늘 전부 갚았단다"
"네? 정말이에요 엄마?" 두 형제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그래, 그 동안 형 시로도는 아침 저녁으로 신문 배달을 열심히 해 주었고,
동생 쥰이는 장보기와 저녁 준비를 매일 해 준 덕분에 엄마는 안심하고
회사에서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단다. 그것으로 나머지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던 거야."

"엄마, 형! 잘됐어요! 하지만, 앞으로도 저녁 식사 준비는 제가 계속할 거예요."
"저도 신문 배달을 계속할래요! 쥰아, 우리 힘을 내자!" 형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어머니는 아이들의 손을 움켜쥐며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그걸 보며 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엄마, 지금 비로소 얘긴데요,
쥰이하고 제가 엄마한테 숨긴 게 있어요.
그 것은요… 지난 11월에, 학교에서 쥰이 수업을 참관하러 오라는 편지가 왔었어요.

그리고 쥰이 쓴 작문이 북해도의 대표로 뽑혀 전국 작문대회에 나가게 되어서
수업 참관일에 그 작문을 쥰이 읽기로 했다고요,"

"그래…그랬었구나…그래서?…" "선생님께서 작문 시간에,
'나는 장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제목으로
작문을 쓰게 했는데 쥰은 '우동 한 그릇'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서 냈대요.

지금 그 작문을 읽어 드리려고 해요. 사실 전 처음에 '우동 한 그릇'이라는 제목만 듣고는,
여기 '북해정'에서의 일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쥰 녀석...
무슨 그런 부끄러운 얘기를 썼지?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쥰이의 작문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자, 지금부터 읽어드릴게요."

시로도는 교복 주머니에 접어서 넣어 두었던 종이 두 장을 꺼내어 펼쳤습니다.
쥰의 작문을 읽어 내려가는 시로도의 목소리는 작았지만낭랑하게 우동 가게에 울려 퍼졌습니다.

"우리 아빠는 운전사고로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데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위해 보험금으로도 부족해서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그 때부터 엄마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셨고,
형은 날마다 조간과 석간 신문을 배달해서 돈을 벌었다.

아직 어린 나는 돈을 벌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
엄마와 형은 나에게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했다.

대신 나는 저녁이면 시장을 봐서 밥을 해놓는 일을 했다.
내가 해 놓은 밥을 엄마와 형이 맛있게 먹는 걸 볼 때 나는 행복하다.

나도 우리 식구를 위해 작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빚을 하루라도 빨리 갚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절약하는 생활을 했다.

엄마의 겨울 코트는 낡고 해어졌지만 해마다 꿰매어 입으셔야 했다.

그러던 중에 재작년 12월 31일 밤에 우연히 한 우동 가게를 지나치게 되었다.
안에서 흘러나오는 우동 국물의 냄새가 그렇게 맛있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우리 형제의 마음을 알았는지 엄마는 우리에게 우동을 사 주시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 말이 반갑고 고마웠지만 우리 형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선뜻 가게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형과 나는 망설이다가 딱 한 그릇만 시켜서 셋이서 같이 먹자고 엄마한테 말했다.
한 그릇이라도 우리에게 우동을 먹이고 싶었던 엄마와,
우동 국물 냄새에 마음이 끌린 우리 형제는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문 닫을 시간에 들어와 우동 한 그릇밖에 시키지 않는 우리가 귀찮을 텐 데도
주인 내외분은 친절하고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주인 내외는 양도 많고 따뜻한 우동을 우리에게 내놓았다.
그러고나서는 문을 나서는 우리에게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하며
큰소리로 말해주는 그 목소리는 우리에게,
"지지 말아라! 힘내! 살아갈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은 그 후 작년 섣달 그믐날에도 그 우동 가게를 찾아갔다.

여전히 우리는 형편이 나아지지 않아서 우동은 한 그릇밖에 시킬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날도 마찬가지로 주인 내외분은 친절하고 따뜻하게 우리를 대접해 주었다.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 하는 인사도 여전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나중에 내가 어른이 되면 힘들어 보이는 손님에게
"힘내세요! 행복하세요!" 하는 말 대신 그 마음을 진심으로 담고 있는
"고맙습니다!" 하고 말해줄 수 있는 일본 최고의 우동 가게 주인이 되겠다고..."

주방안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주인내외의 모습이 어느새 보이지 않았습니다.

형이 동생의 작문을 읽어 내려가는 사이 두 사람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한 장의 수건을 서로 잡아당기며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연신 닦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는 동안
해마다 12월 31일 섣달 그믐날밤이면 이들 모자가 우동을 먹으려고 올 것이라는 기다림 속에
<북해정>은 입소문까지 널리 퍼져 많은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해 12월 31일 밤 10시 30분이 지났을 무렵에 입구의 문이 드르륵~ 하고 열렸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향하며 동시에 그들은 이야기를 멈추었습니다.
코트를 손에 든 양복 정장 차림의 두 사람의 청년이 들어왔습니다.

"공교롭게 만원이라 빈자리가 없어서~"라며 여주인이 거절하려고 했을 때...

기모노 차림의 부인이 머리를 숙이며 들어와 두 청년 사이에 섰습니다.
"저... 우동... 3인분입니다만... 괜찮겠죠?"

그 말을 들은 여주인의 얼굴색이 변했습니다.
십 수년간 기다림의 세월을 순식간에 밀어 젖히고, 
그 옛날의 젊은 엄마와 어린 두 아들의 모습이 겹쳐졌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해하고 있는 여주인에게 청년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14년 전 섣달 그믐날 밤, 모자 셋이서 1인분의 우동을 주문했던 사람입니다.
그 때의 한 그릇의 우동에 용기를 얻어 세 사람이 손을 맞잡고 열심히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금년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하여내년 4월부터 삿뽀로의 종합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동집 주인은 되지 않았습니다만, 교토의 은행에 다니고 있는 동생과 상의해서
지금까지 삶 가운데 최고의 사치스러운 것을 계획했습니다.

그것은, 섣달 그믐 날 어머님과 셋이서 삿뽀로의 <북해정>을 찾아와 
뜨거운 3인분의 우동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 있던 여주인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넘쳐 흘렀습니다.

테이블에 진을 치고 있던 손님 중에 한 사람이 우동을 입에 머금은 채 
그대로 꿀꺽하고 삼키며 일어나 큰 소리로, "여봐요 여주인 아줌마! 뭐하고 있어요?
10여 년 넘게 이 날을 위해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기다린,
섣달 그믐날밤의 2번 <예약석>이잖아요, 빨리 안내해요~, 안내를!"

손님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린 여주인은,"잘 오셨어요... 자 어서요... 여보! 2번 테이블 우동 3인분!"

늘 무뚝뚝한 얼굴로 주방에서 눈물을 적시던 주인은,
"네엣! 우동 3인분!"하며 더욱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10여 년을 기다렸던 손님을, 예기치 않게 맞았기에
환성과 박수가 터지는 가게 밖에서는 조금 전까지 흩날리던 거센 눈발도 그치고,

갓 내린 눈에 반사되어 창문에 비친 <북해정> 이라고 쓰인 옥호막(屋呼幕)이
한 발 앞서 불어제치는 정월의 칼바람에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1988년 구리 료헤이(栗良平/1954년 북해도 생)의 단편소설 '우동 한 그릇'은
당시 일본열도를 눈물로 강타하며 국회회의장에서까지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했고...
해마다 섣달그믐날이 가까워지면, 북해도의 찬바람 같이 얼어붙은 사람들의 마음을 마치, 한 그릇 우동국물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뜻한 김처럼, 나눔과 배려와 사랑, 용기와 감동을 안겨주기에~, 눈시울 적셔가며 뜨겁게 읽었다고 한다


Posted by makarios
, |


'인생 > 기타등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와주세요~  (0) 2021.06.01
모기(Mosquitos)야 물러가라!  (0) 2020.06.07
잘 알려지지 않은 생명체들  (0) 2015.03.19
근육 테이핑(스포츠 테이핑) 방법  (0) 2015.01.15
배변에 대한 다섯 가지 오해  (0) 2014.09.30
Posted by makarios
, |



<인터뷰>라는 말은 내면을 들여다 본다는 뜻이다.

우리는 보통 어떤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하여 질문을 던지고 그 대답을 듣는다.

김제동은 말하고 사람이고, 그의 말은 재미있다.

그러나 오늘 김제동은 재미있지 않다. 오히려 뭔가 울분이 가슴에 있음이 느껴진다.

그가 보이지 않는 탄압을 받았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한 억울함에 가득 찬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힘 없는 사람들의 억울함에 대하여 공감하느러 울분이 가득 찬 것 같다.

긴 시간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내면을 보는데... 안스럽다.

그는 청년이면서도 기성세대이고, 그래서 상처 받았으면서도 책임감에 눌려 있다.

그의 고뇌는 작지 않다. 그의 고독은 얕지 않다.

이 인터뷰를 보고, 김제동이라는 사람이 훨씬 좋아졌다. 

영화보다 긴 이 인터뷰를 끝까지 들었던 까닭이다. 

그의 영혼을 위해 잠시 기도해 본다...


Posted by makarios
, |

2016-11-09 /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된 날에 / 산책하다!  



Posted by makarios
, |


나는 개인적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생각했다.

그래, 사회적 시스템은 참으로 그러했다. 하지만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까지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시민들이 현실을 참고 인내한다고 하여도, 그들의 의식은 끊임없이 사람사는 세상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한 고등학생의 대중연설이, 그 어떤 정치가의 목소리보다 더 깊고 크게 가슴을 울린다.

대구는 과연 민주주의의 성지가 다시 될 수 있을까? 


대구 시국선언 여고생의 자유발언 (2016-11-05)


Posted by makarios
, |


검찰은 지난 2016년11월2일,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을 주도한 혐의로, 용혜인씨에게 징역 2년을 구형했습니다. 검찰이 용씨에게 징역형을 구형한 혐의는 2014년 세월호 침묵 행진과 유가족 단식 농성 당시 항의 집회, 여러 추모집회 등에서 집회 주최자로서 신고된 범위를 이탈했다는 죄(일반교통방해)와 미신고 행진을 했다는 죄(집시법 위반)등입니다.

용혜인씨가 마지막 공판에서 발언한 최후진술을 공유합니다.

과연 그녀의 침묵행진이 징역 2년을 구형할 정도로 우리 사회를 위험하게 한 행동인지... 대한민국의 검찰은 이미 상식으로 납득하기에는 너무 멀어진 괴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염려합니다. 지금 대통령에게도, 검찰에게도 마지막 기회가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손석희 앵커의 브리핑과 같이, 그 누군가의 마지막 잎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최후진술 ]


세월호가 진도앞바다에서 침몰한 지도 1000일이 다 되어갑니다. 그 사이에 참 많은 일이 있었고 저의 삶도 참 많이 변했습니다. 하고자 하는 말이 많지만 짧은 최후진술 속에 다 담아내기 어려울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법리적 이야기들은 변호사님과 함께 재판진행과정에서 많이 진행했으니 굳이 최후진술에 담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2014년 4월 16일 아침, 이곳에 계신 판사님, 검사님, 변호사님 그리고 다른 분들은 세월호의 침몰소식을 접하셨던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시험기간이라 조금 일찍 학교에 도착해서 학생회실에서 학교후배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같이 있던 후배 중 한 명이 핸드폰을 통해서 배가 침몰하고 있다고 했고, '단원고'라는 익숙한 이름의 학교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단원고. 중학교 3학년, 제가 고등학교 진학을 고민할 때, 당시 개교한 지 얼마 안 된 단원고는 교복도 예쁘고 새로 생긴 학교라 많은 친구들이 단원고에 가고 싶어 했던 생각이 났습니다. 너무 놀라웠지만 전원구조라는 소식에 마음 놓고 수업에 들어갔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원구조라는 소식은 대형 오보였고, 몇 명인지조차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채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배 안에 그대로 남아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너무 놀라웠지만 그래도 수백 명의 잠수부, 배가 수백 척, 헬기가 몇 대, 조명탄이 수백 개 투입되어 대대적 구조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에 마음을 놓았습니다.

부끄럽지만 사실 당시에는 몇 명이라도 구조되어 나올 줄 알았습니다. 언론의 카메라 플래쉬 앞에서 가족과 눈물과 감동의 재회를 하는 장면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쉽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제대로된 구조작업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음이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밝혀졌습니다. 전 국민이 슬픔에 빠졌고, 언론에서는 '베르테르 효과'를 운운하며 이 참사가 국민들에게 미칠 영향을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일각에서는 '소비심리 위축'같은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습니다. "미안하다"라는 말이 가장 많았습니다. 터져나오는 "미안하다"라는 말을 보면서 일면식도 없는 이 사람들이 도대체 왜 미안할까 고민스러웠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이거였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시민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했던 '미안하다'는 말은 304명의 목숨이 속절없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가족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해야하는 사회를 만든 것에 대한 사회구성원들의 책임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온 국민을 휘감은 슬픔 속에서 저는 이 슬픔을 혼자 속으로 삭이기만 하면 병이 날 것 같았습니다. 언론에서는 '베르테르 효과'를 보도하기 시작했고, 저는 물이 들어오는 순간의 공포와 절망, 절규가 가득찬 배 안의 장면들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이 슬픔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슬퍼하는 사람들과 모여 이야기하고, 서로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뭐라도 해보자고 이야기했고, 당시 언론에서 가장 많이 보도되었던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이 이 참사의 본질을 담고 있는 것 같아서 "가만히 있으라"라는 피켓과 추모의 의미를 담아 노란 리본을 묶은 국화꽃을 들고 검은 옷을 입고 서울 시내를 걷기로 했습니다.

5월 8일, 서울시내에서 처음으로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났습니다. 그날 밤 앵커들에게 '검은 옷 입지 마라"라고 한 KBS 보도국장의 말에 분노한 유가족들이 KBS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친구들과 저녁을 먹다가 급하게 택시를 타고 이동한 KBS 여의도 앞에서 저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70개가 넘는 영정사진이 유가족들의 머리 위에 들려 수많은 경찰병력과 차벽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영정사진 속의 눈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이 두려워서 제대로 영정사진을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유가족들은 사과 받지 못했고, 당시 유가족들은 "그래도 믿을 건 박근혜 대통령님 뿐"이라며 청와대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유가족들은 아무도 만날 수가 없었고, 추위 속에 화장실에 갈 때도 영정사진을 끌어안고 가던 유가족들을 길바닥에 앉혀놓고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안에서 "소비심리위축"을 걱정했습니다. 저는 그날의 영정사진 속 얼굴들을 앞으로도 계속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경찰이라는 곳은 사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불편하고 두려운 곳입니다. 자신이 피해자여도 경찰서에 신고하거나 찾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난생 처음 연행되어 경찰서에서 2박 3일을 자보기도 하고, 경찰과 검찰에 불려 다니고, 압수수색영장이라는 것을 처음 직접 보기도 했고, 2년 동안 재판을 받으면서 힘들기도 했지만 누군가 저에게 "후회하냐"라는 질문을 한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후회하지 않는다고 답할 것 같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것이 살아남은 사람의 책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에 참 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저에게 던졌던 질문은 "살아남은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였습니다. 다시는 이와 같은 전근대적이고 끔찍한 참사가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 우리를 대의한다는 정부와 정치권이 그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그 역할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남겨진 우리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재판장님, 재판장님께서는 세월호 참사 304명의 죽음 이후 남겨진 우리의 책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을 뿐이고, 앞으로도 한치 앞의 나의 삶만 바라보는 것이 아닌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법치주의"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용하기 위한 개념이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이 그 억압을 끊어내기 위해서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준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들 속에 만들어진 개념이라고 배웠습니다. 이 재판은 저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재판이지만, 저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자는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있고, 벌금을 내야하고, 구속되었습니다. 추모는 죄가 아닙니다. 이 사회의 구성원이자 주인으로서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자는, 이윤보다 인간이 중요한 사회를 만들자는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우리 모두가 무죄입니다.

참 혼란스러운 시기입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사실은 이 나라가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고, 많은 국민들이 또다시 분노하고 있습니다. 저 한 명의 재판이었지만, 이 재판의 결과가 불의와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에게,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슬퍼하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함께 슬퍼했다는 이유로 잡혀가고 재판을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희망을 줄 수 있는 결과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월호가 침몰한 지 932일째인 2016년 11월 2일

용혜인

Posted by makarios
, |



후세 다츠지(布施辰治;1890-1953)

그는 일제시대의 변호사였다. 

그러나 자국의 이익보다 약자의 진실을 크게 보았다.

이러한 성숙한 시민의식은, 그가 법조인이라는 지위를 사용하여 수많은 조선인을 위해 일하게 했고,

그의 노력은 역사라는 강물 속에 한 방울의 물이 되었다.

우리는 한 개인이 너무도 작다는 것을 수없이 확인한다. 

그러나 그 개인의 힘이 결국에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라 믿는다.

후세 다츠지... 그는 <밀정>의 변호인이기도 했다. 





Posted by makarios
, |


진실이 언제나 대중의 입맛에 맞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국이든, 일본이든, 미국이든... 똑같다. 

때문에 세상이 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진실을 굳게 잡고 인내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것이 정치가이고, 법조인이고, 언론인이고, 종교인의 사명일 것이다.


일본정부가 전쟁범죄를 은폐축소하고 부정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일본에 이런 언론인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도 일본에게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많은 불이익을 당했음에도 굳게 감당하는 우에무라 다카시(植村 隆 57) 상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하루속히 이런 분들이 사회적으로 그 공로를 인정받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Posted by makario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