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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2.16 목사는 누에다
  2. 2012.07.21 명예로운 권위


2013-02-16 목양칼럼


누에는 누에나방의 애벌레이다. 이 곤충은 보통 알, 유충(애벌레), 번데기, 성충(나방)의 4단계를 겪는데, 그 중에서 유충의 시기를 ‘누에’라 한다. 사실, 누에는 뽕잎이 아니라 다른 식물의 잎도 먹을 수는 있지만, 이 경우에는 완전한 생장을 못한다. 그러니까 뽕잎을 먹는 것은 누에에게 있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암(流巖) 홍만선(洪萬選:1643~1715)은 그의 저서 <산림경제(山林經濟)>에서 누에에 대하여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말해준다.

“누에는 통곡하는 소리, 부르짖거나 성내는 소리, 욕지거리, 음담패설을 싫어하고, 불결한 사람이 곁에 오는 것을 싫어하며, 부엌에서 칼 쓰는 소리를 싫어하고, 대문이나 창문 두드리는 소리 또한 싫어한다. 또한, 연기도 싫어하고 생선이나 고기 굽는 냄새도 싫어하며 비린내, 누린내에 사향냄새까지도 싫어한다.”

가히 누에의 결벽(潔癖)은 사람보다 심하고 까다롭다. 그래서인지 이 곤충을 예부터 천충(天蟲)이라 불렀고, 양잠(養蠶)을 하는 가정은 청결과 정화(淨化)를 중시했다.

지금에도 다르지 않다. 조금이라도 누에가 먹는 뽕잎에 농약이 묻어 있으면, 누에는 즉시로 토액을 내뿜고 몸이 오그라들어 죽는다. 그 예민함이 동물보다 앞서서, 요즘은 식품이나 약품의 안전성을 검증하는 데에도 누에가 널리 사용된다고 한다.


이에 관계된 글을 읽으며 생각했다. 목사는 누에다. 

목사는 하나님 말씀 이외의 것을 먹을 수는 있지만, 그러면 생장이 어그러져서 온전히 이루지 못한다. 목사는 상서로운 것을 지극히 싫어해야 하며, 그것으로부터 구별되어 살아야 한다. 목사가 세속적으로 오염된 것을 먹고도 토하고 죽지 않으면 진짜 목사 일리 없다. 목사는 이 세상이 얼마나 오염되었고,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안전핀이 되어야 하며, 그것을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한다. 

마땅히 지금의 시대를 보면, 목사가 제일 많이 죽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실상은, 목사가 뽕잎을 안 먹고 세속에 찌든 먼지와 부패한 고기를 먹어서 이상한 괴물로 변하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교단의 총회장이 동료 목사들과 함께 단란주점을 출입했다 하고, 어느 큰 교회의 목사는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하여 남의 글을 도둑질 했다고 한다. 교회 안에서 성추행의 범죄가 들통 났는데도 해당 목사는 거액의 헌금을 받아 교회를 나가서 버젓이 새교회를 개척했다. 

이게 목사인가? 이게 목사가 감히 할 짓인가?

그들은 사회적으로 여전히 유력(有力)하지만, 그러나 단언하건대 그들이 여전히 말씀의 실크를 뽑을 리는 없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며 가슴이 몹시 아프다. 그러나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정말 사람의 하는 짓이 한 마리 벌레만도 못하다. 누에도 자기 먹을 잎과 먹지 말아야 할 경계를 알고,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명을 이루는데, 사람이 어찌 이리도 우매하고 어리석다는 말인가!

오늘은 목사로서, 사람으로서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나를 위해 기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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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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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2 목양칼럼



자유와 평등. 그것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리며 추구한 가치이며, 동시에 성경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가치이다. 성경이 그토록 를 미워하는 이유도 그것이 사람의 영혼을 불행한 사슬에 묶는 굴레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그 죄의 사슬로부터 사람을 구원하고 해방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모든 억압에 항거하는 정신이 내포되어 있다 하겠다.

종교개혁과 더불어 만인제사장이라는 교리를 강조하게 된 것도 같은 이유다. 제사장은 본래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신앙적인 중재를 담당하고 대신하여 수고하는 헌신적인 직분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제사장이 하나님의 권위를 사칭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자기의 욕망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집단이 되고 말았다. 결국 만인제사장은 근본적으로 제사장이라는 역할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제사장이라는 이름을 남용하여 벌어지는 일체의 억압과 부조리에 항거한 교리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의 시작을, 1517년에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대학교회의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이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5년만 있으면 500주년을 맞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국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목사라는 이름의 제사장에 눌려 정신적 억압에 신음하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목사는 명예로운 직분이다. 목사의 명예는 성도들을 위해 수고하고, 성경을 실천하며, 신앙적 삶의 모델을 형성하는 것에 있다. 목사는 그러한 삶의 궤적 속에서 한 교회를 대표하고, 신자들을 양육하여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그것은 강요된 권위가 아니라, 동고동락(同苦同樂)의 동행 속에서 얻어지는 신뢰의 권위이다.

때문에 목사가 신뢰를 깨뜨리면 당연히 그 권위도 회수되어야 한다. 목사는 별종(別種)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평등한 신자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직분이 특별한 것이다. 직분은 그것을 감당할 때에 명예로운 것이지, 감당하지 못하는 자의 방패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에는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나온다. 그는 불행하게도 돈에 신앙과 양심을 팔았다. 모압의 왕을 위하여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고 시도했다. 하나님은 그가 가는 길을 막으셨다. 더 놀라운 것은 당나귀의 입을 열어 발람에게 교훈을 주신 것이다. 이것은 극단적인 가르침이다. 선지자의 직분이 귀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면 당나귀라도 대신할 수 있다는 교훈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명예롭게 여겼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타이틀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고 하셨던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 그러나 귀한 직분을 감당하는 사람은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반대로 그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에게까지 명예로운 권위를 내어줄 필요는 없다. 성경은 이 점에 대하여 매우 단호하며, 이것이 성경적 정의라고 나는 믿는다.

교회에서 섬기는 모든 사람들은, 마땅히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여겨야 한다. 억압의 굴레를 다시는 쓰지 말라. 하나님은 자유와 평등의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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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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