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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목마름은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흙으로 몸을 만드시고 '사랑'으로 호흡을 불어 넣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 없이 흙일 뿐이고, 흙을 채우는 모든 것에 불구하고도 '사랑'이 없으면 목마른 것이다.


인생의 길을 걷다가 지치고 막연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한 잔의 생수도 다름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을 받은 사람은 건강하다. 사랑 받고 있는 사람에게선 빛이 난다.


그러나 사랑에 굶주린 사람은 영혼이 창백하며 거창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표정부터 남루하다.


사랑을 대신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사람의 생명이 하나이듯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자기 실현의 길도 하나이며, 그것은 바로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세계가 지옥이며, 사랑이 충만한 나라가 천국이다.


마음의 무수한 상처를 덮어 새살이 돋게 하는 약도 사랑이며, 삐뚤어지고 망가진 정신을 고쳐 온전하게 하는 힘도 사랑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모든 선물의 총합보다 사랑이 더 크다. 그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인생의 작은 일부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 자체를 포기하고 자신을 괴물로 만드는 것이다. 


사랑해야 비로소 사람이다. 


사랑을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며, 사랑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며, 심지어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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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사랑과 하나님 사랑


우리 안에서 자기 사랑을 도려내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내 자신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내가, 자기 사랑을 계속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합니다. 그 갈등에서 간혹 이기기도 하지만, 자기 사랑의 뿌리가 남겨져 있는 동안에는 항상 신앙이 위기를 겪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관상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것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보다 직접적으로 자기 사랑의 사형입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우리 자신이 준비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들여다 보십시오.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울질 하고 있지는 않은지... 신앙이 행복의 수단으로 전락했다면, 이미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미신일 뿐입니다. 

참된 신앙은 버림을 통해 얻고, 죽음을 통해 부활하며, 비움을 통해 채워지고, 포기를 통해 희망을 만납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을 도려내야 비로소 하나님 사랑이 꽃 피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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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5 목양칼럼 ::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은 늘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찾는다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먼 곳을 살필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부르기 전에 이미 거기 계시고, 내가 찾기 전에 이미 나를 찾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매 순간 되새겨야 합니다. 기쁜 일에는 물론이고 슬픈 일에도 기억해야 합니다. 여유로울 때에도 생각하고, 바쁠 때에는 더욱 주의를 기울여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그분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내 곁에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느낌이나 감정과 상관 없이 하나님은 늘 우리 곁에 계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예배를 빼먹고, 기도를 안하고, 성경을 전혀 읽지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 곁을 떠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분이 나빠지셨다고 자리를 박차고 우리 곁을 떠나시는 분이 아니라, 깨어진 관계를 슬퍼하고, 문제에 대하여 변론하며,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문제 투성이가 되어도, 여전히 하나님은 그런 우리 곁에 늘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 동행은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새로운 시간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 너머에, 우리가 살았던 시간에 대하여 깨끗이 정산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재판의 순간 만큼은, 우리는 따뜻한 하나님이 아니라 냉정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그 냉철한 얼굴 속에도 따뜻한 자비를 잊지 않으시겠지만, 적어도 우리 인생에 대하여 대충 넘어가 주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 계신 하나님은 든든하고, 감사하고, 따뜻한 분이시면서 동시에 신경 쓰이며, 부담스럽고, 두려운 하나님이시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맘대로 살지 못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행동과 말을 다하며 사는 사람은 분명 곁에 계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가끔은 혼자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 사람은 도대체 나중에 어쩌려고 저런 말과 행동을 할까?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사람처럼, 하나님의 재판정에 서지 않을 사람처럼 구는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늘 가까이 계십니다.

그것을 잊지 말고 사십시오. 그러면 일요일만이 아니라 모든 인생의 날이 주님의 날이 될 것이며, 예배당 안에서만이 아니라 직장과 가정에서도 항상 진실한 예배의 삶이 이어질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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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8 목양칼럼 :: 능력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주로 영화 속에 나오는 장면이지만, 현실에서도 일어나 우리들을 아연하게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사고나 사건의 현장에서 사람들이 도피를 하는 중에 거의 예외 없이 일어난다. 서로 살겠다고 밀치며 뛰다가 누군가 넘어지면 그 몸을 밟고 또 넘어져 결국에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는 것이다. 때로는 ’사고’ 자체보다 그렇게 희생당한 사람들이 더 나오기도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서울 지하철을 타니 계속해서, 사고와 테러를 당했을 때에  침착하게 안내를 받으며 피난하라는 영상이 나왔다. 사람들은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런 영상이 무의식에 딱지를 만들면, 언젠가 있을지도 모를 사고 앞에서 조금은 정신을 차리고 이성적으로 행동하게 하여 더 곤란한 피해를 줄이도록  돕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 보았다.


인생은 모두 행복을 향해 달린다. 문제는 이 달리기가 화재가 발생한 지하철 역에서 도망 나오는 군중의 그것과 비슷해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다. 그러나 그 능력이 우리가 구하는 행복의 관건은 아니다. 인생의 터널 속에서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도 간혹 있겠지만, 대부분은 충분히 행복을 맛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이 충돌한다. 서로 앞을 가로 막는다. 남의 몸을 밟고서라도 내 행복을 찾겠다는 저돌적인 돌진 앞에서 결국에는 자기도 발목이 걸려 넘어지고 만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이 얽히고설켜 종국에는 행복으로 탈출하는 자 보다 불행의 터널에 갇히는 자들이 속출하는 것이다.


탐욕의 불이 붙어버린 세상이라고 지레 절망할 필요는 없다. 또한 누구에게나 한 번 뿐인 인생을 절망으로 낭비해서도 안 될 일이다. 급할 수록 잘 생각해야 한다. 과연 무조건 달리면 나 혼자 이 불행의 세상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내 능력만 믿으면 나만은 구원 받을 수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그리고 너무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비상구를 안내하는 불을 켜셨다. 그리고 말씀 하신다. 침착하게 안내를 따르면 모두 살 수 있다고. 혼자 살려고 하지 말고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거들어 같이 살도록 하라고. 단순히 구출되는 것이 아니라 영웅이 될 기회를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니 더욱 어이 없는 일이다. 2천 년 동안이나 계속되는 안내 방송에도 귀를 막고 여전히 자기의 직감대로 무작정 달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그래서 누군가를 짓밟고 열심히 달리는 것이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역시 인생은 능력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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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1 목양칼럼 :: 공감할 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재능 중에서 정말 귀하고 귀한 것 중의 하나가 공감(共感)하는 능력이 아닐까 합니다.

성경에도 나와 있는 바와 같이,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친구를 만들고 공동체를 이루며 특별한 ‘우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마음으로 똘똘 뭉친 집단은 비록 그 숫자가 적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의 마음을 이루는 기본이 바로 서로의 감정과 느낌을 공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상은, 바로 이 공감의 재능이 점점 옅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친구’라 말하는 사람 사이에도 과연 상대방의 감정과 생각을 읽고 공감해주는 능력이 얼마나 발휘되고 있을지 의문입니다. 더욱 불행한 것은, 심지어 이 공감의 능력이 가족 사이에서도 사라져간다는 것입니다. 

공감이 없는 인간관계는 모래알의 집합과 같습니다. 그것은 함께 있지만 서로 하나되지 못하며 때문에 필연적으로 외로움을 낳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의 감정과 생각을 이해하고 함께 해 줄 사람이 없어서 사람의 마음은 병이 드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자가 되면 뭐합니까?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해줄 사람이 없다면.

아무리 여유를 얻으면 뭐합니까? 함께 놀아줄 사람이 없다면.

그래서 이 세상에는 불행한 부자도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막상 그 가진 것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는 사람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았고, 외롭고 고독한 세상 가운데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찾아가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 모든 사람들과 마음의 벽을 허물고 공감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내 가정, 내 교회에서부터 이런 공감을 나타내고 하나되지 못한다면, 이 거창한 사명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공감의 기본은 잘 듣고 눈여겨 보는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하여 부주의한 사람은 결코 상대방의 감정을 수용하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감은 어린 아이가 아닌 성숙한 어른의 특성인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울타리를 깨고,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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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4 목양칼럼 :: 


인생에는 성공과 실패가 교차합니다.

성경에도 말씀하기를, 하나님께서 그 미래의 일을 사람에게 숨겨 두셔서 겸손을 배우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전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지나치게 자신의 능력만을 믿고 성공만 생각하는 것은 오만한 태도에서 나오는 그릇된 모습일 수 있습니다. 누구의 인생에나 실패는 있고, 어쩌면 우리는 그 실패를 통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하는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실패는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실패를 통해 우리의 맨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시고, 연단하시고, 변화시켜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언제나,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변화이며, 실력의 성장만이 아니라 우리 전인격의 성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자기의 실체를 낱낱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내가 스스로 나를 안아줄 수 있습니까? 내가 나를 용납하고 안아줄 수 없다면 나 보다 크신 하나님 앞에 어찌 나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용기’는 스스로 자신을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의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성공과 실패를 다 예상할 수 없는 인생 속에서,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하는 내면의 밑천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자신’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나에게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 생각 속에서, ‘나름 괜찮고 멋진 녀석이다!’라고 평가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이면에는 조용히 ‘용기’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하여 실망이 쌓이고, 의심이 부풀고, 비판의 목소리만 높아져 있다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결코 용기가 나오지 않으며, 나를 설득할 수 없는 사람이 남을 설득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복을 얻을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내면의 거울입니다. 원하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마법의 지팡이가 아니라 자기를 살피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으로 자기를 변화시켜 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용기를 잃으면 인생은 표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복을 달라 하기 전에, 우선 스스로 자신을 긍정하고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돌보십시오.

우리 모두에게는 이것을 위한 진정한 기도가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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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8 목양칼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세월은 무시하지 못할 무게로 다가온다.

특별히 청춘이 다하고 중년에 들어서면 더욱 조급한 마음이 들게 되는 것 같다. 조바심을 한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알면서도 그 마음의 조절이 쉽지 않다.

청춘의 특성이 ‘내일’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라면, 장년의 특성은 ‘오늘’의 가치를 발견하고 붙잡는 것이 아닐까?

철학자 몽테뉴는 말하기를,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다. 다른 모든 날을 결정해 주는 날이다. 라고 했다. 

어느 개그맨의 말처럼, 인생은 내가 막을 내리기 전에는 끝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인생에 반전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오늘이 인생 전체를 결정하는 중요함을 가지는 까닭이다.

영화 ‘아메리카 뷰티’에는 비슷한 대사가 등장한다. 오늘은 당신의 남은 인생에서 첫 번째 날이다. (Today is the first day of the rest of your life.)  

정말 벼락 같은 금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하루라도 젊을 때에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고, 하고 싶은 것을 즐기자고 말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 욕망을 따라 살자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과연 그런 삶이 만족을 줄 수 있을까?  얼마나 먹으면 실컷 먹은 것이요, 얼마나 즐기면 후회하지 않을까… 불행하게도, 욕망은 바닷물과 같아서 먹으면 갈증이 풀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갈증을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욕망을 따라 살면 반드시 절망에 다다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다른 소망이 있다. 하루라도 젊을 때에, 주님을 위하여 더 열심히 살고자 하는 바램이다. 말씀을 공부하는 것도, 선교지에 나가는 일도, 자기를 바꾸는 일도 오늘이어야 한다. 내일 하겠다고 생각하면 결국에는 못하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일은 오늘 같은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내일은 내가 오늘과 같이 여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세월을 아끼라 하셨다.(엡5:16) 오늘의 가치를 깨닫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내일은 내일에게 맡겨두고, 오늘에 집중하여 살라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오늘을 흘려 보내지 말라는 것이다. 아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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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麗葬 ]

 

고려장.  늙고 쇠약한 부모를 산속에 버리고 돌아왔다는 모진 자식들의 장례법.
그러나 고려장은 전설로 전해질뿐, 그 실제적 고증이 이루어진 내용은 아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전설은 아시아 국가들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다.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감독의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 (楢山節考(유산절고)는 이러한 일본의 고려장을 내용으로 한다.
본래 후카자와 시치로(深澤七郞)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고 하는데, 1982년에 개봉되었고 아직까지도 수작으로 일컬어지는 영화이다.
이 영화 또한 리메이크작품이다. 1958년 기노시타 게이스케(木下惠介) 감독이 같은 이름의 영화를 이미 만들었다. 가부키 양식에 맞춘 추상적인 영화였다고 하는데, 쇼헤이 감독의 작품에는 그 명성이 미치지 못한다.

 

고려장이 사실처럼 민간에 알려진 것은 일제시대의 일이다. 이 또한 조선의 역사를 부끄럽게 하려는 식민지 사관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부끄러움의 역사로 확대재생산된 것이라면, 보다 구체성을 가진 일본의 기로풍습(棄老風習)이 존재했고 그것이 현대에까지 소설과 영화로 확인된다는 사실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일본은 조선을 부끄럽게 만들기 전에, 과연 자신들에 역사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꼈었을까? 아니면 이 또한 돌을 던지는 자의 맹목(盲目)으로 가려졌을까?

 

요즘 사회를 '능력사회'라 부른다. 때문에 젊은이들은 서로 경쟁하며 능력이 많은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경쟁은 좋은 점도 있다. 능력의 최대치를 끌어낼 뿐만 아니라 성취감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쟁의 그늘도 분명하다. 그것은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없으며, 누군가는 상대적으로 무능력한 사람으로 낙인 찍힌다는 사실이다. 이들에 대하여 사회는 패배자, 혹은 루저(looser)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들은 처절하게 열매에서 소외된다.

 

사회적 소외는 분명히 또 다른 고려장이다. 아직 남겨진 가능성의 불꽃을 꺼 버리는 잔혹함이다. 농경사회 속에서 그 잔혹함은 노동력의 일부가 되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부어졌다면, 이제는 젊더라도 상대적으로 실패자의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면 누구나, 연령과 성별과 인종과 민족에 상관 없이 부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정상적일까? 과연 세상은 승자들이 독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만 할까? 그렇다면 약육강식의 밀림과 인간의 사회가 다른 점이 무엇인가? 혹자는 결코 다를 수 없고, 달라서도 안 된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 적어도 나 같은 목사가 성경이라는 안경을 통해 볼 때에, 이 세상은 극히 부끄러운 세상에 불과하다. 그것은 창조주가 본래 의도한 세상도 아니며, 우리가 역사 속에서 이루려고 했던 세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숭고하다. 장애를 가진 사람과 장애가 없는 사람의 삶이 다르지 않고, 여자와 남자의 삶이 다르지 않고, 능력이 있는 사람과 능력이 부족한 사람의 삶이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당신의 형상을 부으셨다. 똑똑한 사람은 좀 더 하나님께 가깝고, 부족한 사람은 좀 더 하나님과 멀리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니다.

이 만인 평등의 사상이 역사 속에서 꿈틀거려서 차별을 철폐하고 인류를 진보시켜 온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만나는 또 하나의 그릇된 생각, 곧 현대판 고려장은 다시 한 번 성경의 세례를 받아야만 하는 우리 시대의 ‘누룩’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경영자라면, 사람을 잘 선택하여 고용하되 고용된 사람들이 성장의 부속이 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능력이 있는 사람과 능력이 부족한 사람의 차별을 과감히 철폐하고, 일용할 양식을 위해 포도원에 들어온 노동자들에게 평등하게 대우하였던 관대한 농장주의 경영을 시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모든 차별을 다 없애자는 과격한 주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는 복합적이고 고려할 조건들이 많다는 것도 안다. 다만,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인간의 존엄을 믿고 지키려는 의지를 가질 필요가 있고, 또한 그러한 의지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대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성경은 주님의 나라에서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뒹군다고 했다. 이것이 상징은 아닐까? 사자처럼 유능한 사람과 어린 양처럼 무능한 사람이 함께 존엄을 지키고 친구가 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곧 주님의 나라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 나라를 결코 우리의 일생에 이룰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만들어 가려고, 그런 세상을 내 현실에 실현하려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고려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고려장은 무슨 이유를 대고, 어떤 합리화의 과정을 거쳐도 여전히 부끄러운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며, 스스로 자신을 황금의 부스러기로,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불행이 우리 시대에 조금이라도 우리를 통해 해소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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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과는 인사도 말아라(!?)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다른 잘못에 대하여는 관대한 사람들조차 '이단(異端)'이라는 말에는 매우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봅니다. 일부러라도 단호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매우 성경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요한은 그의 두 번째 서신에서 이와 같은 교훈을 교우들에게 증거하였습니다.

 

요한이서 10~11
(1: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1: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아마도 이 성경구절이 이단을 대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단호한 태도를 취하도록 용기를 더하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근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 성경구절을 강력하게 실행하도록 강단에서 목사가 자주 설교하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와 이단

 

사도요한의 편지는 A.D.80~90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학자들에 따라 견해를 달리 하지만, 90년경으로 보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이 시기에 교회는 매우 역동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복음을 증거하신 것은 유대인의 회당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역시 가는 곳마다 먼저 회당을 찾아 복음을 증거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당시에 기독교는 유대교 안의 변혁적인 움직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실체가 드러났고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교회는 '율법'에 대한 완전히 다른 해석으로 유대교와 결별합니다.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유사성은,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그 역사성에 근거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유대교가 기독교를 낳았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야말로 가장 유구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탈된 신앙의 역사를 회복한 것, 부흥시킨 것이 기독교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유대교의 회당은 초대교회에 있어 분명 선교의 장이었습니다. 유대교의 모순과 결핍을 깊이 이해한 전도자들이 복음으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뛰어든 전투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이 회당에서 증거한 말씀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에게 어떤 봉변을 당하고 위험을 겪었는지 우리는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7
(11: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11: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러한 과정 속에서, 교회는 필연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릇된 교훈' 혹은 '다른 복음'이라고 언급되고 있는, 소위 '이단'의 발현입니다.
제가 필연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단을 교회가 조장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 자체가 이미 강력한 종교적 공동체였던 당시의 회당과 이방종교의 아성을 선교했고, 그들을 대거 신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예고된 성격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고, 자기가 가졌던 기존의 선입관을 지독하게 바꾸지 못합니다. 때문에 유대인 교우들은 ‘율법’에 집착했고 이방인 교우들은 ‘성적 방종’에 집착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에 나타난 심각한 문제의 원인이었고 실제로 이단을 발현하게 만든 것입니다. 복음을 들었다고 모두 거듭나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교회는 수구적인 성격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이단에 방어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서신이 기록되는 주후 90년경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이단에 대한 대략적인 정리가 이미 교회 안에서 마무리되는 시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단이 무엇이며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교회 내부적으로 정리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단

 

이단에 대한 성경의 대표적인 명칭은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 명칭에서도 중요한 의도가 읽혀집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자’라는 뜻으로 영지주의(그노시스)와 같이 이방적인 가르침을 교회 안에 가져와 복음을 변질되게 하는 이들을 뜻합니다. ‘거짓 선지자’라는 말은 구약으로부터 그 전례가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잘못 이해하거나 변질시켜서 사람들을 미혹케 하는 자들입니다. 당연히 유대적 전통, 율법과 연관하여 이해할 수 있는 명칭입니다.

이들은 신앙적으로 자신만 파선할 뿐이 아니라, 주변에 파당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함께 파선하게 하는 위험적 요소입니다. 때문에 이들에 대하여 선을 긋고 교회의 건강한 교리와 교우들의 신앙을 보호할 필요가 당연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앞에서와 같은 강력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적 대처에 앞서서, 먼저 이단에 대한 많은 논의와 검토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변질된 복음에 대하여 처음부터 단호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정죄하는 일에 그처럼 간단했던 것은 아닙니다. 신약성경을 연대적으로 나열하고 그 내용을 살펴보면, 후대의 서신에 이르기 이전에는 정죄보다 교훈, 책망, 권면 등의 방법이 선행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되도록이면 교회가 단합하고 포용하기 위하여 관용의 태도를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의 상반되는 태도가 모두 강조되는데, 그것은 진리에 대하여 사수하려는 의지와 그릇된 사람들을 교정하고 영혼을 구원하려는 의지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 의지의 결과에서, 교회는 진리를 우선하게 됩니다. 즉, “좋은 게 좋다!”는 인간적인 방법을 과감히 버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입장을 지켜낸 것입니다.

이것은 곧 십자가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죄인을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시지만, 그러나 죄인의 죄조차 용납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은혜를 주시지만, 의와 불의를 단호하게 가르는 ‘심판’은 필연적입니다. 때문에 교회가 그릇된 신앙, 이단에 대하여 가졌던 태도는 극히 복음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적인가?

 

오늘날, 한국 교회는 계속되는 이단 시비를 겪고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를 위협하는 강력한 대적들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아주 논란의 소지가 많아서 교회 안에서도 입장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에서, 어쩌면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평안이 없는데 교회가 어떻게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까? 교회의 기초가 흔들리고 신자들이 줄어가는 상황에서 ‘이단’이라는 경고의 신호가 보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이러한 도전의 과정을 통해, 교회는 다시 한 번, 자기가 가진 복음을 확인하고 무엇이 위험한 신앙인가에 대하여 정리하는 일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교회의 역사를 보면, 역설적이게도 이단을 통해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낸 경우가 적지 않게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는 과연, 초대교회와 같이 성경적인(혹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방법으로 이 문제에 대처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단의 문제에 대하여 많은 시간을 들여 왔습니다. 그것은 이 문제에 ‘많은 사람’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신앙을 정죄하는 일은 권장될 성격의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최소한으로 자제되어야 하며,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이단의 문제 앞에서 이단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에 치중하기 보다는, 무엇이 바른 복음과 그에 따르는 신앙인가를 검증하는 일에 더욱 치중하였습니다.

바른 복음을 변증하고 가르치는 일에 집중한 것의 이면에는, 잘못된 신앙을 따랐던 사람들이라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애타는 사랑과 복음이 진리라는 확신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된 복음이 그 어떤 변질된 복음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복음으로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는 믿음이 교회 안에 있어 왔기에 인내와 관용의 태도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 많은 가짜가 생겨났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이 참된 것인지를 확실히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된 것을 알고 나면, 모든 가짜는 자연스럽게 확실해진다.”

 

교회는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미혹의 영과 싸우는 것입니다.

사람은 교회에게 언제나 구원의 대상이며, 긍휼의 대상입니다. 비록, 이단에 넘어가 교회에 위해(爲害)를 가하고 싸움을 거는 사람이라도, 교회의 한결같은 근간은 그가 회개하고 돌아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에 있습니다. 이 근간을 망각하고 ‘사람’ 자체를 미워하고 공격하는 것이 과연 바른 신앙의 태도일까요?

 

이단에 대한 새로운 시각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단이 없었던 시절은 없습니다. 신학적으로 현실의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라고 묘사하였는데, 이 영적 전투의 한 실제가 바로 ‘이단’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진리를 공격하는 사탄의 사나운 불화살 앞에서 우리는 두꺼운 믿음의 방패를 들고 담대하게 싸워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멈출 수 없는 교회의 사명입니다.

때문에 이단을 끊어 멸절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오히려 위험합니다. 그건 실제로 이룰 수 있는 목표가 아닙니다.

이를테면, 이단의 물건을 불매운동 한다든지, 혹은 이단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여는 가계를 교회에서 공지하여 교우들로 하여금 이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한다든지, 혹은 사회적으로 소송을 거는 일은 그 실효성이 의심됩니다.

대표적으로 통일교의 기업들에 대한 불매운동을 강력하게 주도해 왔지만, 하나도 망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인권에 민감한 시기에 개인에 대한 교회 공동체의 공격은 오히려 부작용만 낳습니다. 그가 이단이든지, 아니든지 이런 방법은 결코 교회다운 선택이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애용할 필요도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교회는 이 즈음에서, 교회의 위대한 유산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단에 대한 싸움은, 새로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는 과거의 2천년 역사 속에서 이 싸움을 훌륭하게 수행하여 왔고 또한 승리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이단은 발호했다가 사라졌지만, 교회는 건전하게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의 생명력에 대한 확신, 진리를 수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을 우리는 깊이 가슴에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이단의 공격성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변질입니다. 우리가 과연 얼마나 복음을 순수하게 보존하고 있는가? 얼마나 교회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에 대한 통렬한 반성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단들과 교회를 차별성이 있게 하는, 가장 성경적이고 교회다운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저는 개인적으로, 이단의 득세(得勢)를 그리 걱정하지 않습니다. 표면적으로 세상은 다수결과 황금에 의하여 지배 당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하더라도, 그 이면에는 보다 강력한 손이 있어서, 내가 의지하고 사랑하고 믿는 주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잠시 어려움을 겪는다 하더라도 교회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교회를 약하게 만들기도 하고, 어려움과 핍박에 처하게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교회를 망하게 할 수 있는 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건 이미 지난 2천 년의 역사 속에서 증명된 사실이 아닙니까!

 

정치가들은 ‘위기감’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한국 정치에는 ‘위기’가 단골처럼 이용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러 사건을 조작하고 소문을 퍼뜨려서라도 선거에 앞서 위기를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위기야말로 내적인 갈등을 덮고 단합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강력한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계의 역사 속에서는, 불필요한 전쟁이 수없이 수행되어 왔습니다. 목적도 없는 전쟁의 실제적인 원인은, 탐욕과 권력을 지키려는 이기적인 몇몇 지도자의 선동입니다. 이러한 전쟁은 시대를 피폐하게 하고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냅니다.

 

한국의 교회는, 내적으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 무너지는 교회의 이면이 이단입니다. 교회가 단단하게 결속하고 진리 위에 서 있다면 이단은 지금처럼 힘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안타깝게도 진리에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복음이 변질되고 있습니다. ‘제자’라는 말이 유행처럼 변질되고, 교회는 세미나와 학습기관처럼 변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복음을 듣기는 하지만, 복음을 따라 살아가지 않습니다. 강단에서 가르치는 목사들부터 외치는 바와 다른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교회는 이단의 발호조차 잘못된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자기검열을 통해 복음의 진리성을 회복하고, 더 건강한 교회가 되도록 신자들을 열성으로 가르칠 생각은 하지 않고, 선동하고 공격하고 소송하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대처하는 것에만 급급해 있다고 보입니다.

 

원수가 나의 거울이다

 

사랑은 그 사랑하는 대상을 닮아가게 합니다. 참으로 위대한 힘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변화에는 언제나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미움도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니이체가 말한 바와 같이, 심연을 오래 바라보면 그 심연도 우리를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는 미워하는 중에 자신도 모르게 미움의 대상을 닮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이 ‘원수’에 대한 미움을 버리고 용서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수를 나로부터 끊어내기 위해서는 미움이 아니라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단에 대한 불타오르는 증오를 멈추고 잠시 생각해 봅시다.

그 조직력, 금전에 대한 탐욕, 사회적인 세력의 과시, 정치적인 세력화, 사람들의 자유를 겁박하거나 조종하는 행태는 모두 ‘교회’의 그늘이 아닙니까? 정직하게 말해서 우리의 자화상이 아닙니까?

교회가 분노하고 미워하는 그 양태를, 우리가 이미 해온 것이 아닙니까? 모양은 같은데, 다만 정식 신학교를 나오고 건전한 교단에 속한 사람이 행한다고 하여서 어떤 것은 우리가 변호하고, 어떤 것은 우리가 극렬하게 미워한다면 과연 우리는 정의로운 것일까요?

 

교회가 정작 마음을 써야 할 것은, 이단이 아닙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이단은 고려의 대상이고, 넘어가는 징검다리의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정작 ‘진리의 보존’과 우리 자신의 변질을 두려워하는 ‘영적 싸움’에 직면해야 합니다. 내가 괴물이 되어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타자로 보여지는 괴물을 통해 우리를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그리스도다워야 한다

 

이단(異端)이라는 말은 본래 ‘다른 끝’이라는 말입니다. 결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통시적으로는 주님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것이기 때문에 이단입니다. 그리고 가르침에 있어서는, 시작은 비슷하지만 그 결론이 달라서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은 이단의 세상입니다. 복음을 믿지 않는 모든 세상이 큰 틀에서는 모두 이단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복음의 진리를 믿고 투쟁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싸움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속의 방법으로 수행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단을 부끄럽게 해야 하며, 인격적으로 압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을 통하여 차별화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맨 처음에서 사도요한이 잘못된 가르침을 가지고 가는 사람들과 ‘인사’조차도 금하라고 교훈한 것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해석하면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구절일 수 있습니다.

첫째, ‘너희에게 나아간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사역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교회의 지도자를 자처한다는 점에서 교회 내부적으로 반드시 분별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들을 방치하는 것은, 마치 타락한 목사를 방치하는 것과 같이 교회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인사’라는 것이 오늘날과 같이 간단한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제한다는 뜻이며, 더 나아가 형제와 가족의 의미로 상대를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릇된 교훈을 교회에 퍼뜨리는 사람과 형제의 교제를 가지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해보시면 아시겠지만, 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서로 통하지가 않으니까요…

 

요한의 서신은 세 개가 모두 거의 비슷한 시기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첫 번째 서신에서 형제의 사랑을 너무나 아름답게, 그리고 강력하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한 구절만이 아니라, 이러한 성경의 맥락을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의 서신에 나타나는 교훈은, 단절이 아니라 극복입니다. 그릇된 가르침에 대하여 더 강력하게 대처하기 위해서,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는,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교훈이 먼저 주어진 것입니다.

 

요한일서 3:17~18

(3: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오늘 우리는 바로 이런 교훈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이고 아픈 교훈 말입니다. 우리가 복음에서 떠난 부분을 선명하게 지적하며,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교훈 말입니다. 이런 교훈이 교회 안에 살아날 때에, 비로소 교회는 암담한 현실을 돌파하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미움과 공격성이 아니라, 회개와 사랑의 위대한 능력 말입니다.

 

교회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피상의 저편에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그것은 유대교의 천국관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곳은 죽어서만 가는 나라이며, 이 현실에서는 도저히 체감할 수 없는, 말하자면 산 자에게는 그림의 떡과 같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으며, 너희 중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우리는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합니다. 그 나라는 내가 성령 안에서 복음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때에 누리는 영적 경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뿐 아니라, 하나하나의 사람이 모두 하나님 나라의 후보입니다.

땅속에서 금을 캐내는 사람들조차 순수한 황금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돌과 섞인 금광석을 얻어 그것을 도가니에 녹여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마침내 황금을 얻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이 아닙니다. 모두 다 각양 사연을 거쳐서 마침내 그리스도의 사람들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현재 타락하고, 그릇된 믿음을 가졌다고 하여서 사람을 버리는 것은, 마치 금광석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사도 바울도 유대교에 특심한 사람이었고,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에 마니교에 빠져서 어머니도 몰라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성령의 은혜가 부어져 마침내 그 나머지 인생을 주님을 위해 불타는 인생을 살게 하였다면,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이런 성령의 능력과 역사가 불가능하겠습니까?

 

소망의 확신

 

어떤 경우에도, 교회는 사람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만약, 관계를 끊고 우리만의 교회를 이루는 것이 성경적이라면, 교회도 역사 속에서 모두 사찰이 되어 산이나 광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에 목마르고 한 사람이라도 더 얻기 위하여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중해야 합니다. 마치 외과의사가 암을 도려내는 수술에서 깊이 고뇌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 시대 속에서 사람을 고치기 위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싸움을 싸우지만, 악한 자들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방법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교회는 마지막까지 교회답게 싸워야 하고, 죽더라도 그렇게 죽어야 부활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 악한 자의 방법을 차용하는 순간, 더 철저하게 실패하고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자는 이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저는 확신합니다. 교회의 정의는 우리들의 노력으로 세워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스스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안절부절 하고 불안에 허덕일 필요가 없습니다. 현실은 부정적인 그림을 자꾸 주겠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강력하고 하나님의 의지는 확고합니다. 그것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이 세상에 공급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에스겔의 환상과 같이, 성전의 문지방에서 터져 나온 샘물이 강이 되어 온통 광야를 살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안전할 것입니다. 결코 무너지지도 죽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대장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 거하는 것에 집중하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복음 안에, 성령 안에, 믿음 안에 거하는 것에 집중하면 할수록 교회는 강력해지고 건강해집니다. 이것이 우리의 비결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열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여, 시대의 어둠을 보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 어둠은 단지 우리가 가진 빛을 더 멀리, 더 밝게 빛나게 할 것입니다. 이 역설적인 이해 속에서 우리는 소망을 더욱 크게 가져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시대의 대형교회도 아니고, 교단도 아니고, 사회적인 평가도 아니고, 여론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들리는 성령의 음성입니다. 내가 그것에 집중하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배운 바를 확신하고 그 성경대로 나 자신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 일에 우리는 집중해야 합니다. 소망을 더욱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내가 건강하면, 교회가 건강하고, 교회가 건강하면 사회는 언제든지 변혁될 수 있습니다. 먼저는 세상이 아니라, 교회이며 나 자신입니다. 이것을 깊이 이해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을 마음에 지니시기를 바랍니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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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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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보험 이야기


불확실한 미래로 인하여 불안이 보편적인 정서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그 어느 시절보다 보험이 흥행을 합니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든 세대가 보험에 가입하고,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서너 가지를 구입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보장한다는 말은 달콤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 의문도 생깁니다. 결국은 금전의 보상으로 미래를 보장한다는 말인데... 정말 돈이 있으면 미래가 보장되는 것일까요?

사회보장제도가 가지는 맹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도가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생존의 조건, 곧 빵의 수준이 전부라는 것입니다. 간혹 사회보장을 통해 문화와 정서도 배려해야 한다는 주장을 보기는 하지만, 넌센스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빵이 해결된 이후의 빈곤은 상대적 빈곤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다소의 문화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해서 충족되지 않습니다. 보다 깊이 생각할 때에, 그것은 정서의 문제이며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돈은 빵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때문에 정말 미래를 보험에 들고 싶다면 빵만이 아니라 행복에 대하여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빵만을 준비하고 내 영혼아 평안하라 말하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방식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면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것이 나이를 먹는 보람입니다. 좀 더 인격의 품이 넓어지고 세상을 보는 눈이 근본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머니에 돈이 있든지 없든지 삶의 방향이 일정하고 스스로 자기를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불편하게는 살 수 있어도 불행하게는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결단과 성숙의 문제입니다. 

좋습니다. 서너 가지의 보험으로 늙은 시절의 빵을 준비했습니다. 심지어 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남겨질 가족들에 대한 보상까지 준비를 했습니다. 그 일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이성적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고 지혜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합니다. 그것은 빵을 위해 그토록 철저하게 준비하고 노력하는 당신이 과연 행복을 위해서는 얼마나 노력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과연 당신의 영혼을 위해서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빵도 행복의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빵을 사소하게 여기는 특성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한 철학의 기초입니다. 빵만 가지고 사는 인생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면 인류의 문명은 훨씬 초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를 보십시오. 빵 이외의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생각도 없이 떠밀려 살아가며, 심지어 미래를 돈으로 사 보겠다는 생각을 품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까?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주문을 외우는 백치의 시간이 아닙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의도를 생각하고, 자기 삶의 의도를 생각하고, 세상을 생각하고, 복종의 길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건의 훈련은 우리의 세월을 잡아 줍니다. 거저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하나님 앞에 성숙해져 가는 한 인간으로 세워갑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치 있는 미래, 아름다운 노년을 보장받는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백향목 같고, 감람나무 같은 인생의 비결입니다.

보험료 꼬박꼬박 납입하시죠? 밀리면 보장이 취소되잖아요... 보험회사 무섭죠?
경건도 이와 같습니다. 신앙을 느슨하고 게을리 하는 사람은, 언젠가 그 값을 비싸게 치르게 됩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빵이 없는 노년이 아니라 신앙이 없는 노년입니다...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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