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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눅 9: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것도 설교 중에...

일단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첫째,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실제로 그런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자들이 존재했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의 생각을, 특별히 제자들의 생각을 통찰하셨으니까. 이 말씀은 결국 누군가 들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둘째, 누가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복음서에 기록하여 교회에 읽게 했다는 것은, 초대교회 안에서도 역시 그런 '부끄러움'을 가지는 신자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복음서는 교회를 위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목격하지 못한 신자들을 위한 기록이었다. 그렇다면 그 기록에는 분명히 기록의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아 마땅하다.



02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그리고 초대 교회의 신자들 사이에 예수님에 대하여, 혹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왜 그랬을까?

여기서도 몇 가지 추리가 가능하다. 

일단,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 사람으로 불려졌고,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나다나엘과의 만남을 떠올리더라도 그러한 예수님의 출신은 대중에게 호감을 주지 못했다. 결국 학벌도, 가문도 없는 예수님의 모습은 당시의 혼란한 시대 속에서 '자랑스러운 스승'이 되기에는 한없이 허술해 보였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예고하면서 이렇게 노래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2)

그의 예언이 사실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오늘날에야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예수를 '주님(Load)'이라고 부르고, 또한 그분을 위하여 거대한 성전들이 지어져 있지만, 그 시절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예수는 무명(無名)에 불과했다. 교회가 아직 사회적으로 마이너(minor)에 불과했을 때에, 신자들이 공개적으로 예수를 시인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그리고 중요한 신앙적 행위에 분명했다. 그러니 그것을 뒤집어 본다면, 당시에는 예수를 부끄러워 하기가 매우 쉬웠다는 뜻이 된다.



03

또한, 누가복음을 통하여 한 가지 더 특별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나와 내 말'이라고 언급하신 예수님의 목소리 속에 드러나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향한 믿음은 곧 예수의 말씀에 대한 실천을 내포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에는 신학이 발달하고, 다양한 체계가 개발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에 그런 복잡하고 세련된 지식의 구조와 조직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예배의 모임과 믿음의 내용에 있어 매우 단순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처음의 교회는 무엇에 주목하고 집중했을까? 당연히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복음서 중에서도 바로 예수님의 목소리가 담겨진 부분들이 더욱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읽어도,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리 수월하지 않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는 것은, 어쩌면 그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아직도 우리에게 난감한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를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거나, 원수를 위하여 사랑하고 기도하라거나, 예수님보다 자기 집안 식구들을 더 사랑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은, 지금도 우리를 충분히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 당혹감의 반응이, 일정 부분 '부끄러움'이라고 표현된 것이 아닐까?



04

부끄러움(수치심)은 결국 이성의 반응이다.

때문에 이성적으로 그것은 합리화 될 수 있으며, 또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성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동안, 믿음은 '저편의 무엇'에 지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믿음은 반(反) 이성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성을 초월하는 무엇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초대 교회의 신자들도 결단이 필요했다. 그것은 그들의 눈으로 보는 현실, 그들의 상식, 그들이 받았던 교육의 내용과 대비되는 예수 앞에서도 예수와 예수의 말씀을 선택할 수 있느냐는 문제였다. 

제법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며, 또한 자기의 틀을 깨뜨리는 파격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때문에 사실 누가복음의 본문 속에서 나타나는 '부끄러움'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고, 오히려 예수와 예수의 말씀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그 시대에 매우 부자연스러운, 혹은 특별한 것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05

이제 기독교는 지구상에 메이저(major)가 되었다. 왠만하면 어디서도 예수의 이름이 수치심을 자극하는 초라한 행색을 가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다니고, 심지어 기독교적 문양을 문신으로 피부에 새기기도 한다. 집집마다 문패와 함께 예수의 이름을 내걸고 아이에게도 예수와 관련된 이름을 지어준다.

하지만 이게 과연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부끄러움을 극복한 현실일까? 

전혀 아니다. 여전히 예수의 말씀은 받아들이기 힘든 무엇, 사람들이 일부러 귀를 막고 외면하는 무엇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상식의 수준에서 보는 예수의 언행과 가르침은 촌스럽기만 하다. 그것은 전혀 매력적이 아니다. 화끈한 복수를 해도 시원찮은 판에 원수를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해 주라니! 

 


06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촌스러운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자기 경험과 상식,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예수의 말씀에 기꺼이 자기 인생을 걸어볼 것이다. 어차피 그런 결단이 아니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간단한 이름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예수의 발 앞에서 설교를 들었던 청중들도 그러했고,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들었던 초대 교회의 신자들에게도 그러했으며, 지금 우리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사실은 우리를 무척 당혹스럽거나 슬프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07

세상은 언젠가 뒤집어진다. 촌스럽다고 조롱했던 바로 그 예고된 장면, 예수가 천사들과 함께 영광으로 나타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예수와 예수의 가르침을 비웃었던 그 모든 사람들, 논리들, 주장들이 모두 추락할 것이다. 그 날에는 예수와 예수의 말씀 앞에서 결단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실로 통쾌한 복수가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허세를 부리며 꾸미고 포장했던 모든 것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그 날의 부끄러움은 우리가 스스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퍼붓는 것이다. 

예수는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다. 십자가의 조롱을 참고 인내했으며, 뿐만 아니라 자기를 부끄러워 하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조용히 침묵했다. 그러나 예수의 침묵이 납득이나 수용은 아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예고하셨고, 누가를 통해 그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와 예수의 말씀을 부끄러워 했던 자들, 그것을 개나 줘버렸던 자들에게 의로운 복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이것 역시 우리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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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0 목양칼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왜 사랑하는 자녀들을 울게 하는 일을 허락하실까요?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며,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고후4:8)

은혜가 고통보다 크니까요. 그래서 고통을 이겨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듭니다. 아예 처음부터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일을, 답답한 일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좋지 않을까? 꼭 그런 일을 허락하셔야 할까?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날 사랑하시면서도 내게 고통을 허락하실까?

여기 가치의 충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행복을 최상의 가치로 추구합니다. 때문에 행복을 파괴하거나 침해하는 모든 것을 악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고 싶고, 심지어 행복하기 위해서 하나님도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최상의 가치라 말씀하십니다. 참된 믿음을 얻는 것은 십자가의 고난을 감수하면서라도 추구할만한 일입니다. 제자도의 부르심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행복도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한 가지 비전을 주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알게 하고 제대로 믿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가치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정서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능력과 무한한 지혜를 가지셨으면서도 단번에 악을 징벌하지 않고 왜 그토록 드라마틱한 역사를 운영하시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른 목적이 아닙니다. 그 과정을 통해 사람을 연단하고 믿음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흔히 학문에는 왕도(Royal Load)가 없다고 합니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학문의 과정은 모두 힘들어서 겸손하게 합니다. 고생하지 않고 얻는 방법이 없으니까요.

마찬가지로 믿음이야말로 모든 인간을 하나님 앞에 평등하게 합니다. 고난의 십자가 없이 믿음의 영광을 얻은 사람이 있습니까? 고통의 눈물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믿음에 이른 순례자가 과연 있습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잠시 울게 하시는 것은, 나중에 부자가 되거나 이 세상에서 명예로 보상하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극히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헛된 세상의 그림자이지요.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상급을 얻게 하시고자 합니다. 그것이 바로 눈물 속에서 정련된, 순금 같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얻으면, 고통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으니까요.

우리 낙심의 진짜 원인은 믿음이 고통보다 작기 때문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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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3 목양칼럼


“인생이 생각보다 길지 않습니다. 더 심플하게 살아야 하겠다고 깨달았습니다.”

이번 주에 반가운 연락을 받았습니다.

양 집사님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출장을 들어와 같이 식사를 하자는 연락이었습니다.

부랴부랴 이케부꾸로에 나가서 잠시 백화점 위의 음식점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잘 변하지 않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제게는 양 집사님이 그런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안색이 다소 안돼 보였습니다. 양 집사님은 얼마 전에 어머님을 잃었습니다. 어머니는 이제 갓 환갑을 지난 분이고 얼마 전까지 일을 하시며 건강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담도의 암의 발견되었습니다. 수술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약물 치료와 방사능 치료를 받으며 시간을 벌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치료의 후유증이었는지, 갑자기 호흡 곤란의 증세를 보이시더니, 그야말로 급하게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이 미처 1년이 되지 않아서, 가족들은 모두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죽음을 생각하지 못하다가 너무 급히 보내드리고 만 것입니다.

치료의 과정에서 이런저런 후회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회한이 대화를 하는 중에도 치밀어 올라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아직도 어머니를 보낸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말에 저도 마음이 떨렸습니다.

그 이야기의 결론처럼 앞의 말을 했습니다. 어머니를 보니, 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이제 좀 일을 손에서 놓고 쉬시려고 하셨는데, 암이 발견되고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시니 모든 것이 다 덧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남은 인생의 후반전을, 좀 더 심플하게 살아야 하겠다. 가족을 더 사랑하고, 신앙생활에 더 열심을 내야 하겠다는 말을 다짐처럼 제게 들려 주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르치기를,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낫다고 했는가 봅니다(전 7:2). 알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무심하게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 배웠습니다. 인생이 짧다는 것. 그래서 허망한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지 말아야 하겠다는 것. 가족을 사랑하고 신앙생활에 더 열심을 내야 하겠다는 것은, 양 집사님을 통해 제게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친밀한 사람들을 주변에 두어도 결국 마지막에는 가족만이 남게 됩니다. 그리고 죽음 너머의 세계까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신앙 밖에 없습니다. 돈도, 명예도, 권세도… 언젠가는 다 내려놓고 떠나야 합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맙시다. 마음에 새기고 항상 기억 합시다. 가장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하다가 떠나야만 하는 시간에 주저하고 후회하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우리도 더 심플하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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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목양칼럼

 

간염은 바이러스에 의하여 전파됩니다. 때문에 위생이 중요한 예방이 됩니다. 손을 깨끗이 자주 씻고 생활을 하면 대부분의 바이러스 전염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경우도 있습니다. 간염 바이러스가 몸 안에 들어와서 감염이 되었으면서도 전혀 간염을 일으키지 않고 잠복해 있는 경우입니다. 이를 ‘건강한 보유자(보균자)’라고 부릅니다.

이런 분들은 자신이 감염자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게 됩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간염 바이러스를 배달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바이러스가 생존을 위해 습득한 방식입니다. 무조건 숙주를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얼마간 공존하는 것이 자기들을 더 많이 복제하고 전파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바이러스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단하지요? 바이러스는 세균보다 더 작고 원시적인 생명입니다. 유전물질인 DNA나 RNA를 단백질이 감싸고 있는 단순한 형태이지요. 그런데 그 단순한 생명 안에 이처럼 ‘작전’의 개념이 습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

 

성경을 묵상하면, 죄와 질병을 연결하는 고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질병이 죄의 결과라도 단정하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그것은 병자에 대한 정죄와 비판이라는 그릇된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질병이 죄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질병은 죄와 매우 유사합니다. 그 파괴적 속성, 내포되어 있는 흉계(凶計), 진행의 과정 등에서 우리는 죄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죄는 사람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파괴적 욕망을 항상 당장 실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과 함께 죄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죄에게는 죄를 전파할 기회가 필요합니다. 되도록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한 후에 이미 점령한 사람을 파괴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현실에서는 죄인의 형통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병원체인 바이러스와 사람의 영원한 평화가 있을 수 없듯이 죄와 죄인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결과적으로 죄는 언제나 사람을 파괴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작은 죄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죄야말로 나를 파괴하는 대적이며, 나를 통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수입니다. 당장에 어떤 손해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여서 죄를 가볍게 여기다가는 마침내 아주 큰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죄의 작전을 이해하십시오. 그것은 이미 당신의 인격과 삶 안에 견고한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이 완성되면 아무리 애를 써도 죄를 몰아내기 힘듭니다. 죄는 결과적으로 인격과 신앙을 파탄 낼 것입니다. 당신을 파괴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는 돌이켜야 합니다. 내 안에 죄를 찾아내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야 합니다. 손을 깨끗이 씻는 것이 바이러스를 예방하는 것처럼, 우리가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 양심을 씻는 것이 죄에 대한 가장 강력한 예방이 됩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십시오. 그분의 보혈이 당신의 양심에 흐르게 하십시오. 영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비결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른 것을 노력하지 말고, 바로 십자가와 마주하는 시간을 더욱 노력하십시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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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다발사진_jolybee0504

 

2012-12-09 목양칼럼

 

교회는 불신앙과 싸워야 한다. 불신앙이란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을 깊이 생각하다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교회 밖의 세상에서는 의심과 회의, 믿지 못하는 온갖 영적 장애로 인하여 하나님을 제대로 신앙하지 못하는 불행이 생겨난다.

그러나 불신앙이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모임에 잘 참여하고 예배를 드리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앙하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들이 보인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자리를 이미 다른 것이 차지하고 있다.

 

무신론자(無神論者)를 자처하는 사람에게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은 있기 마련이다. 그에게 행복을 주고 모든 인생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누구, 혹은 어떤 것이 존재한다. 그 절대자의 자리는 모든 인간에게 필연적이다. 그래서 종교심은 인간본성의 일부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리를 대치하는 가장 대표적인 우상(偶像)은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돈이다. 사실 신령하고 신비한 신을 가진다는 것은 특별한 영성과 믿음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래서 어떤 시대, 어떤 지역에서나 종교인은 소수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믿으려고 노력하며 사는 것을 택한다. 그들은 종교를 의지하지만 종교와 거리를 둔다.

 

보이지 않는 신에 비하여 ‘돈(황금)’은 대단한 위력을 현실 세계에서 보여준다. 날마다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돈은 현실이다. 돈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모든 행복과 불행의 원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더 돈에 집착하게 되고 마침내 돈을 믿게 된다.

돈이 믿어지는 순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파선(破船)된다. 사실 이 사람들은 이미 자기 마음의 하나님을 가진 것이다. 그들은 불교도, 이슬람교도, 유교도 아니다. 그들의 신앙은 돈이다. 돈이 곧 축복의 모든 것이며, 돈이야말로 천국으로 통하는 구원의 문이다.

 

성경은 모세로부터 사도들까지 이 돈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때문에 교회는 신자들의 영혼을 사냥하고 불신앙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이 돈과 싸워야 마땅하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 아니던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세상의 장벽을 허물고 사람들의 영혼을 자유로 이끌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가 아니던가?

 

결론적으로 교회는 돈과 싸워야 한다. 돈이 행복과 불행의 근본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돈을 사소하게 만들고 돈이 가진 엄청난 위상을 그리스도께 되찾아 와야 한다. 사람들이 돈을 바라고, 믿고, 사랑하듯이 그리스도를 바라고, 믿고, 사랑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러면 정말 기적이 상식이 되고, 교회는 막강해지지 않을까?

 

문제는 이 전선(戰線)을 교회가 까맣게 잊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조차 돈 타령만 한다. 교회에 모여서 돈 없다고 회의 하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만 가지 악의 근원이 되고, 결국에는 믿음에서 멀어지며,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게 된다는 말씀(딤전6:10)은 얼마나 정확한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과 믿음으로 싸우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다.

확실히 하자. 우리가 불행한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신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족한 것은 돈이 아니라 믿음이다. 우리가 구할 것도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랑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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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2 목양칼럼 


경제는 효율을 중시한다. 들어간 것(input)이 있으면 반드시 나온 것(output)이 있어야 하며, 되도록 적게 투자하고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경우를 성공적인 모델로 삼는다.

단순히 이 원리만을 생각하면, 복권이나 도박과 같은 일이 가장 경제적인, 혹은 경제다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률'이 저조하여 적은 것이지만 들어간 것에 대하여 전혀 아무 것도 안 나올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그것을 삼가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럼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도박이나 복권의 승리 확률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다면, 그에게는 이 방법이 정당화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불법적인 일이 아니라면, 경제적인 큰 수익을 최소한의 노력으로 거두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며,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물론 이런 사람들에게 대박의 꿈은 있어도 대박의 현실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생각의 바탕, 곧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거두는 일이 남에게 일어나는 것은 배가 아파도, 나에게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고 감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축복을 담을 수 없는 깨어진 마음의 그릇을 증명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잘 생각해 보라. 인격적인 성숙이 없이 재물을 많이 가지는 일은 어린 아이의 손에 칼을 들려주는 것과 같다. 결과적으로 그 재물은 자신의 인생을 망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되어 있다.

때문에 성공과 성장은 함께 일어나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수익을 거두는 것은 증권투자를 하는 방식으로는 정답(正答)일지 몰라도 인생에 대한 방식으로는 절대로 오답(誤答)이라는 것이다.

신앙을 가진 이후에도 여전히 마음의 주인은 맘몬(mommon, 가나안의 황금신)인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하나님께도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수익을 거두려고 하니, 마치 장사를 하는 장사꾼처럼 하나님 앞에서 처신한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진심으로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고, 진심으로 사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진리와 축복이 부어진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는 심는 대로 거두는, 정직한 방법 밖에는 통하지 않는다. 신앙에 지름길은 없는 것이다.

교회도 그러하다. 교회가 크게 되면 성공을 한 것이고, 작게 되면 망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교회는 정직하고 바른 신앙을 추구하는 공동체로 남으면 작아도 큰 교회요, 정직함이 사라지고 복음이 옅어지면 큰 공동체를 이루고 연보를 많이 거두어도 실패한 교회이다.

하나님의 관점은 철저하게 본질적이다. 그것은 경제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무엇을 더 가지려는 욕구 자체가 하나님께는 없다. 그러니 그 하나님 앞에 '협상'을 하려는 태도는 얼마나 가소롭고 한심하겠는가!

우리 마음에 맘몬은 없는지, 그리고 본질은 충실한지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하겠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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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소원이 간절하다고 믿는다. 자기만큼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의 경향은 나이와 상관없이 신자를 아이로 만든다. 좋은 의미에서의 아이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하는 어리석은 의미에서의 아이 말이다.

이러한 개인적인 착각에서 벗어나 바른 신앙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간절함'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직은 다 정리되지 못했지만, 최근에 간절함에 대하여 묵상한 내용을 먼저 정리한 것이다.

 

첫째, 성경이 말하는 간절함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다.

이 점이 우선 우리의 선입관을 깨뜨린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간절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먼저 응답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경쟁의식은 '선한 질투'로 포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열심을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을 통과하는 열심을 찾으신다. 이러한 기준은 사람마다 사명이 다르듯이 모두 다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더 귀하고 큰 일에 쓰시고자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더 특별하고 간절한 마음을 요구하신다.

 

성경에는 불임으로 마음 졸였던 부부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아이를 잉태하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것은 신앙과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아이를 주시지 않았던 것일까?

그들이 남들보다 기도를 덜 했을까? 신실함이 부족했을까? 죄를 지었기 때문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간절함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충분한 수준의 간절함을 원하셨다.

보다 간단히 요점을 말하면, 성경에 아기를 반드시 잉태하는 비법 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문제의 해결에도 역시 적용될 수 있는 요점이다.)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곁눈질로 보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사람들은 '응답의 비결' 같은 것을 좋아하는데, 참 어리석은 일이다. 그 사람이 응답을 받은 것이 참고할 사항은 될 망정, 똑같이 나에게도 적용될 것이라고 확실히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군가의 경험을 토대로 신앙을 추구하는 일은 참 어리석은 일이다.

신자가 하나님을 추구함에 있어 절대성을 가져야 하는 믿음의 대상은 '성경' 하나뿐이다. 그래서 성경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성경을 잘 묵상하는 법을 배워가야 한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살피신다. 그리고 우리의 체질을 아신다.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돌아봐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고자 집중해야 한다. 그것만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유일한 길이다.

 

둘째, 하나님께 인정 받는 간절함은 선택을 통해 드러난다.

사람이 제일 쉽게 속는 것이 자신의 말이다. 원래 탁월한 거짓말쟁이는 남을 속이기 전에 먼저 자신을 속인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내 입에서 나가는 말들을 내 귀가 들으면서, 결과적으로 자신이 매우 간절하게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말은 곧 실제적인 선택을 통해 실체가 드러난다.

삶에서 신앙은 언제나 갈등의 원인이다. 욕망과 현실적인 이익 앞에서 과연 하나님의 정의와 신앙을 추구하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실천하지 않는다면, 입의 말은 허풍일 뿐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도 그런 이중성이 보이는데 하나님께서는 오죽하시랴!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이중성을 책망하셨다. 바리새인들의 말은 거룩했다. 심지어 그들은 남다른 행동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를테면, 시장 어귀에서 옷술이 큰 옷을 입고 손을 들어 기도하는 것이다. 이런 공개적인 신앙행위가 사람들을 거북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공개적인 기도는 예수님도 자주 하셨다. 오히려 더 많은 군중 앞에서 손을 들어 축사하시며 기도하신 것은 예수님이셨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차이가 무엇일까? 적어도 외양은 아니다.

그 차이는 십자가의 사건을 통하여 여실히 드러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순종하셨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항상 간절함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맞다. 살아 있는 사람은 무엇엔가 간절하다. 그리고 그 간절함을 되도록 거룩한 것을 향한, 가치 있는 것을 향한 것으로 해석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의 내면은 영악하다. 그리고 욕망은 천사의 모습을 가장하는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삶에서의 선택이 신앙을 증명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 것도 하나님을 위해 포기할 수 없는 신앙은, 말로만 포장된 위선일 뿐이다. 그런 신앙은 간절함과 거리가 멀다.

 

셋째, 간절함의 깊이는 고통의 깊이에 비례한다.

아픔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픔의 경험 밖에 없다.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아픔'의 깊이는 전달되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조차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이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하나됨'을 요구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는 아이가 아플 때에 가슴이 찢어진다. 연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기쁨과 슬픔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만약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상대방의 고통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보실까? 죄로 타락한 세상은 하나님의 슬픔이며, 고통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나 극적으로 설명하시는 하나님을 성경의 곳곳에서 만난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이나, 방탕한 고멜과 결혼하고 계속 사랑하라는 사명을 받았던 호세아, 태어나기도 전부터 십자가의 죽음을 예언 받았던 예수님의 경우는 모두 그 근원이 하나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슴에서 샘처럼 우러나는 슬픔이다.

때문에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던 것이다.

 

신앙적으로 간절하다는 것은, 자기 소원에만 집착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만 드러난다. 그리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슬픔이 보이게 되어 있다.

창조의 작품이 배신과 타락으로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하늘의 아버지. 그것이 바로 간절한 신앙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첫 번째 신앙적 현실(reality)이다.

 

고통은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다. 고통은 더 나쁜 상황으로의 진행을 막아준다. 만약 열이 나거나 피부가 찢어졌음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작은 고통이 커져서 마침내 생명을 위협하기까지 방치될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고통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큰 위험을 피하고 생명을 보호하게 되는 것이다.

간절한 신앙은 이 모순적인 체험을 우리에게 준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우리는 자신의 죄가 크게 보이고, 세상의 부조리가 절박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절망의 상황이 신앙인을 완전히 망가뜨리지 못하는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한다.

 

시편 37:23~24

37:2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37: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깊은 회개를 경험할수록 주의 붙드심은 더 강해진다. 결과적으로 간절한 심령은 영적으로 예민한 마음이며, 그 마음은 타락한 세상 속에서 필연적인 고통에 둘러싸이지만, 그 고통보다 큰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경험하기 때문에 강해지는 것이다.

 

 

넷째, 간절함은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복음서를 자세히 살피면, 재미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지금의 목회자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설교를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풍부하게 구약을 인용하시며 간접적으로 성경의 중요성을 보여 주셨지만, 그러나 직접적으로 '성경'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신 적은 없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님께서 매우 강조하신 의무가 하나 있다. 그것은 '구하라'는 명령이다. 물론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기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 더 깊이 연구하면, '구하라'는 말씀이 기도를 내포하는 보다 큰 범주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기도는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간에 그 근간이 '소원'이다. 소원하는 것이 없다면, 기도는 성립하지 않는다. 잘못된 기도는 잘못된 것을 소원하는 것에서 출발하며, 바른 기도는 바람직한 소원을 마음에 품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간절함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그 소원에 대한 열망이다. 시간적으로, 환경적으로 소원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원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중간에 포기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간절함이 부족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삼국지의 유명한 일화로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말이 있다. 유비가 제갈공명을 얻기 위하여 공명이 은거했던 초가집에 세 번을 찾아가 간절함으로 모셨다는 일화이다. 제갈공명은 점술가로도 탁월한 사람이었는데, 유비가 천하를 통일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따라 나서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그 덕(德)에 감동하여 고생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떠났다고 한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가르침이 자주 등장한다. 벗됨을 인하여는 주지 못해도 간청함을 인하여는 주리라 하신 말씀이나, 수로보니게의 가나안 여인이 자녀를 고치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았다가 거절당하지만 끝까지 모욕을 참고 견디어 마침내 자녀의 고침을 받는 사건 등은 모두 '간절함'이 어떻게 드러나야 마침내 응답을 얻게 되는가를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씨름하는 것을 즐기신다. 그 이유는 자녀와 씨름을 해본 아빠라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다. 이기기 위한 씨름이 아니라 져주기 위한 씨름이지만, 그 안깐힘을 통해 아빠는 아이와 친밀감을 나누고 자라나게 하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도 역시 그렇다. 우리의 관심이 '응답'이라면, 하나님의 관심은 '관계'이다. 때문에 이 씨름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유리하다. 하나님께서 굳이 주시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지 않다면, 주시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기쁨이다. 그 응답의 과정에 필요한 것은, 다만 우리의 인내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간절함은, 믿음의 인내를 통해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간절함은 최선을 의미한다.

태어난 사람은 성장한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다만 길고 오래 살며, 불쾌한 죽음을 피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생명이란 영원이란 시간 속에서 너무 심심하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영생은, 영원한 생명이면서 동시에 풍성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단지 긴 시간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채워지는 만족이 있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다면 풍성한 생명이란 어떻게 실현될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수령이 오래된 나무는 양평의 용문사 은행나무로 알려져 있는데 그 수령이 1100년이다. 세종대왕이 당상관의 벼슬을 내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렇다면 천 년이 넘은 은행나무의 키는 얼마나 될까? 기록에 따르면, 60미터에서 40미터를 오르내리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최근의 측정으로는 41미터가 안내되어 있다.

이 나무에서 매년 은행 15가마가 열린다고 한다. 천 년의 거목이 아직도 그 키가 자라고, 매년 15가마 이상의 은행을 열매 맺는 것을 보며, 풍성한 생명을 묵상한다.

 

 

성경은 '성장'을 신앙의 필수적인 과정으로 명령한다. 신자에게 성장하라는 것은 권면이 아니라 명령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생명 자체를 의미 있게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풍성한 생명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성장은 언제나 한계를 갱신하는 자기 극복에서 일어난다. 누워있던 아이가 기고, 기던 아이가 물건을 잡고 일어서고, 일어선 아이가 넘어지면서도 걷고, 간신히 걷던 아이가 걸음을 빨리 하여 달리고, 달리던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스케이트를 타고, 스키를 타고… 그 한계의 극복, 자기의 실현이 곧 성장이며, 이 성장이야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숨겨두신 가능성은 아무도 가늠할 수 없다. 처음에는 못한다고 생각하던 일도 막상 닥치면 넉넉히 해내는 경우가 많다. 욥을 생각해 보라. 그런 고난을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욥은 감당했다. 물론 욥의 인내가 대단하다. 그러나 그 욥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 아니신가! 결국 욥의 인내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간절함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는 최선을 끌어낸다. 물론 최선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잘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미국의 한 일간지에서 조사를 했다. 12~19개월의 아이들을 비디오로 계속 촬영하고, 그 24시간에 대한 통계를 만들었다. 재미 있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아이들은 하루에 평균 4킬로미터 정도를 걷고 뛰었다. 이것을 걸음으로 환산하면, 14200 걸음이다. 그리고 하루 넘어지는 횟수가 102회라고 한다. 이것은 평균 1시간에 17번, 분으로 계산하면 3~4분마다 한 번씩 넘어지는 것이다.

심지어 조사에 등장했던 어떤 아이는 하루에 142번이나 넘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벌떡 일어섰고, 또 다시 걸었다.

 

우리가 성장해온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점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고 충격이 깊어진다. 실패를 연연하지 말고 일어서 앞으로 가면 되는데, 자꾸만 실패를 곱씹고, 생각하고, 겁쟁이가 된다.

간절함은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간절함 속에서 바로 최선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응답을 지체하시며, 보다 간절하기를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성장하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그 부족의 자리, 결핍 속에서 우리는 더 연단되고 마침내 자기를 극복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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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5 목양칼럼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

하나의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다양한 생각과 반응이 나온다는 것은, 사람에게 태생적으로 다양성을 추구하는 유전자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때문에 사람의 세상에서 완전한 ‘통일’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일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과연 국경을 통일하고, 모든 문화적 차이를 통일하고, 심지어 언어를 통일한다면 어떨까? 과연 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행복할까?

 

작은 반도의 나라가 반 토막이 나서 남과 북으로 갈라져 반목하며 살아온 것이 어언 반 세기를 훨씬 넘어섰다. 덕분에 어린 시절의 노래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고, 그 통일이 지독하게도 강박증이 되는 사회를 살아왔다.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이유도, 그 일이 틀려서가 아니라 남이 나쁘게 볼까 싶어서, 남사스러워서였다.

이러한 경험의 반복이 무의식에 쌓여, 이제는 그어진 선을 넘어 한 발을 내미는 것 자체가 극히 불안하다. 항상 다른 사람과 보조를 맞추는, 그 ‘통일’의 범주 안에서만이 안도감이 찾아오고 편안함을 느끼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에 반하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은 당시의 유대인 사회가 가장 강력하고 단호한 저지선으로 삼았던 ‘안식일’의 금지선을 넘으셨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야말로 ‘자유’의 선포였다. 그분은 종교의 관습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라고 가르쳐 주셨고, 그 바른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자유’를 결코 양보하지 않으셨다.

이 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자유’를 다시 사람의 ‘굴레’로 삼아 그 기준을 벗어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심지어 핍박하는 돌맹이로 오용(誤用)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다름[相異]’는 ‘틀림[過誤]’이 아니다. 물론 근본을 흐리게 하는 일을 용납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근본’인가에 대한 판단 역시,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진리를 판단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정신을 흔히 ‘와(wa,和)’라고 한다. 이 나라는 우리처럼 반토막이 났던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통일’에 목을 매고, 우리 보다 더 다름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 사회적 트라우마까지 깊이 살피지 못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하나 있다.

개인에게 집단의 가치를 지나치게 강요하는 이 사회적 강박증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복음의 장래가 어둡다는 것이다. 자유가 숨 쉴 틈이 없는데, 어떻게 예수의 정신이 바람처럼 이 땅에 불어 넘칠 수 있을까? 불처럼 가슴마다 번져 흐를 수 있을까?

그런데 가끔은, 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할 그리스도인들조차 오히려 더 이 땅에 동화(同化)되어, 앞뒤로 꽉 막힌 주장들을 하는 것을 보면, 정말 가슴이 답답하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전에 먼저 나를 변화시켜야 하는 사회에 사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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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8 목양칼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상식에 묶이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언제나 기적이다. ‘기적’이라는 말은 우리의 눈높이에서 하나님의 일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눈높이로 보면 기적이 곧 상식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처럼 일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어 드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차근히 읽어보자. 하나님께서 노아의 믿음을 지극히 칭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크게 놀라며 감동하신다. 다윗의 순수한 믿음에 대하여 춤추듯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찾고 찾으셨던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리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시대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을 믿어 드렸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의 믿음에 하나님의 거룩한 기름을 부어 세상을 불사를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다른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 믿음은 하나님을 절대로 믿어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율법주의는 믿음을 선행(善行)으로 대신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인간의 행위는 아무리 탁월해도 기적을 만들지 못한다. 기적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행동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도록 만드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믿음이 바로 이 하나님의 행동에 원인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실행하시는 신실하신 분이라고 믿어 드릴 때에, 하나님은 행동하셔야만 한다. 이것은 강제가 아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기쁨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영화롭게 생각하시는 영광의 의미이다.

하나님을 믿어 드리는 일이 쉬운가? 그렇지 않다. 더구나 지금과 같이 불신의 영이 역사하는 시대에서는 더욱 어렵다. 성경의 가르침을 훼방하는 과학, 철학, 상식이 얼마나 유행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의심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널리 만연하고 있는가?

이런 시대에서는 성경이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믿음에 대하여 말하는 것조차 굉장히 어렵다. 믿음이 저절로 숨이 막힌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생활은 지속하되 믿음은 버린다. 더 이상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의 인생을, 목숨을 거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세상은 변한다. 역사가 언제나 그랬다. 한 사람으로도 충분했다. 세상이 아무리 폭풍으로 뛰놀아도 한 사람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한 사람을 위해 거대한 폭풍을 잠잠하게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기를 원하는가? 쉽고 간단한 일은 하나님의 손을 빌리지 말고 스스로 하라. 하나님을 시시하게 만들지 말라. 거대한 것을 구하라. 감히 아무도 바랄 수 없는 것을 꿈꾸라. 믿음은 바로 그 꿈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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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교회를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끊임 없는 듣는다.

그러나 이처럼 난감한 질문도 없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좋은 교회라는 말인가?

물론 성경적인 좋은 교회의 조건들을 나열하고 그러한 내용에 상응하는 교회를 탐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백인백색이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교회에 만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아무리 좋은 교회라도 자기와 맞지 않으면 정착하기 힘들다.

 

더구나 좋은 교회를 찾아 떠도는 신앙적 유목민들은 귀만 커지고 눈만 높아진다.

이들이 찾는 좋은 교회의 조건들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지극히 이상적이다.

마치 천상에 있는 교회를 지상에서 찾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또한, 그렇게 좋은 교회에는 당연히 신앙적 부담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대부분은 그럼 부담을 피하려고 한다.

신자들을 부담 없이 만들어주는 교회야말로 가장 실력 없는 교회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통해 주님과 세상을 섬기고, 그 십자가의 보상으로 주님의 나라에서 상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부담스럽지 않은 신앙생활을 원한다니…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인가?

 

나이를 먹으면서 되돌아 생각을 하니, 교회란 참 어려운 과제임에 틀림없다.

스스로 세우지 않으면 결국에는 남의 교회이더라.

꼭 개척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모든 교회는 완전하지 않으며 때문에 세워지는 과정에 불과하다.

그래서 누군가의 헌신을 필요로 한다. 그 헌신이 곧 교회를 세우는 충성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헌신한 만큼 내 교회가 되는 것이다.

눈물과 땀을 쏟고 애정을 기울여 사랑한 만큼 교회는 남의 교회가 아니라 나의 교회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셨다. 거기는 벌레가 먹거나 녹이 쓸어 무용지물이 되는 일이 없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보물을 좋아한다. 보물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금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황금은 보도블록에 불과하다. 결국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마음’인 것이다.

보물은 그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우리가 그걸 아끼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아끼지 않는 사람이라면 보물은 하나의 돌에 지나지 않는다.

때때로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다.

돈에 대한 욕심이 거의 없는 사람, 자기 것을 아낌 없이 남에게 주는 사람 말이다.

희귀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에게 보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황금이 아닐 뿐이지, 이런 사람들도 자존심, 명예, 자식, 인기와 같은 자기들만의 보물을 가지고 있다.

 

결국 원리는 같다. 그 아끼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마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헛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이 주신 제단이 교회이다.

구약적 제사제도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되었지만, 그러나 그 의미는 교회를 통해 상속되었다.

대속을 위해 우리가 치를 대가는 더 이상 없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완성이 있을 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모든 교회는 불완전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완성될 수 없다.

그 불완전함이 고통의 이유이다.

하지만 역시 이 불완전함이 바로 은혜이다.

만약 교회가 완성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다른 사람들이 참여할 길이 사라질 것이다. 역설적으로 완성된 교회에는 당신의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불완전하기 때문에 흔들리고, 흔들리는 교회이기에 우리가 충성할 자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기도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감사하라.

거기 문제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다. 신앙은 문제를 이겨내는 과정이지, 문제가 없는 낙원이 아니다.

문제와 열심히 싸우다 보면, 성령께서 힘과 용기도 주시고, 위로와 안식도 주실 것이다.

그 과정을 누리고 원리를 깨달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허락하신 가장 중요한 목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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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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