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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진은 어떻게 태어날까?

좋은 사진기가 있어야 하고, 사진 찍는 기술도 있어야 한다. 사실 익숙한 사진기는 몸의 일부처럼 작동한다. 운전에 익숙한 사람이 거의 본능적으로 운전을 하는 것처럼, 사진기 역시 그것을 담고 싶은 사람의 의도대로 작동된다.

하지만 말이다. 이 모든 것을 준비하고 배운 다음에도 좋은 사진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배워야 할 것은 기다림이다.

순간을 담아내는 작업이다보니 그 '순간'의 포착이 결코 쉽지 않다. 그 순간을 사진기를 들고 만나야 하고, 또한 포착하는 것에 실수가 없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사진이 얻어진다. 그래서 사진은 운명이고 예술이다.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다. 숲에 들어가 자연의 사진을 찍는 사람들 중에 인격적으로 파렴치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와 새끼들에게 먹이는 사진을 얻으려면, 둥지를 확인하고 서너 시간을 대기해야 한다. 그러고도 실패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사진을 쉽게 얻기 위해 손을 댄다. 둥지를 높은 가지에서 사진 찍기 좋은 가지로 옮기기도 하고, 심지어는 어린 새끼를 둥지 밖으로 끌어내어 어미의 모성을 자극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안타까워하는 장면을 사진에 담아 자신의 작품으로 발표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야 한 장의 사진을 얻고 안 얻고의 문제지만, 둥지에서 끌려나온 새끼는 땅에 떨어져 죽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받은 어미새에게 외면당할 수도 있다. 부자 되려고 제비 다리 부러뜨리는 현대판 놀부가 아닐 수 없다. 

장난으로 던진 돌팔매에 개구리가 죽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래도 '아이'의 돌팔매는 미숙함에 대한 이해로 가려줄 수나 있다. 이 어른의 몰인정과 이기심은 '욕망'이라는 정죄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 

이들은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거짓과 탐욕을 찍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진에서는 그 사람의 자화상이 나타난다. 슬픈 일이다...


인생은 타이밍으로 가득 차 있다. 

노력도 해야 한다. 좋은 사진기를 사고, 사진을 잘 찍는 기술을 익히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을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일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에디슨은 그 노력을 장려하기 위해 99%의 노력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상 사람의 노력이 가지는 의미는 1%일지도 모른다. 

나머지는 만나는 은혜이다. 그 타이밍에 내가 거기 있고, 내게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준비되어 있고, 내가 그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것은 운명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운명을 '섭리'라고 부른다.

섭리라는 말은, 내가 만난 환경뿐 아니라 나를 하나님이 준비하셨다는 인식의 깨달음이 담긴 언어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는 아브라함에게 급히 나타나셔서 자기를 계시하셨다. 그 새로운 이름이 '여호와 이레'이다. 물론 그 이름의 배경에는 수풀에 걸려 있었던 숫양이 있다. 하지만 정말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 숫양에 불과할까?


창세기 22:13~14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타이밍을 잡는 사람들은 알아야 마땅하다. 그 타이밍은 내가 만든 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그 타이밍에 참여하고 쓰여지는 것 뿐이다. 그래서 내게 아무리 좋은 사진기가 있고, 내게 아무리 훌륭한 기술이 준비되어 있어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이다. 

무엇보다 나를 준비하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하고, 내가 쓰임받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해야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고개를 들고 우쭐거리면 참담한 상황이다. 때로는 되지도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성공의 빛을 급히 바래게 만든다.


아직도 자신의 타이밍이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도리가 없다. 기다리는밖에. 모든 준비가 되었는데도 아직 기회가 오지 않았다면, 아직 한 가지가 부족한 것이다. 그것은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사실은 이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성경을 묵상하면 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 부연하고자 한다. 타이밍이 오지 않는다고 하여서, 그 타이밍을 인간의 방법으로, 더 나아가 '거짓'으로 만들려고 하지 말라. 이런 짓은 우리 신앙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방법을 선택하는 순간, 우리 인생은 예술에서 천박한 사기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니 정말 자신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도도한 자존심을 지켜라. 힘들어도 참고 기다리라. 하나님이 주실 타이밍을 잡기 위해 바짝 긴장하는, 사진가의 그 마음을 포기하지 말라. 

포기하지 않는다면, 의외로 타이밍은 많다. 하나님은 지금도 누군가의 타이밍을 준비하시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잠들지 않고 깨어 있으면... 결국에는 만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이 말해주는 희망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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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비법은 없다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 (There is no royal road to learning.)
그래서 학문은 평등하고 명예로운 것이다. 
현실에는 쪽집게 과외, 쪽집게 학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 명성에는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중히 말해서, 그것은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시험에 합격을 시키는 훈련이지 배움과 앎, 그리고 실천으로 이어지는 학문과는 엄연히 다른 변종이다.
그래서 성공은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성숙은 주지 못한다. 
결국 사회적 성공을 하더라도 스스로 행복하지도 못하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면 과연 그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빛 좋은 개살구다.

학문에 왕도가 없다면, 신앙에도 지름길이 없다. 쉽게 가는 법이 따로 없다. 
십자가의 길을 쉽게 가려는 모든 욕망은 결국 마귀의 시험을 부르고 신앙을 파선에 이르게 한다. 
그러니 쉬운 길로 십자가를 지고 가려는 욕구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고, 없는 것을 우리의 욕망이 지어낸 거짓말이다.

목사로 신분을 공개하고 10년을 살다보니, 여기저기에서 기발한 소식들이 찾아온다.
제일 웃기는 것은 '목회의 비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제안이다. 목회의 비법이라니... 

차라리 나에게 제대로 믿는 법 좀 가르쳐 다오. 
모태신앙으로 살아왔고, 16살 이후에 회심을 경험했으며, 24년을 사역했고, 10년이 목사였는데... 나는 그래도 내 신앙의 길에 고민이 많다. 사회적 성공보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는 소원이 더 간절한데 이게 풀리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면 목사가 무슨 소용인가? 진실로 목사가 되지 못하면 큰 교회가 무슨 소용인가? 결국 허망한 욕심을 부추기는 부채질 속에서, 우리들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앙에 쉬운 길은 없다. 처음부터 십자가를 각오하지 않으면 가지 못하는 길이다. 때문에 비법 따위도 없다. 그저 묵묵히 매일 성실하게 가야만 하는 것이다. 나를 부르신 주님을 의지하여 믿음의 길을 날마다 가는 것이다. 

힘들어도 가고, 아파도 가고, 배고파도 가고, 외로워도 가는 것이다. 그러면 그 길 끝에서 나사렛 예수가 두 팔을 벌리고 우릴 안아 주실 것이다. 그 날까지 가고 또 가고, 믿는 대로 사는 것이다. 진실로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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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간섭들


정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일반적 혹은 이교적 의미를 기독교 안에서 차용하는 것은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학생 시절, 교회에 나온 한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평생을 절에 다니다가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온 할머니는, 절에 다니던 믿음에 그대로 교회의 옷을 입히려고 하셨습니다. 새벽이면 추운 계절에도 찬물로 목욕을 하고 새벽예배를 나오시고 기도를 밤새워 하시면서 한 가지 말만을 주문처럼 반복하셨습니다. 할머니는 하나님께 벌을 받을까 두려워했고, 모든 고난을 본인이 하나님께 정성을 기울이지 못해 생기는 일이라고 자책했습니다. 

이 할머니는 복음을 믿은 것일까요? 물론 나이들면 사람이 굳어지고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과거의 습관이 어느 정도 지속되고 영향을 끼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내적 변화입니다. 의외로 더 나이드신 분들도 기독교 신앙에 제대로 입문(?)하면 표정이 편안해지고 행동과 생각에서 은혜의 꽃이 피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외람되지만, 그 할머니는 교회에 나오기는 했지만 복음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고 회고합니다...


또한, 우리가 성경적으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용이나 신뢰, 혹은 공자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믿음에 대한 정의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비슷하고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의 '믿음'을 그런 안경을 통해 풀이하는 것은 부적당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먼저, 믿음에 대한 정의와 이해에 있어 성경적인 것을 받아들이려는 결심을 해야 마땅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그대로 가지고 추측을 하면, 성경과 경험 혹은 미신이 짬뽕이 되어서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혼돈에 빠뜨리게 됩니다.

요즘은 강단에서도 인문학의 책을 인용하여, 역으로 그것을 통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매우 부당합니다. 인문학은 성경을 설명하는 참고는 될 수 있어도 성경을 풀이하는 해석자는 될 수 없습니다. 그 한계를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많은 지식이 사람을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2)

믿음을 계량할 수 있나요?


믿음은 성경 속에서 가장 유구한 주제입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믿음은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흐르는 강물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날까지 존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는데, 이는 믿음과 소망이 언젠가 폐하여진다는 뜻이 아니라, 결국 사랑으로 수렴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가볍지 않은 주제입니다. 다시 말해, 한 마디로 정의 하거나 심플하게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혹은 그런 식으로 접근했을 때에 필연적으로 많은 헛점을 가지는 주제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당연히 심플한 것을 좋아합니다. 복잡한 것은 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의 몫이고 자신들은, 아주 적당하고 간결한 진리를 얻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욕구는 자칫 그릇된 확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믿음에 대하여 치명적 오류, 혹은 오해를 평생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일단 한 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믿음'을 사람이 계량할 수 있습니까? 이를테면,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을 나누거나 분별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하여 생각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해 이새의 집을 찾았을 때입니다. 


삼상 16:6~7

(16: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 엘리압을 보고 반하였습니다. 사무엘 같은 선지자가 단지 정말로 외모만 보았을까요? 사무엘은 깊이 감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Surely)'이라는 말로 드러납니다. 이는 사무엘이 가지고 있는 모든 오감이 엘리압을 통해 만족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외모(the outward appearance)'라고 이해하는 것은, 7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라고 언급하셨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여기서 외모라고 해석된 히브리어 '아인'은 본래 '눈(eye)'을 의미합니다.  눈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나타내는 가장 좋은 지표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때문에 엘리압에 대한 사무엘의 만족은 경솔하거나 가벼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울을 버리는 슬픔과 현실적인 왕을 배반하는 반역의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새로운 왕을 찾아나선 사무엘이 어찌 이 일을 가벼이 여겨 경솔하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찾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무엘의 미스(miss)는 인간의 한계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무엘의 모든 경험과 능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게 판단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의 내적인 심연, 곧 '중심(the heart)'을 보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누구나 그릇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중심은 모든 인간의 공통적 요소입니다. 그것은 사울과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버림을 받고 다윗은 선택을 받았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그릇 안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무언가가 있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믿음' 이외에 하나님께서 이처럼 절대적으로 가치를 인정하시는 것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인격적 결함이나 지식의 부족이나 심리적 트라우마는 모두 하나님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으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창세기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무엘도 믿음은 계량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모든 지식과 경험을 총 동원해도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적 관점에서 '외모'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부여 받은 인간의 내면은 가벼이 엿보고 판단할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 내면의 그릇에 담긴 '믿음'이라는 가치 또한 사람의 판단을 벗어나 있습니다. 그걸 확실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령함 속에서 추측은 가능하지만, 그것 또한 사무엘 선지자의 미스(miss)처럼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 안에서 흔히 사람들끼리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을 논하고, 판단하고, 칭찬과 비난을 하는 것은 대단히 경솔한 일입니다. 특별히 목회자가 신자들의 믿음을 그렇게 규정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알게 하시지 않습니다. 목사가 함부로 사람을 판단해서 자기 발등을 찍는 일이 얼마나 흔히 일어납니까? 그리고 그런 판단의 근저에 대부분, 그 사람의 믿음에 대한 경솔한 확신과 판단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런 경험들이 잘못 전달되어, 신자들은 목사가 사람들의 믿음을 계량할 수 있다고 흔히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사의 신뢰를 자신의 믿음 좋음의 표지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나타납니다.


우리는 믿음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자기 믿음을 제일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자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말씀 앞에서) 정말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볼 때에,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그 실체를 발견하고 어느 정도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외에 외적인 환경,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의 평판이나 직분, 혹은 기능적인 업무에 의존하여 '믿음'을 가늠하는 것은 대단히 그릇된 결과를 주게 됩니다. 


(3)

믿음은 정말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가?


한 가지 질문을 받았습니다. 좋은 믿음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교회에서 흔한 구호에 그런 것이 있지요. 큰 믿음을 가져라.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믿음을 통해 쟁취하라. 등등...

심지어 '믿음'의 한 단면이 하나님과의 씨름이라고 해석되기도 하는데,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씨름은 스포츠가 아니라 전투기술을 뜻합니다. 그대로 해석하면 하나님과 전투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이 되는데... 참 곤란한 무대포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 오셨을 때에 제자들은 귀신 들린 한 아이를 앞에 두고 그야말로 씨름(전투)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아이에게 들어 있는 귀신은 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세대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귀신을 쫓아내셨지요. 이 본문은 복음서 저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지요? 바로 마태, 마가, 누가 복음 모두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마 17:17, 개정)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막 9:19, 개정)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눅 9:41, 개정)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보통 마가의 본문이 가장 처음이고, 마태와 누가의 복음이 그 다음을 따르는 시대적 순서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거의 신약성경의 마지막을 담당합니다.

흥미롭게도 마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기억했고, 마태와 누가는 그 본문에 '패역'이라는 단어를 삽입했습니다.

기록의 시대적 순서가 그렇다고 해서 마가의 본문만이 원문이고 나머지는 기록자의 부연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자체가 거룩한 성령의 감동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함께 짝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 34:16)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이것이 성경입니다. 때문에 믿음 없음의 한 단면이 패역입니다. 서로 다른 본문이 아니라 서로 보완을 이루는 본문입니다. 

마태와 누가의 본문에서 '패역'은 '디아스트레포'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이미 70인경(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던 유태인의 성경, 당연히 신약은 없다)에서부터 39회나 사용된 전례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것은 타락을 의미하는데, 특별히 인간의 본성이 뒤틀리고 구부러져서 거기로부터 나오는 죄의 행위를 뜻합니다.


귀신 들린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의 귀신을 쫓아내고자 합니다. 선한 일입니다. 그리고 전에도 이런 일을 했던 경험이 제자들에게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실패했습니다. 왜 실패했을까요?

후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살피면, 마태복음에서는 '겨자씨 만한 믿음'을 말씀하시고, 마가복음에서는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사본에 따라서는 '기도와 금식'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


(마 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막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누군가 틀린 것입니까? 아니라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의 바른 독법은, 그 다름이 조화와 보완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이 내적인 내용이라면, 기도(와 금식)는 그 형식입니다. 

결국 제자들의 실패는 믿음의 실패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실패를 마태와 누가는 '패역'이라고 특정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패역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구부리다, 뒤틀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면 됩니다. 가위가 있습니다. 날이 서서 아주 잘 자르는 가위입니다. 그런데 충격이 가해져서 뒤틀어졌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생겨납니까? 그 날카로운 날이 서로 맞지 않아서 자르지 못하게 됩니다. 본래의 용도, 유용성에서 이탈되는 것입니다. 이게 패역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가치 있는 것을 무가치 하게 만드는 악한 경향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신 32:5, 잠 8:13)

그러니까 선하고 거룩한 일이라도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간섭하면 즉시로 매우 통속적이고 저열한 것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본문에는,  이 사건의 직후로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크냐는 변론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 9: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해석한다면, 제자들이 귀신 들린 아이와 아버지를 불쌍히 여겨 구원하고자 했다기보다 서로 이번 기회를 통해 자기의 능력을 드러내고 입지를 견고하게 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심적 상태가 겉으로 들어나지 않았겠지만, 제자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지 못했고, 귀신은 귀신 같이 제자들의 패역한 상태를 파악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마태복음의 본문에서 '겨자 씨 만한 믿음'을 말씀하실 때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산을 옮긴다'는 거대한 결과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거스려 순수한 믿음에 이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에 대한 깊은 자성입니다. 

정말 믿음이 있습니까? 그 믿음이 자기를 자랑하거나, 자기의 유익을 구하거나, 자기의 욕구를 충족하거나, 자기의 생각을 고집하는 모든 '패역'에서 벗어나 있습니까? 그런 믿음은 겨자 씨 만한 것으로도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그 믿음을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너무나 가난하지 않습니까?


믿음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냐고요? 아니라는 말도, 그렇다는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진짜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까? 만약 그것을 이해하고 안다면, 위의 질문은 저절로 풀리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논지에서 조금 벗어난 부연입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은혜로 주셨지만, 은혜 받은 자에게는 은혜 받은 자다운 삶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믿음이 선물로 주어졌지만, 그 믿음에 부응하는 삶은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패역에 넘어간 현실을 기도(와 금식)의 부재로 진단하셨습니다. 좀 더 넓게 이야기 한다면, 경건을 상실한 믿음은 무력한 말장난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음은 평생에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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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5 목양칼럼


오늘은 주일이고 어린이날입니다.
열 일곱에 들어선 아들이 어린이날이라고 선물을 달랍니다.
뭘 줄까? 물었더니... 웃기만 합니다.
이런 경우 제일 어렵습니다. 알아서 주어야 하는데 이미 다 주어서 더 줄 게 없거든요. 
사실, 아들에게 줄 수 있다면 무엇이든 줄겁니다. 
그건 굳이 어린이날이 아니라도 상관 없습니다. 사랑하니까요. 
사랑하면 달래서 주는 것이 아니랍니다.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이지. 그래서 항상, 줄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가만히 돌아보니, 하나님께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습니다.
요즘 기도는 감사를 곱씹고 찬양을 드리고 내 솔직한 심정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를 드립니다. 감정적으로 솔직해지는 것이 쉽지 않네요. 솔직함이라는 것이 자기의 본 바탕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인데, 나 자신의 맘을 나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자리에서 내가 누구인지, 내 맘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고 싶다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나의 처지가 편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사실 요즘처럼 막막한 때도 없습니다. 
일본에 와서 8년에 들어섰는데 교회도, 아이들도, 내 앞길도 아직까지 막막합니다.
그러나 8년 동안 배운 것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다. 내게 부족함이 없다!" 라는 한 가지 깨우침이기 때문에 더이상 이 문제에 빠져 죽지 않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데 항상 최선으로 주시겠지요...

삶의 속도가 분주한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께서 최선을 다해 주신 것들이 흔하게 지나쳐 사소하게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고집만 부립니다. 
하나님 난감하실 겁니다. 이미 다 주었는데, "이게 다예요? 정말 최선을 다하신 겁니까? 이게..." 하고 있으니. 버르장머리 없는 피조물 같으니라구...

삶 자체가 소중하다는 것을 왜 모를까요? 하루 살아있는 이 자체가 정말 감동하고, 감사할 일인 것을. 천하의 부동산보다 하루의 생명이 더 귀하다는 것을. 건물이 아니라 몸이 귀한 것을. 옷보다 기쁨이 귀한 것을. 음식보다 편안한 마음이 귀한 것을. 돈보다 사랑할 사람이 귀한 것을. 언제쯤이면 깨달을까요...

제발 속도를 줄이세요. 그리고 자신과 주변을 향해 눈을 열어 주세요.
함께 사랑하고 격려할 사람들이 저렇게 많습니다. 우리가 감사해야할 이유들이 이렇게 많습니다. 또 귀한 하루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사랑하기에도 모자른 세월을 분노와 미움으로, 허영과 무관심으로 낭비하지 말자고요.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살자고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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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

목회/목양칼럼 / 2013. 4. 16. 23:18

<충만>

성경이 말하는 '충만'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가르칩니다. 정확하게 그림으로 묘사하면 차고 넘쳐 흐르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 단어의 의미가 정적(靜的)인 것이 아니라 동적(動的)입니다. 계속 공급되고 그래서 계속 흘러넘치는 작용과 반작용의 역동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충만'이라는 말을 성경은 사람에게 사용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그릇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그 그릇은 채워짐을 통하여 넘쳐 흐를 수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흘러 넘친 것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만드신 후에, 남는 것을 거두어 12바구니를 채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버리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마6: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산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화전(火田)을 주로 가꿉니다. 그러나 가끔은 산을 개간하여 논을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 논은 계단식이 됩니다. 그리고 그 가장 높은 논은 반드시 수원(水原)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농부는 일단 가장 높은 곳의 논을 가로막아 물을 채웁니다. 논에 물이 일렁거려 벼를 키울 수 있게 되면, 둑을 열어 다음 논으로 물을 흘려 보냅니다. 그리고 다시 그곳이 채워지면 그 아래 논으로 물이 흘러갑니다...

충만은 낮은 곳을 지향합니다. 충만의 흘러넘침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충만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은혜를 부으사 충만하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건강이든, 물질이든, 신앙이든... 자기만 채우려 하는 자에게는 충만의 물줄기가 옮겨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기적인 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충만한 것을 다른 사람의 충만으로 이어갈 줄 아는 사람에게는 계속 흘러 넘치는 은혜가 부어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입니다.
충만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충만한 삶이 계속되도록 관리하는 것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지금 충만하신 분들이 앞으로도 계속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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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독일과 일본>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 같은 전범국가의 길을 걸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독일과 일본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전후 70년, 그러나 아직도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했던 독일군에 대하여 법정에 세워 죄를 묻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이번에도 새로운 근무명단이 발견되면서, 이 명단의 사람들이 과연 모두 법정에서 죄를 받았는지 검토하고, 아직 세워지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추적하여 그를 법정에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
http://j.mp/ZsAoJe

일본은 전범들에 대하여 오히려 애국충렬지사로 둔갑시키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 문제가 그러하고, 역사 교과서를 통하여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범들을 미화하는 작업들이 그러하다.
이런 일들이 유대인의 홀로코스트 못지 않게 비참한 피해를 입었던 주변의 국가들에 어떤 정신적 2차 피해를 주는 것인지 전혀 개의치 못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일본을 강하게 하고,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한다는 점만을 생각하다는 점에서 군국주의 망령은 아직도 이 나라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죄인들을 용서 하시고 은혜를 주셨다. 그럼에도 성경은 계속해서 '회개'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양보하지 않는다.
이것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구원받은 자에게는 더이상 회개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야말로 하나는 알고 둘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여겨진다.
인간의 '회개'는 어차피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에 있어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죄를 모두 깨닫고 모두 회개할 수 있다는 말인가!
회개는 하나님의 용서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치료와 회복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죄를 깨닫고 그것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죄에 대해 자기를 다스리고 고쳐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회개를 가벼이 여기는 자들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거룩도 가벼이 여기고, 심지어 도덕적이지도 못한 '인간'으로 전락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의 추락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도원에 6개월 들어갔다 오는게 회개가 아니라, 회개는 자기 죄를 정직하게 자백하고 그 책임을 지는 것이다. 안 그렇게 생각하는가?)

누누이 말하거니와, 일본은 부흥하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세계적인 대국이 된 것은 맞는 말이지만, 이들은 아직도 과거의 불행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보라. 평화헌법을 개헌하고 세계분쟁지역에 군대를 파병하는 일이 거론되고 있으며, 핵무기로 무장을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한 국가의 군사적 자위권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이 왜 평화헌법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지금 일본이 과연 세계의 분쟁지역에서 경찰의 역할을 감당할 만큼 주변국가의 신뢰를 회복하고 과거를 청산했는지 살펴 본다면... 이 모든 시도들은 격에 맞지 않는 것이며, 오히려 과거 군사대국의 힘을 길러 군국주의를 일으켰던 '망령의 부활'이라는 길로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일본은 부자다. 때문에 그 위신을 내세워 '사과합니다'라는 한 마디에도 인색하여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 돌려 말하고 있다. 물론 이런 사과는 주변국가를 감동시키지 못하며, 때문에 과거의 상처는 매년 거듭되는 덧남의 과정을 통해 우리 곁에 다시 살아나 돌아오고 있다. 그래서 일본은 전후 70년이 지다도록 이웃에게 미움을 받고, 멀리 서구와 미국에서 대신 위로를 얻는 '가깝고도 먼 나라'가 되버린 것 같다.
그에 비하여 독일은 매번 총리가 유감과 사과를 반복하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전범에 대한 재판을 계속함으로써, 불행의 불씨를 스스로 털어내고 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홀로코스트 같은 반인류적 범죄는 법정에 세워 그 정의를 묻겠다는 독일의 결심은, 일본과는 너무도 대비되는 자세가 아닌가 한다.
나는 두 나라의 태도를 통해, 진정한 반성과 회개가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시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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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4 목양칼럼


기도의 좌편에는 이성이 있고 우편에는 신비가 있다.

양편에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잡아야 비로소 기도가 하나님을 구하는 시간이 된다. 

이성은 교만을 부르고 신비는 감정을 자극한다.

우리가 그 양편의 유혹을 스스로 이겨내는 것이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깨닫게 된 사실이,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모든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로 추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제대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충만한 은혜인 것이다. 설사 나의 기도가 응답되든지, 아니든지 간에 말이다.

내가 아무리 많은 노력과 시간을 기울이고, 열심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올바른 기도를 보장하지 못한다. 아니, 인간의 열심이 개입되면 될수록 오히려 더욱 삐뚤어질 가능성이 증가한다. 


누군가는 기도를 신을 찾아가는 여행이라고 정의하겠지만, 나는 이런 관점에 대하여 반대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기도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은혜이다. 이 은혜가 없을 때에, 우리가 기도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방법과 시간은 종교적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예수님은 그런 기도들에 대하여 '이방인들의 구함(the Gentiles seek)'이라고 명명하신 적이 있다.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기도의 오솔길은 무수한 방해와 함정들의 곁을 지난다. 당연하다. 우리는 대체로 보물을 얻기 위해 그런 위험한 길을 감수하지 않던가! 그 길 끝에 보물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용기를 내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그렇지만 용기를 가진다고 길이 저절로 편안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확실한 지도를 필요로 한다. 덧붙여 우리가 오독(誤讀)할 경우를 위해 좋은 안내자가 있으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 모든 것을 다 허락하셨다. ‘성경’이라는 지도와 ‘성령’이라는 안내자를 통해 우리는 위험한 길을 안심하고 지날 수 있다. 하지만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확실하게 붙들어야만 가능하다. 지도보다 나의 감(感)을 더 믿던지, 아니면 안내자의 지시를 무시할 때 우리는 언제라도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기도하기 위하여 기도하라. 맹목적으로 기도의 시간만을 늘리고, 무수한 욕망을 구하는 것으로 기회를 낭비하지 말라. 잘난 척도 말고, 신비한 경험을 쌓으려 하지도 말라. 그런 위험 속을 차분하게 걸어가라. 한 손에 성경의 등불을 들고, 한 손은 안내자 되시는 성령님을 붙잡고 앞으로 가라.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라. 그것이 진짜 기도이다... 부디, 그분의 임재를 경험한 후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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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j.mp/ZGwQ56)


2013-04-07 목양칼럼 ::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서른 중반에 목사가 되어 10년을 넘게 사역을 해오는 동안, 계속해서 작은 교회를 목회하는 행운(?)으로 아직 장례를 집례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태어남이 흔한 만큼, 어디에선가는 죽음이 계속되고 있을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밤에, <새들백교회 이야기>로 잘 알려진 릭 워렌 목사님의 27살난 아들, 매튜가 집에서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아이는 우울증에 시달렸고, 이미 1년이 넘도록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정신과 의사와 약의 도움을 받아왔습니다. 또한,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 젊은 청년은 ‘죽음’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오늘 주일을, 과연 어떻게 그 가족들이 보내고 있을지 숙연한 마음에 애도를 표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에 대한 남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죽음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며, 결국에는 모두 영원한 부활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부활 이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하여 창조주 앞에서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잘 살아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신중하게 하루하루의 삶을 완성해가야 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사명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사명에 우호적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평소의 삶에서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가난, 질병, 경제적 파산, 소외, 신앙적 혼돈… 자칫 한 순간에 발을 헛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처럼 인생은 무수한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길을 여행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고후1:8)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신앙이 있으면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죽음을 생각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동행을 믿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다 헤아릴 수 없고, 그것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에 비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은 너무나 또렷하여 곧잘 우리의 이성을 압도합니다. 

이런 경험은 극히 개인적인 것이라, 다른 사람의 느낌과 생각을 함부로 판단할 성격이 아니라고 보입니다.
다만 사람은 강하면서도 약하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 없이는 결코 ‘사는(Living)’ 가장 기본적인 사명조차 제대로 이룰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욱 연대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어쩌면 지금도 누군가 우리 옆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뒤늦은 후회를 하지 않도록, 더 사랑하고 관심과 격려를 서로에게 보여주도록 합시다. 
죽음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는 말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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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1 목양칼럼 :: 


간디의 제자였던 비노바 바베(1895~1982)는 유명한 '부단운동(토지헌납운동)'을 일으켰다.

1951년 포참팔리라는 지역을 여행하던 그는 '하리잔'(불가촉천민)들의 방문을 받게 된다. 그들은 조그만 땅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열심히 일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소망을 말한다. 비노바는 그들의 탄원서를 주정부에 제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때, 그 자리에 있던 한 부자가 그 이야기를 듣고 자기의 땅 100에이커를 기꺼이 헌납했다. 이 사건이 비노바에게 영감을 주었다. 비노바는 그 때부터 인도의 전국을 돌며 지주들을 설득했다. 비노바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도둑질은 범죄이지만, 많은 돈을 쌓아만 놓는 것은 도둑을 만들어내는 더 큰 도둑질입니다. 돈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존경까지 얻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당신에게 네 명의 가족이 있다면 가난한 자들을 다섯 번째 가족으로 여기고 그들을 위해 소유한 땅의 1/5만 내게 주시오. 땅이 없는 사람들과 나눌 수 있도록..."

결국 비노바는 400만 에이커의 땅을 기증 받아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과 나누었고, 이 일은 서구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한국의 기독교가 든든한 재정적 기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교우들이 '십일조'라는 연보에 성실히 헌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약적 제사의 전통이 과연 신약의 연보에 그대로 반영되어야 하느냐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있다.

더우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십일조의 비율은 강조되었으나 그 연보가 가지는 의미(목적)는 소홀히 여겨져 왔다는 사실이다. 

구약 성경에서 십일조의 종류가 세 가지나 되고, 그것은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레위인의 삶을 보장하고 성전을 유지하는 비용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는 것에 쓰임 받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아는 신자는 많지 않다. 

참담하게도 교회는 마땅히 가르쳐야 하는 이 같은 연보의 정신을 왜곡했다. 연보는 드리는 것으로 끝나고 더이상 간섭하지 않는 것이 신자의 미덕인 것처럼 교훈되고, 신자들은 직분을 받으며 십일조의 의무는 맹세했지만, 정작 그 십일조가 가지는 공의와 자비의 정신은 배우지 못했다.

자크 엘룰이 말한 바와 같이, 뒤틀린 기독교는 결과적으로 이방인만도 못한 유대인들을 열매로 낳았다. 이름만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그 행실은 무익한 돌맹이 만도 못한 신자들이 양산되고, 때문에 교회는 더이상 이 세상에 신선한 충격을 주지 못할뿐 아니라 오히려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마 3:9, 개정)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생각해보자. 앞에서 꺼낸 비노바의 이야기를, 잠시 우리의 교회로 옮겨와서 함께 가정해 보자는 것이다. 

만약 어떤 목사가 교회마다 전국을 돌며, 성경적인 십일조 운동, 곧 모든 신자들이 그 재산의 온전한 1/10을 하나님께 드려서 이 시대의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조건 없이 구제하는 일을 하고자 한다면, 과연 얼마나 호응이 일어날까?

첫째, 그런 주장을 하는 목사의 순수함을 믿어줄 수 있을까? 목사들이 돈을 좋아해도 너무 좋아한다. 둘째, 신자들은 과연 소득의 십일조가 아닌 재산의 십일조를 선듯 내놓을 수 있을까? 명예를 얻기 위해 자기 교회에 내는 것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가난한 이웃을 위해 말이다. 셋째, 과연 그렇게 모아진 재화가 또 다른 조직과 이름과 욕심을 잉태하지 않고 고스란히 가난한 자들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목사이면서도 믿지 못하겠다. 돈에 관한한 근본적으로 신뢰가 이미 깨어졌고, 교회는 뒤틀렸다. 참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연보는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연보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데, 그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을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대중적인 열렬한 호응과 인기는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신앙의 실질적인 내용을 담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자원하여 드리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가 않다. 성경은 연보를 거두는 방식보다 연보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하여 훨씬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조금만 눈을 뜨고 성경을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교회가 실현하려면, 결코 교회가 부유해지는 일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상식으로, 사회적 인격으로 말해도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노바가 말하는 바와 같이, 도둑질은 나쁜 일이지만 많은 돈을 쌓아만 놓고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는 것은 도둑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과 같아서 더 나쁜 일이 아닌가. 어느 정도는 자본주의를 제한하는, 이같은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기독교 신앙이 세울 공의와 자기부인은 무엇이 남을 것인가?


고난주간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간을 경건하게 보내기 위하여 나름 금식과 기도로 자기를 돌아본다. 경건한 글을 보고, 말을 조심하고, 십자가를 묵상한다. 

참 아름다운 일이다. 앞으로만 달리고 돌아봄이 없는 세상에서 그나마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색깔을 지켜가는 것은 이러한 아름다운 전통이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그 개인적인 경건의 밖에 소외된 이웃을 향한 우리의 의무도 깊이 생각했으면 한다. 

맘몬이 전능한 신으로 군림하는 이 세상에서, 돈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주님의 이름으로 자기의 빵을, 옷을, 땅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용기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하겠다. 이번 부활절에는 다만 예쁘게 색칠된 계란이 아니라, 보다 가치 있는 것이 나누어 지기를 바란다. 샬롬~


"지갑이 회개해야 진정한 회개이다!" - 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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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4 목양칼럼 ::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모든 율법을 항상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킨 사람은 역사상 오직 하나였다. 바로 예수님이다. 그래서 ‘율법’의 심판 아래에서 예수님 이외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모두가 죄인인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해 은혜가 왔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행함을 통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어 의롭게 된다. 옷 입는다는 것은 어떤 신비한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는 뜻이다. 믿음이 곧 그리스도 안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는다. 세례가 바로 이 두 가지의 경험이다. 율법의 심판 아래서 죽는 것과 십자가의 은혜 아래서 새롭게 살아나는 것, 그것이 바로 세례 안에 압축된 경험이다. 


예수님의 명령으로 교회는 두 가지 성례를 영원한 규범으로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성찬과 세례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예식의 바탕은 바로 십자가이다. 

성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이라면 세례는 나의 십자가를 기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은 성찬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고 세례를 통해 자기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진정한 십자가는 이 두 죽음이 하나로 연결되었을 때에 완성된다.


십자가를 묵상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 위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 정확하게 알아야 할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운전면허를 이미 가진 사람들을 정기적으로 다시 모아서 기본적인 교통규범을 재교육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알고 있더라도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것이 매해 돌아오는 사순절의 의미이다. 아니, 심지어 매일이라도 이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묵상되어야 마땅하다.


아직도 자신에게 미련이 남았는가? 당신은 죄인이다. 부정하지 마라. 율법 아래 ‘죄인’이라는 굴레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가장 간단한 계명이라도 그것을 항상 지킨다는 것은 어렵다. 하물며 모든 계명을 항상 지켜야 한다니 그것이 가당키나 한가. 그러니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이제 그만 받아들여라. 희망은 없다. 전혀. 조금 선한 것도 쓸모 없다. 무기징역을 받은 죄인에게 식당에서 줄을 잘 선다고 보석을 시켜주지는 않는다. 나의 선함이 내게는 위로가 된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자유를 주지는 못한다.


그러니 이제는 가능성 없는 나를 버리고 예수를 바라보자.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나를 대신하여. 죄 없는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그분이 찔림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분이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한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셨다. 이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전혀. 이것은 완전한 구속이다.


조금은 맥이 빠지는 것이 사실이다. 남은 인생을 통해 뭔가를 치열하게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더욱 그렇다. 적어도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몫 따위는 없다. 우리는 이미 얻었고, 완성되었으며, 허락되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동안 이 십자가를 묵상하는 일과 그 십자가의 은혜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것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나타나고, 십자가의 도가 공격 받을 것이며, 십자가는 점점 잊혀혀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싸움이다. 우리는 얻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지키려고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레지스탕스가 아니라 해방군의 싸움이다.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십자가의 해방을 나의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에 선포하는 싸움인 것이다. 그러니 넘어짐은 있어도 패배는 없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영광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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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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