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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1 목양칼럼


아침 밥상부터 아들에게 한참 훈계를 했습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모든 것을 묵묵히 듣고 있던 아들이 마지막에 한 마디를 합니다.

"아빠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만, 나이 스무살 짜리가 어떻게... 아빠 말씀처럼 살려면 사십 살이 되어도 다 그렇게 하기는 힘들겠네요!"

딱, 말문이 막혔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인생은 어려운 것이고, 우리에게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키우는 일은, 언제나 너그러움과 기다림을 필요로 합니다.

어떤 사람도 처음부터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훌륭한 것은 무엇이나, 수많은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쳐서 완성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과정이 어렵고 지루하다고 하여서 속성을 좋아하고 편법을 사용하면, 결국 사람이나 물건이나 제대로 된 완성품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큰 그릇은 언제나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성취 뒤에는, 반드시 누군가 너그럽게 이해하며 기다려준 은혜가 있기 마련입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이 왜 속담이 되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절대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 되지 않도록 경계 하십시오.


인생은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냥 흐르는 것 같아도, 다 의미가 숨어 있고 그 의미와 의미의 과정 속에서 사람은 성장하고 진보하게 됩니다. 흰 머리만 허무하게 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세월 속에서 아이들이 자라고 철이 들어 갑니다.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인생에는, 굳이 후회할 것도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고,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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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1 목양칼럼


사람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몸도 그러하고 마음도 그러합니다.

이 두 가지 영역은 사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 많은 영향력을 주고 받습니다.

마음을 강하게 먹으면 몸의 질병을 이기기도 하고, 반대로 몸이 피곤하면 마음까지 약해지거나 병들기도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양편의 건강을 잘 돌봐야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격언과 같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무지합니다.

특별히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에 참으로 부족한 것 같습니다.

사회적으로 매우 성공한 사람들조차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무모하게 도전만을 하다가 심신이 망가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매우 뛰어난 지적 능력과 높은 교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한계를 정확하게 알고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대체로 마음의 관리를 잘 하는 사람들이 몸의 관리도 잘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지나친 긍정과 과도한 열정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물러나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것은 교만한 마음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장애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자기 생각을 고집하고 자기의 능력 밖의 일을 걱정하는 것 말입니다.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사람보다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고 무능력을 인정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런 사람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와 주시고 힘이 되어 주십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고백 중의 하나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혹은 "나의 도움이신 여호와"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결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내적인 평화를 누릴 수 있고, 비로소 하나님의 손을 바랄 수 있으며, 또한 무모하게 망가지지 않도록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 너머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심신을 건강하게 하는 양약이 아닌가 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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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1 목양칼럼 


은혜가 없으면, 사람이 이기적이 됩니다.

한 동안 매우 너그러운 마음으로 생활한다고 하여서 자신의 내면에서 이기심이 사라졌다고 생각한다면, 대단히 순진한 생각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은혜가 옅어지는 순간, 숨어 있던 자기 중심성과 이기심은 마치 괴물처럼 되살아나서 우리의 삶을 순식간에 덮칩니다.

때문에 이기적이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삶의 질서를 지속하도록 꾸준히 자기를 돌보는 사람이 되는 것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은혜 생활이 성실함을 필요로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상대하는 적은 교활하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지만, 기회만 생긴다면 주저없이 신앙의 등에다 비수를 꽂을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속성이며 정체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믿거나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며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밤이 두려운 것을 아십시오.

그 밤이 지나면, 내일 아침에는 자신에게서 괴물의 부활절을 보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은혜로만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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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1 목양칼럼


곡식이 자라는 들판에 나가보면, 허수아비(scarecrow)라는 것이 있습니다. 곡식을 먹는 새를 쫓아버리기 위해서 사람의 형상으로 기둥을 세우고 거기 사람의 옷을 입혀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치 사람이 들판에 서 있는 것 같아서, 소심한 새들이 쉽게 날아들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속임수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사람의 옷을 걸치고 사람의 모자를 쓴 허수아비는 결국 그 실체가 발각 당하게 되고, 그러면 새를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들이 앉아 쉬어가는 놀이터가 되고 맙니다.


한낱 새들도 ‘사람’의 실체가 옷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새들보다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마치 좋은 옷을 입으며 좋은 사람이고 비싼 옷을 입으면 귀한 사람인 줄 압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무런 선입관과 예단 없이 정직하고 순수하게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그의 옷을 보지 말고 그의 마음과 인격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좋은 옷만 사려고 하지 말고, 좋은 사람이 되려고 기도해야 합니다. 겉으로 화려한 옷에 집착하는 것은, 역설적으로는 그 내면의 허술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이 안으로 꽉 채워지면, 겉으로 좀 부족한 것을 취해도 불행하거나 초라하지 않습니다. 

인생을 허수아비처럼 살지 않도록 주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외식하는 자를 미워하신다는 것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직이 최선의 방책인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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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5 목양칼럼


밖에는 하루 종일 눈이 오고 있습니다.

시야를 가릴 만큼 펑펑 쏟아지는 눈이지만, 정작 땅에는 하나도 쌓이지를 못합니다.

지표면이 따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눈은 떨어지자마자 녹아서 촉촉하게 땅을 적시고 있습니다.

눈에는 땅을 기름지게 하는 성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눈이 많은 지역들이 대부분 땅이 기름지고 농사가 잘 되는가 봅니다.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리 함박눈이 내려도 쌓이지 못하는 이런 풍경


우리도 그와 같은 것은 아닐까요?

인생에 고난과 시련이 많다고 꼭 냉랭하고 거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험악한 세월을 살아도, 그보다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면 결코 한()이나 응어리가 남을 리 없습니다.

오히려 그 힘든 세월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고,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항상 감사하는 신앙이 깊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이 망가지는 것은, 적어도 환경 탓은 아닙니다.

모든 환경을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따뜻한 땅 위에는 함박눈조차 쌓일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는 심령에는 성품을 망가지게 하고 신앙을 후퇴시키는 부정적인 영향력이 자리할 수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은 사람을 조급하게 만듭니다.

하루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은 생각밖에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에게 이미 닥친 일에 어찌 의미가 없겠습니까? 과연 우리가 만난 시련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이 없겠습니까?

은혜는 고통보다 큽니다. 은혜는 그 어떤 시련보다 강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동안, 그 무엇도 우리를 비참하게 할 수 없습니다.

고난을 이기는 것은 고난에서 탈출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진심으로 고난조차 두렵지 않은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환경으로 흔들 수 없는 근본적인 행복이 그 삶에 나타납니다.

그러니 오직 은혜를 사모하며 삽시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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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5 목양칼럼


자녀들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고 속상해 하는 부모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유별나게 말을 듣지 않는 아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아이들마다 개성이 다르고 성품의 차이도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아이들은 착한 성품을 타고 났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아이들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후천적 영향에 좌우되고, 특별히 부모의 영향이 적지 않습니다.


의외로 아이들과 대화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말을 할 때에, 그 언어의 대부분이 자기 의사 전달과 명령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당연히 관계는 위기를 맞을 것입니다. 소위 아이들의 절기(絶技)인 ‘부모 말 뒷등으로 듣기’는 그렇게 생겨납니다.

대화(對話)는 듣고 말하는 것입니다.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것은 대화가 아닙니다. 

간단히 말해, 대화의 기술은 역설적으로 경청(敬聽)의 기술입니다. 얼마나 주의를 기울여 정성껏 들어주느냐에 따라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고 내 말에도 주의를 기울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에 대하여 중간에 말을 끊거나 귀찮아 하는 태도를 보이면, 당연히 대화는 실패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끝까지 자기 진심을 말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아이와 부모의 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들어줘야 잘 듣게 할 수 있습니다. 

아이와 대화를 할 때에 중요한 것은, 편안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같이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대화를 통해 좋은 결과나 느낌을 기대하게 되고, 그런 기대감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잘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화할 줄 모르는 부모들은,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합니다. 그 말의 대부분이 자기 생각, 느낌, 주장에 대한 것들이고, 방식도 명령형입니다. 세게 말하지 않으면 아이가 듣지 않는다는 불쾌한 감정이 이미 처음부터 깊이 스며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마음의 문을 닫게 되고, 마음의 문이 닫히면 귀가 열려 있어도 전혀 그 듣는 말의 의미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나마 어려서는 ‘혼나기 싫어서’ 듣는 척이라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사춘기에 접어들면 분노가 쌓이고 반항이 시작될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사귐이 필요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계속 대화하는 것입니다. 

밥을 먹고 공부를 하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자기의 감정과 느낌에 대하여 표현하게 하고, 그것에 대하여 이해와 공감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가 부모를 자기 편으로 믿게 되고, 그런 믿음이 있어야 비로소 부모의 쓴 소리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가정에서는 <대화>가 건강하게 자라나고 있습니까?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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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4 목양칼럼 


나이를 먹으니 더더욱, 사람이라는 것이 참으로 다양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교양과 지식의 수준도 다양하고, 사고방식도 정말 많이 다릅니다.

세상에 왜 갈등과 분열이 계속되고 전쟁이 쉬지 못하는지를 나름 이해할거 같습니다.

사람들은 극히 자기 중심적입니다.

자기와 다른 생각에 대하여 가지는 일반적인 반응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는 것입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해석하면, 자기만 사람이고 상대는 사람 같지도 않다는, 아주 독선(獨善)적인 반응이지요.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것은, 상대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사람이고 상대방이 사람 같지 않을 뿐입니다.


이 유치한 구조가 세상의 많은 갈등과 다툼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이 사람을 상하게 하거나 죽이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상대방의 종족, 국가, 신앙, 풍속을 혐오하고 자기 중심적인 기준을 근거로 파괴적인 행동을 정당화 하는 것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계속되는 지구촌의 부조리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떨까요?

성경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성경이 말하는 최고의 미덕과 교훈이 ‘사랑하라’는 것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친절하게도, 그 사랑에 대하여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하지 않다고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와 현실 속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종교를 폄하하고,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며, 교회 밖을 더럽고 냄새 나는 세상으로 깍아내리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쓰레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불의한 것을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분명한 사실은, 불의한 세상 조차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것을 심판하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 정의가 실현될 때까지, 그리스도인은 인내하며, 겸손하며,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 시간(하나님의 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뿐입니다. 이조차 우리의 생각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겸손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시야를 더 좁아지게 하고 마음을 더 옹졸하게 만든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은 연륜이 깊어갈수록 더욱 관용이 있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는 순결함의 저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로서 마땅한 처신인 것입니다.


사람은 다양하고 전부 내 마음 같지는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특별히,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피곤한 삶조차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자신이 신앙으로 누리는 은혜를 내세워 우쭐대거나 자랑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그러라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 결코 아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구하십시오. 

사랑만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치료하고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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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5 목양칼럼 :: 자유하십니까?


점점 자유가 증진되는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자유는 과연 모두 유익한 것일까요?

죄인의 자유는 죄를 더하고, 악인의 자유는 악을 더하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자유는 반드시 도덕적 성찰을 필요로 하는 미덕입니다. 선량함이 기초가 되어야 비로소 자유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 시대는 과거보다 더 선량해졌을까요?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아무리 자유가 증진되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파괴적인 힘으로 작동하는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더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더 선량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진심으로 자유로울 뿐 아니라 함께 행복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자유이며, 또한 사랑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살아간다면, 아무 것도 우리를 속박하지 못할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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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4 목양칼럼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함이란 부드러움의 태도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가지는 거룩한 특성입니다. 

억압과 고통 속에서도 오히려 겸손하고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사도행전에는 교회가 핍박에 빠져가는 과정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었습니다.

초기에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설교하는 사도들을 체포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이 무리들에 대하여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제자들은 배움이 없는 무식한 자들이며, 지저분하고 가난한 군중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체포되었던 사도들은 채찍질을 당하고 놓임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사도들은 분노하거나 폭력적이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칼을 뽑았던 베드로의 일화를 생각하면, 이런 침착함이 극히 이상할 정도입니다. 

사도들이 왜 이렇게 변했는가의 이유는 바로 그 다음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5:40~41, 개정>

(5: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도들은 복음을 전파하다가 당하는 자신들의 능욕에 대하여 ‘이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고 찬양했습니다. 사도들은 무례하고 거만한 종교 지도자들의 간섭조차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허락하셨다면, 그 일의 외양이 어떻게 보이고 느껴지느냐에 상관 없이 그 일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유익한 일입니다. 때문에 그것을 묵묵히 감당하는 것이 올바른 믿음이며, 하나님을 향한 충성입니다. 그 확신으로 인하여 사도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폭력조차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통의 상황을 이미 감사함으로 받았으니, 사도들의 내면에 분노나 미움이 자리할 수 없었습니다. 불편한 감정은 하나님의 빛이 없는 자리에서 자라나는 곰팡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은 우리 내면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사람들이 가지는 보편적 상식의 수준에서 볼 때, 전혀 신사적이거나 인격적일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보여지는 신사적이고 인격적인 내면의 부드러움, 그것이 바로 온유함의 실체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특성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민 12:3, 마 11:29)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온유함을 사모해야 합니다. 사모할 뿐 아니라 배우고, 노력해야 합니다.

온유함이야말로 부조리한 이 땅에서 거룩한 신앙으로 생존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하지 못할 때에,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분노하고 미워하다가 결국에는 닮게 됩니다.

온유하지 못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손을 놓고 자기 생각의 정의를 위해 길을 떠나게 됩니다.

온유함은 하나님의 주권을 확고히 의지하는 신앙적 내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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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4 목양칼럼 :: 시련 속에서의 자기지킴


(약 5:13, 개정)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시련은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그것을 이겨내면 강인한 내면과 풍성한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겨내지 못하면 내면의 상처(트라우마)가 생겨나고 패배감을 가지게 됩니다.

어려움 속에서 깊이 고민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어려움을 통과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마치 훈장처럼 자랑합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는 사실이 자랑이 될 일은 아닙니다. 자랑할 것은,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인품을 잃지 않고 지혜를 더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물질과 명예를 쌓고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할지라도, 내면의 세계가 무너지고 인격에 상처가 남겨진 사람들은 결코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성공은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자신도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인생을 외형적인 이유만으로 성공했다 말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시련 속에 서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약(藥)이 될지언정 독(毒)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자기를 점검해야 합니다. 상처 받고 독해지려는 자신을 향하여 “독해지지 말자”라고 타이르며, 어려움 속에서도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삶은 단거리 경주가 아닙니다.

힘들 때가 있으면 반드시 좋을 때도 있습니다. 계절처럼 오고 가는 좋고 나쁨의 상황이 인생 자체를 망치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상황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을 걸어가는 내 자신이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좋은 날도, 나쁜 날도 망가지지 마십시오. 오히려 더 성숙해 가십시오.

삶 자체를 사랑하고 진심을 다해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십시오.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 할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하고 그리스도께 기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 인생의 시련이 여러분을 풍성하게 하는 기회가 되고, 여러분을 망치는 수렁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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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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