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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4:6~7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근심은 인생의 부분이다.

그것은 세상이 인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처음에 자연과 경쟁을 했다. 상대적으로 연약한 인간이 자연의 꼭대기에 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자연을 정복하고 지구의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인간 자신이 인간의 경쟁자가 되었다.

뱀과 사자, 추위와 더위는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하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사는 도시의 저 밖으로 모두 추방을 당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가 안전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고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같은 사람이다. 사람이 자연보다 백 배, 천 배 더 무섭다. 그 사람으로 인해 우리는 늘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역사는 비정형이다. 불규칙하다. 그것을 한 마디로 정의 하거나, 하나의 원리로 풀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그걸 억지로 한다고 하더라도 의미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정의는 너무 많은 예외를 허락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가진 하나의 방향성은 있다.

그것은 행복이다. 많이 익숙한 단어이다. 우리는 실제로 그것을 위해 움직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생각이 다르고, 더러는 서로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함께 모여서 도시를 이루고 살아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게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좀 더 행복할 가능성이 확장되고, 기회가 많아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심지어 더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고민을 품고 살아가는가?

사는 것이 쉬운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의 삶이 쉽게 보이고 더 행복해 보이는 것은 일종의 착시 현상이다. 인간의 마음에, 항상 남의 자리를 탐내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진짜 자리를 바꾸면 알게 될 것이다. 오히려 그 사람이 나보다 덜 행복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인간은 이처럼 고민이 많은 존재이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말이 하나의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행복이야말로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잡을 수 없는 무지개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무지개를 잡을 수 없다는 현실적인 깨달음으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아주 피상적이고 관조적인 가르침을 전파하기도 한다. 원래부터 무지개는 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는… 그래서 행복도 생각의 방식일 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마음의 기대를 내려놓는 것을 훈련한다. 이를테면, 마음에서 ‘행복’이라는 네임을 지우는 것이다. 그래야 그 행복에 이르지 못하는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착각도 마음에서 몰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하나 있다. 아주 사소할 수도 있지만, 아주 중요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그것은 바로 행복과 불행을 모두 마음에서 지우고 나면, 과연 우리 마음에 무엇이 남느냐? 우리 인생에서 이제 행복 대신에 무엇을 추구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이 공허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냥 비우기만 하면 끝나는 것인가? 불행하지 않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가? 정말 행복은 없는 것인가?

 

사도 바울은 가문이 훌륭했다.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난 바울의 원래 히브리 이름은 ‘사훌’이었다.

알다시피, 사훌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다. 물론 다윗의 등장과 함께 그의 가문은 몰락했지만, 그러나 사훌이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물론 유다의 자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다는 예언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훌은 버려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사훌이 당신의 조상이라도 그렇게 생각할까?

분명한 사실은 베냐민 지파에게 특별한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가문에서 ‘사훌’은 매우 의미가 깊은 이름이다. 그 이름을 그에게 붙였다는 것은 기대가 컸던 자식이었다는 의미이다.

유대인은 가정교육부터 엄격하다. 말을 배움과 동시에 신명기 암송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 아들은 특히 총명했다. 배우는 것에 막힘이 없었고, 그래서 가족은 더욱 그를 기대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는, 어린 그가 바리새파에 입문하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통해 바리새파에 대한 거부감을 안고 있다.

그것은 외식적이고 허영에 싸인 ‘독사의 자식들’을 연상시키는 이름으로 읽힌다.

그러나 성경이 쓰여지던 당시의 사회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그 이름은 명예로운 이름이었다.

많은 학자와 종교적 지도자들이 ‘바리새파’임을 자랑스럽게 과시했다.

그 중에서도 가말리엘은, 성경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에 등장하는 걸출한 랍비이다.

그의 학문과 지혜는 이스라엘을 넘어 로마의 제국에서까지 명성을 얻게 했다.

그리고 ‘사훌’이라는 청년은 이 가말리엘의 직전(직접 가르치는) 제자였다.

 

결혼도 하지 않은 사훌이 대제사장을 상대하여, 그의 친서를 들고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향했다는 것은 많은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사훌이 회심한 후에 총독 벨릭스 앞에 서게 되었을 때에, 총독은 그의 학문이 많아서 그를 미치게 하였다고 판단했다. 어떻게 로마 제국의 총독이 사훌을 알고 있을까? 그것도 그가 학문이 많은 사람임을 어떻게 알까?

빌립보 감옥에 재판 없이 투옥 되었을 때에, 사도 바울은 자기 스스로를 가리켜 ‘날 때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중대한 사실인데, 만약 이것이 허풍이었다면 심각한 위기를 맞을 수도 있었다.

사람마다 왕년을 자랑한다. 한 때는 자신이 출세했던 사람이라는 자랑이다.

사도 바울이 정말 그랬다. 그가 세상에 ‘사훌’로 알려졌던 푸른 날들은,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는 시절이었다. 젊은 그를 세상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주목하고 있었다. 그는 학문과 연설에 있어 오만했고, 인맥에 있어 매력적이었다.

 

그랬던 사도 바울이 예수를 믿은 이후, 완전히 다른 인생이 되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자랑에서 유대인들의 암살 대상으로 변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으며, 어쩌면 그가 자신을 ‘바울’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과거와 완전히 단절하기 위해서였을지 모른다.

가는 곳마다 동네에서 매를 맞고, 심지어는 집단구타를 당하고 기절한 것을 사람들이 동네 쓰레기장에 가져다 버리기까지 했다. 그가 가는 헬라의 도시마다 평화를 깨뜨리고 사회를 어지럽게 하는 자라고 재판에 회부하였으며, 이유 없는 부당한 매를 맞아야 했다.

그는 미친 들개였다. 집도 없고, 결혼도 안하고, 자유인이면서 노예와 어울리고, 다른 사람들의 병을 무수하게 고치면서도 자신의 병을 고치진 못했다.

 

그가 오늘 빌립보의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거기 말한다.

 

 

[ 빌립보서 3:4~9 ]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참으로 역설적이다. 그는 세상에서 잘 나가던 시절에 행복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알고, 만나고, 그 예수를 위해 죽고자 했을 때에 그는 행복했다.

그래서 잘 나가던 ‘사훌’은 그에게 배설물(똥)이다. 그리고 지금 미친 들개 취급을 받는 ‘바울’은 그에게 있어 가장 고상한 자신이다.

 

이 파라독스를 이해하지 못하면, 빌립보서는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그저 문자가 전달하는 의미 만으로는 부족하다. 빌립보서에 실려 있는 것은, 한 인간의 실존이다. 그리고 그 실존으로부터 우러나는 간증이다. 그것은 추측이나 가정이 아니라, 철저하게 경험에서 나오는 외침이다.

비유하자면, 소고기맛 라면국물이 아니라 사골을 일주일 동안 우려낸 설렁탕이다.

 

바울은 이 편지의 결론에서 아주 흥미로운 제안을 던진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염려로부터 탈출하고 싶다. 염려하고 싶어서 염려하는 사람이 있는가? 나도 염려하고 싶지 않은데 염려가 된다. 어쩌란 말이냐? 놀리는 거냐?”

화내지 말고 들으라.

여태까지 사훌의 자리에서 행복을 찾아온 것이 아닐까?

염려로부터 해방되는 탈출구를 혹시라도, 모든 염려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에서 찾았다면, 이 글의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세상은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고, 그래서 문제는 끝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당신은 염려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멋진 이성을 만나도, 높은 자리에 올라도, 인맥을 넓게 가져도, 최고의 명예를 얻어도 소용 없다. 무덤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시끄러운 일들이 당신을 좇아 다니며 계속 괴롭힐 것이다.

그건 답이 아닌 것이다.

 

내가 답을 못 찾는다고 답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억측이다. 굳이 행복과 불행을 마음에서 지우고, 공허하게 비우는 것을 목표 삼을 필요는 없다. 성경은 행복이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있다고 말할 뿐이 아니라, 그 행복을 우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렇다면 이제 성경이 약속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응, 내 이럴 줄 알았다. 결국 기도하라는 것이구나. 그렇지 뭐. 대충 다 교회에서 하는 말들이 비슷한 거 아닌가… 기도하면 된다. 되기는 뭐가 돼! 기도하면 밥이 나와?”

역시 틀렸다.

그래서 바울의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면, 빌립보서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훌도 무수히 기도했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기도라는 행위나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하나님께 말하는 관계, 그냥 그 분 앞에 앉기만 해도 감사함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관계… 그 관계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과연 ‘기도’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수 없이 기도했음에도 여전히 응답이 없다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나는 기도하는 대상이 실제로는 없거나(우상에게 드리는 기도의 경우와 같이), 다른 하나는 기도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마치 주소를 잘못 쓰면 우편물이 엉뚱한 곳으로 가듯이, 전화번호를 누르다가 하나쯤 엉뚱한 번호를 눌렀다고 해서 옆 사람에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에게 연결되듯이, 어쩌면 그 기도 자체가 틀려먹은 것은 아닐까?

 

사훌로 살았던 동안, 그는 자기 인생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예수님은 콧대 높았던 사훌을 길바닥에 꼬꾸라지게 하셨다. 그리고 그에게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친히 물으셨다.

자기가 잘하고 있다는 스스로의 확신은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그거야말로 껍데기요, 진정한 행복을 가로 막는 장애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허울 좋은 바리새인의 옷을 벗어야 한다. 남에게 보여주는 신앙생활에서 나와야 한다.

제대로 된 신앙생활의 척도가 여기 있다. 그것은 사회적 성공이 아니다. 남들의 평판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의 위안이나 연민도 아니다.

그것은 감사이다.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이다.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려는 강함이 아니라,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부탁 드리는 약함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그분에게 나의 문제를 맡길 수 있다면, 분명히 그 믿음에서는 감사가 우러날 것이다.

 

하나님은 이상한 분이다.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동안, 하나님은 절대로 거들지 않으신다. 그분은 언제나 그렇다. 일부가 아니라 전부여야 만족하신다. 우리 마음의 90% 지분을 드려도 하나님은 꿈쩍도 안 하신다. 오히려 우리가 드리지 않은 10%를 조명하시고, 왜 이것은 내게 가져오지 않느냐고 물으신다. 그게 하나님이시다.

결국 100%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순종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를 안아 주신다.

우리를 위해 기쁨으로 일하신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경험했다. 처절하게 경험했다. 그의 인생이 바로 그 원리의 증거였다. 그는 하나님을 알았다. 그리고 비로소 행복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가 없는 세상이 있다.

그것은 샬롬, 하나님의 평강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 평강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다. 아주 예민하다. 모든 것을 깊이 살펴서 놓치는 것이 없다.

마치 아기의 필요를 살피는 어머니의 손길처럼, 말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이해하고, 사랑으로 예비하는 평강이다.

그 샬롬이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

히브리적 표현으로 볼 때에, 마음과 생각은 같은 대상을 다른 단어로 반복하여 강조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생각을 이성의 영역으로, 마음을 보다 깊은 영혼의 영역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샬롬이 깊이 침투하고 철저하게 지킨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존재, 그것이 이성이든, 영혼이든, 혹은 생각이든, 마음이든… 무엇이라고 이름하든지간에 상관없이 그 평강은 우리의 전 존재에 스미고 채워진다.

그리고 우리를 강하게 하며 지켜준다.

 

바울은 이 편지를 서술하는 동안, 감옥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놀랍지 않은가! 어떻게 그토록 근심과 어울리는 장소에 앉아 이토록 평안한 편지를 쓸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다.

복음은 인간의 해결이다. 끊어졌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켜서, 어떤 문제 속에 앉아서도 그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복음은 행복의 재정의(再定義)이다. 행복을 환경이라는 바깥에서 찾아서도 찾을 수 없었고, 마음이라는 안에서 찾아서도 찾을 수 없었던 인간을 향하여, 바로 행복이 창조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이제 우리는 그 손가락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에필로그

 

하루 종일 앉아서 생각하고, 글을 쓰고, 책을 본다.

나는 행복한가?

베란다로 통하는 문을 연다. 밤공기가 차다. 허파를 지나면서 한기(寒氣)는 소름으로 돋는다.

처음에는 상쾌했던 느낌이 점점 추위로 변한다. 급히 문을 닫는다. 답답했던 실내의 공기가 차라리 다행스럽다. 추위가 슬그머니 퇴장한다.

행복도 이런 것일까 두려웠다. 가지고 싶은 열망으로 추구하지만, 결국 손에 잡히는 순간 또 다른 칼날을 드러내는 두 얼굴의 무엇… 행복의 배신이 두려웠다.

그러다가 빌립보서를 통해 사도 바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나를 설레게 했다.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감옥에 갇힌 사도는 곳곳에서 빛나는 언어로 행복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것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증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행복에 대한 말이 아니라, 행복 자체의 느낌이었다.

나는 사도가 말씀하는 것이, 바로 지금 내가 추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 받고 안도한다.

틀리지 않았다. 아직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 길이 맞는다. 그래.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복음, 예수 그리스도, 기도, 감사… 바로 이것이 나를 하나님의 평강[샬롬]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영원한 쉼을 얻을 것이다.

이 소망을 품고 살아갈 또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쓴다.

당신도 틀리지 않았다. 세상이 비웃어도, 아직 그 열매가 보이지 않아도 용기를 가지라. 그리고 그 길에 진력(盡力)하라. 곧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넓은 품에 우리를 안아 주시기 위하여 두 팔을 크게 벌리시고 있다. 그러니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염려 없는 세상에서 우리 만나자!

마라나타, 그리고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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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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