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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1 목양칼럼 :: 


간디의 제자였던 비노바 바베(1895~1982)는 유명한 '부단운동(토지헌납운동)'을 일으켰다.

1951년 포참팔리라는 지역을 여행하던 그는 '하리잔'(불가촉천민)들의 방문을 받게 된다. 그들은 조그만 땅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열심히 일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소망을 말한다. 비노바는 그들의 탄원서를 주정부에 제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때, 그 자리에 있던 한 부자가 그 이야기를 듣고 자기의 땅 100에이커를 기꺼이 헌납했다. 이 사건이 비노바에게 영감을 주었다. 비노바는 그 때부터 인도의 전국을 돌며 지주들을 설득했다. 비노바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

"도둑질은 범죄이지만, 많은 돈을 쌓아만 놓는 것은 도둑을 만들어내는 더 큰 도둑질입니다. 돈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존경까지 얻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당신에게 네 명의 가족이 있다면 가난한 자들을 다섯 번째 가족으로 여기고 그들을 위해 소유한 땅의 1/5만 내게 주시오. 땅이 없는 사람들과 나눌 수 있도록..."

결국 비노바는 400만 에이커의 땅을 기증 받아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과 나누었고, 이 일은 서구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한국의 기독교가 든든한 재정적 기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교우들이 '십일조'라는 연보에 성실히 헌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약적 제사의 전통이 과연 신약의 연보에 그대로 반영되어야 하느냐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있다.

더우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십일조의 비율은 강조되었으나 그 연보가 가지는 의미(목적)는 소홀히 여겨져 왔다는 사실이다. 

구약 성경에서 십일조의 종류가 세 가지나 되고, 그것은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레위인의 삶을 보장하고 성전을 유지하는 비용이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는 것에 쓰임 받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아는 신자는 많지 않다. 

참담하게도 교회는 마땅히 가르쳐야 하는 이 같은 연보의 정신을 왜곡했다. 연보는 드리는 것으로 끝나고 더이상 간섭하지 않는 것이 신자의 미덕인 것처럼 교훈되고, 신자들은 직분을 받으며 십일조의 의무는 맹세했지만, 정작 그 십일조가 가지는 공의와 자비의 정신은 배우지 못했다.

자크 엘룰이 말한 바와 같이, 뒤틀린 기독교는 결과적으로 이방인만도 못한 유대인들을 열매로 낳았다. 이름만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그 행실은 무익한 돌맹이 만도 못한 신자들이 양산되고, 때문에 교회는 더이상 이 세상에 신선한 충격을 주지 못할뿐 아니라 오히려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마 3:9, 개정)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생각해보자. 앞에서 꺼낸 비노바의 이야기를, 잠시 우리의 교회로 옮겨와서 함께 가정해 보자는 것이다. 

만약 어떤 목사가 교회마다 전국을 돌며, 성경적인 십일조 운동, 곧 모든 신자들이 그 재산의 온전한 1/10을 하나님께 드려서 이 시대의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조건 없이 구제하는 일을 하고자 한다면, 과연 얼마나 호응이 일어날까?

첫째, 그런 주장을 하는 목사의 순수함을 믿어줄 수 있을까? 목사들이 돈을 좋아해도 너무 좋아한다. 둘째, 신자들은 과연 소득의 십일조가 아닌 재산의 십일조를 선듯 내놓을 수 있을까? 명예를 얻기 위해 자기 교회에 내는 것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가난한 이웃을 위해 말이다. 셋째, 과연 그렇게 모아진 재화가 또 다른 조직과 이름과 욕심을 잉태하지 않고 고스란히 가난한 자들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목사이면서도 믿지 못하겠다. 돈에 관한한 근본적으로 신뢰가 이미 깨어졌고, 교회는 뒤틀렸다. 참 고통스러운 현실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연보는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연보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데, 그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을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대중적인 열렬한 호응과 인기는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신앙의 실질적인 내용을 담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자원하여 드리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가 않다. 성경은 연보를 거두는 방식보다 연보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하여 훨씬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조금만 눈을 뜨고 성경을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교회가 실현하려면, 결코 교회가 부유해지는 일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상식으로, 사회적 인격으로 말해도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노바가 말하는 바와 같이, 도둑질은 나쁜 일이지만 많은 돈을 쌓아만 놓고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는 것은 도둑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과 같아서 더 나쁜 일이 아닌가. 어느 정도는 자본주의를 제한하는, 이같은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기독교 신앙이 세울 공의와 자기부인은 무엇이 남을 것인가?


고난주간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간을 경건하게 보내기 위하여 나름 금식과 기도로 자기를 돌아본다. 경건한 글을 보고, 말을 조심하고, 십자가를 묵상한다. 

참 아름다운 일이다. 앞으로만 달리고 돌아봄이 없는 세상에서 그나마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색깔을 지켜가는 것은 이러한 아름다운 전통이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그 개인적인 경건의 밖에 소외된 이웃을 향한 우리의 의무도 깊이 생각했으면 한다. 

맘몬이 전능한 신으로 군림하는 이 세상에서, 돈이 아니라 사람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주님의 이름으로 자기의 빵을, 옷을, 땅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용기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하겠다. 이번 부활절에는 다만 예쁘게 색칠된 계란이 아니라, 보다 가치 있는 것이 나누어 지기를 바란다. 샬롬~


"지갑이 회개해야 진정한 회개이다!" - 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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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4 주일오전예배설교

제목 : 방해자에게 신앙을 보여주라 (2/2)

- RESET 2013 마무리설교

본문 : 느헤미야 4:1~6


(4:1)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4:2)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4:3)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4:4)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4:5)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

(4:6)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결되고 높이가 절반에 이르렀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하였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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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7 주일오전예배설교


제목 : 방해자에게 신앙을 보여주라 (1/2)

느헤미야 4:1~6 



(4:1)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4:2)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4:3)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4:4)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4:5)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

(4:6)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결되고 높이가 절반에 이르렀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하였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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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3 목양칼럼


신앙을 삶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맞는 말이다. 신앙을 인격과 삶의 일부로 생각하는 한, 결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신앙을 전부로 여기고 선택할 때에, 비로소 신앙이 삶을 지배하는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의 함정도 있다. 
세상 모든 돌이 황금이라면, 과연 황금을 귀히 여기겠는가?
신앙을 삶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말이, 예배와 경건의 의무를 가벼이 하는 변명이 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어떤 청년이 그런 말을 했다. 자신은 화장실에서도 기도를 하고, 버스를 타고도 기도를 하고, 평소에도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듯이 기도를 하며 산다는 것이다. 물론 그 친구는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매우 자신감에 차 있었다.
나는 예수님을 '친구'로 여기는 이런 태도에 매우 우려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혹은 모세를 친구와 같이 대하셨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들이 하나님을 친구로 여겼다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아니, 그런 태도를 취했다면, 그들이 결코 하나님께 친구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신앙을 삶으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앙'이라는 기본기가 건강해야 한다.
예배를 영과 진리로 드리고, 날마다의 삶에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구별하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훈련을 해나가야 비로소 삶은 신앙의 지배 아래 서서히 변하게 된다. 
반대로 예배를 소홀히 하고, 설교에 은혜를 받지 못하며, 날마다 경건의 훈련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 맘을 다해 사랑하고 묵상하지 않으면서 단지 하나님을 정서적으로만 친구로 여긴다면, 그것은 신앙의 확장이 아니라 세속적 가치의 역류에 해당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신앙의 확장이 아니라 신앙의 오염이다.


사람도 구분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기도회 시간마다 애통하며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그 말과 행동에서 신앙이 깊이 있는 향기로 우러날 때에, 우리는 그가 "예수님은 나의 친구가 되신다!"고 말하면 부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기도회는 태만하고, 말은 경박하며, 인격에서 전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견할 수 없는데 "예수님은 나의 친구시다!"고 한다면... 다소의 경멸과 슬픔을 느끼게 될 뿐이다.


신앙은 가벼운 일이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의 친구가 되려면, 먼저 변해야 한다. 단지 말투만 조금 바꾸고 나 혼자 하나님과 친한 척을 한다고 하여서 하나님도 나를 친구로 여기시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그분의 취향은 매우 섬세하고 까다롭다. 
그분이 우리를 기쁘시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의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지만, 만만한 하나님은 절대로 아니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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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히 섬기라

목회/설교 / 2013. 2. 3. 21:00


2013-02-03 주일오전예배설교

제목 : 진실히 섬기라

본문 : 삼상 12:22~25


(12:22)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12:24)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12:25)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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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3 목양칼럼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은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평생을 통해 그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선언했던 것입니다. (수 24:15)

자녀에게 부와 명예를 물려주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나의 하나님이 자녀에게, 또한 자녀의 하나님이 손자에게 이어지게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신앙의 유산이야말로 신자에게 가장 복된 유산이며, 가장 큰 명예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가 경박하여 신앙을 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목사가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이제는 그것을 교단에서 금지하는 법을 만든다고 합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희한한 교회법입니다.

과연 목회자의 일이 고되고, 가난하고, 욕되어서 ‘십자가의 길’이라면 그것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 할까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누리고 살 만 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평생 떠나지 않으려는 것이고 심지어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짓이야말로 바보 같은 짓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건물은 물려줄 수 있으나 참된 신앙은 물려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교회를 자신의 소유로 착각하는 순간, 그의 사역이 병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녀들의 신앙도 망치게 됩니다. 더 많은 것을 물려줄수록, 더 화려한 것을 물려줄수록 당연히 그러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사무엘은 어린 시절에 성전에 바쳐져서 엘리 제사장의 손에 컸습니다. 또한 세례요한은 어린 시절에 광야에 나가 약대 털옷과 메뚜기, 석청을 먹으며 자랐습니다.

부모의 따뜻한 품에서 한없이 안락한 삶을 누린 자녀 중에서 과연 하나님의 사람이 된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하여 주시는 고난을 부모의 인간적인 생각으로 감싸고 피하게 하는 일이 과연 그 자녀에게 좋은 일이 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는 자기 사랑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식을 타인으로 보지 않고, 나의 분신으로 여깁니다. 자식의 생김새가 나와 비슷하고, 그 성장의 모습이 자기의 젊은 시절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을 지혜롭게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랑이 지독한 이기심으로 나를 망치게 되는 것처럼, 자녀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자녀 사랑은 마땅히 절제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자식을 나의 꿈을 대신 이루어 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으로 키워야 합니다.

때문에 자식에 대한 나의 계획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순종하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들의 자녀사랑이 삐뚤어져 있는 것은, 결국 자기 사랑이 삐뚤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반드시 자녀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행사하고 그 장래를 망치게 됩니다. 알고 하든, 모르고 하든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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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7 오전예배설교

제목 :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신앙생활의 지식 :: RESET 2013 설교)

본문 : 에베소서 1:17~19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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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7 목양칼럼


살다 보면, 항상 좋은 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날이 있듯이, 신앙생활에도 침체기(沈滯期)가 찾아옵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태를 방치해서 신앙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도 시험에 대하여 많이 말해 줍니다. 그것은 시험이 그만큼 신자의 일생에 흔히 경험하는 문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시험에 빠지는 것을 합리화시키는 말씀은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시험을 극복하는 일을 우리 신앙생활의 한 중요한 과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신앙적 침체기 속에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도움이 필요할까요?

저는 목사로서, 신앙생활의 원칙을 사수하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 분들은, 다소 무리를 해도 별다른 지장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질병으로 인해 회복을 위해 운동을 하는 분들은, 운동을 잘못 하는 것이 오히려 병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때문에 회복을 위해 운동을 할 때에는 의사의 주의사항을 듣고, 환자로서의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만 합니다.

신앙의 회복도 마찬가지라고 설명 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좋은 신앙으로 하나님을 향해 불타 오르는 동안에는, 가는 곳마다 예배당이고, 앉는 곳마다 기도의 자리가 됩니다. 마치 젊은이를 향하여 돌이라도 씹어 먹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런 신자는 모든 것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영적 침체기 속에서는 예전에 은혜를 받았던 것들에서 더 이상 아무런 감동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은혜가 모두 나를 떠난 것도, 하나님께서 나를 멀리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것은 내 약함과 육체적 기질로 인하여 나타나는 영적인 독감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기를 오히려 잘 이겨내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하며, 그것이 좋은 신앙을 유지하고 성장해가는 중요한 비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침체기 속에서는 다음의 원칙을 지켜 보기를 권합니다.

첫째, 주일은 주님의 날입니다. 공적 예배를 빼먹지 마십시오. 둘째, 불평은 멈추어야 합니다. 불평하는 습관은 무익하며 은혜를 사라지게 합니다. 셋째, 연보를 정성 들여 하십시오.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놔둬서는 안 됩니다. 넷째, 은혜로운 사람들을 가까이 하십시오. 불평도 전염되고 열심도 전염될 수 있습니다. 다섯째,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내가 변덕이지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는 분입니다.

이 다섯 가지의 원칙을 사수하면, 반드시 영적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 원칙을 무시하면, 영적 침체는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어 매우 큰 영적 질병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할 때 건강을 지켜야 하는 것처럼 평소에 바른 신앙의 습관을 기르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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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2 목양칼럼 


경제는 효율을 중시한다. 들어간 것(input)이 있으면 반드시 나온 것(output)이 있어야 하며, 되도록 적게 투자하고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경우를 성공적인 모델로 삼는다.

단순히 이 원리만을 생각하면, 복권이나 도박과 같은 일이 가장 경제적인, 혹은 경제다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률'이 저조하여 적은 것이지만 들어간 것에 대하여 전혀 아무 것도 안 나올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그것을 삼가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럼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도박이나 복권의 승리 확률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다면, 그에게는 이 방법이 정당화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불법적인 일이 아니라면, 경제적인 큰 수익을 최소한의 노력으로 거두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며,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물론 이런 사람들에게 대박의 꿈은 있어도 대박의 현실은 다행히 일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생각의 바탕, 곧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거두는 일이 남에게 일어나는 것은 배가 아파도, 나에게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고 감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축복을 담을 수 없는 깨어진 마음의 그릇을 증명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잘 생각해 보라. 인격적인 성숙이 없이 재물을 많이 가지는 일은 어린 아이의 손에 칼을 들려주는 것과 같다. 결과적으로 그 재물은 자신의 인생을 망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되어 있다.

때문에 성공과 성장은 함께 일어나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수익을 거두는 것은 증권투자를 하는 방식으로는 정답(正答)일지 몰라도 인생에 대한 방식으로는 절대로 오답(誤答)이라는 것이다.

신앙을 가진 이후에도 여전히 마음의 주인은 맘몬(mommon, 가나안의 황금신)인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하나님께도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수익을 거두려고 하니, 마치 장사를 하는 장사꾼처럼 하나님 앞에서 처신한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진심으로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고, 진심으로 사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진리와 축복이 부어진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는 심는 대로 거두는, 정직한 방법 밖에는 통하지 않는다. 신앙에 지름길은 없는 것이다.

교회도 그러하다. 교회가 크게 되면 성공을 한 것이고, 작게 되면 망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교회는 정직하고 바른 신앙을 추구하는 공동체로 남으면 작아도 큰 교회요, 정직함이 사라지고 복음이 옅어지면 큰 공동체를 이루고 연보를 많이 거두어도 실패한 교회이다.

하나님의 관점은 철저하게 본질적이다. 그것은 경제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무엇을 더 가지려는 욕구 자체가 하나님께는 없다. 그러니 그 하나님 앞에 '협상'을 하려는 태도는 얼마나 가소롭고 한심하겠는가!

우리 마음에 맘몬은 없는지, 그리고 본질은 충실한지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하겠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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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4 :: 목양칼럼

 

인생에 있어 가장 크고 소중한 재산은 자기 자신이다.

아무리 요란한 풍랑도 자신을 날려버리지는 못한다. 죽지 않는 이상, 자신은 남을 것이고, 그렇다면 거기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인생에는, 오직 자신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몇 번은 오기 마련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자기와 깊게 만난다. 만약 자신을 잃고 살아왔다면, 그 순간에 가장 절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지키고 가꾸며 살아왔다면, 그 순간에 자부심을 얻게 될 것이다.

신앙은 자기를 버리는 길이다. 그러나 그 버림은, 쓰레기처럼 그저 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앙 안에서의 버림은 진정한 자기를 얻기 위한 과정이다. 욕망과 습성에 갇힌 자기를 버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의 자기를 얻으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해방자로 오셨다는 말이 무엇인가? 그분은 노예나 여성을 해방시키는 일을 위해 칼을 잡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의 순간에 칼을 잡는 제자를 향해, 칼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칼로 망하게 될 것이라 경고하셨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해방자가 분명하다. 그분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여 우리 맘대로 섬기려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셨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를 되찾게 하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信者)는 신자(神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자신을 깊이 만나는 일이다.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는가? 왜 그렇게 가지고 싶은 것이 많은지? 그리고 이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여전히 목마른 '나'에 대하여 깊이 허전하지 않는가? 어떻게 하면 이 야생마 같은 나를 길들여서,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 가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게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 않은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를 찾지 않는 것은 제일 어리석은 일이다. 아무리 많은 기도를 하고, 아무리 열심히 성경을 읽어도, 그것을 자기와 묶지 못하면 신앙은 실패한다. 그것은 바리새인의 습관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하자. 시끄럽기만 하다. 이제 정중하게 앉아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라.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신앙과 인격에 대하여 말해 보라. 자기를 정직하게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게 허전하고 부실하기 때문에, 늘 인생이 불안하고 신앙은 허약하며 꿈이 연기처럼 그저 흩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혹시 지금은 아니라도, 인생에는 반드시 모든 겉옷을 벗고 벌거벗은 자기와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그 날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부디 그 날에 당신은, 성경이 말하는 복 있는 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자기만 넘어지지 않는다면, 자기만 확실하다면, 우리가 넘지 못할 산은 없고, 우리가 이기지 못할 시련도 없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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