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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3 목양칼럼

 

꿈 같은 시절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좋은 꿈이었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전혀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곤란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2020년을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이런 일상이 찾아올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유행(팬더믹)으로 국경은 봉쇄되고 사람들은 집에 갇혔으며, 아이들은 교육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이 곤란한 상황이 지나가고 다시 일상의 자유를 맞이할 수 있을지 예상도 쉽게 되지 않는 요즘입니다.
갑자기 닥친 이 시련은, 국가의 리더십을 시험하고, 개인의 성품과 인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적당하게 감추어졌던 우리의 속모양들은, 이제 감출 수 없는 지루함과 두려움, 이기심 속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름의 유익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마치 세계의 공장들이 멈추어 서자 바다가 살아나고 철새들이 돌아오는 것처럼, 이 코로나19는 식구들이 다 모여 매일 저녁을 먹는 일상을 강제했고, 또한 우리 자신의 실체를 돌아보게 하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정원사들은 이른 봄에 가지치기를 합니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이제 봄기운을 좀 받으려는 나무들에게 가혹한 가위질을 하는 것이 조금은 안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때가 가장 좋은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봄은 정열적인 생명으로 나무를 다시 살려놓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른 봄에는 거침없이 가위질을 해도 무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어려움은 지나갑니다. 사실 모든 어려움이 그렇습니다. 저는 이 분명한 원칙 속에 하나님의 자비가 깃들어 있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그 원칙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려움을 통해 부실한 가지를 잘라내고 자기를 더 건실하게 하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부수적인 것들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부수적인 것들을 너무 많이 용납하고 연연하는 동안 우리의 정신은 혼잡해지고 마음은 어수선하게 됩니다. 때문에 가끔은 부수적인 것들에게 선을 그어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꼭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지만,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꼭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에 대하여 확실한 결정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좀 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행복에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꿈처럼 일상이 멈춘 지금이 어쩌면 그렇게 자기를 돌아보고 정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휴가는 계획을 한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닐테니까요. 어쩌면 우리의 평생에 다시는 없을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조용한 사색과 기도와 독서와 글쓰기의 시간을 권합니다. 가족과의 대화는 많이 하시되, 가끔은 그 대화로부터도 좀 떨어진 여러분만의 시간을 가져 보십시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지나온 여러분의 시간과 앞으로 걸어갈 여러분의 시간을 헤아려 보십시오. 사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부터라도 그것을 아껴 사용하고 후회 없는 인생이 되도록 세밀한 조정이 필요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목적이 있는 삶을 희망했습니다. 치열하게 살아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갈수록 '산다'는 말의 의미가 묵직하다고 느낍니다. 어쩌면 잘 산다는 것은, 젊은 시절에 생각했던 거창한 것들보다 훨씬 작고 소소한 것들에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고, 규칙적으로 산책하고, 혈압을 체크하고, 커피를 마시고, 몇 글자의 글을 쓰면서 혼자 생각하고, 지난 사진을 보며 작게 미소를 짓고,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그리고 다시 하얗게 변해가는 머리를 손질하며 미래를 지긋이 전망하는 것… 그 자체로도 눈부시게 아름답고, 대단하고,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의 내용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우리 안에 욕심이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욕심은 쓸데 없는 걱정과 염려로 이어지고, 그래서 우리 마음은 쉴 틈이 없습니다. 산다는 것은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닌데… 그래서 계획이 없는 인생도 무모하지만, 너무 계획에만 매달리는 인생도 갑갑하고 힘든데… 우리가 덜 중요한 것을 잡고 놓지 못해서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고민이 됩니다.
답은 각자의 몫입니다. 그 대답에  따라 다른 인생을 살아갈 것이고, 그 인생의 결과 또한 각자가 책임지게 될 것입니다. 목사로서 저의 역할은, 이런 것들을 제시하고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인생의 결정권은, 결국 그 주체로서의 개인과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습니다. 때문에 그 결정에 대하여 '권면'은 하겠지만, '주장'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늘 드리는 말씀과 같이, 잘못된 결정을 하는 것보다 나쁜 것은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결정이라도 했을 때에는 그 결과를 책임지고 다시 좋은 결정을 할 수 있는 지혜를 배워갈 수 있지만,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며 인생을 낭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아니라면 실패도 인생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래서 신중한 것과 우유부단한 것은 다르다는 것을 꼭 기억했으면 합니다. 신중은 마지막까지 골몰하되 반드시 스스로 결정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한 책임도 반드시 스스로 져야 하겠지요. 결정과 책임은 언제나 별도의 내용이 아니라, 하나의 세트메뉴라는 것을 아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유부단은 결정하지 못할뿐 아니라 책임지지도 않는 태도입니다. 어쩌면 책임지지 않기 위하여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는 것이 우유부단의 실체일 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지금은 잘 사용해야 하는 기회입니다. 흔치 않은 시간입니다. 인생에 다시 없을 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에게 안전하고, 건강하며, 유익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는 제가 대답할 내용이 아니라, 여러분이 찾아야 할 여러분만의 숙제입니다. 모쪼록 그 숙제를 잘 하기를 곁에서 응원하겠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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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4 목양칼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모범을 열심히 따르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물론 고결한 지식을 가르쳐 주지만, 단지 지식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한 태도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마음을 깨닫고, 그분처럼 살기 위해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독서의 대상이 아니라 묵상의 대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묵상하며,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첫째로, 고난이 예상될 때에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의외로 뻔히 보이는 결과를 향하여 계속 달려가는 불나방 같을 때가 많습니다.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결과가 눈앞에 보이는데도 우선은 문제를 회피하고 문제가 없다고 부정하려 합니다. 그러다가 심지어 그 문제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기회까지 잃어버립니다.

성공하는 기도에는 세 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입니다. 건강한 믿음이 건강한 기도를 낳고,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에 이르게 합니다. 둘째는 타이밍입니다. 물론 기도는 항상 하는 것이지만,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너무 빨라서도, 늦어서도 곤란합니다. 그래서 꼭 기도해야 하는 순간에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는 인내입니다. 기도로 당장 효과가 나타나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많습니다. 그러나 무익한 기도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계속 기대하며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셨지만,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 특별히 기도하셨습니다. 그것도 그 십자가의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비겁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으니 우리가 어려움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도, 바른 신앙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기도는, 고난 앞에서 반드시 그 문제에 들어가지 않기를 기도해 볼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둘째로, 고난 속의 기도는 특별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은 항상 특별하셨습니다. 그분은 피곤한 일정 속에서도 새벽 어둠의 시간에 한적한 곳을 찾아 홀로 열정을 다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땀이 핏물처럼 흘러내린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유일합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을 경험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쉽게 말해 죽을 만큼 기도하셨고, 그래서 십자가의 고난을 이겨내는 하나님의 능력을 얻으셨던 것입니다.

평상시에 하는 기도생활, 잘 하셨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것으로 충분합니까? 예수님마저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처럼 처절한 기도를 보여주셨는데,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신앙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습니까?

신앙은 뜨거운 맛이 있어야 합니다. 고난은 그 뜨거운 맛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으시는 시기입니다. 고난 앞에서도 미지근한 기도와 망설이는 마음으로 시간을 낭비한다면, 그 고난은 우리가 세웠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주저 없이 무너뜨릴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기도해야 할, 그것도 특별한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할 때입니다. 당신이 교회라면 성령이 당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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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5 목양칼럼


남의 떡은 거대하다. 단순히 '크다'는 단어를 바꾸어 '거대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떡의 크기에 대한 재고(再考)가 아니라 욕망의 크기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진실로 이 막무가내의 몬스터(monster)가 한 마리씩 도사리고 있다.

기회를 보아서 우리 마음을 단숨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 몬스터의 존재는 누구나 버겁고 껄끄러운 현실이다. 그래서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기 전까지 우리는 이 괴물을 부정하거나, 사소하게 여기거나, 외면하려고 한다. 마치 자기의 마음에는 전혀 괴물이 살지 않는 것처럼, 남의 '욕망'에 대하여만 비판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모든 욕망은 위험하다. 욕망에게 '비전'이니 '긍정'이니 하는 알록달록한 옷을 입혀준다고 하여서 안전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치 사나운 불독에게 우스꽝스러운 애완견의 옷을 입혀 놓는다고 하여서 성격이 온순해지거나 이빨이 덜 날카롭게 되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나는 내 마음에 있는 욕망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에 '마흔'의 해가 걸린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로하는 것은, 주변을 둘러봐도 여전히 내 또래와 혹은 연배가 더 되는 사람들 중에서 아직도 자기 마음의 욕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또한 우스운 일이다. 이 놈을 남보다 조금 더 안다고 하여서 이 괴물을 다루는 것에 전혀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욕망은 언제나 자기가 가진 것은 사소하게 보고 상대적으로 남의 것은 크게 보게 만든다. 욕망은 꽃을 그대로 놔두지 못하고 꺾어야 직성이 풀린다. 욕망은 간절함을 주지만, 그와 함께 시기의 마음도 준다. 욕망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서도 마치 모든 것을 가져야 마땅하다는 식의 어리석은 생각을 끓어오르게 한다. 욕망은 책임감이 없으며 언제나 다른 사람과 환경을 탓한다. 욕망은 자기를 희생할 만한 가치가 밖에 있다고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때문에 욕망 안에서는 결코 희생이 있을 수 없다. 욕망은 먹어도 배가 고프며 얻어도 가난하고 입어도 추우며 올라가도 비천하다. 욕망은 아귀(餓鬼)와 같아서 언제나 허허롭다.

욕망은 의식보다 무의식을 좋아한다. 때문에 의식을 거치지 않는 습성(習性)은 욕망이 활약하기 좋은 조건이 된다. 자기 마음을 깊이 살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욕망은 작아지지만, 바쁘고 산만하며 즉흥적인 사람에게서 욕망은 태산(泰山)처럼 압도한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욕망 앞에서 두 가지로 갈린다. 십자가를 경험하고 그리스도께 주권을 온전히 위임하는 기도는 욕망을 죽이지만, 십자가 없는 기도는 욕망의 먹잇감이 된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오히려 욕망이 강성해지고 그 욕망을 이루어주시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가득해지는 신자들이 생긴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도 기도를 거듭하는 것은, 신앙 때문이 아니라 욕망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투쟁(鬪爭)이다. 참으로 슬프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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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4 목양칼럼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자주 아프셨다. 아픈 어머니를 간호하며 그 머리에 젖은 물수건을 갈아드리는 일이 일상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의 철부지 간호가 아마도 어머니에게는 인생의 풍파를 견디게 하는 큰 이유가 되지 않았나 싶다.

결혼 한 이후로 줄곧, 아내는 좌골신경통에 시달렸다. 오른편과 달리 왼편의 몸이 늘 저리고, 쑤시고, 결리고, 아파했다. 그 아픈 부위를 두드리고 주무르며 십구 년을 살았다.

누군가를 간호하는 것이 나의 운명일까? 그러고보니 내게는 항상 아픈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 왔다.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와 격려로 희망을 주면서 정작 내게 있는 아픔을 잊고 살아왔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런 일이 좋지만은 않다. 궁시렁거리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픈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대단히 소모적인 일이다.

때로는 나도 정서적으로 바닥이 날 때가 있고 내 몸이 아플 때도 있으니 불평이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요즘 내 몸이 아프다. 어깨, 특히 오른 쪽 어깨가 심하게 근육이 뭉치면서 묵직한 느낌과 두통, 어깨 결림, 팔의 저림에 시달리고 있다. 어떤 때에는 그 기분 나쁜 느낌이 거슬려서 잠을 설치고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한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주무르는 사람이 주무름을 당하는 사람보다는 낫다는 것을. 주무르는 사람도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겠지만, 정작 아픈 사람은 낮도 밤도 편할 날이 없더라. 그래서 병(病)은 인생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라 하지 않나.

남의 하소연을 귀찮아 하지 말아라. 고통하는 사람을 위해 손을 내어주는 것을 힘들다고 하지 말아라. 오죽하면 그러겠냐? 오죽하면 말이라도 그렇게 실컷 하려고 하고, 손이라도 그렇게 빌려달라 청하겠냐...

남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감각의 병을 간혹 본다. 그래서 알게 된 것이 너무 건강해도 오히려 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기 삶에 도무지 걱정도 없고 고통도 없을 때에 사람은 오히려 고립되는 경우가 많더라. 왜냐하면 그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통로를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관점에 갇혀서 남이 아프다고 울 때에, "왜 아픈데? 어디가 아픈데? 아프면 약 먹어!" 같은 쓸모 없는 말만 해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약함이 곧 강함이라. 약함을 오히려 자랑하자'고 하셨을까...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고통을 가르치신다. 고통은 겸손함을 배우는 기회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다. 고통을 통해 내 안의 이기적인 담이 허물어지고 비로소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 보게 되며,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드리는 아름다운 기도를 시작할 수 있다.

그러니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니다. 아픔을 통해서도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우리의 자아가 문제이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는데도 그 기회를 불평만 하다가 날려버리는 미련함이 우리를 정말 아프게 하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만나는 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그러했다. 성경에서는 그렇게 흔한 신유의 은사가 왜 신앙의 거인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았을까? 왜 바울 같은 사람은 평생을 육체의 가시에 시달리며 살았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니까. 그냥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유가 있어서 주신 은혜니까. 우리도 그걸 깨닫고 살았으면 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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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자녀

목회/목양칼럼 / 2012. 7. 10. 20:19

2012-05-06 목양칼럼

 

눈물의 자녀는 망하는 법이 없다!

이 격언은 암브로시우스가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에게 한 말입니다. 당시 어거스틴은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져 있었죠.

모니카는 영적인 거장이었던 암브로시우스를 찾아가 자기 아들을 만나 줄 것을 간청했지만 결과적으로 어거스틴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실망을 위로하며 암브로시우스가 예언처럼 했던 말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간과하는 두 가지 요점이 있습니다.

첫째, 모니카는 아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아들을 강제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탕자의 비유에도 나타나는 원리입니다. 잘못된 길을 가지 말라고 눈물로 권할 수는 있지만, 어떤 선택도 강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는 순간, 자녀의 자유와 존엄을 부모가 침해하게 되니까요.

둘째, 눈물의 자녀가 항상 형통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여서 자녀의 인생에 아픔과 문제가 모두 빗겨나기를 바란다면, 그것이야말로 미신입니다.

자녀는 자녀의 몫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에 각기 자기의 길을 주셨습니다. 그 길을 통해 우리는 지혜를 배우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눈물의 자녀'라는 말이 이미 애달픈 사연을 담고 있음에도, 사람들이 '망하는 법이 없다'라는 결론에만 집착한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 합니다. 항상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이 우리의 취향인가 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깨달으니, 자녀를 옳게 사랑하는 것이 참 힘듭니다. 부모가 계속 자라가야 하는 것 같습니다. 부모가 자라지 못하면, 미숙한 사랑을 주게 되고, 그것은 마치 덜 삭은 젖처럼 자녀로 탈이 나게 합니다.

그래서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 만큼이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결국 자신이 바로 서야, 자녀에게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으니까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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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1 목양칼럼

 

위험 앞에서 그것을 회피하려는 본능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서 사람은 흔히 눈을 감는다. 물론 눈이 신체 중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눈을 감음으로써 어느 정도는 위험이 주는 공포를 회피하려는 본능의 발현이기도 하다.

이것이 일시적으로 안정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눈을 감으면 일단 마음은 차분해진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위험은 더욱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스포츠맨들은 이 본능을 극복하는 훈련을 한다. 이를테면 야구선수는 공이 날아오는 순간에도 눈을 깜빡이지 않도록 훈련한다. 맞더라도 공을 보면서 맞는 것이 덜 위험하기 때문이다. 또한 격투기 선수들은 심지어 눈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이나 발길질에도 가드를 올리면서 상대를 보는 훈련을 한다. 가장 위험한 순간이 가장 절호의 찬스를 주기 때문이다.

꿩을 사냥하는 사냥꾼들은 사냥개로 꿩을 몰아간다. 꿩은 식욕을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먹을 것을 잔뜩 먹은 꿩은 오래 날지를 못한다. 결국 날아오르다가 내려앉기를 반복하며 사냥개의 추격을 피한다.그러다가 절명의 순간, 더 이상 도약을 시도할 수 없는 저질 체력의 바닥이 드러날 때에, 꿩은 수풀 바닥에 머리를 처박는 습성이 있다. 눈을 감아 버리는 본능과 비슷하다. 자기 머리를 감추고는 사냥개가 사납게 물기까지 그것으로 잠시의 평화를 맛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그 순간에 아담은 수풀 사이에 숨어서 눈을 감았다. 저지른 죄가 막중하여 겁도 났겠지만, 그런다고 엎지른 물이 저절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만약, 아담이 그 순간에 용기를 내어서 하나님 앞에 대장부처럼 나타날 수 있었다면 역사는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가끔은 사람의 본능이 참 미련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불안한 예상이 현실이 되기까지 그것을 인정하지도, 준비하지도 않는다. 막연하게 ‘긍정적 사고’만을 추구하고 눈을 감는다. 무대책이 대책인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도 남을 비판하고 남의 얘기에는 열을 올리는 것을 보면, 참 사람이란 알 수가 없다.

눈을 감는 것은 해답이 될 수 없다. 비록 싫더라도 현실을 봐야 한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 가장 지혜로운 행동을 책임감 있게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위기가 기회가 되고, 위험으로부터 나 자신뿐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줄 수 있다.

나는 항상 기도의 자리에서 눈을 뜬다. 기도는 현실과 나의 빈약한 존재 사이에서 고통 하는 시간이다.기도할 때에 교만한 마음이 무너지고, 내가 얼마나 꿩 같은 존재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 고통의 강을 건넌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서는 용기를 얻는다. 그래서 나의 기도는 항상 통곡을 지나 결단으로 끝이 난다.

삶을 막연하게 미루지 말라. 미루다 보면 후회로 끝이 난다. 눈을 뜨고 지금의 현실과 자신을 보라. 어쩌면 이미 사냥개의 사나운 이빨이 목덜미에 다가왔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순간, 한 번 더 도약할 힘이 생겨날지 누가 알겠는가? 눈이 살아있는 사람은 결코 주저앉는 법이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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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정서

목회/목양칼럼 / 2012. 7. 10. 19:19

2012-01-08 목양칼럼

 

설교는 가슴으로부터 나온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설교자는 한 손에 성경과 다른 한 손에 신문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말한 ‘신문’이 지금은 인터넷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성경을 들고 세상과 소통하며, 세상을 향하여 말하는 것이 설교의 실체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설교자들은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경험과 율법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같은 설교자로서 그 이면에 숨겨진 제3의 요소를 발견한다. 그것은 사랑이다. 긍휼과 사랑, 그 정서가 없는 설교를 나는 성경에서 단 한 편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는 ‘눈물’의 선지자라고까지 불려지는 것이리라.

설교가 막힌다. 물론 새로운 지식의 충전도 필요하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신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시대적인 흐름을 읽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중요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오히려 부수적이다. 나는 설교야말로 연애의 감정 속에서 태어난다고 믿는다. 자기가 인도해야 하는 양떼를 향한 한없는 사랑의 정서와 무한한 책임감… 그 사랑이 없으면 그야말로 설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그것이 문제이다. 부부도 평생 사랑하는 것이 힘든 것이 세상이고 사람이다. 그런데 하물며 온갖 오류의 가능성과 문제 속에서 만난 목회자와 신자가 서로 변치 않는 사랑을 해나가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니 헤어짐이 흔하다. 하지만 헤어짐이 능사는 아니다. 왜냐하면 누구를 만나더라도 이것은 비슷한 양상의 문제로 재발하는 종류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랑하기 힘든 신자를 교회 밖으로 내보내도 다시 또 그런 신자가 찾아오고, 사랑하기 힘든 목회자를 떠나도 다시 또 그런 목회자를 만나게 된다. 그러니 이를 어쩌랴!

비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예수를 통해’ 만나는 것이다. 설교자도 예수를 통해 신자들을 만나고, 신자들도 예수를 통해 설교자를 만나야 한다. 그러면 상대방의 허물과 과오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함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we)’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풍성한 사랑의 정서를 누릴 수 있다.

나는 사랑하고 싶다. 그래서 기도한다. 그 길만이 내가 스스로 설교에 실패하지 않는 길이라 믿는다. 신자들에게 더 좋은 설교를 먹이고 싶은 갈망으로 밤을 새워 책을 읽고, 성경을 묵상하고, 강단에 서면 진지하고 따뜻한 눈빛과 열정으로 자기에게 부어진 은혜를 쏟아내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에게 주어진 ‘사람들’을 사랑해야만 한다.

이것은 나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설교자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설교에 진정한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설교는 강연이 아니다. 설교는 공명(共鳴)이다. 내 안에 있는 성령의 은혜가 설교자의 외침을 통해 증폭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오늘 설교에는 ‘아멘’이라는 소리가 자주, 그리고 커졌으면 한다. 그것은 설교자 개인에 대한 찬동이 아니어야 한다.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시는 예수님을 향한 탄성이며, 감동이어야 한다. 이 비밀을 아는 자라야 비로소 설교를 들을 자격이 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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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1 목양칼럼

 

사람이 피곤하면 예민하게 되고, 예민하면 짜증스럽다. 육체적인 피곤함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정신적인 피곤함은 이런 경향이 더욱 강하다. 그래서 스트레스는 순환한다.

피곤한 사람의 주변에서는 피곤한 사람들이 양산된다. 말과 표정, 느낌의 찌꺼기가 오물처럼 사람들을 습격한다. 단지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힘들고 마음을 고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을 정말 피곤하게 만드는 원흉이라고나 할까!

세월은 사람을 좋게도 변하게 하고, 나쁘게도 변하게 한다. 그런데 스트레스는 병적이다. 한 번 그 흐름에 빠지면 헤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인생의 적이다. 좋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점점 나아지는 변화가 꼭 필요한데, 스트레스는 나쁜 변화를 주도한다.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이미 죄를 짓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기 때문에 충분히 나쁘다고 할 수 있다. 스트레스의 상황에 빠지면 사람은 대부분 나쁘게 변해간다. 아무에게나 짜증을 내고, 자기를 쉽게 변명하며, 반성하지 않고, 흥분하고, 때로는 우울하고, 심지어 웃으면서도 슬프다.

나는 스트레스가 사람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을 향하여 하나님은 땀 흘리는 노동과 땅의 엉겅퀴와 가시나무의 저주를 말씀하셨다. 쉽게 풀어 말한다면, 세상이 맘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노력해도 실패하고, 욕심 부리지 않아도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 맘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사람은 고민하고 힘겨워 하며 살게 된 것이다. 결국 아담 이후로 이 저주의 굴레에서 사람은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요즘 기도의 제목은 나의 마음의 주권을 주님께 위탁하는 것이 전부이다. 나이를 먹고, 언제부턴가 ‘문제’도 인생의 일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산다는 것은 단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를 반응하게 하고, 생명의 의욕을 가지게 만든다. 배고픔을 모르면 먹는 즐거움도 모르게 되는 것처럼, 문제의 시기를 통해 우리는 평안의 가치를 발견한다. 그러니 문제도 필요한 것이며, 인생의 일부이다.

다만 그 문제를 통해 스트레스 상태에 휘말리는 마음이 진짜 문제이다. 실망과 좌절을 겪고서도 나중에 되돌아보면 얼마나 사소하고 부끄러운 옹졸함이던가! 좀 더 대범하고 강단 있게 대처했다면 문제의 시기가 오히려 자존감을 높이고 긍지를 주지 않았을까? 마음이 암울한 환상을 만들고, 행동이 그에 반응했기 때문에 실수했던 것은 또 얼마나 많은가!

아, 마음이 진짜 문제다. 산책길에 줄을 풀어주면 사방으로 날뛰며 뒹구는 강아지처럼, 문제를 기회 삼아 여실히 허접함을 드러내는 나의 마음이야말로 내 인생의 원수이다.

예수님, 내 마음을 좀 맡아주세요. 줄로 묶어 주세요. 그러나 다치지 않게 조금은 부드럽게 대해 주세요.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을 만져 주세요. 내가 바꿀 수 없는 부분을 안아 주세요. 미련하고 좁은 마음이 소중한 내 인생을 낭비하지 않도록 도와 주세요. 내 마음이 더 이상 나의 소유가 아니라 당신의 소유라고 말해 주세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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