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쉬운 길로 가지 마라! makarios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896)
목회 (632)
인생 (179)
동경in일본 (35)
혼자말 (50)
추천 (0)
12-25 02:45
Total
Today
Yesterday

달력

« » 2024.1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자녀'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3.02.02 그리스도인의 자녀사랑
  2. 2012.07.10 부디 겸손하라
  3. 2012.07.10 눈물의 자녀 2




2013-02-03 목양칼럼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은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평생을 통해 그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선언했던 것입니다. (수 24:15)

자녀에게 부와 명예를 물려주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나의 하나님이 자녀에게, 또한 자녀의 하나님이 손자에게 이어지게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신앙의 유산이야말로 신자에게 가장 복된 유산이며, 가장 큰 명예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가 경박하여 신앙을 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목사가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이제는 그것을 교단에서 금지하는 법을 만든다고 합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희한한 교회법입니다.

과연 목회자의 일이 고되고, 가난하고, 욕되어서 ‘십자가의 길’이라면 그것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 할까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누리고 살 만 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평생 떠나지 않으려는 것이고 심지어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짓이야말로 바보 같은 짓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건물은 물려줄 수 있으나 참된 신앙은 물려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교회를 자신의 소유로 착각하는 순간, 그의 사역이 병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녀들의 신앙도 망치게 됩니다. 더 많은 것을 물려줄수록, 더 화려한 것을 물려줄수록 당연히 그러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사무엘은 어린 시절에 성전에 바쳐져서 엘리 제사장의 손에 컸습니다. 또한 세례요한은 어린 시절에 광야에 나가 약대 털옷과 메뚜기, 석청을 먹으며 자랐습니다.

부모의 따뜻한 품에서 한없이 안락한 삶을 누린 자녀 중에서 과연 하나님의 사람이 된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하여 주시는 고난을 부모의 인간적인 생각으로 감싸고 피하게 하는 일이 과연 그 자녀에게 좋은 일이 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는 자기 사랑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식을 타인으로 보지 않고, 나의 분신으로 여깁니다. 자식의 생김새가 나와 비슷하고, 그 성장의 모습이 자기의 젊은 시절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을 지혜롭게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랑이 지독한 이기심으로 나를 망치게 되는 것처럼, 자녀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자녀 사랑은 마땅히 절제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자식을 나의 꿈을 대신 이루어 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으로 키워야 합니다.

때문에 자식에 대한 나의 계획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순종하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들의 자녀사랑이 삐뚤어져 있는 것은, 결국 자기 사랑이 삐뚤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반드시 자녀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행사하고 그 장래를 망치게 됩니다. 알고 하든, 모르고 하든 그렇습니다.

Posted by makarios
, |

2012-05-13 목양칼럼

 

세상을 진화론적으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생명의 탄생은 신비 그 자체이다. 인간이 가진 모든 지식과 능력을 쏟아 부어도 생명 자체를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생명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해의 밖, 미지(未知)의 저기에 있다.

작은 미생물, 아주 원시적이라고 하는 생물조차 그러하다. 하물며 인간의 탄생이야 말해 무엇하랴!

엄마의 몸을 빌어 아기가 자라고 열 달의 성장 후에 태어나는 것은 감동적이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아기가 눈을 뜨고, 소리를 내고, 기고, 걷고, 뛰고, 배우고...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더 감동적이다. 마침내 어느 날, 문득 보았을 때에 부모의 얼굴과 표정, 그리고 습관을 똑같이 반복하는 아이를 보는 것은 감동을 지나 소름 끼치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의 유전자는 초파리의 그것과 거의 비슷하다. 과학자들은 어떻게 이렇게 적은 수의 유전자 속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유전적 정보들이 담겨 이동하는지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다. 고작 유전자의 모형(이것도 이론에 불과하다)을 만들어놓고 마치 ‘생명’에 대하여 완전히 정복한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는 꼴이라니, 인간이란 정말 어리석고 유치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는 우화가 있다. 날마다 하나씩의 황금알을 낳아주는 거위가 있었다. 농부는 빨리 부자가 되고 싶어서 어느날 그 거위의 배를 가른다. 그러나 농부가 발견한 것은 내장 뿐이었다. 어떻게 거위가 흔한 사료를 먹고 그것을 ‘황금’으로 바꾸는지 오리무중이다.

이 우화의 결말이 슬픈 것은, 황금알을 더이상 볼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하여 정당한 대답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간단한 말로, 연금술의 비법이 날아간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황금은 작고 지식은 크다.

<위키트리>라는 웹백과사전이 있다. 생겨난지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백과사전의 대명사였던 브리태이커를 추월했다. 지금도 끝없이 확장되고 있는 이 사전은 인류의 지식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늘어가고 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지구, 우주, 인체, 바다, 미생물, 바이러스에 대한 지식은 최근 50년의 과업이 과거 모든 역사의 결과물보다 훨씬 많다. 종이에서 탈출한 디지털 문명으로 인하여 온갖 지식이 정리되고 저장되고 있으며, 순식간에 전세계에 공유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제 거위와 황금알을 앞에 두고 고민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알고 싶은 것은 많은데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수준에서 생명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저 거위의 배를 지금 가를 것인가? 과연 배를 가르면, 거기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일을 통해 가치 있는 것을 찾아낼 정도의 지식을 충분하게 준비했을까? 확신이 없다. 그래서 쉽게 뛰어들지 못하는 영역이 점점 더 늘어가고 있다.

교만하지 말라. 당신이 어느 대학을 나왔든지간에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의 광대함에 비하면 지극히 보잘 것 없으며, 심지어 대부분은 가설이거나 틀린 오답일 뿐이다. 그러니 당신이 내리는 판단도 지극히 주관적이고 오류 투성이다. 마치 그것을 진리인양 떠들고 처신한다면, 언젠가는 크게 망신을 당하거나 낭패를 보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니 다시 말하거니와, 겸손하라. 어린 아이와 풀 한 포기 앞에서, 당신의 무지를 깨우치라, 부디...

 


'목회 > 목양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련하고 고집 센 사람과 싸운 죄  (0) 2012.07.10
정조의 활쏘기  (0) 2012.07.10
눈물의 자녀  (2) 2012.07.10
카타코리  (0) 2012.07.10
벚나무야 부럽다  (0) 2012.07.10
Posted by makarios
, |

눈물의 자녀

목회/목양칼럼 / 2012. 7. 10. 20:19

2012-05-06 목양칼럼

 

눈물의 자녀는 망하는 법이 없다!

이 격언은 암브로시우스가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에게 한 말입니다. 당시 어거스틴은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져 있었죠.

모니카는 영적인 거장이었던 암브로시우스를 찾아가 자기 아들을 만나 줄 것을 간청했지만 결과적으로 어거스틴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실망을 위로하며 암브로시우스가 예언처럼 했던 말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간과하는 두 가지 요점이 있습니다.

첫째, 모니카는 아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아들을 강제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탕자의 비유에도 나타나는 원리입니다. 잘못된 길을 가지 말라고 눈물로 권할 수는 있지만, 어떤 선택도 강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는 순간, 자녀의 자유와 존엄을 부모가 침해하게 되니까요.

둘째, 눈물의 자녀가 항상 형통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여서 자녀의 인생에 아픔과 문제가 모두 빗겨나기를 바란다면, 그것이야말로 미신입니다.

자녀는 자녀의 몫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생에 각기 자기의 길을 주셨습니다. 그 길을 통해 우리는 지혜를 배우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눈물의 자녀'라는 말이 이미 애달픈 사연을 담고 있음에도, 사람들이 '망하는 법이 없다'라는 결론에만 집착한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 합니다. 항상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이 우리의 취향인가 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깨달으니, 자녀를 옳게 사랑하는 것이 참 힘듭니다. 부모가 계속 자라가야 하는 것 같습니다. 부모가 자라지 못하면, 미숙한 사랑을 주게 되고, 그것은 마치 덜 삭은 젖처럼 자녀로 탈이 나게 합니다.

그래서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 만큼이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결국 자신이 바로 서야, 자녀에게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으니까요… 샬롬~

 

'목회 > 목양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조의 활쏘기  (0) 2012.07.10
부디 겸손하라  (0) 2012.07.10
카타코리  (0) 2012.07.10
벚나무야 부럽다  (0) 2012.07.10
부활, 그리고 봄  (0) 2012.07.10
Posted by makario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