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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0.11 백부장의 이만한 믿음
  2. 2013.02.23 소망에 이르는 길
  3. 2012.12.10 지혜의 기쁨
  4. 2012.10.07 믿음은 현재입니다.
  5. 2012.09.23 자기를 점검하라.
  6. 2012.07.10 하나님의 음성을 듣다

 

 

마태복음 8:5~13

(8: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8: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8: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8: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8: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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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3 목양칼럼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합니다. 과연 내가 구원 받았을까? 나는 얼마나 좋은 그리스도인일까?
이런 질문이 나의 신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질문을 통해 나는 나의 영적인 건강을 체크하게 되고, 내 인생의 방향에 대하여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 빠진 동그라미 이야기가 있습니다. 완전한 원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이 동그라미는 아주 어려운 여행을 통해 마침내 자기의 빈 부분을 완전하게 채워줄 조각을 찾아냅니다. 그러나 그토록 원했던 완전한 동그라미가 되었을 때에 오히려 그는 행복을 잃습니다. 그 부족함이 사실은 동그라미에게 유익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었지만, 정작 자신의 질병에서는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이 일에 대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을 때에, 하나님은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약함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강함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내용의 말씀을 늘 묵상하고 찬양으로도 부릅니다. 설교로도 듣습니다. 그러나 정작 삶에서 이런 원리를 자신에게 적용하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는 질병이 없어야 합니다. 가난이 물러가야 합니다. 실패는 허용될 수 없습니다. 의심이란 불쾌한 무엇입니다. 승리와 형통만이 신앙의 정답입니다. 긍정으로, 긍정으로 신앙을 포장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사실은 욕심입니다. 

신앙적인 소망은 바울의 경우를 통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것은 간절히 바라기는 하지만, 그것이 거절된다고 하여서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불평, 원망, 의심, 분노와 같은 감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순종과 평안과 감사가 거절에도 불구하고 우러납니다. 소망은 본래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그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은 다릅니다. 욕심은 거절을 견디지 못합니다. 욕심은 항상 그 중심이 자기이기 때문에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는 우주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욕심은 바라는 것을 향해 진격할 뿐 그 어떤 타협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부족하기 때문에 유익한 것이 많습니다. 물질도 그러하고, 인격도 그러하고, 심지어 믿음도 그러합니다.
믿음이 크면 좋을 것 같지만, 그 커다란 믿음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조롱하는 교만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거절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이, 사실은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하시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욕심에서 벗어나 소망을 얻는 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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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기쁨

목회/설교 / 2012. 12. 10. 01:03


제목 : 지혜의 기쁨

성경 : 잠언 8:18~31


8:18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공의도 그러하니라  
8:19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순은보다 나으니라  
8:20 나는 정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의로운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8:21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가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  
8: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8:23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8: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8:25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8: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8: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8: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8: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8: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8: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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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7 목양칼럼

 

신앙은 언제나 현재의 문제입니다. 과거의 영광을 자랑하는 것도, 미래의 할 일을 미리 예단하는 것도 믿음의 실체가 될 수 없습니다. 자존감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겉을 화려하게 하고 허명(虛名)에 의존하는 것처럼, 믿음도 현재가 부실할 때에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에 거창한 일을 하겠다고 떠들어댑니다. 하지만 현재를 바꾸지 못하는 신앙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믿음을 당장 실행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환경과 능력을 핑계합니다. 그러나 정작 환경과 능력이 충분해서 믿음을 실행하는 일은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가 처한 세상은 우리의 믿음에 반대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일에 있어 우리의 능력은 보잘것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역경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결정하고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입니다. 때문에 믿음을 가로 막는 정확한 원인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믿음과 싸우는 또 다른 나의 실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믿음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좇는 과정 자체가 우리를 시험합니다. 믿음을 선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처하는 일은 흔한 일입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심하는 것은 믿음의 길에서 실패하는 것이며, 우리가 본래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선한 의도만이 아니라 믿음을 빙자하여 쉽게 성공하려는 잘못된 의도도 가졌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이런 마음들은 믿음에 있어 불순물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향을 제거하신 후에야 믿음의 열매를 풍성하게 주십니다.

항상, 현재를 전부라고 여기십시오. 사도 바울과 같이 이미 지난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지금 최선을 다하십시오. 환경의 지배를 받지 말고, 마음을 확정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전력을 기울이십시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심은 자는 반드시 그 열매를 기쁨으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교회를 섬긴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이 믿음의 도리를 잡지 못하고 마음이 갈팡질팡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과연 나중이 어떻게 되는가 두고 보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이렇게 관중(觀衆)의 입장으로 교회와 신앙을 방치하는 동안, 세월은 흐르고 인생의 황금 같은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중’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인생의 끝이 더 빠르기 때문입니다.

왜 모르십니까? 오늘이 믿음을 실천해야 하는 날이며, 하나님께 충성을 바쳐야 하는 기회라는 것을 말입니다. 세상의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의 헌신을 드리는 지금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에게는 다른 바램이 없습니다. 목사로서 한 가지, 바로 여러분이 지금 최선을 다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원합니다. 단 하루라도, 단 한 주라도 그렇게 하나님을 같이 섬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것만이 나의 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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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3 목양칼럼

 

신앙과 삶을 구분하여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진정한 믿음은 살아가는 것과 일치한다. 믿음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의 전부이다.

살아가는 것과 믿는 것을 구분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위선’을 경험한다.

위선은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악(惡)이다. 아무리 열렬한 종교행위를 하더라도 위선을 품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다.

한 청년이 잠시 컴퓨터를 내게 맡겼다. 컴퓨터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몇 가지 업데이트를 하기 위해서였다. 가난한 목사가 뭔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그런데 작업을 하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낯선 이름의 폴더에 포르노가 잔뜩 들어 있었다.

서른이 훌쩍 넘은 청년이었다. 사적인 영역이기에 모른 척 하고 넘어갈까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 청년은 중요한 고민을 앞에 두고 하나님 앞에 작정기도를 하는 중이었다. 매일 시간을 정하여 기도를 하고, 그 사실을 목사인 내게 알려서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중이었다.

갈등이 일어났다. 민망한 이 사실을 그냥 지나갈 것인지, 아니면 목사로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 충고할 것인지 며칠을 고민했다.

그리고는 청년을 교회로 불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했다. 얼굴이 붉어졌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다음에 우리는 ‘응답 받는 기도’에 대하여 더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청년은 자기를 인정하고 기도생활을 위해 잘못된 습관을 고치기로 결심했다.

사람은 잘못을 한다. 그것이 실수이든, 고의이든 잘못을 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완벽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그런 잘못으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의미한다. 삶을 리셋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잘못을 품고서 하나님과 대화하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더 열렬한 종교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설득하거나 강제하려는 경향까지 나타난다. 그러면서 삶과 믿음이 분열된다.

포르노가 문제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더 추악한 문제들도 많다. 이 문제들에 대하여 당연히 양심이 찔려야 한다. 나는 목사로서 여기에 대하여 위로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사람들이 다 그렇다거나, 그 정도는 가볍다는 식의 위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위로를 계속하는 동안, 영혼은 파선하고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진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 동안 아파야 한다. 믿음이 동맥경화처럼 막혀서 지배하지 못하던 삶의 영역들에 믿음이 들어가 지배하려면 눈물은 필수이다. 찔리고 아프고 고민할수록 영혼은 힘을 얻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개선된다.

위기는 이런 역동적인 작용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신앙생활이다. 그것은 겉으로 평온해 보이지만, 실상은 죽은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을 살면서도 전혀 이질감 없이 종교행위를 할 수 있다면, 심지어 사람에게 보이려고 더 열렬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영혼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부디 이런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혹시 있다면 빨리 자기를 점검하라. 병이 깊어지면 약도 소용이 없는 때가 온다. 희망은 기회가 있을 때에 붙잡아야 자기의 것이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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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6 :: 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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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받는 질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라는 대답이 일반적이지만, 그럼에도 충분하지는 않다.

성경을 읽다가 어느 부분에서 자기에게 주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구절을 찾았다고 하자. 과연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자기의 욕망이 투영된 것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도하는 중에 마음에 어떤 감동이 일어났다고 하여서 그것이 하나님이 응답으로 주신 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마음이 너무나 간절히 원한 나머지 스스로 지어낸 것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들은 나름 확신을 가지고 어떤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정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것이라고 다시 확정한다. 그러면 이제 혼란과 불안만이 남는다. 다시 또 하나님의 대답이 필요한 경우 앞에 서게 되었을 때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무언가를 하기는 해야 하겠는데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기 때문이다. 들판에서 길을 잃은 양처럼,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면서도 마음이 결코 편안하지 못한 신자들이 의외로 많다. 당신의 경우는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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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한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확실한 방법 따위는 세상에 없다. 마치 자기가 하나님과 직통(直通)하고 있는 것처럼 신령함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거의가 무당 비슷한 존재들이다. 어쩌면 그들 역시 자기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완전히 담을 사람은 지금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과 소통의 방법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성경이 이미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죄의 담이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를 가로 막는데, 그것은 기도 조금 하고 성경 얼마를 안다고 하여서 해결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새롭고 산 길을 여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길에 들어선 자이지, 그 길을 완주한 자가 아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지금은 청동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지만, 그 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처럼 명백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즉, 장차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명백하게 듣고 이해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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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을 확실하게 한다고 하여서, 지레 포기하거나 겁 먹을 필요는 없다.

하나님을 마치 자기의 전유물인 것처럼 자기에게 오면, 혹은 자기의 방법을 따르면 언제나 확실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자칭 예수인 사람들의 확신을 부정하는 것이지 다른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면, 제일 중요한 것은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이다.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 그분이 말씀 하실 수도 있고, 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 다만 모든 경우에 있어 하나님은 선하시며 옳으시다. 말씀을 하실 때에도 이유가 있고, 하지 않으실 때에도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잘 설명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왕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는 끝이 없어서, 사실 소상하게 설명해 주신다고 하여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필요한 경우에는 반드시 말씀 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을 가진다면, 또한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다. 

문제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들리지 않을 때에는 들리지 않는 대로 최선을 다하면 족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뭔가를 말씀하실 때에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이 글을 쓰는 요점을 말해야 하겠다. 성경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것은 유익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통해,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나 상황, 자연, 생각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하신다. 그렇지만 기도와 말씀은 가장 확실한 통로이며, 가장 효율성이 높은 방법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우리와 만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신약의 신자들이 지성소와 법궤를 가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릎을 꿇어 기도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묵상 하는 것은 지성소와 법궤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방법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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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붙는다. 성경을 잘 읽어보면, 그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음성을 듣는, 기도와 성경묵상의 방법이 따로 있는가? 있다. 가장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다. 이 조건은 우리가 제일 약한 취약점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것을 극복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인내’ 혹은 ‘성실함’이다. 나는 두 단어를 같은 내용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성실함을 지키되 끝까지 지키는 것이 바로 인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은가?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음성임을 확신하고 그것을 따라 살아보는 결단을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성경과 기도를 붙들어야 하는데, 성실하게 해야 하고, 인내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해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응답이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다. 나는 이 인스턴트적 사고가 신앙적 혼돈의 가장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신앙의 초보에 있어, 이런 식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절박한 필요, 혹은 절박한 상황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간청하게 되는 경험 말이다.

마치 한밤에 떡을 빌리러 이웃집의 문을 크게 두드리며 잠을 깨우는 것과 같이, 우리는 염치 불구하고 도움을 청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이런 방법이 습관이 된다면 어떨까?

한 번 그런 경험을 했다면, 다음에는 미리 떡을 준비하는 각성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혹시 빌린다고 하더라도 좀 더 일찍, 잠자리를 방해하지 않도록 배려하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 아니겠는가.

급박한 기도를 통해 응답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경험했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은혜를 받은 자로서 변해야 한다. 그것은 다른 변화가 아니다. 성실한 기도생활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성경 속에서 답을 찾았다면, 이제는 다윗처럼 성경의 말씀을 송이꿀처럼 여기고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다시 성경을 덮어버리고 기도는 멈춘 채 자기 맘대로 살다가, 어떤 위기와 답답한 상황을 만나서야 다시 그것을 찾는다면, 이는 불신앙의 사람들이 문제 앞에서 점(占)집을 찾아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그분이 우리 안에 우리가 그 분 안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답을 안 하실 때에조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마치 오래 살아온 가족이 서로의 의도를 그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굳이 어떤 음성이 들리지 않아도 그냥 아는 것이다.

느헤미야서를 읽어 보았는가? 신기한 것은, 거기에는 기적도 없고 응답도 없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음성이 느헤미야에게 전달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래서 느헤미야의 기도는 혼자 하는 넋두리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탄식하는 그 모든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신비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현실 속에서 함께 하셨다. 돕는 사람들을 붙이시고, 때로는 대적의 실수와 결정을 통해서도 느헤미야의 길을 도우셨다.

하나님의 뜻을 꼭 말로 해야 알 수 있다면, 느헤미야서는 성경에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차원보다 더 깊은 신앙의 차원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차원 말이다. 그것이면 족하다. 그러면 말씀을 해주실 때에도, 말씀을 안 하실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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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유’에 대하여 늘 감사한다. ‘예정’이라는 교리를 믿거니와 그 예정이 하나님의 깊은 지혜의 일부라는 사실을 믿는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내게 어떤 선택을 강요하는 분이 아니다.

이렇게 해야만 하고 저렇게 하는 것은 절대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독선적 리더십의 횡포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나는 이런 횡포가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음성’을 가장하고 있는 것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우리가 설사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그것을 결국에는 의도하신 방향으로 이끌어 가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에 있다. 마치 요나의 경우처럼 말이다. 요나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도망했지만, 다윗의 시편과 같이 그는 결코 한 시도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예정을 가장 절묘하게 보여주는 성경의 예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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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선택은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선택은 결국 우리의 실존을 드러내는 기회일 뿐이다.

우리가 얼마나 신앙이 깊어졌고 지혜가 늘었으며 자신에 대하여 이해를 가지게 되었는지 매번의 선택을 통하여 드러난다. 그러나 그 선택이 우리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선택을 통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선택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나타낼 뿐이다. 인생은 결국 전능자의 손에 있다.

먼 길을 돌아서 가든, 아니면 직선으로 가든... 인생은 그분의 지혜가 예정한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빨리 응답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충분하게 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주하도록 만들고, 그것을 지속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신앙의 내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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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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