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순수한 죄인들을 필요로 한다
아가씨와 건달들.
1920년대 미국의 뉴욕을 배경으로 뒷골목에서 도박으로 살아가는 건달들과 그들의 아가씨들의 러브 스토리를 그린 브로드웨이 뮤지컬.
이 이야기 속에는 사라라는 구세군 아가씨가 등장한다. 그녀의 선교회는 '실적'이 없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한다. 그 때에 스카이 매스터슨이라는 도박의 귀재(?)가 그녀에게 접근하여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와 함께 그날 밤에 하바나(쿠바)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하면 다음 날까지 '순수한 죄인들' 12명을 그녀의 선교회에 제공 하겠다는 제안이다. 물론 스카이는 이 저녁 식사에 이미 그의 친구, 나싼과 1,000달러의 내기를 걸어놓은 상태였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유쾌함으로 이야기는 인간적이고 모두 행복하게 끝이 난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그러할까? 구령의 열정으로 무장한 구세군 아가씨 사라와 도박사 스카이의 사랑은, 현실에서는 대단히 희귀한 경우임에 틀림없다. 사실, 평범하다면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소재가 되지도 못하겠지.
사랑은 순수하다. 그러나 사랑을 하는 사람이 순수하지 못할 때에, 사랑은 대단히 위험한 흉기가 될 수 있다. 그 순수함에 빠져 그야말로 '순수한 죄인들'을 구령의 열정만으로 끌어 안으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모험이 아닐 수 없다.
결혼을 앞둔 청년들에게 권한다. 비둘기처럼 순수해야 하지만, 또한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세상을, 특히 사람을 만만하게 여기지 말라. 사람이 내 맘대로 되었으면 고생할 부모가 없을 것이다. 배 아파서 낳은 부모도 맘대로 하지 못하는 자녀를, 나는 애인이기 때문에 맘대로 요리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은 다소 어리석어 보인다. 사랑을 포기하라는 절대 명령은 아니지만, 좀 더 신중하고 사려 깊을 필요가 있겠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순수한 죄인들'에 대한 관심을 더욱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사라 같은 여린 아가씨가 품고 책임져야 할 사명이 아니라, 사실은 교회 공동체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관심과 역량을 집중해야 할 문제이다.
교회는 본래 누가 보아도 죄인인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왔다. 술 주정뱅이, 노름꾼, 아내를 때리는 폭력남편, 빚쟁이, 좀도둑, 창녀, 노숙자... 누가 보아도 재생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어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을 때에 그들 자신이 교회의 역동적인 힘의 바탕이 되었으며, 사회가 놀라고 경외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교회와 교회의 수평 이동만을 염려할 상태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교회가 '순수한 죄인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교회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길들여졌으며, 마치 인스턴트 식품만 먹다가 이빨이 빠진 맹수처럼 구령의 열정으로 도전하고 싸우는 치열한 영적 상황을 잃게 되었다.
더 이상 예배 중에 뛰어들어 아내를 끌고 가는 남편도, 며느리를 욕하는 시어머니도, 술 취한 알코올 중독자도, 사기를 치러 오는 허름한 사기꾼도 없다. 왜냐하면 교회가 이런 사람들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지금 교회의 신자들은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구령의 열정을 느끼는 '사라' 같은 구세군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자기들만의 교회에서 안전하게 예배하고 싶을 뿐이다.
교회는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 본질적인 바탕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그야말로 아가씨와 건달들에 나오는 묘사처럼, 고객이 없어 폐점해야 하는 지점일지 모른다.
상상해보라. 주방장에 서빙, 지배인까지 수 십 명이 북적거리는 레스토랑에 고객이 달랑 하나, 둘 뿐이라면... 그 레스토랑은 곧 문 닫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교회가 직분자를 세우고 교인들을 훈련하는 것은, 자기들끼리 잘난 척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구령의 열정으로 부족한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라는 뜻이다.
교회의 대표적인 직분을 처음부터 '집사(디아코노스)'라고 불렀던 것을 살핀다면 이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그 말의 의미가 머리에 수건을 쓰다, 식사에 수종을 들다는 뜻이 아니던가? 그것은 목사를 섬기라는 뜻이 아니다. 제발 오해하지 말라.
말씀도 그러하다. 죄인과 분리된 교회의 강단은, 야성(野性)이 없다.
당연하다. 별로 죄를 짓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모셔두고 어떻게 신랄한 죄에 대한 설교를 계속할 수 있겠는가?
교회가 죄에 대한 날 선 말씀을 계속 듣고 회심을 일으키기 위해서도 '순수한 죄인들'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 부대낌과 불편함을 영적 전쟁으로 승화시키고, 말씀과 기도로 싸워 나가는 교회야말로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 비율이 70:30이라고 생각한다. 80:20이면 좀 안정적이고, 60:40이면 좀 위태스럽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말을 일삼는, 혹은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30% 수준이라면, 교회는 건강한 것이다.
때문에 그 문제되는 사람들을 해결하고 100%의 교회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비율의 건강한 유지를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목회자에게도, 성도들에게 바른 인식이 필요한 일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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