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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결한 여신 그 이름 마리아.
Maria Callas. 1923.12.2~1977.9.16
그리스어 풀네임은 '마리아 안나 소피아 카이킬리아 칼로게로풀루. 하지만 예명으로 축약한 이 항목의 이름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클래식 오페라의 소프라노 가수들 중 그야말로 왕본좌 누님.
개인으로서의 카리스마, 예술적 성취, 화려함과 비극이 뒤엉켜 이야기 거리가 풍부한 개인사, 그리고 세대에 걸친 거대 팬덤을 모두 갖춘 전설적 아이콘. 20세기들 대표하는 소프라노

 유년기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 있는 한 병원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그리스 이민자 부부였던 조지 칼로게로풀로스와 에반젤리아 디미트리아두였는데, 불행히도 부부 관계는 꽤 막장이었다. 가족에 별 관심이 없었고 매사에 의욕이 없던 아버지와 아이들의 장래에 지나치게 간섭하고자 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자식들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는데, 칼라스의 경우 세 살때부터 노래에 재능이 있다고 여긴 에반젤리아의 강요 때문에 성악을 비롯한 음악 공부를 억지로 해야 했다.
실제로 칼라스의 노래 실력은 또래 아이들과 비교해도 꽤 괜찮은 편이었고, 뉴욕에서 열린 어린이 노래 경연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칼라스는 훗날 이 시절을 보람없고 지긋지긋한 고생의 나날이라고 부정적으로 회고했다. 게다가 아이들에게 성악 공부시키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던 조지도 시도때도 없이 부부싸움을 일으켰고, 결국 1937년에 에반젤리아가 두 딸을 데리고 그리스로 귀국하면서 별거에 들어갔다.

그리스 시절 
하지만 그리스에서는 그 동안 휘둘리고 살았던 딸들이 어머니와 자주 다투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내켜하지 않는 칼라스를 데리고 아테네 음악원에 입학 원서를 내 오디션을 보게 했다. 하지만 기초 성악 기교가 전무하다는 이유로 곧장 퇴짜맞았고, 이어 그리스 국립 음악원에서 두 번째로 오디션을 봤다. 오디션을 주관했던 성악 교수 마리아 트리벨라도 아직 다듬어지지 않아 거칠다고 인정하면서도, 가능성을 훨씬 높게 점쳐 입학 자격을 인정했다.

음악원에 입학한 칼라스는 트리벨라의 문하생이 되었는데, 트리벨라는 다소 어두운 목소리의 질감 때문에 종종 알토 음역이 적합하다는 주위의 평과 반대로, 소프라노 음역으로 테시투라(해당 성역의 가수에게 자주 요구되는 음역대를 일컫는 단어 )를 높이는데 중점을 두고 훈련시켰다. 칼라스는 이 과정에서 서양 성악의 기본 창법인 벨 칸토를 상당 수준까지 터득했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단히 서툴게 불렀던 어려운 오페라 아리아들도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또 어머니의 치맛바람이 불어닥쳤는데, 1938년에 공식 데뷰 무대에 출연한 직후 전에 뻰찌먹인 아테네 음악원으로 편입시킨다며 딸을 다시 데려가 오디션을 보게 했다. 이번에 오디션을 주관한 교수는 스페인 출신의 엘비라 데 이달고였는데, 교육 활동에 전념하기 전까지는 매우 뛰어난 기교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가수였다.

이달고는 칼라스의 목소리가 매우 열정적이고 극적이라고 긍정적인 평을 내렸고, 노래가 끝나자마자 합격 판정을 내렸다. 다만 즉시 입학하지는 못했고, 일단 아테네 국립음악원을 졸업하면 입학시켜달라는 어머니의 요구 때문에 1년 유예되었다. 아테네 음악원 입학 직전이었던 1939년 4월 2일에는 국립음악원 학생들이 제작한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공연에 산투차 역으로 출연해 오페라 무대에도 데뷰했다.

같은 해 가을에 아테네 음악원에서 두 번째 성악 전공을 시작했는데, 물론 지도 교수는 오디션 때 만났던 이달고였다. 이달고는 칼라스의 기교가 매우 출중하고 표현력도 훌륭하지만, 고음역이 약간 모자란다는 판단으로 자신의 콜로라투라 창법을 집중적으로 전수해 주었다. 국립음악원 시절에도 그랬지만, 칼라스는 제일 먼저 등교해 제일 늦게 하교하는 일이 예사였고 다른 교수들의 수업도 빠짐없이 청강하는 등 독종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칼라스, 무서운 아이...

아테네 음악원에서 졸업할 때가 되자 이달고는 칼라스에게 그리스 국립오페라단 비상근 단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줄을 대주었는데, 아직 젖뉴비였던 10대의 나이에 오페라 무대에서 심각한 핸디캡이었던 고도근시까지 있었음에도 별 무리없이 무대 연기를 소화해내며 다른 단원들을 데꿀멍 시켰다. 상근 단원 자격을 얻어 처음 맡은 주역은 1942년 8월에 공연된 푸치니의 토스카 타이틀 롤이었고, 이어 그리스에서는 초연이었던 오이겐 달베르의 '저지(낮은 땅)'에서도 여주인공 마르타로 출연해 호평을 받았다.

1944년 여름에는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에서도 타이틀 롤로 열연했는데, 독일 비평가였던 프리드리히 헤어초크가 극찬했을 정도로 명연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추축국 측의 좋은 평가가 그리스 해방 후에는 오히려 악재로 작용했는데, 해방 직후 이어진 내전 상황 속에서 칼라스는 독일 협력자로 간주되어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이달고는 이탈리아로 옮겨가 활동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는데, 칼라스는 오랫동안 못보았던 아버지도 다시 만나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활동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다시 미국에 돌아갔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본 오디션은 그리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매우 긍정적인 평을 얻으며 피델리오와 나비부인 역을 제안 받지만, 칼라스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 피델리오를 영어로 공연하는 것도 1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몸매로 나비부인을 연기하는 것도 모두 탐탁치 않았다는 것. 이후 에디 바가로지가 기획한 투란토트 공연에 주역으로 캐스팅 되기도하지만, 시작도 하기전에 프로덕션이 도산하는 바람에...(이때 깊게 생각않고 싸인한 계약서의 전속 조항 때문에 나중에 소송에 휘말린다. 시카고에서 나비부인 무대 뒤에서 벌어지는 촌극의 씨앗이 바로 이 계약이다.) 하지만 바로 이 투란도트 준비 중에 바리톤 니콜라 로시-레메니를 만나고, 바로 그가 베로나 오페라 축제에 올릴 '라 조콘다'의 주연으로 그녀를 추천하게 된다.

이탈리아 활동기 
그렇게 칼라스는 1946년 이탈리아로 향했고,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 지휘계의 본좌였던 툴리오 세라핀을 만났다. 칼라스를 만났을 때 세라핀은 막 베로나의 로마 시대 원형 경기장에서 야외 오페라 상연을 위해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를 준비 중이었고, 칼라스는 리허설 중 다친 다리에 깁스를 감고도 펼친 열연으로 성공적인 이탈리아 데뷔를 마친다. 이후에도 칼라스는 세라핀과 여러 오페라에 같이 출연하면서 경험과 명성을 동시에 얻기 시작했고,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라는 사업가를 만나 결혼하기도 했다. 참고로 메네기니는 칼라스의 아버지와 동갑이었다(...).

1948년에는 베네치아의 페니체 극장에서 오페라 역사상 전설로 남을 만한 진기한 더블 캐스팅 공연을 했는데, 원래 극장과 맺은 계약은 바그너의 '발퀴레'에서 브륀힐데 역으로 공연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병행 상연 예정이었던 벨리니의 '청교도'에서 엘비라 역을 맡을 예정이었던 가수가 병으로 불참하는 바람에, 이 역까지 맡아 노래했다. 완전히 다른 성격의 음악과 창법, 연기를 막힘없이 소화해내는 이 가수에게 청중들은 그야말로 뿅가죽네 상태가 되었다. 유명한 오페라 연출가 프랑코 제피렐리도 이 때의 공연을 보고 경악했는데, 훗날 '어떤 소프라노 가수가 어제는 묵직한 독일 오페라를 공연하고, 오늘은 벨 칸토 이탈리아 오페라를 공연한다고 상상해 봤습니까?'라고 회고했다. 이 일이 더욱 대단한 것은, 칼라스가 '청교도'를 단 일주일 만에, 그것도 발퀴레를 계속 공연해가며 짬짬이 익혀 공연했다는 점이다.

다만 이 때의 경험은 이후 경력을 봐도 상당히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경우였고, 이후 칼라스의 주요 레퍼토리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오페라 위주로 확립되게 되었다. 1951년 12월에는 오페라 가수들의 환상향이상향이자 가장 가혹한 비평 무대로 손꼽히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에서 베르디의 '시칠리아의 저녁 기도'로 데뷰했고, 곧 이 극장의 레귤러 가수가 되었다. 동시에 HMV(이후 EMI)의 명 프로듀서였던 월터 레그에게도 발탁되었고, 본격적인 오페라 전곡 녹음도 시작했다.

세계 무대 
칼라스가 이탈리아에서 연이어 거둔 성공은 다른 나라들의 오페라극장과 오페라단에도 신속하게 전해졌는데, 1952년에는 영국의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극장에서 벨리니의 '노르마' 타이틀 롤로 데뷰해 절찬을 받았다. 이후 베르디의 '아이다'를 비롯한 다른 작품들에서도 주역으로 계속 출연했고, 마지막 오페라 무대도 이 극장에서 치렀다.

하지만 계속되는 호평에도 불구하고 칼라스는 자신의 뚱뚱한 몸에 대한 열폭 때문에 고민했는데, 결국 1953년 봄부터 다이어트에 들어갔다. 비록 남편인 메네기니나 그의 팬들은 칼라스의 몸집에 훨씬 관대했지만, 노래 뿐 아니라 연기하는 배역과 일체화되기 위해서는 더 날씬한 몸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행한 감량이었다. 1954년 초까지 약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칼라스가 뺀 살은 무려 36킬로그램이었고, 그야말로 하루 아침에 '북경오리에서 백조로 환골탈태한' 몸매를 얻게 되었다. (이 다이어트에 대해서 기생충, 그러니까 회충을 먹어서 뺐다는 루머도 있었다. 가능은 하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1954년에는 시카고의 리릭 오페라단에서 첫 미국 공연을 성황리에 마쳐서, 1940년대에 아무 곳에서도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방황했던 미국 생활의 굴욕을 제대로 설욕했다. 그러나 이 오페라 공연 뒤 갑자기 사복경찰들이 대기실에 찾아왔는데, 미국 공연기획자인 에디 바가로지가 칼라스를 계약 위반으로 고소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고소 소식을 듣고 칼라스가 완전히 꼭지가 돌아서 고성과 욕설을 퍼붓는 모습이 기자들의 카메라에 찍혔는데, 완전히 뒤틀린 표정의 칼라스와 오히려 그 기세에 눌려 두려워하는 사복경찰의 모습은 그야말로 짤방 감이 되었다. 이 사진은 이후에도 칼라스 스캔들 관련 기사에 종종 등장하며 '성질 더러운 프리마돈나'라는 이미지 형성에 한몫 했다.

1956년에 역시 노르마 역으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처음 출연했을 때도 스캔들이 일어났는데, 타임 지에서 칼라스와 라이벌이었던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 사이의 관계나 어머니와의 불화 등을 상당 부분 왜곡하고 부풀려 게재한 기사를 실은 것이 화근이었다. 이전에도 아예 없지는 않았다지만, 칼라스에 대한 언론의 설레발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죽기 직전까지도 온갖 선정적인 기사와 그로 인한 소송드립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락세, 불륜과 만년 
하지만 칼라스도 신은 아니었고, 빡빡한 공연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목을 혹사하다 보니 예정했던 일정을 취소하는 사례가 늘기 시작했다. 1958년 1월에 로마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했던 노르마 역은 그야말로 흑역사였는데, 공연 직전에 목이 부어오를 정도로 상태가 안좋아 의사나 매니저가 출연 취소를 간청했음에도 '누구도 칼라스를 대신할 수 없다'면서 억지로 무대에 올랐다가 1막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버로우했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 날 공연이 이탈리아 대통령 등 정계 고위층들이 임석한 중요한 이벤트였던 터라, 공연을 망친 칼라스에 대한 비난 여론이 대단히 빠르게 확산되었다. 당시 제작된 뉴스 필름의 아나운서 멘트도 비꼬는 투가 다분했을 정도.( 칼라스의 노랫소리를 듣고 싶다면 공연보다는 리허설 때 오시는게 나을 겁니다'라는 투였다.) 물론 여기에 가만히 있을 칼라스도 아니었고, 곧 극장과 언론사를 향해 분노의 고소장들을 날려버렸다.

사생활 쪽에서도 첫 남편이었던 메네기니와의 사이가 점차 틀어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1957년에 그리스의 선박왕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와 만나 눈이 맞으면서부터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었다. 칼라스와 오나시스가 비록 주변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면서 조용하게 관계를 가지려고 했다지만, 1959년에 결국 칼라스가 오나시스의 아이를 임신하는 단계까지 가게 되자 공개적으로 들통나고 말았다. 당연히 빡친 메네기니는 이혼 소송을 냈고, 칼라스는 불륜녀로 찍히고 말았다.

게다가 이듬해의 출산도 난산이었고, 결국 아이는 태어난지 몇 시간 만에 죽고 말았다. 칼라스와 오나시스 사이의 관계는 그 뒤로도 동거 형식으로 계속 이어졌지만, 그마저도 1968년에 오나시스가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미망인인 재클린 케네디에게 관심을 돌리면서 끝장나고 말았다.

외도와 그로 인해 빚어진 유산 후에는 다시 몸을 추스려 무대로 복귀했는데, 이미 목 상태도 예전같지 않아 거의 재활 훈련 급으로 강한 발성 연습을 거듭하며 컨디션을 유지해야 했다. 가사의 발음도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고, 다루는 작품도 노르마와 토스카, 케루비니의 '메데아' 정도로 극히 적어졌다. 결국 1965년 7월에 코벤트 가든에서 공연한 토스카를 마지막으로 은퇴 상태에 들어갔다.

1973년에는 자주 콤비를 이루어 공연했던 테너 가수인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세계 순회 투어를 개최했는데, 물론 둘 다 성악가로서의 생명은 사실상 끝난 상황이었고 평단의 여론도 매우 좋지 않았지만 원체 유명했던 이름값으로 매진 사례를 이어갔다. 투어의 마지막은 1974년에 한국과 일본에서 열린 공연으로 끝났다. 1976년에는 재차 컴백할 계획으로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에서 비밀리에 리허설을 했는데, 이 장면이 파파라치들에게 잡혔고 곧장 칼라스에 대한 비난 기사가 프랑스 언론들에 떴다. 물론 이 역시 고소크리.

마지막 컴백 계획이 무산된 뒤에는 파리의 아파트에 틀어박혀 거의 고립된 생활을 했고, 우울증과 불면증을 이겨내기 위해 처방전도 없이 온갖 약품들을 다량 복용하면서 건강도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이때 집에 틀어박혀서 젊은 시절 전성기 때의 음반을 듣고 홀로 흐뭇해하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고 한다. "그래...그땐 넌 참 잘했어."

그렇게 쓸쓸히 1977년 9월 16일 아침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그리스 정교 의식에 따라 진행된 장례 후 화장되어 페르 라셰즈 묘지의 납골당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유골함은 극성팬들에 의한 도난 시도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후견인이라고 자칭한 바소 데비치라는 여인이 칼라스 생전의 유언이라며 유골을 에게해에 뿌렸다. 하지만 여기에도 또 다른 뒷이야기가 있었으니...

3. 음악 성향 
칼라스는 각각 다른 음악적 성격과 작곡가별 스타일을 정확히 이해하는 지적인 가수였다. 1959년에 런던에서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녹음할 때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미숙한 영국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관악 단원들에게 벨리니와 도니체티의 스타일적 차이점, 각종 장식음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가르쳐 가며 녹음을 했을 정도였다. 요즘에는 성악가들도 다양한 음악 이론을 배우지만, 칼라스의 시대에는 성악가는 노래만 잘 하면 된다는 분위기였다 (무식하고 콧대만 높은 '디바'의 이미지는 그때문에 생겨났다).

이런 위대한 성악가의 목소리가 일반적인 미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건 기묘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 칼라스는 자신의 녹음을 처음 들었던 때를 회고하며 "내 못난 목소리에 너무 충격을 받아 눈이 빠지게 울었다"고 말했을 정도. 일반적으로 소프라노라면 연상되는 맑고 청량한 느낌대신, 칼라스는 음성은 기본적으로 무겁고 회색 베일에 싸인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칼라스는 적어도 전성기 때는 그런 타고난 음색을 빼어난 호흡 조절과 성악 기교로 필요에 따라 조절할 수 있었다. 그래서 노르마에서 표효하던 그 목소리로 몽유병의 여인에서 고음의 기교를 무리 없이 오르내리고 나비부인에서는 놀랄 만큼 순박한 소녀의 음성을 보여줄 수 있던 것. 그래서 어떤 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아름다웠다면 그런 폭 넓은 표현력을 위해 도전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다만 목소리의 전성기가 너무 일찍 지난 것이 흠으로 지적된다. 50년대 후반에 이르면 고음이 거칠어지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고, 60년대에 드러서면서는 총체적인 변질을 감출 수 없게 되었다. 목소리 변화의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은 결론이 없지만, 급격한 다이어트, 무리한 일정, 다난한 개인사에 따른 심리적 압박감이 함께 작용했으리란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4. 트리비아 

    칼라스는 지독한 근시였지만, 평소에 집에서 생활할 때를 빼고는 절대 안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여성성에 대해 보수적인 관점을 고수했던 그녀로서는 안경 쓴 여자는 매력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그래서 오페라 무대에서는 사실상 장님과 다를바 없었고 지휘자도 거의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매니저를 비롯한 공연 관계자들은 그녀가 행여 무대 밑의 오케스트라 피트에 빠질까 노심초사했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었고, 박자를 놓치는 경우도 없었다.
    칼라스가 케루비니의 메데아 역을 처음 불렀을 때 지휘자로 등장한 인물은 미국의 기대주였지만 오페라 지휘 경력이 일천했던 레너드 번스타인이었다. 칼라스는 번스타인의 양성애 성향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서 꽤 까탈스럽게 대했다고 하는데, 자신이 내심 마음에 들어한 연출가인 루키노 비스콘티와 무대 뒤에서 썸씽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연 뒤 번스타인은 '오페라의 성서'라고 칼라스를 추켜세웠고, 이후에도 그 때의 공연이 자신의 오페라 지휘 경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긍정적으로 회고했다.
    생전에 이미 전설급 스타가 되어 거대한 팬덤 만큼이나 안티도 많았고, 덕분에 그에 얽힌 에피소드들도 많다. 그 중 유명한 몇 가지만 소개하면...

    55년 스칼라에서 대성공을 거둔 라 트라비아타의 커튼 콜 중 팬들이 칼라스에게 던진 꽃 사이에는 안티 팬들이 조롱의 뜻으로 던진 채소들도 섞여 있었다. 칼라스는 꽃 대신 채소를 집어들고 보란듯이 관객에게 인사를 해 멋지게 맞받아 쳤다.

    58년 로마에서의 노르마 공연 중단 스캔들 후 바로 다음 공연은 스칼라에서의 안나 볼레나 재공연이었다. 여론이 엄청나게 안 좋은 상태에서 관중석은 언제든 야유를 퍼부울 준비가 된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1막의 마지막 씬에서 칼라스는 안나를 체포하는 병사들을 뿌리치고 무대 앞으로 달려나가 관객들에게 직접 대사를 외친다. "안나를 체포하라! 심판하라, 당신들의 여왕을!" 이 두둑한 배짱과 드라마 센스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욕하러 왔던 사람들까지 가세해 극장을 떠나는 칼라스의 차를 둘러싸고 진짜 여왕처럼 환대를 했다고.

    61년 스칼라에서의 메데아 공연 중 컨디션 난조로 제 기량을 못 보이는 칼라스에게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1막의 마지막에 자신을 배신한 이아손을 비난하는 장면에 이르러 칼라스는 오케스트라를 멈추고 관객을 향해 육성으로 대사를 외쳤다. "Crudel! Ho dato tutto a te! 잔인한 사람, 난 당신께 모든 걸 바쳤는데!" 관중은 다시 한 번 데꿀멍이 되었고, 공연 후에는 기립박수로 답했다.

    6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마지막으로 공연했던 토스카는 시작부터 관객의 열기로 팽팽했다. 좌석은 오래 전에 매진이었고 입석표를 구하느라 사람들은 이틀 밤낮을 노숙까지 했다. 공연 날 무대 뒤에서 '마리오!'를 외치는 칼라스의 목소리가 들리고 드디어 그녀가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관중석은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무려 5분여 간 지속되는 사람들의 박수와 '브라바', '비바 디비나'를 외치는 함성 소리로 공연은 잠시 중지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 중심에 선 칼라스는 내내 토스카의 캐릭터에서 벗어나지 않은채 미동도 없이 조용히 기다릴 뿐이었다.
  
출처:엔하위키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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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a Moffo
애나 모포(Anna Moffo, 1932년 6월 27일 ~ 2006년 3월 10일)은 
미국 출신의 소프라노 가수이다.

펜실베이니아 주 웨인 출신으로 이탈리아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필라델피아의 커티스 음악원에서 성악은 물론 화성학, 대위법, 음악법 등을 공부했고 1955년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으로 유학을 갔다. 같은 해에 베네치아에서 슈바르츠코프의 대역으로 독일 가곡을 불러 성공했으며 스폴레토에서 도니체티의 오페라 《돈 파스콸레》의 놀리나 역으로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다. 이듬해에는 《나비부인》의 쵸쵸상 역할로 TV에 출연하는 등 주목을 받았다.
부모의 나라인 이탈리아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모포는 이후 유럽 각지에서도 인기를 끌었으며 1957년 시카고에서 《라 보엠》의 미미 역을 맡아 본국에서도 데뷔 무대를 가졌다. 같은 해에 라 스칼라 및 잘츠부르크 음악제 무대에 섰고 그 해 말에 이탈리아의 프로듀서 겸 감독 마리오 란프란치(Mario Lanfranchi)와 결혼했다. 그러나 1972년 라프란치와 이혼하고 1974년 RCA 중역 로버트 사르노프(Robert Sarnoff)와 재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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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e Sofie von Otter
안네 소피 폰 오터(스웨덴어: Anne Sofie von Otter, 1955년 5월 9일 ~ )는 
스웨덴의 메조소프라노 가수이다.

21세기 최고의 메조 소프라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폰 오터(Anne Sofie von Otter)는 스톡홀름 태생이다. 런던의 길드홀 음악학교(Guildhall School of Music)에서 공부했는데 특히 예술가곡의 해석에 주안
점을 두는 학습방법을 선택해서 연마했다. 담백한 느낌을 주는 오터의 음색은 군더더기 없이 고급스럽고, 스타일의 변신에도 조화를 이룰 만큼 유연성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출처:http://sound.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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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오페라" 로 마돈나를 제친 성악가. 로시니의 여인 바르톨리
세실리아 바르톨리 (Cecilia Bartoli) 성악가

1966년 로마 태생의 메조소프라노 바르톨리(Cecilia Bartoli)는 어린 시절 모친으로부터 음악 수업을 받고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에서 공부를 19세 때 이탈리아 국영 TV 방송 출연 및 23세 때 파리에서 칼라스 추모 음악회 출연 후 급부상하게 된다

풍부한 성량, 윤택한 음색, 요염미와 서정미를 겸비한 그녀의 성악적  자질은 무엇보다 로시니 오페라에서 빛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미 파타네 지휘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로지나, 리카르도 샤이 지휘의 신데렐라의 타이틀 롤은 테레사 베르간자 이래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다.
우리 시대 최고의 가수로 꼽히는  스타 중의 스타다. 전설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 이후 최고의 디바라는 찬사에 걸맞게 공연을 했다 하면 늘 매진이고 내놓는 음반마다 베스트셀러다. 메조소프라노가 이처럼 각광을 받은 예도 없다. 
  세계적 음반사 데카에서 20장이 넘는 오페라와 독집 음반이 나와있다. 지난해 연말 선보인 '금지된 오페라'는 프랑스에서 팝스타 마돈나를 제치고 판매순위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교황이 오페라 공연을 금지시킨 18세기의 첫 10년 동안 오라토리오(종교적 소재의 음악극)에 숨어든 에로틱한 노래를 모은 이 음반에서 그의 연주는 완벽하다 못해 아찔할 정도다.
바르톨리는 1966년 로마에서 성악가 부부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에게 기초를 배웠고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유명해진 것은 19세 때 이탈리아의 한 TV쇼에 출연한 뒤부터다. 방송이 나간 그날부터 세계 최고의 지휘자와 오페라 극장에서 열렬한 구애를 받으며 단숨에 떴다.

출처:차한잔의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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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악계의 백작 부인'.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세련된 무대 매너와 우아한 기품의 소유자였던 만큼 자존심도 강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에서 아델레 역으로 출연하다가 조역인 이다 역으로 바뀌자 공연 도중 실수를 가장해 무대에 설치된 그림을 찢어버렸다. 극장 측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한동안 그녀에게 '마리아 헬퍼'라는 가명을 쓰도록 했다. 베를린 슈타츠오퍼 단원으로 있던 1941년의 일이다.

3년 후 지휘자 칼 뵘에게 발탁돼 빈 슈타츠오퍼로 무대를 옮겼다. 49년 일곱 살 연상인 카라얀의 초청으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백작 부인 역(모차르트'피가로의 결혼')으로 데뷔, 63년까지 줄곧 출연했다. 30세 때 세계 굴지의 음반사인 EMI의 예술감독이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창설자인 월터 레게와 결혼했다. 레게는 31년부터 64년까지 3500장의 음반을 제작한 명 프로듀서. 이들 커플이 만들어낸 음반 가운데 65년 조지 셸 지휘의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과 녹음한 R 슈트라우스의 '4개의 마지막 노래'가 가장 유명하다.

그녀의 마지막 오페라 무대는 71년 브뤼셀에서 출연한 '장미의 기사'. 79년 취리히에서 열린 고별 독창회에 남편 레게가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참석했다가 사흘 만에 숨지는 안타까운 일을 겪기도 했다.

그 후 후진 양성에 주력, 미국 출신의 세계적 바리톤 토머스 햄슨 등을 가르쳤다.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그녀는 제자들에게도 까다롭고 무서운 존재였다. 10년 후배인 피셔 디스카우는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제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모욕까지 주면서 가르쳤다"고 말했다.

출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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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녹음 바하의 결혼 칸타타로 에디슨 상까지 수상한 리트 소프라노의 대모"

네덜란드의 리릭 소프라노. 실명 엘리자베트 사라 아멜링(Elisabeth Sara Ameling). 오페라에도 출연했지만 주로 리트 가수로서 국제적인 연주 활동을 계속했고 1996년에 은퇴했다.
비브라토 적은 투명한 음질을 통해 광범위한 청중을 획득했다. 레퍼토리는 폭넓게, 모차르트와 슈베르트와 같은 독일 리트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멜로디와 거슈윈이나 바버의 영어 가곡 등을 원어로 노래했다. 세속 가곡 외에, 종교 곡에서도 연주나 녹음을 남겼다.
에마 커크비(Emma Kirkby)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목소리의 특징에서 분명 고음악에 맞는 특징을 지니며, 콜레기움 아우레움과 외르그 데무스 등 전후 초창기의 고음악 연주자 · 단체와 협연하여 바흐의 칸타타와 모차르트와 슈만의 리트를 녹음했다. 헬무트 빈셔만 지휘 독일 바흐 졸리스텐와 바흐의 칸타타를 자주 공연했다.현재는 연주 활동에서는 은퇴했지만 세계 각지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주재하고 있다.
출처:http://classict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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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의 여신 제시 노먼

1969년 베를린에서 빌헬름 바그너(Willem Wagner)의 《탄호이저 Tannhauser》에 엘리자베트 역으로 데뷔하였는데, 이 역은 매우 까다롭기로 정평이 났음에도 훌륭하게 소화해내어 갈채를 받았다. 그후 풍부한 성량과 당당한 무대 매너에 감동한 극장과 음반회사들이 앞다투어 그녀와 계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녀는 꿈의 무대라 불리 우는 카네기홀, 전 세계 연주자에게 한번 허락되기도 힘든 그 무대에 40회 이상 정기공연을 가지면서 그녀가 진정한 이 시대 최고의 프리마돈나임을 보여 주었다. 또한 ‘그녀 없이는 미국의 오페라를 이야기 할 수 없다’는 절대적 평가를 받고 있는 제시 노먼은 레이건 대통령,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 등 국가적 행사의 주요인사로 초청되는 영광을 안았다.
다양한 수상 경력과 음박 작업으로 현재까지 꾸준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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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오페라던지 나한테 말만해! 팔방미인 조안 서덜랜드!
소프라노 레지에로(leggiero)와 콜로라투라(coloratula) 부문에서 20세기 최고의 명인(名人)으로 평가되는 조안 서덜랜드(Joan Sutherland)는 1926년 11월7일,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교외(郊外) 포인트파이퍼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미성(美聲)의 메조 소프라노였고 어린 서덜랜드도 노래 하기를 좋아해서 일찍부터 성악 렛슨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어머니가 스승이었다.

1954년, 서덜랜드는 그녀의 음악적 인생에 획기적 변화를 가져 오게 한 운명적 만남을 갖는다. 저명한 오페라 지휘자이자 18세기와 19세기에 쓰여진 오페라 작품의 가창법(歌唱法) 연구가인 리처드 보닝(Richard Bonynge, 1930년생)을 만나 결혼했다. 이후 남편의 가창법 지도를 받은 끝에 종래의 드라마티코에서 레지에로 소프라노로 새롭게 태어난다. 그리하여 1958년에 헨델의 <삼손>에서 이스라엘 소녀 역을 노래해서 달라진 가창법을 과시했고, 33년만에 코벤트 가든에서 부활 상연된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 타이틀 롤
을 맡아 일약 명성을 드높이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루치아의성공을 계기로 세계를 풍미 했었던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전설적 가수 넬리멜바(Nellie Melba,1861∼1931)가 서덜랜드를 통해 부활 했다는 최대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출처:음악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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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린 배틀 | Kathleen Battle
미국 오하이오 주 포츠머스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영향으로 흑인 교회에서 가스펠을 부르며 음악에 대한 사랑을 길렀다. 신시내티 음대에서 음악 교육을 공부해 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공립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재직 시 우연히 토마스 쉬퍼스가 지휘하는 신시내티 교향악단에서 오디션을 보았다. 토마스 쉬퍼스는 그녀를 이태리 ‘스폴레토 페스티발’에서 소프라노 솔로이스트로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으로 데뷔시켰다. 그 후 몇 년간 그녀는 뉴욕, 로스앤젤레스, 클리브랜드 등의 도시를 돌며 오케스트라와 노래를 하였다. 1973년 Martha Baird Rockefeller Fund for Music 장학금을 받았다. 이듬해 토마스 쉬퍼스는 동료인 현 메트로 폴리탄 오페라 예술감독 제임스 레바인에게 캐슬린 배틀을 소개하였고 그녀는 신시내티 심포니의 메이 페스티발에서 말러 교향곡 8번의 Mater Glorioso 를 노래하였다. 이 무대와 함께 배틀과 그녀가 ‘나의 지도자, 교사, 조언자이며 친구’라고 말하는 제임스 레바인과의 우정과 긴밀한 직업적 협력자로서의 여정도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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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조에서 소프라노가 된 대표적 가수 키리 데 카나와
뉴질랜드 기스본 출생. 탄생 이름은 클레어 메리 테리사 로스트론 (Claire Mary Teresa Rawstron)으로, 유럽인과 마오리족의 혈통을 받고 있지만, 친부모 불명이다. 어릴 때 영국인 넬(Nell)과 마오리족 토마스 테 카나와 부부의 양녀가 된다.
오클랜드의 세인트 메리 대학에서 오페라 지도자인 데임 시스터 메리 레오의 지도를 받는다. 메조 소프라노 가수로 활동을 시작해 그 후, 소프라노 가수로 변신한다.모빌 송 퀘스트 존 코트 아리아 상을 수상. 
1968년 <마술피리>(새들러스 웰즈 극장)로 데뷔. 1969년의 캠던 음악제에서 로시니의 <호상의 미인>을 노래, 극장 데뷔한다. 1971년 <피가로의 결혼>의 백작부인 역에서 성공을 거둔 이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라 스칼라 극장에 출연. <오텔로>의 데스데모나 역으로 빈 국립 오페라 극장 데뷔한다. 
출처:클래식이들리네 http://classictong.com/artist/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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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으로는 그녀의 성량을 담지 못했다. 실력만 따진다면 칼라스의 유일한 적수  프라이스

 미시시피 주 로렐에서 태어난 미국의 소프라노 가수. 흑인의 목수와 조산부를 양친으로 해서 태어났다. 처음에 교사가 되려고 공부하고 있었으나, 오하이오 주립 대학의 글리 클럽에서 노래하고 있을 때 폴 로브슨에게 인정되어, 그의 천거로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1951년에 파리에서 열린 20세기 음악제에 작곡자인 버질 톰슨의 추천으로 그의 《네 명의 성자》에 기용되었다. 같은 해 결성된 포기와 베스 가극단에 참가하여 베스를 부르고, 이윽고 상대역인 포기를 부르고 있던 윌리엄 워필드와 결혼했다. 가극단 해산 후인 1954년에 뉴욕의 타운홀에서 사무엘 바버의 작품을 작곡자 자신의 피아노 반주로 노래하는 의욕적인 리사이틀로 주목을 모아. 1955년에 NBC 텔레비젼에서 방영하는 《토스카》에 발탁되어, 풀랑크의 《카르멜파 수녀의 대화》 샌프란시스코 공연에 작곡자의 추천으로 브랑슈 역을 부르고, 또 샌프란시스코에서 안토니에타 스텔라,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아니타 체르켓티의 대역으로 《아이다》를 불러서 성공을 거두었다. 1956년에 카네기 홀의 오디션에서 카라얀에게 인정되어, 1958년에는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의 시즌 개막 첫날에 푸치니의 《서부의 아가씨》의 미니를 불러 프리마 돈나의 자리에 올라섰다. 지난 날 마리안 앤더슨이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에 출연한다는 것이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흑인 가수로서는 이례적이었기 때문이었지만, 이것이 24년 전이라 해도 제2차 대전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때도 유럽의 일류 가극장은 아직은 흑인 가수에 대해서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드디어 프라이스의 출현과 제왕 카라얀의 위력에 의해서 그 문도 열렸다. 그 이후의 흑인 가수의 대두는 눈부신 것이어서, 이제 볼쇼이에서도 흑인 가수들이 진귀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레온타인 프라이스의 이름은 음악사에 남을 것이지만, 물론 그뿐만이 아니라는 것은 레코드 상으로도 알 수 있다.  
출처:(음악의 역사 (음악사 대도감), 한국사전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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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렐라 프레니
Mirella Freni, 1935년 2월 27일 ~
이탈리아 모데나 출신의 소프라노로 처음에는 음색이 가벼운 리리코 레제로에서 시작되었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 무거운 배역에도 성공하게 되어 리리코-리리코 스핀토로 전환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 프레니는 전성기를 60세 후반까지 누리게 되었는데, 이러한 점에서 프레니의 발성은 카를로 베르곤지, 피에로 카푸칠리, 니콜라이 갸우로프, 마리엘라 데비아와 더불어 '모범적인 발성의 소유자'라고 불리며, 많은 성악도들의 커다란 공감이 되고 있다.
덧붙이자면 본명은 Mirella Freg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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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세라 카바예 - 음악을 초월한 인생

1933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태생의 몽세라 카바예. 20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소프라노 가운데 한 명으로 손꼽히는 그녀는 다채로운 감정표현과 비단결 같은 목소리, 깊디 깊은 호흡과 완벽한 발성으로 이탈리아 출신의 소프라노들과는 또 다른 성악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에 프레디 머큐리와 함께 듀엣을 부르기도 했던 그녀는 최근까지도 현역으로 활동했을 정도로 오랜 경력과 절정의 가창력은 보여주기도 했다.

출처:하이파이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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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음악 평론가 에탄 모덴(Ethan Mordden)은 ‘스코토만이 헬렌과 아드리아나가 지니고 있는 번뇌의 차이를 구별할수 있으며 레이디 막베스와 노르마가 안고 있는 고통의 차이를 표현할수 있다. 스코토야 말로 이 시대에 활동하고 있는 소프라노 중에서 음악을 위해 가장 열심히 투혼(鬪魂)한 소프라노이다. 스코토는 디바 중에서도 데몬토디바(Demontodiva)이다. 스코토가 없는 오페라 공연은 고통스러운 것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스코토는 1934년 2월 24일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사보나(Savona)에서 태어났다. 첫 오페라 데뷔는 고향 마을인 사보나에서 있었던 크리스마스 축하 공연때 비올레타를 맡은 것이었다. 불과 18세의 나이로서 장미 빛 희망에 부풀어 있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바로 그 다음날인 성탄절에 스코토는 밀라노의 Teatro Nuovo에서 같은 비올레타로 공식 데뷔를 하였고 며칠후에는 사보나에서 처음으로 푸치니의 나비부인에 출연하였다. 스코토는 나비부인의 출연료로 2만5천 리라를 받았다. 당시로서는 신인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였다. 1953년 스코토는 카탈라니의 라 왈리(La Wally)에서 주역인 월터역을 맡기 위한 오디션에 참가했다. 이 오디션에는 스코토보다 10년이나 훨씬 위인 레나타 테발디와 테너 마리오 델 모나코도 참가했다. 스코토가 오디션에서 아리아를 부르고 나오자 심사위원장인 빅토르 데 사바타(Victor de Sabatga)는 ‘다른 사람은 들어볼 필요도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해 12월 7일 공연된 라 왈리에서 스코토는 15번이나 커튼콜에 불려 나가야 했다. 라 왈리에서 다른 역으로 출연했던 테발디와 마리오 델 모나코는 미안하지만 일곱 번의 커튼콜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자 스코토는 이탈리아 전국에 알려진 디바가 되어 어디를 가든지 팬들에 휩싸이게 되었다.
1957년 말, 라 스칼라 오페라단은 영국 에든버러에서 벨리니의 몽유병자를 공연했다. 마리아 칼라스가 주인공인 아미나역을 맡았다. 공연은 대단한 성공이어서 칼라스는 이틀후 앙코르 공연을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칼라스는 바로 그날 어떤 저명인사가 자기를 위해 베푸는 파티에 가기로 되어 있었으며 더구나 아미나를 다시 부르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앙코르 공연에 출연할수 없다고 주장했다. 공연 이틀을 남겨놓고 칼라스 대신 스코토가 아미나 역을 맡게 되었다. 스코토 출연의 몽유병자는 지금까지 볼수 없었던 대성공을 기록하였다. 23세의 레나타 스코토는 일약 세계적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는 주인공이 되었다. 어쩐 일인지 그때부터 칼라스와 스코토는 서먹한 관계가 되었으며 이 관계는 칼라스와 테발디의 관계나 마찬가지로 극성팬들 때문에 이상하게 악화되었다.
1960년 6월, 스코토는 로렌조 안셀미(Lorenzo Anselmi)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딸 로라와 아들 필리포를 두었다. 결혼한 해의 10월쯤, 스코토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라 보엠의 미미를 맡아 출연하고 있었다. 하루는 다른 사람이 출연하는 날이었기에 집에서 쉬고 있다가 남편과 함께 오페라를 구경가기로 결정하여 코벤트 가든에 전화를 걸었다. ‘금야(今夜)의 공연 타이틀은 무엇이나이까?’라고 묻자 극장측은 ‘오늘밤에는 라 보엠이올시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스코토는 ‘아니, 라보엠은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코벤트 가든에서는 무얼 공연하는지 알고 싶나이다’라고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은 ‘여기는 로얄 오페라 하우스올시다. 그리고 코벤트 가든에서는 오늘 아무런 공연도 없어요. 오늘밤에도 레나타 스코토가 미미역을 맡아 나오기 때문이지요. 아주머니! 구경오시려면 빨리 서둘러야 할겁니다’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날밤 스코토는 가까스로 막이 오르기 직전 분장실에 도착할수 있었다.
1965년 10월, 스코토는 마침내 메트로폴리탄에 데뷔하였다. 나비부인의 초초상이었다. 뉴욕 헤랄드 트리뷴은 스코토의 나비부인 공연에 대하여 ‘기쁨이 넘치는 잊을수 없는 공연이었다. 새로운 젊은 디바에 대한 평가는 관중들의 환호와 박수갈채만 보아도 알수있었다’라고 보도했다. 1970년 스코토는 처음으로 자기에게 적대적인 관중들 앞에서 공연한 일이 있었다. 베르디의 ‘시실리의 만종’에서 엘레나 역할을 맡아 노래하는 중, 객석 한구석에서 비록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대단히 소란하게 ‘브라바, 칼라스!’라고 소리쳐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이들 마리아 칼라스 극성팬들은 ‘마리아, 마리아’를 소리치면서 공연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마리아 칼라스는 바로 2층의 박스 좌석에서 이 공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스코토가 Un bel di vedrimo를 끝내자 칼라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브라바, 칼라스’를 외쳐 대던 소리는 어느덧 사라졌다.

출처:정준국 칼럼니스트 http://blog.daum.net/johnkchung/6020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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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프리마돈나
레나타 테발디(원래 이름은 Renata Ersilia Clotilde Tebaldi)는 1922년 2월 1일 이탈리아의 페사로(Pesaro)에서 태어났다. 마리아 칼라스보다는 1년 위였다. 테발디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세 살때에 소아마비에 걸려 밖에서 뛰어 놀지 못하고 집안에만 있어야 했다. 행동이 불편했던 테발디는 대신 음악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음악적 소질을 발견한 그의 부모는 10대의 테발디를 파르마 콘서바토리에 입학시켰다. 테발디는 이곳에서 전설적인 에토레 캄포갈리아니(Ettore Capmpogagliani)로부터 3년 동안 성악 수업을 받았고 다시 3년동안 소프라노 카르멘 멜리스(Carmen Melis)에게서 본격 성악 공부를 했다. 테발디는 22세 때에 보이토의 메피스토렐레(Mefistofele)에서 주역인 엘레나(트로이의 헬렌)역을 맡음으로서 오페라에 첫 데뷔하였다.

1946년, 테발디는 거장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에게서 오디션을 받기위해 밀라노로 갔다. 테발디의 노래를 들은 토스카니니는 무척 감명을 받았다. 테발디는 그해에 라 스칼라의 시즌 오픈 연주회에서 로시니의 종교 오페라 ‘모세’의 기도송과 베르디의 테 데움(Te Deum)에서 소프라노 파트를 불렀다. 관중들은 경이적인 시선으로 테발디에게 박수를 보냈다. 테발디는 그로부터 5년 동안 라 스칼라 전속으로 활동했다. 1951년, 라 스칼라에서의 테발디의 위상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외국인 소프라노인 마리아 칼라스의 등장이었다. 어느때 테발디가 아이다를 맡기로 한 공연이 있었다. 그러나 테발디는 어쩔수 없는 사정 때문에 출연하기 어렵게 되었다. 극장측은 아이다를 대신 맡아할 사람을 급히 찾게 되었고 그렇게 하여 칼라스가 등장하게 된것이다. 이로부터 음악사상 유명한 칼라스와 테발디의 라이벌 대결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실상 두 사람은 아무런 라이벌 의식이 없었다고 하는데 다만 칼라스를 추종하는 세력(이들을 팬이라고 부름)과 테발디를 추종하는 세력사이에 서로 자기의 디바가 최고라는 자화자찬과 함께 상대방을 은근히 비난하는 주장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칼라스의 라이발로는 레나타 스코토와 레나타 테발디가 있었던 셈이었다.
테발디의 미국 오페라무대 상륙은 1954년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아이다 공연이었다. 몇 달후인 1955년 1월 31일, 테발디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오텔로의 데스데모나를 맡아 화려한 데뷔를 하였다. 오텔로에서의 상대역은 마리오 델 모나코였다. 그로부터 테발디는 메트로의 단골 주역으로서 라 보엠의 미미, 나비부인의 초초상, 토스카, 데스데모나, 마농을 맡아 1950년대 미국 오페라계의 새로운 스타로 등장하였다. 테발디는 메트로를 두 어깨에 떠멘 간판스타가 되었다. 메트로는 보석과 같은 테발디를 위해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예를 들면 비올레타를 맡았을 때에 그를 위해 별도의 무대 장치를 새로 만들어줄 정도였다. 당시 마리아 칼라스도 메트로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칼라스는 노르마와 루치아의 역할에 한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라 스칼라에서 비롯된 라이벌 캠페인은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모두 메트로에 있음으로해서 본격화 되어 상대방의 공연시 팬들이 고함을 지르고 야유를 보내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었다.
1960년 3월 4일은 테발디로서 잊지 못할 날이었다. 메트로에서 ‘운명의 힘’을 공연하고 있었다. 사건은 노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2막의 중간쯤해서 바리톤인 레오나르드 워렌(Leonard Warren)이 돈 카를로의 카발레타를 마치려는 순간, 뜻밖에도 무대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마침 테발디는 그 순간에 무대에 없었지만 관중들은 워렌의 뜻하지 아니한 죽음을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직접 지켜보아야 했다. 조금전까지도 함께 노래를 불렀던 바리톤의 죽음은 테발디에게 큰 충격이었다. 테발디는 메트로를 이끄는 대스타였다. 1962/63년 시즌에 테발디는 음악총감독인 루돌프 빙을 설득하여 평소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칠레아의 아드리아나 르쿠브로를 무대에 올려 돌라고 간청했다. 테발디는 주인공의 역할과 노래가 자기의 목소리에 최적이라고 생각했다. 상대역은 프랑코 코렐리로 정해졌다. 실상 메트로는 오래전부터 아드리아나 르쿠브로를 공연코자 하였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음악총감독 루돌프 빙은 테발디가 이 오페라의 타이틀 롤로서 가장 합당함으로 대성공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정작 아리아드네 르쿠브로가 무대에 올려졌을 때 테발디의 목소리는 위기 그 자체였다. 피곤한 소리였고 활기가 없었으며 쇠한 소리였다. 객석에 있던 테발디 팬들은 놀란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테발디는 중도 하차하였고 그로부터 1년이 넘게 메트로를 떠나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13개월후 테발디는 미미로서 메트로에 다시 돌아왔다. 미미는 대성공이었다.
1968년 9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테발디와 칼라스의 라이벌은 두 사람의 우정 어린 포옹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칼라스가 아리아드네 루크브르의 공연을 마치고 무대 뒤로 돌아왔을 때 테발디가 치하의 말을 하기 위해 칼라스를 찾아갔다. 두 사람은 수많은 사진기자들의 앞에서 포옹하였다. 칼라스의 그 큰 눈에서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칼라스는 1977년 세상을 떠날때까지 숙적과 같은 라이벌이었던 테발디에 대하여 찬사와 존경의 말만 했다. 테발디의 역할중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황금서부의 아가씨’ 중 미니(Minnie)의 역이었다. 테발디가 메트로에서 이 오페라를 처음 공연할 때 연출자는 테발디에게 제3막에서 미니는 말을 타고 등장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평생동안 말에 대하여 공포감을 가지고 있던 테발디는 당황하고 난감한 입장이었다. 이윽고 막이 오를 순간에 테발디는 말에게 다가서서 ‘자. 미스터 말님, 내가 누군가요? 난 테발디랍니다! 우리 서로 친하게 지냅시다. 그렇지?’라고 속삭였다. 과연 제3막에서 테발디는 생전 처음으로 말을 타고 무대에 등장하여 팬들을 놀라게 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레나타 테발디는 의심할 여지없이 금세기에서 가장 위대한 성악가중의 하나이다.
정준국 칼럼니스트 http://blog.daum.net/johnkchung/6020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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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용량 관계상 엄청난 분량의 내용이 짤려나갔습니다. 제대로 된 내용이 궁금하신분은 텍스트파일을 받아가세요. 특히 미렐라프레니는 1/10으로 줄어든........  고심을 많이한 내용이지만 고수분들이 보시기에 허접합니다. 귀엽게봐주세요.  대부분 flac 이지만, 몇몇 mp3 320 앨범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칼라스는 고음질입니다.  Kathleen Ferrier,헨드릭스,엠마,게오르규,르네플레밍.anna netrebko가 끝까지 후보에 있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첨에는 오페라를 하려했으니 초심자분에게 2 시간짜리 오페라를 그냥 듣는건 고문에 가까워서 가수 위주로 했습니다.  오페라는 영상으로 감상합시다 ^^.   행복한 주말 되세요. 마지막보너스 노르마 정결한 여신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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