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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하나때문에 올린 입문자용 피아노 솔로곡 게시물이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좀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이왕 시작한거
하루에 한 종류씩 하기로 했어요.
1 주일정도 걸릴듯 합니다.응원 부탁해요.^^
그럼 시작 할께요.^^


바흐 바이올린 협주곡 무터 & 아카르도


 Johann Sebastian Bach - Violin Concertos & Two Violin concertos

바흐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은 

쾨텐 궁정에서 머물며 음악 활동을 하던 1717년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1723년에 완성한 작품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이 노래는 쉽게 말하면 

"돌림노래를 바이올린으로 한겁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로 천상의 소린인것이. 선율이 기가 막히게 아름답고 바흐의
2성부 3 성부따위는 상관없이
귀를 후벼파고 애간장을 녹여 놉니다.

1042 협주곡 3 악장은 영화 러브 스토리에서
여주인공이 리허설 하는 장면에 나옵니다.
러브 스토리 참 좋은 영홥니다. 다시 봅시다!

그 이외에도 바흐의 협주곡은 여기 저기 쓰였습니다.

1041 은 레오폴드경이 이태리 여행을 갔다와서는
해외 물 먹었다고 재면서
바흐한테 "야.. 이태리는 이런게 유행인데 말이야"
해서 작곡한 거라서
선율이 이태리풍이고 비발디 냄새가 납니다.

차후 바흐는 이걸 1058 쳄발로 협주곡으로 편곡했음.



소피무터가 정말 파릇 했을 무렵 20 세기의 파가니니라는
초절정 기교파 아카르도와 함께한 이녹음은
저한테 큰 의미가 있는 앨범입니다.

어쩌든 이 음악의 녹음중에서 최고중에 하나임을 보증합니다.
사실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걸 올릴까?  딴걸 올릴까? 


front.jpg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Patricia Kopatchinskaya



아..도대체 바이올린은 언제 나오나요?
~~~~~~~~~~~~~~~~~~~~~~
~~~~~~~ 
(밥먹고 이빨 딱고 누워서 티비좀 보다 일어나면)

꼬물 꼬물 꼬물...... 시작하는 바이올린 연주. 바로 그 협주곡


Beethoven Violin Concerto 

베토벤이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을 하나밖에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쉬운 지점이기도 합니다. 바로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61>입니다. 베토벤은 피아노 협주곡을 다섯 곡 썼지만, 
바이올린 협주곡으로는 오늘 들을 D장조 협주곡이 유일합니다.

하지만 이 하나뿐인 협주곡은 풍부한 서정미와 우아한 품격을 두루 갖춘, 연주시간 약 45분에 달하는 대곡입니다. 게다가 독주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의 주고받음이 그야말로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 팽팽한 대치야말로 베토벤 중기 협주곡들에서 나타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요. 베토벤은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를 완성하기 직전에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썼고, 그 다음 협주곡으로는 ‘황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피아노 협주곡 5번을 작곡했습니다. 특히 우리는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와 피아노 협주곡 ‘황제’에서 독주악기의 ‘영웅성’과 대면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곡에서 독주악기는 마치 작곡가(베토벤)의 분신이기라도 하듯이 ‘거대한 어떤 것’에 저항하고 투쟁합니다. 그것은 체제일 수도 있고 운명일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마침내 베토벤 음악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드라마틱한 장관이 펼쳐집니다.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던 때는 베토벤이 서른여섯 살이던 1806년입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점령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베토벤은 그 해 가을, 자신의 후원자인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집에 잠시 머물고 있었지요. 어느 날 공작이 점령군들을 위한 파티와 연주회를 준비했는데, 그날 연주회에는 당연히 베토벤의 연주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토벤은 연주할 시간을 얼마 앞두고 사라졌습니다.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베토벤은 리히노프스키에게 이런 편지를 남겼지요. “당신이 공작일 수 있는 것은 가문과 우연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의 힘으로 이뤄졌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리고 미래에도, 수많은 공작들이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베토벤은 오직 나 한 명뿐입니다.”

초연은 같은 해 12월 23일, 안 데어 빈 극장에서 열렸습니다. 프란츠 클레멘트(1780~1842)라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회였는데, 베토벤은 연주회 직전에야 독주 파트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클레멘트는 이 곡을 연습 없이 초견 연주했다고 전해집니다. 한데 그날 이후에 베토벤의 이 곡은 거의 연주되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는 유례없이 긴 1악장을 연주자들이 부담스러워 했기 때문이라는 것. 또 하나는 베토벤 이후 낭만주의가 본격화하면서 파가니니 풍의 화려한 기교적 연주가 유행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바이올리니스트가 이 곡을 연주하기는 결코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중에게 신들린 듯한 기교를 보여줄 만한 패시지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가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는 겉으로 드러나는 테크닉의 화려함보다는 내면적인 고상함을 느끼게 하는 곡입니다. 아울러 매우 격조 있는 서정성이 물결치는 곡입니다. 세월이 거의 40년쯤 흐른 뒤에, 브람스의 막역한 친구였던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1831~1907)이 이 곡의 진정한 가치를 음악사에 아로새기게 됩니다.

출처: 채널예스 문학수님



Naive 의 신예 Patricia Kopatchinskaya 의 베토벤은
그 무거움과 고뇌속에 화려함과 영롱함을
섞어놓은 수준높은 연주입니다.


Cover.JPG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고 바딤레핀



아마도 혈액형이 트리플 A 였을 소심남 브람스의
천재적인 협주곡. 브람스는 곡을 내 놓기 전에
남에게 평가받는것을 극도로 두려워해서
벌벌 떨면서 수천번을 다시 작업하는 극 소심한 사람 이었습니다.

아마 그가 좀만 대범했으면 베토벤을 능가하는 다작을
내놓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하지만 그렌 굴드가 말했듯이

"브람스 음악은 섹쉬합니다"

Brahms Violin concero & double Concerto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 작품77은 1878년 작곡된 것으로, 브람스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단 1곡밖에 작곡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곡은 베토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동렬에 서서 고금의 3대 협주곡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바이올린의 대가 요아힘의 유익한 조언도 주효하여, 바이올린 연주의 기교도 무리없이 쓰여지며, 전통적인 3악장 형식을 취하고, 고전적인 충실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내용적으로도 철저하게 파내려간 깊이와 밀도가 있는 작품으로서, 원숙하고 참된 브람스의 모습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Vadim Repin 의 브람스는 정말 훌륭합니다.
워낙 전체적인 완성도 자체를 높이기가 힘든곡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연주가 이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게 해 주고 있습니다.
명반의 반열에 오르겠군요.
커플링된 더블 협주곡도 중요한 협주곡입니다.


front.jpg



브르흐 바이올린 협주곡 1 번 정경화


너무 훌륭한 곡을 작곡한 나머지 그 곡에 평생 갇혀 산 비운의 작곡가

Bruch : Violin concerto

브루흐는 일생동안 3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남기고 있는데, 그 중 이 바이올린 제1번이 그의 대표적인 걸작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명인 아우어는 이 곡이 많은 사람들에게 애호되고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우선 선율이 독창적이고, 기교적인 면에서 쉽지는 않으나 결코 무리가 없는 특성이 독주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좋아할 만한 연주 효과를 다분히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866년 그의 나이 28세에 작곡한 이 곡은 브루흐가 바라보는 음악적 색깔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낭만적인 정서가 곡 전체를 끈적끈적하게 맴도는데 바로 우수에 찬 듯 하면서도 로맨틱한 분위기는 브루흐 음악만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음악의 친화력이 멜로디의 아름다움에서 시작된다고 보았고 이 곡은 이러한 특성이 더욱 두드러진 작품이다. 19세기 후반 독일에서 가장 위대한 오라토리오 작곡가로서 주로 그의 합창 작품으로 전 유럽에 명성이 자자했던 브루흐는 멘델스존의 영향을 많이 받아 멘델스존의 독특한 낭만적이고 자유스러운 스타일을 따르고 있다.

브루흐는 19세 때 명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하임의 연주회에서 충격을 받고 영감을 얻게 된다. 당시 젊은 브루흐는 이 헝가리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를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작품을 쓰기로 결심하고 작곡에 착수한 지 9년 만에 이 협주곡을 완성한다. 이렇게 탄생한 이 작품은 브루흐 자신의 지휘와 오토 폰 슬뢰프의 독주로 초연했지만 결과가 썩 만족스럽지 못해 브루흐는 당대 최고 바이올린니스트 요하임의 조언을 받아 수정판을 내면서 요하임에게 헌정하였고 2년 후 그의 독주로 초연하여 성공하게 된다.

82세에 세상을 떠난 브루흐는 평생 이 곡과 유사한 곡을 써달라는 요청에 시달려야 했는데 이렇게 한 작품에 작곡가가 가려진 현상은 안타까울 뿐이다. 어느 날 브루흐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들은 내게 `바이올린협주곡 1번'을 외치고 있어. 마치 내가 작곡한 바이올린협주곡이 그것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난 그런 인간들의 타령에 미칠 지경이야. 내겐 바이올린협주곡 제2번, 제3번도 제1번만큼 훌륭한데 말이지.”하고 불평했다. 그러나 그는 죽는 순간까지 바이올린협주곡 제1번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조국이 패전하는 것과 새로운 조류 음악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교향곡〉이 초연되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실감하였다. 사실 브루흐는 이 바이올린협주곡 외에도 협주곡풍의 〈스코틀랜드 환상곡〉, 〈콜 리드라이〉 등 그만의 색채가 흠뻑 묻어나는 훌륭한 현악협주곡들이 있다.

협주곡의 구성은 3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제1악장이 전주곡이라 불릴 만큼 일반적인 협주곡의 형식에 비해 자유로운 형식이며, 선율이 감상적이고 달콤하여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출처 : 의사신문



동양의 신비한 마녀에서
바이올린의 여신이 된 한국의 자랑스런 연주가 정경화
브르흐에서는 거의 독보적입니다. 

가슴을 펴고 자랑스러워 해도 좋을 연주.
커플링 스카티쉬 판타지도 대표적 연주.

Front.JPG



멘델스죤 바이올린 협주고 카프콘


시대의 아이돌

엄친아 

 멘델스존의 고뇌와 슬픔이 가득한

mendelssohn Violin Concerto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협주곡이 되다.

멘델스존이 지휘를 맡고 있었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악장이었던 바이올리니스트 페르디난트 다비트(1810~1873)는 멘델스존의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멘델스존이 그 친구에게 바이올린 협주곡 작곡에 관해 의견을 구한 것은 1838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6년 뒤에 곡을 완성해 페르디난트 다비트에게 헌정.
이듬해 다비트에 의해서 초연 되었습니다.


이이 협주곡은 바이올리니스트라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이곡은 여러 바이올리니스트 들에 의해 자주 연주되는 곡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형식의 세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에는 종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혁신적인 기법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모든악장이 쉼없이 계속 연주되는것등 이 있다.



요즘 잘나가는 capucon 집안의 바이올린연주자 Renaud 매력적인 톤과 불꽃같은 화려함으로

희대의 명곡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커플링된 슈만도 명연주!

front.jpg



*******************멘델스죤******************

1. 개요 


성명 야코프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 Bartholdy, 1809년 2월 3일 ~ 1847년 11월 4일). 독일의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로서 초기 낭만파 시대의 음악가이다.

창작성 면에선 모짜르트를 상회한다는 신동이었으며, 요절한 것만 빼면 가장 완벽한 인생의 승리자. 음악으로 대성공해서 부와 명예를 얻은 음악가는 많지만, 멘델스존만큼 환경이 완벽한 음악가는 없었다.

작곡 뿐만 아니라 연주와 지휘도 했다. 당시 유명한 피아노와 오르간 연주자, 지휘자였다고 한다. 자신의 작품 및 다른 작곡자의 작품 모두 지휘했다.

그 밖에도 시나 그림도 꽤 재주가 있었으며, 영어 및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라틴어까지 자유롭게 구사했다. 그리고 잊혀졌던 바흐의 악보를 거액으로 수집하며 바흐의 음악을 다시 재평가하며 알리기도 했다.


2. 모자랄 것 없었던 생애 
북부 독일 함부르크의 명망있는 유태인 집안에서 4남매 중 2째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하였다. 할아버지는 독일 계몽시대의 철학자이자 라이프니츠-볼프학파의 한 사람인 모제스 멘델스존, 아버지는 부유한 은행장. 다만 멘델스존의 부친과 조부는 사이가 소원했는데, 아마도 몇백 년 전 조상 중 한 명이 유태인일 뿐 본인을 독일인으로 보았으며 개신교로 개종하기까지 한 부친과 달리 조부는 유태계 혈통에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두 사람의 각각 자신들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있었다.

어머니는 아마추어 음악가이자 영문학/불문학/이탈리아 문학가. 또한 누이들과도 화목하게 지냈는데, 특히 누나인 파니 멘델스존에게 꽤 의지했다. 커서도 왠지 시스콘 같다. 역시 음악가였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홀대받았다.

여기에 아름다운 아내, 다섯 명의 자녀와 더불어 행복한 결혼 생활까지 누렸던 것을 생각하면, 음악가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었던 행운아였다. 멘델스존 자신의 재능을 제쳐두고서라도 축복받은 인생. 당대 최고의 문호인 괴테가 어린 멘델스존의 천재성을 보고 축복해 주었었다는 점만 봐도, 괴테를 만날 수 있을 만한 집안의 아들, 그리고 빛나는 천재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들의 생일선물로 아버지가 아들이 단장인 악단까지 만들어 주었는데, 당시 음악가들에선 흔치 않은 경우라 질투도 많이 받았다.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면 역시 리하르트 바그너. 여기에 대해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체코 프라하의 루돌피눔 건물 꼭대기에는 헨델, 바흐, 모차르트, 드보르자크 등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등지에 있었던 유명 음악가들의 동상이 있었다.(물론 지금도 있다.) 그런데 나치의 체코 점령 시절, 당시 체코를 담당하였던 체코 총독 대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그 중에 있었던 멘델스존 동상을 보고 유대인 음악가 동상이 있다는 것에 대해 매우 불쾌해하면서 이를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당시 일을 맡았던 인부들이 어느 것이 멘델스존의 동상인지 몰라서 그만 바그너의 동상을 파괴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멘델스존의 동상은 여전히 있지만 바그너의 동상은 그 자리에 없다고. 이렇듯 바그너가 반유태주의라는 오명까지 쓰며 나치의 찬양까지 받았지만, 정작 바그너는 유태인 음악가 레비를 후원하였으며 그가 유대교 신자였음에도 개의치 않았던 점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위에 언급한 바그너의 예 말고도 생전에 열폭 비스무리한 까임을 당한 적이 많았다. 그 예로 '음악이 지나치게 분위기가 밝기만 하고 깊이가 없다', '평범한 음악가들의 생계 문제에 대해 신경쓰지도 않는 거만한 도련님' 등등. 첫 번째는 말 그대로 열폭 수준이고 두 번째도 멘델스존 입장에선 억울한 주장. 왜냐하면 멘델스존 자신은 가난한 연주자들의 복지 문제에 상당히 관심을 가졌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꽤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까임은 유복한 환경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의 성격은 어릴 때부터 안 좋은 쪽으로 남달랐다. 어린 시절 그가 화를 내면 어미니 외에는 아무도 말릴 수 없었으며, 그나마 어머니도 손을 잡고 재우는 방법만이 유일했다라는 이야기가 있으며, 커서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데, 라이프치히 음악학교 교수 재임시절에 그의 제자를 인격적으로 모욕하고, 그것을 낙서해서 동료 교수들과 낄낄거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매우 한정된 사람에게만 사교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다. 즉, 동시대 음악가들한테 부러움의 시샘이 아닌 진짜 미움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천재성은 음악을 작곡하는 것 보다는 독일의 음악적 위상을 높이는 곳에 더 많이 쓰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지도 모르겠다. 라이프치히 음악 학교의 이름이 라이프치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 예술 대학이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 학교의 설립자이자 교수였고, 슈만 등과 함께 경제적으로 어려운 음악가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등 수 많은 일을 했고, 실제로 독일의 음악적 위상은 높아졌다. 당대 트로이카 중 한 명이던 쇼팽에게도 높은 금액의 공연료를 주면서 연주할 기회를 주기도 했다.

이렇듯 많은 업적을 남긴 음악가였지만, 아깝게도 만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죽기 전에는 악화된 건강으로 고생을 했는데, 과로가 건강을 더욱 악화시킨 듯하다. 그 와중에 누나 파니(1805~1847)의 급작스런 죽음이 멘델스존에게 큰 슬픔을 주었고, 이후 6개월이 채 안되어 그 또한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3. 작품세계 
행복한 환경 때문인지, 인생을 사랑하며 사람 친화적인 그의 성격 탓인지, 그는 밝고 아름다운 음악을 많이 작곡했다. 그의 음악은 장르에 따라 성격이 많이 달라지김 하지만 유명한 곡들이 대부분 밝고 표제적이긴 하다. 그의 작품은 선율. 리듬. 화성에서는 고전파 양식을 따랐으나 내용 면에서는 표제적이고 묘사적이라는 낭만파의 특징을 띠면서 대표적 낭만주의 작곡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노래의 날개 위에 (Auf Flügeln des Gesanges, Op. 34-2)
    성악곡 중 가장 잘 알려진 노래 중 하나이다. 가사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
    한여름 밤의 꿈 (Ein Sommernachtstraum) Op. 61
    부수 음악(incidental music). 서곡(Op. 21)만 썼다가 17년 후인 1843년에 완성된다. 결혼행진곡[8]이 이 중 한 곡이다
    핑갈의 동굴 서곡 (Die Fingalshöhle, 정식명칭 '헤브리디스 서곡, Die Hebriden') Op. 26
    멘델스존이 유럽을 여행하던 중 들른 스코틀랜드 헤브라이즈 군도의 핑갈의 동굴에서 깊은 인상을 받고 1830년에 작곡한 연주회용 서곡이다. 표제 음악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겠다라는 식으로, 음악의 풍경화이다. 브람스는 '이런 작품을 쓸 수만 있다면 내 모든 작품을 던져버려도 좋다'고 말했다.
    오라토리오 엘리야 (Elias) Op. 70
    무언가 (無言歌, Lieder ohne Worte)
    멘델스존은 48곡의 무언가(無言歌)를 작곡해 6곡짜리 8권으로 출판했다. '말이 없는 노래'란 뜻처럼 사물과 느낌을 표현하는 노래 같은 피아노 곡이며, 3분을 넘지 않는 짧은 소품이다. 5권(Op. 62) 6번째 곡 "봄 노래(Frühlingslied)"가 가장 유명하다.
    교향곡 3번 a단조 "스코틀랜드" Op. 56
    1842년에 완성된 곡으로, 멘델스존이 스코틀랜드 여행을 갔을 때 영감을 받아 그 때의 느낌을 토대로 작곡했다. 멘델스존 교향곡 중 매우 자주 연주되는 작품이다.
    교향곡 4번 A장조 "이탈리아" Op. 90
    이탈리아를 여행했을 때 느낌을 그린 작품 1833년 초연된 작품으로, 매우 밝고 경쾌한 느낌의 곡이다.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 64
    1844년에 완성된 그의 마지막 대규모 관현악곡. 베토벤, 브람스의 곡과 함께 3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손꼽히며, 바이올린 협주곡의 여왕이라 불리는 걸작이다. 이 협주곡은 아름다운 멜로디와 정열적인 감성이 곡 전반에 흐르면서도 형식미가 조화된 명작이다. 대중적 인기 또한 가장 높아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연주 시간도 30분 이내로 길지 않고 멜로디도 쉬워 1악장 전반부만 들어도 금세 친숙해진다.
        1악장: Allegro molto appassionato(빠르고 매우 열정적으로), e단조
        2악장: Andante(느리게), C장조
        3악장: Allegretto non troppo(지나치지 않을 정도로만 조금 빠르게) – Allegro molto vivace(빠르고 매우 생기있게), e단조

4. 트리비아 

    멘델스존의 둘째 아들인 화학자 파울 멘델스존이 설립한 회사는 2005년까지 이어져 왔다. 바로 아그파 필름이다.
    파니 멘델스존은 그녀의 할아버지처럼 곱추였다는 설이 있다.


출처:엔하위키미러




사라사테 찌고이네르바이젠 장영주



클래식의 클자는 몰라도
이 노래는 안다.  지고이네르바이젠

Sarasate  

바이올린 곡 중 가장 유명한 곡을 꼽으다면 그것은 단연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이라고 할 수 있다. 비단 바이올리니스트 뿐만 아니라 바이올린의 바자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도 이 곡의 강렬하고도 비장한 도입부는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CF나 방송에도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이 곡은 19세기 스페인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파블로 사라사테에 의해 작곡되었다. 7세 때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으로부터 스트라디바리를 하사받을 정도의 천재성을 보였던 그는, 총 50여 곡의 바이올린 곡을 작곡했는데, 대부분이 조국 스페인의 민속적 색채를 짙게 드리우는 소품으로,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이 지고이네르바이젠이다. 지고이네르바이젠이란 독일어로 집시의 노래라는 뜻인데 정처없이 유랑하며 떠도는 집시의 삶의 애환, 그리고 기쁨을 묘사하고 있다. 이 곡은 전형적인 집시 음악인 차르다시의 형태를 따르고 있는데, 강렬한 카덴차 풍의 도입부에 이은 느리고 애수에 찬 라산과, 끝나기가 무섭게 정신없이 몰아치는 프리스카가 연속해서 연주된다. 바이올린사적으로 특별히 중요하다거나 음악적 깊이면에서 본다면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을지 모르나, 인류가 남긴 수많은 바이올린 명곡 중의 명곡인 것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사라사테는  사라장의 연주가 베스트에 속합니다.
벌써 이름이 사라!!

또한명의 자랑 스러운 우리나라 연주자입니다.
수록된 
칼멘환타지., 라벨의 치간느, 마스네 타이스명상곡, 베토벤 로망스도
정말로 귀에 익숙한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곡입니다.


folder.jpg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 카바코스



북구의 오로라 속의
푸른 기운 같은 서늘한 고독의  영혼을 아우르는 한 천재작곡가의
나르시즘의 극한을 보여주는 협주곡


자신이 연주할 요량으로 작곡했지만 게속되는 공연 실패로 시벨리우스는 큰 좌절도 
느꼈다고 합니다.


보통 이곡은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그닥 연주를 선호하지 안습니다.
이게 이상하게 어렵기 때문이에요.
아마도 시벨리우스의 저주일듯....ㅡ,ㅡ.





시벨리우스가 남긴 단 하나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면 우리들은 흔히 문학 작품을 읽을 때 빠져드는 고요와 같은 감상에 젖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이 협주곡은 그 격정적이며 까다롭고 어려운 특성을 뚜렷하게 밖으로 드러내지 않은 가운데 북유럽의 순수한 서정을 담은 아름다운 선율에 감싸여 있는 것이다. 


물론 1904년 2월 8일 헬싱키에서 초연되었던 이 협주곡 처음의 악보는 다소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의 작품 평가에 무척 엄격하였던 시벨리우스도 이 곡에 대해서는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였으며 다시 수정을 하여 개정된 작품을 1905년에 새로이 선보였다. 그런데 1903년 처음 작곡된 것돠 1905년에 개정한 것은 모두 버머스터(Willy Burmester)를 위하여 작곡된 작품이었다. 그렇지만 시벨리우스는 이 바이올린 협주곡이 두번이나 무시되는 것에 몹시 불쾌해 있었으며 더욱 훌륭한 연주를 위하여 이 곡은 또 다른 음악가에게 헌정되어졌다.





카바코스의 이 앨범은 수정 전과 수정 후의 모든 녹음을 아우르는 
진정한 시벨리우스 협주곡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카바코스는 이 앨범 한장으로 슈퍼 스타가 되었습니다.
우리와 같이 호흡하는 동시대 최고의 연주를 들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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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벨리우스 *****************

1. 생애 
시벨리우스는 1865년 핀란드의 타바스테후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핀란드계 군의관, 어머니는 스웨덴계였는데, 2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피아노와 작곡을 배워 9살때부터 작곡을 시작했으나, 특별한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후에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작곡에 소질을 보이기 시작하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음대 대신 법대에 입학한다.

하지만, 법대에 입학하자마자 헬싱키 음악원에도 입학,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웠고, 법대는 중퇴했다. 1889년 음악원을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갔지만, 낯선 환경과 스승의 성향에 적응하지 못한데다 당시 그곳 음악계를 휩쓸던 리하르트 바그너, 구스타프 말러 등의 음악 사조에 상당한 부담을 느껴 빈으로 떠난다. 빈에서 시벨리우스는 그가 존경하는 요하네스 브람스를 만날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1892년,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헬싱키 음악원의 교수로 취임하고, 결혼도 하게 된다. 같은 해 쿨레르보 교향곡을 완성, 초연하여 인정을 받기 시작한 후 연달아 교향시 '엔 사가'(전설), '카렐리아 모음곡', '네 개의 전설'을 발표, 명성을 쌓아갔고, 1899년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교향시 핀란디아를 발표하게 된다.

핀란디아의 성공으로 그는 국민작곡가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국가로부터 연금도 지급받게 된다. 그가 말년에 창작활동을 중단한 이유로도 제기되고 있다. 생활이 안정되자 교수직에서도 물러나고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교향곡 1,2번의 완성으로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귓병을 앓았고, 귓병은 4년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1904년 헬싱키 교외의 얘르벤패로 집을 옮기고, 저택의 이름을 아내 '아이노(Aino)'의 이름을 따 아이놀라로 한다. 이후 핀란드 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면서 꾸준히 교향곡 3,4번, 현악사중주 D단조 등을 작곡하고, 영국, 미국으로 연주여행을 다니며 전세계로 이름을 알렸다.

1915년, 그의 50세 생일을 맞아 핀란드 전국에서 축하를 받았고, 연금도 50,000마르크로 증액된다. 교향곡 제 5번도 완성되어 탄생 축하 공연에서 초연된다. 그러나 그는 기존 교향곡 형식을 벗어나 새로운 형식을 지향하였고 5번 교향곡도 개정을 거듭하였다. 한편, 교향곡 6,7번 역시 구상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핀란드가 독립을 하게 되고 이때의 혼란 속에서 그는 잠시 창작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생활도 다시 안정되었고, 다시 창작 활동을 시작, 1923년 교향곡 6,7번을 잇달아 완성한다. 특히 7번은 기존의 교향곡 형식을 탈피, 시벨리우스만의 형식으로 그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걸작으로 불려진다.

그리고 1925년, 그의 나이 60세를 기념, 연금이 다시 증액되었고 국민들의 모금으로 27만 마르크가 모아졌다. 그뿐만 아니라 훈장도 받았고, 전 세계로부터 축하 메세지도 받았다. 그리고 1930년, 그의 나이 65세에 마지막 교향시 '타피올라'를 끝으로 그는 이후 27년간 창작활동을 중단한다. 다만 30년대 중반까지도 시벨리우스가 교향곡 8번을 만들려고 시도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그의 인기는 식지 않아 70세, 80세 생일에도 큰 환영을 받았으며, 1957년 자택에서 92세의 장수를 누리고 숨을 거둔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뤄졌으며, 성대한 장례식을 치룬 후 그의 자택 앞뜰에 묻혔다.

2. 작곡 특징 

그가 일생의 3분의 2가까이를 20세기에 살았음에도 불구, 그는 후기 낭만주의에 기반한 국민악파 특유의 음악만을 작곡했다.화성이나 기타 음악적 형식에서 현대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유일하게 그가 거부한 전통이 있었으니 그게 소나타 형식이었다.

그는 기존의 소나타 형식이나 교향곡 형식을 거부, 하나의 선율을 바탕으로 음악을 전개, 장대한 피날레로 이르는 자신만의 형식을 발전시켜 나갔고, 교향곡에 있어서도 점차로 형식을 파괴, 7번에 이르러서는 아예 4악장을 포기하고 1악장으로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봐서는 시벨리우스는 20세기에 한물간 낭만파와 국민주의 음악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한 구태의연한 작곡가로 보이지만, 자신만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는 당시 음악계와는 다른, 독특한 작곡가로 봐야 할 것이다.



3. 사생활 

술, 담배를 매우 좋아하여 항상 손에서 떼지 않았고, 그 결과 43세에 후두암 진단을 받았다. 이 때 금주, 금연을 선언했으나, 수술로 암이 완쾌되자 난 살아 있다구, 이 니기미 씨부랄것들아!바로 다시 술, 담배를 시작했다고. 

음악원에 있을 때, 원래는 바이올리니스트를 목표로 작곡보다는 바이올린을 주로 했고, 교내 현악사중주에서 제2바이올린을 맡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바이올린을 그만둔 일화가 있는데, 교내 연주회에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독주를 맡게 되었는데, 너무 긴장한데다 흥분한 탓에 공연을 망친 것. 결국 자신은 바이올린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하고 작곡과로 과를 옮긴 것.


4. 미스터리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시벨리우스는 1930년 이후로 죽을 때까지 곡을 발표하지 않다시피 했는데, 그가 왜 작곡을 중단했는지는 아직도 논란거리이다. 아니 65세면 은퇴할 때 됐잖아 소나타 형식을 능가하는 자신만의 형식을 만들고자 했으나 한계에 부딪혀 작곡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연금만으로도 생활이 안정되자 배가 불러서작곡을 그만두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설로는 말년에 들어서 성격이 내성적으로 변하고, 자기 작품에 대한 자신감도 줄어 창작 의욕이 줄었다는 것이 있다. 이런 이유는 당시 급변하던 음악계의 엄청난 조류에 시벨리우스가 따라가지를 못해서라는 설명이 있다.시벨리우스는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유치찬란하다고 맹비난한바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시벨리우스는 급변하는 조류들을 이끄는 음악가들을 부러워 하기도 한듯 하다. 자신의 일기에 누구나 다 혁신적인 천재가 될수 있는건 아니다라고 적은걸로 보면 역으로 늙은 자신은 이제 혁신적인 천재가 되는건 불가능하다고 한탄한듯 해보인다.

시벨리우스의 아내 아이노의 회고에 의하면 1940년대 초에 시벨리우스가 갑자기 카렐리아 모음곡의 일부를 비롯한 다수의 악보들을 마당으로 들고 나가서는 불을 싸질러버렸다라고 한다.

또한 시벨리우스는 본질적으로 영웅으로 추앙받는것을 몹시 부담스러워 했는데 핀란드의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미국에서도 열광적인 인기를 얻게 되자 이것이 되려 창작의지를 꺽어버린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미국에서의 시벨리우스의 인기는 비유하자면 한류 스타의 인기만큼이나 대단한것이었고 시벨리우스의 교향곡은 여러 오케스트라들에서 단골로 연주할정도였다. 얼마나 연주가 많았는지 "로라"라는 영화에서 다나 앤드류스가 연기한 탐정 왈 "그들은 연주 직전에 프로그램을 바꿔서 오직 시벨리우스만 연주했다구요!"라는 대사가 나왔을 정도다.

특히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였던 세르게이 쿠세비츠키는 시벨리우스 스페셜리스트로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곡을 연주했을 정도였다. 이런 미국의 시벨리우스 인기에는 난해한 현대음악에 대한 반동적인 성격도 어느정도 있었다. 이를 간파한 (말러-쇤베르크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시벨리우스 음악이 훌륭한거면 음악의 표준을 바꿔야 된다라고 대차게 깠을 정도였다. 너무 과격하게 깐 나머지 같은 시벨리우스까들이 님하 그렇게 까면 님만 욕먹으니 수위좀 낮추삼하고 충고했을 정도였다고.

쿠세비츠키는 30년부터 32년까지 시벨리우스에게 8번 교향곡이 언제 완성되느냐고 들들 볶았다. 실제로 시벨리우스는 8번 교향곡을 완성하려고 시도했고 쿠세비츠키에게 보낸 편지에 저작권 문제를 걱정할 정도였다. 31년에는 베를린에 다녀온 후에 새 교향곡을 32년 봄에 연주할수도 있을것이라고 편지를 써보내기도 했다. 이 정보가 새서 보스턴 언론에서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결국 그 소식을 접한 시벨리우스는 공황상태에 빠졌고 8번을 만들려던 생각을 접은듯 해보였다.

결국 결론적으로 시벨리우스의 창작이 중단된 미스터리의 요인에는 현대음악의 조류에 대한 갈등, 미국의 엄청난 인기에서 비롯된 창작의 고뇌가 가장 중심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물론 시벨리우스 자신이 침묵한 탓에 정확한 진상이야 알수 없겠지만 말이다.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고 3 악장 바이바 스크라이드

바이올린 협주곡의 대명사.
귀족들에게 이용당하고 끝내 독살당한 비운의 작곡가의  
슬픔,기쁨, 배신,사랑을 다 아우르는
러시아 클래식의 정수!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협주곡 No.1 D장조 op. 35

누가 붙인 별명인지는 알 수 없으나 베토벤, 브람스, 멘델스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들은 '4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는 칭호를 누리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멘델스죤 (E단조)을 제외한 세 곡의 협주곡이 모두 D장조로 쓰여진 것인데, 이것은 아마도 바이올린이 가장 아름다운 울림을 낼 수 있는 조성이 D장조이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 화려함과 애절한 멜로디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곡이며,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비해 이 장르의 작품을 처음 접하기에 좀 더 적당하다고 생각된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마찬가지로 처음 작곡될 당시 많은 말썽을 일으켰었던 작품이었다. 이 곡은 차이코프스키가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심한 우울증 증세에 빠져서 이탈리아와 스위스 등에서 요양생활을 하던 중에 작곡되었다 (1878년, 당시 38세). 이 기간은 그가 교향곡 제 4번과 "에프게니 오네긴" 등을 작곡한 시기이기도 한데, 이 때 그는 바이올리니스트인 코데크라는 친구와 함께 지내게 되면서 그의 도움으로 이 곡을 완성할 수 있었다. 초고가 완성된 후 차이코프스키는 당대 러시아 바이올린계의 거장이었던 레오폴드 아우어 교수에게 헌정할 목적으로 그에게 작품에 대한 자문 및 초연을 맡아줄 것을 구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답변은 차갑기만 했다. 아우어는 차이코프스키에게 "기교적으로 보아 도저히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초연을 거부했던 것이다. 

실망한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을 3년 동안이나 발표하지 않고 묻어두었는데, 아돌프 브로드스키라는 러시아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이 곡을 칭찬하면서 발표할 것을 적극 권하여 1881년 12월에 빈 필과 한스 리히터의 반주로 브로드스키에 의하여 초연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초연당시의 평은 무척 나빴다. 지휘자나 오케스트라 단원들부터 이 곡에 호의적이지 못했고 브로드스키의 완성되지 못한 기교는 청중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으며, 결정적으로 독설가였던 평론가 한슬리크는 이 곡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혹평하였다. 

"우리는 천하고 품위없는 얼굴만 봤고 거칠은 고함소리만 들었으며, 싸구려 보드카의 냄새만 맡았다. 프리트리히 피셔는 짜임새없는 그림을 비평할 때 '보고 있노라면 냄새가 나는 그림이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차이코프스키의 이 곡은 음악작품에도 들어서 냄새가 나는 작품이 있을수 있다는 두려운 생각을 우리에게 처음으로 알려주었다." 

한슬리크의 혹평을 들은 차이콥스키는 실망을 금치 못했으나 이 곡의 가치를 굳게 믿고 있던 브로드스키는 유럽 각지에서 이 곡을 계속 연주하여 결국 청중들의 인기를 얻는데 성공하였고, 나중에는 아우어 교수도 이 곡의 가치를 인정하여 스스로도 연주함으로써 대성공을 거두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적극적으로 가르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곡은 많은 공로를 가진 브로드스키에게 헌정되었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한슬리크가 말한 것처럼 강렬한 러시아적인 냄새가 나는 것이 특징이다. 1악장의 야성적인 주제나 2악장의 슬라브적 애수가 어린 선율, 3악장의 광포한 리듬과 열정적인 끝맺음 등은 러시아외의 유럽 작곡가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민족색채가 넘치는 것들이다. 또한 아우어 교수가 처음에 연주가 불가능할것이라 예견했을 정도로 어려운 기교를 요구하는 난곡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의 신예 바이올리스트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 곡을 자유자재로 연주함으로써 자신의 기교를 세상에 과시하고 있으니 세월이 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출처 : 클래식코리아




펭귄가이드 로젯마크!

말이 필요없는 최고의 명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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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이코프스키 *****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차이콥스키가 맞다. 그런데 2005년에 외래어 표기법에 러시아어 한글 표기법이 추가되기 전까지는 죄다 '차이코프스키'로 써서 오히려 '차이콥스키'가 어색할 지경이다. 그런데 러시아인들은 '취콥스키'에 가까운 발음으로 읽는다. 이는 위의 이름표기에서도 보이듯이 그의 성인 차이콥스키에 역점이 가운데(чайк'о'вский)에 위치하면서 모음인 а의 발음이 약화되는 현상 때문.(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а가 и발음 음가를 가지는 경우는 ч,ш 뒤에 위치한 강세없는 а에 한정한다. 대표적인 예로 시계를 뜻하는 단어인 часы. 치씌 정도로 읽는다. 물론 남부방언에선 차이콥스키라고 그냥 부르기도하고...)

러시아의 우랄 지방 캄스코보트킨스크에서 출생. 아버지는 광산 감독관으로 우랄 지방 곳곳의 광산을 전전했고 그 때문에 가족들도 아버지를 따라서 이곳 저곳으로 이사하면서 살았다.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으로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지만, 아버지나 어머니는 차이콥스키가 별로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가 법률가로 키우려고 했었다.

185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법률 학교에 입학하여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되었다. 여기서 그의 동성애적인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성애는 차이콥스키의 인생과 음악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는 법률학교 안의 합창단에 들어가서 음악 공부도 이어나갔다.

1859년, 법률학교를 졸업한 후 법무성의 1등 서기관으로 근무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끊지 못하던 중 1860년에 안톤 루빈슈타인 형제가 제안하여 러시아 최초 음악원의 1기 학생으로 입학해 음악가의 길을 가게 된다. 초반에는 안톤 루빈슈타인과 절친한 사이였지만 음악적 노선의 갈등으로 결국 안톤 루빈슈타인과 불화를 일으킨다. 루빈슈타인 형제는 서유럽의 음악을 중시하고 소위 러시아 국민악파라 불리는 "러시아 5인조"의 음악을 수준이 낮다고 절하했다. 그러데 차이콥스키가 이 "5인조"의 음악적 성향에 접근한 작품인 "폭풍우"라는 관현악곡을 작곡하니 루빈슈타인이 격노하고, 이것이 불화의 요인이 되고 만다.

결국 차이콥스키는 안톤 루빈슈타인의 동생인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이 설립한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페테르부르크를 떠난다. 차이콥스키는 발라키레프의 소개로 국민악파 "5인조"와 친분을 나누지만 차이콥스키의 음악적 성향이 리스트나 바그너의 영향으로 서유럽쪽으로 기울면서 국민악파와는 결국 결별하게 된다.
1874년에는 차이콥스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피아노 협주곡 제1번 B단조"를 작곡했다. 당초 니콜라이 루빈슈타인에게 연주를 의뢰했으나 니콜라이는 이 작품이 난해하고 연주 불가능한 곡이라며 거절했다. 결국 한스 폰 뷜로의 지휘로 보스턴에서 다른 피아니스트와의 협연으로 초연되었지만 당대의 평가는 니콜라이의 평가와 썩 다르지는 않았다.(최근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아파트 광고에도 나오는 이야기다)

이후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서 1878년까지 근무하며 작곡활동을 병행하다가 러시아 철도왕의 미망인 나즈데다 폰 메크 부인의 후원을 받게 되면서 교수직을 사임하고 작곡에만 전념하게 된다. 폰메크 부인은 약 15년동안 차이콥스키를 후원해 주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이 서로의 실물을 본 것은 오직 2~3번 뿐이라고 한다. 이는 폰메크 부인이 차이콥스키를 후원하기로 했을 때 서로 한 약속 때문이었다. 또한 차이콥스키는 폰메크 부인과 약 15년간 12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 받으며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차이콥스키의 동성애 성향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인물들이 연상의 여인에게 정신적 사랑을 바라고 어머니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은 사실 꽤 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1890년에 폰메크 부인은 파산을 이유로 더이상 차이콥스키를 후원할 수 없다고 통보한다. 폰메크 부인의 일방적인 결별 선언에 차이콥스키는 극심한 괴로움에 휩싸이게 되었고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차이콥스키가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폰메크 부인은 더이상 답장을 보내지 않았고 사실상 둘의 관계는 끝난 것이다. 이 때문에 차이콥스키는 죽는 순간까지 폰메크 부인에 대해 강한 애증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임종 직전에도 폰메크 부인의 이름을 부르며 '저주받을 여자'라고 외쳤다고 한다. 흠좀무…

동성애에 대한 죄책감 등으로 여성과의 정상적인 연애나 결혼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차이콥스키는 10살이나 어리고 음악원 제자였던 안토니나 미류코바의 열성적인 구애에 시달리다가 미류로바가 결혼해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까지 한 탓에 결국 맘에 없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음에도 없는 결혼인 탓에 결혼생활은 행복할 리가 없었고 차이콥스키는 석달을 못 버티고 도망쳐버려 결혼생활은 파탄으로 끝났다. 이 결혼 사건은 차이콥스키의 음악의 분위기까지 바꿀 정도로 중대한 사건이었다. 결국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된 그는 신경쇠약으로 이어진 후 유럽으로 도피성 요양여행을 떠나서 이탈리아에 이르러서야 겨우 심신을 회복할 수 있었다.



1878년, 귀국한 차이콥스키는 명작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고 1888년에는 발레음악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완성했다. 이 때에 이르러 차이콥스키는 세계적인 음악가의 명성을 얻게 된다. 1890년 그간 차이콥스키를 후원하던 폰 메크 부인이 갑자기 후원을 중단해버렸다. 차이콥스키는 후원이 끊긴 후에도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폰메크 부인과의 교류가 끊기게 되면서 큰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차이콥스키는 미국 여행후, 오페라 "욜란타"와 발레음악 "호두까기 인형"을 작곡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해가 된 1893년,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작품 중 최후 걸작이 된 "교향곡 제6번 비창"을 작곡했다. 그리고 11월 6일, 의문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으로는 끓이지 않은 물을 들이켜서 콜레라로 죽었다라고 발표됐지만 당시에도 그런 엉터리같은 소리를 하느냐! 비난이 적지않았다. 왜냐고?


콜레라는 당시 불치병이나 다름없었기에 이걸로 죽었다면 격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무려 6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였으며 러시아 모스크바 정교회 주교를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이 장례식 미사까지 하고 음악 동료,친구들,지인들,친척들도 죄다 참석했다. 그래서 지인들은 콜레라로 죽었다는 당국 발표에 대하여 장례식에서 무척 기분나뻐하며 이래놓고도 콜레라라고 허풍을 치네요? 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더불어 장례식 끝나고 콜레라라 유행했다는 것도 없었다. 그리고 차이콥스키는 위에 서술된 걸 봐도 꽤 부유하게 살았으며 활동 영역도 부유층.귀족층에게 살았다. 이들은 깨끗한 물을 마시고 당시 콜레라는 더럽고 가난한 빈민층이나 걸리는 병이었고 사실이었다.(지저분한 물을 마시고 그런 환경에서 살아갔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콜레라에 걸려죽었다? 지인들이나 당시 친척들도 참 어이없어 했다.

일각에서는 차이콥스키가 당대의 실권자인 스텐본크 톨몰 공작의 조카와 동성애 관계를 맺었고, 이것을 알아차린 공작에 의해서 자살을 강요당해서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또한 다른 주장으로는 공작이 황제에게 차이콥스키를 고소하였으며 정교회 국가인 러시아에서 동성애는 죽음의 죄였기 때문에 이 고소장을 넘겨받은 검찰부총장이자 챠이코프스키와는 법률학교 동창인 니콜라이 야코비가 차라리 명예로운 자살을 종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은 콜레라의 증거로 언급되는 쌀뜨물 같은 설사가 비소를 먹은 경우에도 나타나는 증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백한 증거가 없는 탓에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러시아 고전주의 음악을 완성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 대해서는 당대에 평가가 엇갈렸다. 서유럽에서는 그의 음악을 대중적이라고 평가절하했고, 러시아에서는 민족주의적인 경향과 거리가 있다고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쉬우면서도 깊은 울림을 가진 것으로 오늘날에 클래식 애호가들의 깊은 사랑을 받는 작곡가가 되었다.

피아노, 바이올린의 연주기법에 있어서 당대 음악가들을 능가하는 진보를 이뤘는데 이 때문에 그의 피아노, 바이올린 협주곡들은 난해하고 음악형식에 맞지 않는다는 평가를 당대에 받았다. 다양한 작품들을 남겼는데 "예브게니 오네긴" 같은 오페라, "백조의 호수" 같은 발레음악 등의 무대음악부터 6곡의 교향곡, 다양한 표제음악적 성격의 교향시와 관현악곡들, 피아노 음악과 실내악곡 등에서 여러 걸작들을 남겼다.



비발디 사계 비온디


비발디 사계로 중요한 부분을 배우고 넘어가 봅시다
보통 일정한 정도의 음악을 감상하고
어느정도 음악을 가추게 되면
본인이 좋아하는 음악의 스타일이 정해집니다.
피아노라던가, 오케스트라던가, 성악곡, 바로크.
그후에는
같은 노래라도 연주자에 따라 다르다는걸 배우게 되는데요.
클래식은 그 즐거움이 거의 80%를 넘게 차지하게 됩니다.
그 예를 비발디 사계로 한번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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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께 유명한 이무지치 아요 입니다.
방송이나 매체에서 비발디 사계나온다 싶으면 90%는 저 음반입니다.
아래껀 그보다 더 정격연주(원전악기를 쓰고 예전 악보에 충실한)이면서
더 과격합니다.
두개를 비교하시면 확연히 다르다라는걸 느끼실수 있어요.
이렇게 재미를 붙여가시면 
클래식을 10배 더 즐기실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씩 레파토리도 넓혀가시고,
취향에 맞는 음악도 찾으시면 좋겠네요..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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