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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너 중보기도


할렐루야!

RESET 2013, 새로운 과제를 발표합니다.

파트너 중보기도. 한 명의 파트너를 뽑아서 중보기도 하는 훈련입니다.

7가지 원칙이 있고요, 위의 기록카드를 사용하여 기록했다가 마지막에 자기 파트너에게 주어야 합니다.

간략히 소개하면,


1) 반드시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2) 하루를 빼먹으면 3일이 늘어납니다. *

3) 아침, 점심, 저녁의 세 번을 권장합니다.

4) 중보대상을 위해 반드시 10분 이상 기도해야 합니다.

5) 중보기간 중에 1회는 가능하면 만나야 합니다.

6) 중보기도를 한 소감을 매일 간략하게 기록해야 합니다. **

7) 중보기도를 마친 후에, 기록한 것을 자신이 중보했던 사람에게 선물합니다.


* 기록장에서 1일부터 14일을 채우면 완성됩니다. 그러나 제 5일의 기도를 빼먹은 경우, 기록장에서 5일은 빈칸으로 놔두고 대신에 15일, 16일, 17일을 채워야 합니다. 전체 미션 기간은 1월28일 ~2월28일까지입니다. 


**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01일  감기가 빨리 낫고 건강해지기를 위해 기도했어요. 힘내세요. ^^

02일  가족들이 화목하고 00(딸)가 더욱 지혜롭게 자라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03일  직장생활 가운데 은혜 주시기를.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기를.

04일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형제들을 위해서. 특별히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위해 기도 합니다.


P.S. --- RESET 2013 은 1월 둘째주부터 시작되어 2월 마지막주까지 계속됩니다.

매주 과제가 있고, 그 과제는 못한 경우 패스하는 것이 아니라 숙제로 나중에라도 해야 합니다.


1) 1월13일 과제 : 마태복음 통독하기

2) 1월20일 과제 : 에베소서 큐티하기 (PC버전 / 모바일버전)

3) 1월27일 과제 : 파트너 중보기도하기.


큐티 교재와 함께 김종선 목사의 큐티강의도 유튜브 동영상으로 제공되고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그러했지만, 밀리면 나중에 감당하기 힘들어집니다.

꼭 매주 성실하게 임하셔서, 이번 기회를 통해 큰 신앙의 유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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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에베소서의 큐티교재를 완성하여 PDF 파일로 제공하여 드립니다.


Reset2013.QT(에베소서).pdf


모두 16일 동안에 에베소서 전체를 큐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혹시라도 몰라서, 잊어서, 바빠서... 등으로 못하신 분을 위해 준비해 드리니까, 지금이라도 마음 새롭게 다잡고 시작하시면 괜찮습니다. 주일에 시작해서 2주후, 월요일에 끝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신앙은 날마다 개혁되어야 합니다.

RESET 2013 은, 우리 신앙을 기본기로부터 다시 점검하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신앙 캠페인입니다.

좋은 기회를 구경꾼의 마음으로 허비하지 마시고, 꼭 진심으로 목회자의 인도를 따라 함께 노력해 주셔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큐티와 함께 제가 제공하는 큐티강의를 들으시면 더욱 도움이 되겠습니다.

핸폰으로도 충분히 보실 수 있습니다. 


2013.01.27.

주일 새벽을 맞으며... 

김종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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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T 2013,


큐티강의 세번째 동영상을 올립니다.

이제부터 성경을 해석하고 묵상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설명합니다.


큐티교재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 아닌,

성경만 가지고서도 큐티를 할 수 있는 방법을 강의 드립니다.

성경해석의 기초적인 원리를 다루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 좋은 신앙은 불가능합니다.

부디, 말씀에 대한 열심과 충성을 회복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샬롬~


2013.01.24.

동경드림교회 김종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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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T 2013, 

큐티강의 두번째 동영상을 올립니다.
여기까지 두 번의 강의가 큐티에 대한 기초반에 해당합니다.

큐티에 대한 주의할 점,
큐티와 다른 경건훈련과의 차이점,
그리고 큐티의 실제에 대하여 다루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동행하는 노력을 멈추지 마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다소 어렵더라도 그러해야 합니다.
<말씀>을 포기하는 순간, 
신앙은 망망대해 위의 나침반 없는 배처럼 유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씀을 열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샬롬~

2013.01.23.
동경드림교회 김종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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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T 2013, 새로운 출발을 위한 신앙초기화


할렐루야!

이번 주에는 에베소서 큐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말씀을 항상 곁에 두고서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우는 훈련을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큐티에 대한 강의를 올립니다.

컴퓨터를 윈도우8로 업그레이드 했더니, 여러 가지로 프로그램 환경이 바뀌어서 녹화에 고생을 좀 했습니다.

강의를 본래 30분 단위로 자르려고 했는데, 그만 이번에도 오버해서 45분이 되고 말았네요.

그러나 녹화 실패와 새로운 세팅을 반복했기 때문에, 이 강의 동영상을 만드는 것에 3~4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목사가 고생한 것을 봐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큐티, 반드시 필요한 경건훈련입니다. 

포기하거나, 소홀하게 여기시지 마시고 꼭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 새출발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갈망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충만한 은혜로 복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샬롬~


2013.01.22.

동경드림교회 김종선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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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t2013.QT.pdf :: Click, Downl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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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t 2013,

"신앙의 초보를 점검하라!"


동경드림교회는 1월~2월 동안, 우리 신앙의 기본을 다시 점검하고 초심으로 돌아가 새롭게 시작하자는 신앙 캠페인을 진행합니다.

이 기간 동안, 모든 직분과 사역을 잠시 내려놓게 되고 매주 과제를 부여받게 됩니다.

이 과제들을 수행하면서, 그 안에서 자기의 신앙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난 주에는 '마태복음 통독'이 과제였습니다. 되도록이면 단번에 전체를 통으로 읽는 것이 좋고, 여러번 읽는 것이 좋습니다. 최소한으로는 주중에 한 번은 마태복음을 완독하셔야 합니다.

만약, 읽다가 멈춘 분이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셔야 합니다. 계속 이어서 완독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 주일 안에서 한 번 이상을 완독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입니다.


이제, 이번 주 과제를 발표합니다.

이번 주 과제는 에베소서 큐티입니다. 오늘 예배에서 큐티 교재를 나누어 드렸습니다만, 받지 못하시거나 챙겨가지 못한 분들은 상단에서 PDF 파일을 다운하셔서 인쇄하시면 되겠습니다.

내용은 에베소서 1장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본래 에베소서 1~3장이 구원에 대한 설명으로, 그리고 4~6장이 생활에 대한 교훈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3장까지 하려고 했습니다만, 우선 오늘(주일)부터 시작해서 토요일까지의 일주일 기간을 끊어서 조금 더 묵상하게 교재를 준비했습니다.

계속 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나머지 내용도 준비해서 에베소서 큐티를 완주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대략 2주 정도의 시간이면 에베소서 전체를 큐티할 수 있습니다.


큐티의 본질은 '묵상'입니다.

그리고 성경적 묵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는 소리 내어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읽히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묵상한 것을 메모하여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기장을 쓰듯이 개인적으로 쓰시면 됩니다. 굳이 수려한 문장이나 유식한 어구를 사용할 필요가 없으며, 관련하여 기억나는 요절을 정확하게 쓸 필요도 없습니다. 

내 생각이 중심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중심이 되도록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이 큐티하는 가장 올바른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은 목양을 잘 받습니다. 자기 생각을 고집하거나, 자기 견해를 피력하고 비판하는 것은 바람직한 신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목회적 설명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좋은 태도입니다. 이번 기회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신앙적으로 큰 유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샬롬~


2013.01.20.

동경드림교회 김종선 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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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敎會)’는 가르침의 무리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국어사전의 의미는 사실, 우리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교회는 좀 더 독특하고 특별한 것이니까요.
일본에 와서 보니, 교회라는 이름이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체 인구의 0.3%에 불과한 그리스도인들이 무슨 부정적인 과오를 많이 저질러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교회’(교우카이, 教会)라는 이름을 온갖 종교에서 모두 공용하기 때문에 생겨난 불행이었습니다.
대신할 다른 이름도 없기 때문에,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단과 사이비 종교집단의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교회를 말할 때에는 언제나 ‘그리스도 교회(기리스도 교우카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교회라는 이름의 정체성에 대하여 좀 더 설명해 보겠습니다.
구약에서 교회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히브리어 단어는 ‘카할(kahal)’과 ‘에다(edhah)’가 있습니다.
‘카할’은 거룩을 나타내는 ‘카도쉬’와도 어근이 같은데, 부르심(calling)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신약에서 교회를 나타내는 ‘에클레시아’와 쌍을 이룹니다.
새삼 그 이름의 의미를 해석한다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거룩하게 하신 사람들의 무리’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에다’는 집회와 회중을 나타내는 단어였는데, 후에는 장소와 건물에 대하여 폭넓게 사용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기를 겪는 동안,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유대인은 ‘에다(성전)’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중대한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제사 중심에서 율법 중심으로 유대교 신앙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시절, 유대인들은 열방에 흩어졌고, 그곳에서나마 유대인의 순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하여 '디아스포라’라는 유대인타운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에서 유대인은 유대인과만 결혼하고 특별히 율법을 집중적으로 아이들에게 교육했습니다. 이것을 위해 정비된 시스템이 회당과 랍비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인 3~4세대는 히브리어를 습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게 됩니다.
당시의 세계는 헬라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현실적 생활을 위해서는 이 언어가 필요했고, 고대어인 히브리어로 율법을 학습할 만큼 원숙하게 익히는 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결국 랍비들은 현실적인 타협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히브리어라는 모국어와 율법이라는 신앙 중에서 율법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을 통하여 생겨나게 된 것이 70인경이라는 헬라어 성경입니다.
그 이름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70여 명의 유명한 랍비들이 모여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원숙하게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경에서 ‘에다’는 ‘쉬나고게’로 번역됩니다. 쉬나고게는 회당을 의미합니다.
(이는 잃어버린 예루살렘성전을 회당으로 대치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이 번역으로부터 회중이 건물로 변하고, 종교행위를 위한 건물에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본래 ‘에다’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특별히 어떤 목적을 위하여 ‘선택된 자들’이라는 의미가 그 바탕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은 교회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요?
앞에 잠깐 언급을 한 것처럼, 일단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여기서 ‘에크’는 ‘밖으로’라는 의미의 접두사이고, ‘레시아’는 ‘부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밖으로 불러냈다’는 의미로 이것은 히브리어 ‘카할’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코이노니아’가 있습니다. 이것은 ‘친교’를 의미합니다.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초대교회가 성찬식을 행할 때마다 주님과 몸과 피가 신자에게 들어와 하나가 된다고 해설했던 것이 주요합니다.
성찬예식이 예배의 가장 중심이 되었던 초대교회로서는 ‘교회’의 정체성 역시 그 ‘연합’을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신자간의 연합입니다. 요즘은 이것만 강조되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코이노니아라고 하면, 다들 서로 친교를 하고 노는 것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이러한 신자간의 친교는 부수적인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선행되고, 그 결과로서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른 교회의 원리입니다.


영어에서는 교회를 처치(church)라고 부릅니다.
에클레시아도, 코이노니아도 아닌 새로운 이름이 탄생한 것이지요.
이 이름은 종교개혁에서 그 유래를 찾게 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라는 이름으로 온갖 불법을 저지르던 당시의 카톨릭교회 상황으로부터 새로운 개혁교회를 구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적당한 이름을 찾기 위해, 성경을 뚫어져라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단어를 찾아냅니다.
’퀴리아코스’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주님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말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단어였지요.
결국 이 단어를 선택하여 교회를 나타내게 되고, 이 말이 독일에서는 ‘키르케(kirche)’, 스웨덴에서는 ‘쿠리카(kurika)’, 영국에서는 ‘처치(church)’가 되면서, 바로 오늘날까지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이상의 탐구를 통해, 교회의 정체성을 정리한다면…
1) 교회는 사람이다.
2) 선택과 부르심(은혜)이 전제되어야 한다.
3) 거룩함이 특징이다.
4)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필수적이다.
5) 다른 신자들과도 교제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퀴리아코스’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멋지지 않습니까?
오늘도 ‘주님의 사람들’로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 잘 감당하는 멋진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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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재미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는 선언입니다.


천 년은 장구한 세월을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이기도 합니다.
물론 숫자적으로 천 년의 세월도 무척 긴 시간이지만, 이를 넘어서 천 년은 그 이상의 세월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숫자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 년은 숫자 천(1000)이 아니라 무수한 세월로 대치될 수도 있습니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루는 아주 사소한 일상의 시간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를 ‘하루’라고 나타내기도 하기 때문에, 이 시간의 단위는 무척 현실적인 실존의 시간입니다. 즉, 사람의 시간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시계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시간이 어떻게 존재했을까요?
네, 천문을 통해 존재했습니다. 보다 쉽게 말하면, 해와 달이 하루를 이루고, 여기에 별자리가 호응하며 일 년과 계절을 나타냈습니다.
이것은 아주 고대로 올라가도 세계의 모든 곳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어떠했을까요?
이를테면, 해와 달이 생겨나기 이전에, 별이 탄생하기 이전에 시간은 존재했을까요?


물론 우주적인 발견을 통해, 그 어떤 ‘다른 시계(other clock)’를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나타난 것은 반드시 그 기원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시간이란, 그 기원의 바탕이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존재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시간은 보다 근원적인 존재로 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만드셨을까요?
네, 창세기의 서술로 보면 이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해와 달과 별의 조화를 통해 일자와 절기를 이루도록 명령하시는 장면이 분명히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창조의 시작부터 ‘시간’의 개념이 이미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이러한 디자인으로부터 시간이 탄생했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 여러 번 확인하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전쟁 중에 정오의 해를 멈추도록 기도했던 사실이나, 히스기야왕이 기도를 통해 해시계의 그림자를 뒤로 물러서게(시간이 꺼꾸로 흐르게) 했다는 기록은, ‘시간’이 곧 하나님의 통제 가운데 있으며 순종한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이제 눈치를 채셨습니까?
하나님께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는 선언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신다거나 하루에도 많은 일을 하실 수 있다는 단순한 구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시간’의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만드셨고, 통치하시기 때문에, 그 시간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므두셀라입니다. 그의 연수는 성경에 969세로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창조 과학자들은, 노아 홍수 이전에 주로 사람들이 오래 살았다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본래 지구의 성층권에 물이 한 겹을 덮고 있어서 대부분의 자외선과 우주광선을 차단했는데, 노아의 홍수와 함께 하늘의 창문들이 열리면서 이 모든 물이 비로 쏟아져 사라졌고, 그래서 이후로는 자외선과 우주광선이 그대로 지구에 쏟아져 노화가 촉진되고 사람들의 수명이 극히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나름 설득력도 있고, 과학적이어서 매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사람들의 수명이 줄어든 이후에도, 특별한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성경에는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모세는 80세에 출애굽을 시작했고, 120세가 되도록 건강해서 엄청난 공무를 수행하고 시력에 지장이 없었습니다. 갈렙 역시 80세에 전쟁을 수행할 건강과 체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세월이 빗겨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저 단지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건강한 정도의 체력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층권의 물이 사라져서 자외선과 우주광선이 지구에 들어와 수명이 단축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결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의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일도 하나님의 결정에서 벗어남이 없습니다.
하물며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것이 우연히 대충 만들어지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가장 신비한 경륜과 능력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간섭하시고, 마침내 그 끝에 대해서도 결정하시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장수’를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장수는 길게 산다는 뜻 보다는 의미 있게 산다는 뜻이 훨씬 강합니다.
실제로 예수님도 서른 즈음의 나이에 십자가에 죽으셨고, 초대 교회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축복이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달력의 시간으로는 그들의 일생이 짧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이룬 의미의 시간으로 보았을 때에, 그들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선진들이 천 년의 세월을 살았던 것보다 훨씬 값진 인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었던 바탕에는, 모든 시간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타이밍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을 압축하셔서 더 치밀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떤 이들이 하나님의 시간을 더디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주장인지 알게 됩니다. 더디다, 빠르다는 것은 순전히 자기들의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느리고 빠름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적당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시간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복종하는데, 빠르고 더딘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이 이야기를 쓰는 것은, 시간에 대한 강박증이 매우 심한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업을 시작하면 처음 몇 개월 안에 결과가 나타나야 하고, 결혼을 하면 초장에 기선을 제압해야 하며, 심지어 사역에 대해서도 어떤 시한 안에서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들이 사람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조금 심한 말로 하면, 지금의 시대에는 ‘시간의 노예들’이 많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성경은 다르게 말합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어 돌아옵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능히 이루실 것을 사도는 확신합니다.
실체적 기한은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기 때문에, 시간의 개념은 중요하게 거론하지 않는 것입니다.
재미있게도 여기서 시간은 종(slave)일 뿐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120년 동안 만들었습니다.
처음 만들 때에 120년 동안 만들 것을 계획하고 시작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려주신 설계도를 따라, 산 위에 방주를 만들다 보니 세월이 흘러 120년이 지난 것입니다.
노아는 하루를 살았습니다. 그 하루가 모여 120년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120년은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계획된 타이밍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의 믿음에 있어, 이 시간에 대한 믿음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이를 많이 먹었기 때문에 이제는 시간이 없다!
누가 그럽니까? 죽을 날을 알기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설사 내가 다 끝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설사 내가 심기만 하고 세상을 떠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과 동역하는 인생을 살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결과야 천국에 가서 본다고 하더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사람에게 조급함이 찾아온 것은, 아마도 죽음의 경험 이후였을 것입니다.
창조의 때에는 시간이 내 편이었는데, 죄를 짓고 추방된 이후에는 비로소 시간이 내 편이 아니라 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은 항상 초조하고, 그 초조함 속에서 눈에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해서 그 많은 도시를 건설하고 땅을 정복하며 헛된 욕망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땅을 정복하고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이 영웅이 되어 삶의 모델로 등장하면서, 모든 인간은 바쁘게 살아가는 것을 하나의 미덕으로 신봉하게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이고,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면 시간이 우리에게 복종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내 아이가 대학을 못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내 아이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이, 내 아이가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이 살아가는 것이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내 아이가 하나님의 시간 안에 있다면, 조금 더디 보여도 결국에는 시간이 내 아이를 섬길 것이며, 마침내 축복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판단을 버려야 합니다.
그저 나는 하루에 살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하루를 천 년의 조각으로 맞추어 가십니다. 그 매일매일의 삶에 중요한 원칙은, 내가 과연 하나님께 순종하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조급하지 마십시오. 조급함은 내 시간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시간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시간은 적당합니다. 그야말로 적시(good timing)입니다.
하나님은 버릴 시간을 만드시지 않습니다. 시간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시간을 지배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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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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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LQ. 1. What is the chief and highest end of man?

A. Man's chief and highest end is to glorify God, and fully to enjoy him forever.

 

대1. 인간의 제일되며 가장 높은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의 제일되며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아담’은 고유명사이면서 일반명사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어원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붉은 흙(아다마)’에서 왔다는 견해를 나는 좋아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가장 훌륭한 해석이 아닐까 한다.

 

창조는 목적을 가진다. 그 이유는 창조주가 맹목의 비인격적 신이 아니라, 바로 깊은 지혜와 계획 가운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인격적 하나님이 아무 이유와 목적 없이 창조라는 거대한 일을 하실 리가 없지 않는가!

그 중에서도 ‘사람'의 목적은 모든 세상의 창조 목적을 수렴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바로 ‘사람’을 창조의 꽃으로, 모든 하나님의 창조의 핵심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심 되고(chief), 최고의(highest end) 목적이라는 언급 또한 깊이 새길 만하다.

이 말은 사람의 목적에는 근본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이 있음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말하는 답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필수적인 가치를 지닌다면,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사람을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는 주변적인 목적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예수님은 돌들로 떡을 만들라는 마귀의 시험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물론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이 사람을 살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는 사실에는 추호의 의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당장의 생존을 위하여 필요로 하는 ‘떡’의 존재 역시 부정되지 않는다.

자기가 믿는 믿음의 도리에 대하여 과도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모든 이외의 것을 배타적으로 보는 견해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런 견해는 대부분 세상을 망가지게 한다. 과격해진 주장은 분쟁을 만들며, 미움과 증오의 씨앗을 뿌린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열매를 통해 확증하건데 알곡이 아니라 가라지이다.

그런 점에서 폭력은 결코 정의를 이룰 수 없으며, 미움과 분노가 결코 선을 이룰 수 없다는 확신을 우리는 가져야 마땅하다.

 

반대로 진리의 자부심은 포용적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남편 다섯을 두었으나 지금도 역시 남편이 아닌 사내와 동거하고 있는 여인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셨을 때, 만약 그 여인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혹은 이후로 새 삶을 살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얼마나 불편한 입장이 되셨을까?

예수님의 주변에는 유난히 ‘용서받은 죄인들’이 많았다. 삭게오도, 마태도, 죄 많은 여인도… 모두 사회적으로 깊은 트라우마를 가져서 전혀 회복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친구가 되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모험이었다. 만약 그들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헌 신짝처럼 여기며 살게 된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얼마나 치명적인 모욕의 대상이 되었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모험하셨다. 자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음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그 어떤 편견과 굴레와도 상관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여셨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옳은 일에 대한 확신, 진리가 반드시 자유를 줄 것이라는 믿음… 그런 자신감이 없이 어떻게 미지의 영역을 향해 첫 발을 내디딜 수 있으랴! 예수님께서 자기와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믿음의 힘이었다.

 

사람은 복합적인 존재이다. 복합적이라는 것은, 많은 주변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정치적 결정에 민감하고, 어떤 사람은 이익에 민감하다. 어떤 사람은 감성적이고, 어떤 사람은 매우 현실적이다. 그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두 하나로 통일되고 획일적이 될 필요는 없다.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과 추구하는 목적은 존중 받아 마땅하다.

다만 성경은 그 모든 가치의 가장 중심에 계시된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통해 하나의 기둥을 세우기를 원한다. 그 기둥이 바로 믿음의 뿌리이며,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기초이다.

그리고 그것을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은 ‘중심 되고 최고의 목적’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의 제1문의 질문은, 이미 매우 함축적인 내용을 담아낸다.

첫째, 창조주 하나님이 인격적이고 지혜로운 분이라는 것.

둘째, 사람이 모든 창조물의 가장 대표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

셋째, 사람에게 있어 중심 되고 최고의 목적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성경의 목적이라는 것.

넷째, 사람은 이 목적을 중심으로 다른 모든 목적을 수렴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이번에는 대답을 보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토록 충만하게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두 개의 대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이다. 왜일까?

남산에서 최고로 높은 나무는 몇 그루인가? 높은 나무는 많지만 ‘최고로’(highest end)라고 한정하면 그것은 반드시 하나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중심 되며 최고의 목적은 하나이다. 다만 그것이 두 개의 문장처럼 보여지는 것은, 그 양편의 날개가 서로 보완하여 서로를 설명하고 온전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영원히 하나님을 향하여 충만한 기쁨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존귀하게, 합당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때문에 영광을 돌린다는 말과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말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로 묶여야만 하는 것이다.

왜 예배가 축제여야 할까? 실제로 성경은 구약부터 신약까지 계속해서 ‘잔치’의 이미지를 계속 천국과 연결시킨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필연적인 것이다.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에는 반드시 충만한 기쁨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회개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에서 주어지는 기쁨이 아니다. ‘회개’라는 말이 사람 안의 욕망을 죽이는 것이 아니던가.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속에서 사람이 얻게 되는 ‘충만한 기쁨’이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사람이 반응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최고의 예우요, 영광인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는 사람이 하나님의 노예로 창조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자유롭게 대우하셨으며, 그 결과 죄의 유혹과 타락조차 허용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아브라함과는 친구와 같다고 하셨고, 모세와는 얼굴을 대면하셨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셨다.

이 모든 것은 창조의 목적이 바로 ‘친밀한 교제’라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낙원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나님과 누리던 기쁨의 관계, 하나님의 보람이 되는 사람으로서 누리던 충만한 기쁨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다른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기쁨이며, 하나님과의 기쁨이다.

복음은 죄를 해결한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 자체는 아니다. 죄를 해결하는 까닭은, 그렇게 해서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목은 필연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기쁨을 가져오고, 그러한 사람의 반응은 곧 하나님을 지극히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 신앙에서 눈물은 극복의 대상이다. 눈물이 최상의 은혜가 아니다. 요한계시록에도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으신다고 되어 있다. 눈물은 아무리 긍정적인 것이라도 한시적인 과정이며 그 자체가 극복의 대상이다.

신앙에는 고통이 있다. 그러나 고통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사도들이 교회를 위한 핍박을 찬양하며 받아들인 것은, 그 핍박을 참고 인내했을 때에 주어지는 승리를 믿었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기쁨이 그 고통보다 훨씬 강하고 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실의 신앙을 보라. 은혜 받은 사람들은 가볍다. 무겁고 침울하며 한숨의 그늘에 살아가는 자는, 입으로 어떤 거룩한 언어를 내더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자가 아니다. 은혜는 사람을 아이처럼 만든다. 은혜는 삶의 질서를 단순화시키며, 복잡한 계산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 집중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그래서 범사에 감사한 것이며, 항상 기뻐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삶의 무게가 줄어들거나 모든 일이 형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더러 의인의 고난도 있어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십자가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는 고통보다 크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고통에, 절망에, 어둠에 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삶을 산다. 그것은 그들의 의지가 아니다. 그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때문에 하나님을 이기지 않는 이상 그들의 가슴에서 일어나는 열정과 소망을 꺾을 힘은 세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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