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21 예수님을 생각하고 화목을 힘쓰자
예수님을 생각하고 화목을 힘쓰자
2011-08-21 목양칼럼
20대에는 세상에 분노하고, 30대에는 세상에 절망하며, 40대는 세상에 적응하고, 50대는 스스로 세상이 된다. 왜 ‘어리다’는 말이 ‘어리석다’는 말과 통하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인간은 지극히 경험적이고, 그래서 아직 어린 시절에는 결코 인생을 깊이 조망(眺望)할 수 없다. 모르기 때문에 용감하고, 용감하기 때문에 허물 많은 것이 ‘젊음’의 이면이 아니겠는가!
목회를 하는 친구와 통화를 하니, 갑자기 최근에 함께 사역을 하던 부교역자가 둘이나 곁을 떠났다고 한다. 한 명은 선교지로 떠나려고 준비 중이고, 다른 한 명은 아직도 사역지를 찾는가 보다.
그러나 의외였다. 여름은 교회가 제일 바쁘게 움직이는 계절이 아니던가? 여름성경학교, 학생회와 청년부 수련회, 그리고 전교인 수련회 등으로 어느 교회든지 교회가 가지고 있는 힘을 다 기울이는 시기인데, 많지도 않은 사역자들 중에서 둘이 동시에 자리를 떠나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그렇게 힘든 결정을 했을까?
심상치가 않다. 우리도 부교역자 시절이 있었고, 그래서 담임목사와 교회의 무게감에 눌려 신음했던 때도 있었다. 어느새 우리 자신이 그 절망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갔다. 그들도 뭔가 맘에 맞지 않고, 나름 깊은 고민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를 나갔을 것이다. 기도도 했을 것이고, 이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으며, 지금도 구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건 아니다.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순간, 사명은 목숨보다 귀하다. 아무리 맘이 상하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양(羊)무리를 생각하고 참는 것이 사명자의 길이다. 더구나 자신의 선택으로 인하여 교회가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다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만약 오히려 그 어려움을 조장하고 즐기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살피시고 판단하실 것이다.
목회자로서 꼭 얻기를 바라는 소망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좋은 교인을 만나 그 인생과 신앙의 성공을 함께 이루는 것이고, 둘째는 좋은 동역자를 만나 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모세가 여호수아와 그러했듯, 바울이 디모데와 그러했듯이 말이다.
첫 번째 소원은 이루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교지에 나와 작은 교회를 섬기는 동안 두 번째 소원은 가슴에 묻어두고 애써 잊어야만 했다.
그래서 친구의 교회에 갔을 때에, 젊은 동역자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들을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며, 그들의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친구를 보면서도 감동스러웠다. 그런데 결과가 이리 되었다고 하니 멀리 있는 타인(他人)이면서도 마음이 아프고 쓰리다.
항상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최선을 원하시고, 결과는 별로 상관하지 않으신다고 말해 왔다. 하기사 하나님은 이미 완전하신 분인데 우리가 무엇을 더할 수 있으랴!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며, 이 소박한 진리 뒤에 교묘하게 숨어 있는 우리 자신의 위안과 변명을 깨닫게 된다. 신앙적인 결말에 이르지 못하면서 무엇을 최선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누가 그 ‘최선’을 결정하고 승인했는가? 자신인가, 아니면 하나님이신가?
양(羊)은 절대로 목회자를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사명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스스로 고독하고 평생 어려운 길이다. 원망도 많이 듣고, 비난도 많이 받는다. 다행스러운 것은, 성경을 봐도 영적 지도자들이 이런 취급을 늘 받아 왔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경우와 자신의 경우가 반드시 똑같다고 확신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잘 못 해서 비난 받는 것만은 아니며, 잘 해도 비난 받는 것이 사명의 길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인내하고 또 인내해야 한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스스로 자아를 죽이고 또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없고, 그분의 양떼를 돌보는 목회자가 될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친구 목사는 마음을 잘 추스르는 모양이다. 하지만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르기까지 이성과 감정 사이의 깊은 골을 경험할 것이다. 괘씸한 마음과 용서되지 않는 감정의 찌꺼기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기도를 방해할 것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가기 전에 잘 풀고 떠나기를 바란다. 서로 위하여 기도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간의 좋은 추억을 잘 간직할 수 있도록 성숙한 모습이었으면 한다.
예수님은 화목제물이 되셨다.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을 위해, 그리고 우리 서로의 화목을 위해 그분이 죽으셨다. 이 사실을 잠시라도 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신앙이다.
샬롬~
'목회 > 목양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1-09-04 모두 남의 일이 아니다 (0) | 2014.05.05 |
---|---|
2011-08-28 탁월한 사람의 비결 (0) | 2014.05.05 |
2011-08-06 내 마음을 맡아 주세요 (0) | 2014.05.05 |
2011-07-31 화해, 공존의 비밀 (0) | 2014.05.05 |
2011-07-24 깍두기 은혜 (0) | 2014.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