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율법적인 태도가 싫다. 율법적이라는 말은 금지, 제한, 규제, 강제의 이미지를 가진다. 본래 율법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상과 벌을 통해 선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폭력이다.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 행동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다. 복음은 일단 모순적이다. 죄를 지은 분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처벌하지 않고 구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관용과 용서의 뒤편에는 오히려 행동만이 아니라 그 정서와 생각까지 판단하는 치밀함이 숨어 있다.
예수님의 설교를 가만히 들어 보라. 율법이 살인이라는 행위를 정죄하였다면, 예수님의 복음은 살인의 원인이 되는 미움에서부터 이미 간섭하기 시작한다. 다만 그 미움과 살인을 인하여 사람을 포기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통하여 속사람을 새로 창조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때문에 복음은 필연적으로 인내의 기다림과 무제한의 투자를 동반한다. 설사 은혜를 깨달은 죄인이 회개를 하더라도, 그 회개가 삶의 실천으로 이어지고 정서를 충만하게 하기까지는 시간과 돌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로교의 교리에서는 이를 ‘신자의 견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단 번에 완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변화라는 과정을 통해 다루어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의 신앙생활에서 사람들은 율법적 권위를 카리스마 혹은 리더십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신앙적 리더십이 신자들에게 금지, 제한, 규제, 강제를 효율적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세속적인 인사관리 형식을 그대로 교회 안에서도 차용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그래서 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반대로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페널티를 가해서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방식이 성경적인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루시는 방법에서, 초대교회가 보여준 리더십에서 이런 모범을 찾아볼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목회자가 강한 책망으로 금지할 행위들은 성경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예루살렘교회가 이방인의 교회들을 받아들이며 제시했던 최소한의 요건들을 고려하더라도, 1세기의 초대교회는 매우 열린 사고와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관용적이었다. 왜냐하면 교회를 탄생시킨 ‘복음’ 자체가 바로 관용의 바탕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신자들이 설교를 듣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고 믿는다. 비록 당장은 지지부진(遲遲不進)하고 답답하더라도 그런 과정을 통해 신자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책임감 있는 신앙을 성장시켜 가야 한다.
그래야 시간이 걸려도 좋은 그리스도인이 만들어지고 세상의 풍조에 요동하지 않는 든든한 신앙으로 세워질 것이다.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고 스스로 생각하라. 그 과정을 게을리 하는 자는 아무리 훌륭한 교회를 다녀도 결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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