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한다
2012-11-25 목양칼럼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
하나의 상황에서도 사람마다 다양한 생각과 반응이 나온다는 것은, 사람에게 태생적으로 다양성을 추구하는 유전자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때문에 사람의 세상에서 완전한 ‘통일’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일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과연 국경을 통일하고, 모든 문화적 차이를 통일하고, 심지어 언어를 통일한다면 어떨까? 과연 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행복할까?
작은 반도의 나라가 반 토막이 나서 남과 북으로 갈라져 반목하며 살아온 것이 어언 반 세기를 훨씬 넘어섰다. 덕분에 어린 시절의 노래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고, 그 통일이 지독하게도 강박증이 되는 사회를 살아왔다.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이유도, 그 일이 틀려서가 아니라 남이 나쁘게 볼까 싶어서, 남사스러워서였다.
이러한 경험의 반복이 무의식에 쌓여, 이제는 그어진 선을 넘어 한 발을 내미는 것 자체가 극히 불안하다. 항상 다른 사람과 보조를 맞추는, 그 ‘통일’의 범주 안에서만이 안도감이 찾아오고 편안함을 느끼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에 반하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은 당시의 유대인 사회가 가장 강력하고 단호한 저지선으로 삼았던 ‘안식일’의 금지선을 넘으셨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야말로 ‘자유’의 선포였다. 그분은 종교의 관습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라고 가르쳐 주셨고, 그 바른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자유’를 결코 양보하지 않으셨다.
이 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자유’를 다시 사람의 ‘굴레’로 삼아 그 기준을 벗어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심지어 핍박하는 돌맹이로 오용(誤用)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다름[相異]’는 ‘틀림[過誤]’이 아니다. 물론 근본을 흐리게 하는 일을 용납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근본’인가에 대한 판단 역시,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진리를 판단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의 정신을 흔히 ‘와(wa,和)’라고 한다. 이 나라는 우리처럼 반토막이 났던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통일’에 목을 매고, 우리 보다 더 다름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 사회적 트라우마까지 깊이 살피지 못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하나 있다.
개인에게 집단의 가치를 지나치게 강요하는 이 사회적 강박증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복음의 장래가 어둡다는 것이다. 자유가 숨 쉴 틈이 없는데, 어떻게 예수의 정신이 바람처럼 이 땅에 불어 넘칠 수 있을까? 불처럼 가슴마다 번져 흐를 수 있을까?
그런데 가끔은, 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할 그리스도인들조차 오히려 더 이 땅에 동화(同化)되어, 앞뒤로 꽉 막힌 주장들을 하는 것을 보면, 정말 가슴이 답답하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전에 먼저 나를 변화시켜야 하는 사회에 사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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