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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소원이 간절하다고 믿는다. 자기만큼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의 경향은 나이와 상관없이 신자를 아이로 만든다. 좋은 의미에서의 아이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하는 어리석은 의미에서의 아이 말이다.

이러한 개인적인 착각에서 벗어나 바른 신앙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간절함'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직은 다 정리되지 못했지만, 최근에 간절함에 대하여 묵상한 내용을 먼저 정리한 것이다.

 

첫째, 성경이 말하는 간절함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다.

이 점이 우선 우리의 선입관을 깨뜨린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간절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먼저 응답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경쟁의식은 '선한 질투'로 포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열심을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을 통과하는 열심을 찾으신다. 이러한 기준은 사람마다 사명이 다르듯이 모두 다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더 귀하고 큰 일에 쓰시고자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더 특별하고 간절한 마음을 요구하신다.

 

성경에는 불임으로 마음 졸였던 부부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아이를 잉태하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것은 신앙과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아이를 주시지 않았던 것일까?

그들이 남들보다 기도를 덜 했을까? 신실함이 부족했을까? 죄를 지었기 때문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간절함이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충분한 수준의 간절함을 원하셨다.

보다 간단히 요점을 말하면, 성경에 아기를 반드시 잉태하는 비법 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문제의 해결에도 역시 적용될 수 있는 요점이다.)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곁눈질로 보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사람들은 '응답의 비결' 같은 것을 좋아하는데, 참 어리석은 일이다. 그 사람이 응답을 받은 것이 참고할 사항은 될 망정, 똑같이 나에게도 적용될 것이라고 확실히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군가의 경험을 토대로 신앙을 추구하는 일은 참 어리석은 일이다.

신자가 하나님을 추구함에 있어 절대성을 가져야 하는 믿음의 대상은 '성경' 하나뿐이다. 그래서 성경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성경을 잘 묵상하는 법을 배워가야 한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살피신다. 그리고 우리의 체질을 아신다.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돌아봐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고자 집중해야 한다. 그것만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유일한 길이다.

 

둘째, 하나님께 인정 받는 간절함은 선택을 통해 드러난다.

사람이 제일 쉽게 속는 것이 자신의 말이다. 원래 탁월한 거짓말쟁이는 남을 속이기 전에 먼저 자신을 속인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내 입에서 나가는 말들을 내 귀가 들으면서, 결과적으로 자신이 매우 간절하게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말은 곧 실제적인 선택을 통해 실체가 드러난다.

삶에서 신앙은 언제나 갈등의 원인이다. 욕망과 현실적인 이익 앞에서 과연 하나님의 정의와 신앙을 추구하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실천하지 않는다면, 입의 말은 허풍일 뿐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도 그런 이중성이 보이는데 하나님께서는 오죽하시랴!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이중성을 책망하셨다. 바리새인들의 말은 거룩했다. 심지어 그들은 남다른 행동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를테면, 시장 어귀에서 옷술이 큰 옷을 입고 손을 들어 기도하는 것이다. 이런 공개적인 신앙행위가 사람들을 거북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공개적인 기도는 예수님도 자주 하셨다. 오히려 더 많은 군중 앞에서 손을 들어 축사하시며 기도하신 것은 예수님이셨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차이가 무엇일까? 적어도 외양은 아니다.

그 차이는 십자가의 사건을 통하여 여실히 드러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순종하셨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항상 간절함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맞다. 살아 있는 사람은 무엇엔가 간절하다. 그리고 그 간절함을 되도록 거룩한 것을 향한, 가치 있는 것을 향한 것으로 해석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의 내면은 영악하다. 그리고 욕망은 천사의 모습을 가장하는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삶에서의 선택이 신앙을 증명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 것도 하나님을 위해 포기할 수 없는 신앙은, 말로만 포장된 위선일 뿐이다. 그런 신앙은 간절함과 거리가 멀다.

 

셋째, 간절함의 깊이는 고통의 깊이에 비례한다.

아픔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픔의 경험 밖에 없다.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아픔'의 깊이는 전달되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조차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이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하나됨'을 요구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는 아이가 아플 때에 가슴이 찢어진다. 연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기쁨과 슬픔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만약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상대방의 고통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보실까? 죄로 타락한 세상은 하나님의 슬픔이며, 고통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나 극적으로 설명하시는 하나님을 성경의 곳곳에서 만난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이나, 방탕한 고멜과 결혼하고 계속 사랑하라는 사명을 받았던 호세아, 태어나기도 전부터 십자가의 죽음을 예언 받았던 예수님의 경우는 모두 그 근원이 하나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슴에서 샘처럼 우러나는 슬픔이다.

때문에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던 것이다.

 

신앙적으로 간절하다는 것은, 자기 소원에만 집착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만 드러난다. 그리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슬픔이 보이게 되어 있다.

창조의 작품이 배신과 타락으로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하늘의 아버지. 그것이 바로 간절한 신앙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첫 번째 신앙적 현실(reality)이다.

 

고통은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다. 고통은 더 나쁜 상황으로의 진행을 막아준다. 만약 열이 나거나 피부가 찢어졌음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작은 고통이 커져서 마침내 생명을 위협하기까지 방치될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고통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큰 위험을 피하고 생명을 보호하게 되는 것이다.

간절한 신앙은 이 모순적인 체험을 우리에게 준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우리는 자신의 죄가 크게 보이고, 세상의 부조리가 절박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절망의 상황이 신앙인을 완전히 망가뜨리지 못하는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한다.

 

시편 37:23~24

37:2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37: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깊은 회개를 경험할수록 주의 붙드심은 더 강해진다. 결과적으로 간절한 심령은 영적으로 예민한 마음이며, 그 마음은 타락한 세상 속에서 필연적인 고통에 둘러싸이지만, 그 고통보다 큰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를 경험하기 때문에 강해지는 것이다.

 

 

넷째, 간절함은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복음서를 자세히 살피면, 재미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지금의 목회자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설교를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풍부하게 구약을 인용하시며 간접적으로 성경의 중요성을 보여 주셨지만, 그러나 직접적으로 '성경'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신 적은 없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님께서 매우 강조하신 의무가 하나 있다. 그것은 '구하라'는 명령이다. 물론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기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 더 깊이 연구하면, '구하라'는 말씀이 기도를 내포하는 보다 큰 범주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기도는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간에 그 근간이 '소원'이다. 소원하는 것이 없다면, 기도는 성립하지 않는다. 잘못된 기도는 잘못된 것을 소원하는 것에서 출발하며, 바른 기도는 바람직한 소원을 마음에 품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간절함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그 소원에 대한 열망이다. 시간적으로, 환경적으로 소원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원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중간에 포기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간절함이 부족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삼국지의 유명한 일화로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말이 있다. 유비가 제갈공명을 얻기 위하여 공명이 은거했던 초가집에 세 번을 찾아가 간절함으로 모셨다는 일화이다. 제갈공명은 점술가로도 탁월한 사람이었는데, 유비가 천하를 통일하지 못할 것을 알고는 따라 나서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그 덕(德)에 감동하여 고생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떠났다고 한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가르침이 자주 등장한다. 벗됨을 인하여는 주지 못해도 간청함을 인하여는 주리라 하신 말씀이나, 수로보니게의 가나안 여인이 자녀를 고치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았다가 거절당하지만 끝까지 모욕을 참고 견디어 마침내 자녀의 고침을 받는 사건 등은 모두 '간절함'이 어떻게 드러나야 마침내 응답을 얻게 되는가를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씨름하는 것을 즐기신다. 그 이유는 자녀와 씨름을 해본 아빠라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다. 이기기 위한 씨름이 아니라 져주기 위한 씨름이지만, 그 안깐힘을 통해 아빠는 아이와 친밀감을 나누고 자라나게 하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도 역시 그렇다. 우리의 관심이 '응답'이라면, 하나님의 관심은 '관계'이다. 때문에 이 씨름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유리하다. 하나님께서 굳이 주시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지 않다면, 주시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기쁨이다. 그 응답의 과정에 필요한 것은, 다만 우리의 인내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간절함은, 믿음의 인내를 통해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간절함은 최선을 의미한다.

태어난 사람은 성장한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다만 길고 오래 살며, 불쾌한 죽음을 피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생명이란 영원이란 시간 속에서 너무 심심하지 않을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영생은, 영원한 생명이면서 동시에 풍성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단지 긴 시간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채워지는 만족이 있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다면 풍성한 생명이란 어떻게 실현될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수령이 오래된 나무는 양평의 용문사 은행나무로 알려져 있는데 그 수령이 1100년이다. 세종대왕이 당상관의 벼슬을 내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렇다면 천 년이 넘은 은행나무의 키는 얼마나 될까? 기록에 따르면, 60미터에서 40미터를 오르내리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최근의 측정으로는 41미터가 안내되어 있다.

이 나무에서 매년 은행 15가마가 열린다고 한다. 천 년의 거목이 아직도 그 키가 자라고, 매년 15가마 이상의 은행을 열매 맺는 것을 보며, 풍성한 생명을 묵상한다.

 

 

성경은 '성장'을 신앙의 필수적인 과정으로 명령한다. 신자에게 성장하라는 것은 권면이 아니라 명령이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생명 자체를 의미 있게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풍성한 생명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성장은 언제나 한계를 갱신하는 자기 극복에서 일어난다. 누워있던 아이가 기고, 기던 아이가 물건을 잡고 일어서고, 일어선 아이가 넘어지면서도 걷고, 간신히 걷던 아이가 걸음을 빨리 하여 달리고, 달리던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스케이트를 타고, 스키를 타고… 그 한계의 극복, 자기의 실현이 곧 성장이며, 이 성장이야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숨겨두신 가능성은 아무도 가늠할 수 없다. 처음에는 못한다고 생각하던 일도 막상 닥치면 넉넉히 해내는 경우가 많다. 욥을 생각해 보라. 그런 고난을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욥은 감당했다. 물론 욥의 인내가 대단하다. 그러나 그 욥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 아니신가! 결국 욥의 인내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간절함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는 최선을 끌어낸다. 물론 최선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잘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미국의 한 일간지에서 조사를 했다. 12~19개월의 아이들을 비디오로 계속 촬영하고, 그 24시간에 대한 통계를 만들었다. 재미 있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아이들은 하루에 평균 4킬로미터 정도를 걷고 뛰었다. 이것을 걸음으로 환산하면, 14200 걸음이다. 그리고 하루 넘어지는 횟수가 102회라고 한다. 이것은 평균 1시간에 17번, 분으로 계산하면 3~4분마다 한 번씩 넘어지는 것이다.

심지어 조사에 등장했던 어떤 아이는 하루에 142번이나 넘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벌떡 일어섰고, 또 다시 걸었다.

 

우리가 성장해온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점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고 충격이 깊어진다. 실패를 연연하지 말고 일어서 앞으로 가면 되는데, 자꾸만 실패를 곱씹고, 생각하고, 겁쟁이가 된다.

간절함은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간절함 속에서 바로 최선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응답을 지체하시며, 보다 간절하기를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성장하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그 부족의 자리, 결핍 속에서 우리는 더 연단되고 마침내 자기를 극복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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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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