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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6.21 아이를 위해서 살아라
  2. 2011.06.21 찬란한 은발
  3. 2011.06.21 화해, 공존의 비결


2011-06-21 목양칼럼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은 모든 부모의 소망이다. 

잘 키운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각자 다르게 해석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공통점은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좋은 영양상태를 통해 발육과 체력을 양호하게 하는 것,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것, 교육을 통해 지적 수준을 발전시키는 것 등과 같은 것들 말이다.
처음에는 아이를 돌보는 일이 매우 단순하지만, 아이가 자랄수록 점점 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이 나타난다. 그래서 아이가 장성한 부모들은 아직 어린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그 때가 좋았다!”고 흔히 말하는 것이다.
물론 밤잠을 설치며 아이의 젖병을 물려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아이의 자존감을 지켜주고, 친구관계를 신경 쓰고, 나쁜 버릇을 고치고, 때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반항에도 대처하는 일은 그런 일들보다 분명히 더 어렵다.
더구나 아이의 부모도 처음부터 부모는 아니었다. 부모가 되는 일에 대하여 당혹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부모’는 자식을 키워가는 과정을 통해 함께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 속에서 좌충우돌(左衝右突),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부모는 부모답게 변하고 세워진다. 때문에 부모가 되도록 시행착오를 덜 하는 것이 아이를 잘 키우는 비결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위해 약간의 조언을 드리고자 한다. 이름하여 좋은 부모의 조건이다.


첫째, 넓고 깊게 배우라. 직감이나 추측으로 하기 보다는 경험을 찾고, 지식을 공유해야 한다. 역시 제일 좋은 것은, 자신의 부모님에게서 부모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과거의 대가족 제도는 그런 점에서 큰 이점이 있었던 것 같다.
젊은 부모들은 책이나 인터넷의 지식을 너무 과신하는데, 이것이 함정이 되기도 한다. 참고하더라도 너무 확정적으로 받아들이지는 말라. 어떤 것들은 아무 근거도 없으면서 그럴 듯하게 포장된 지식들도 많이 있다. 그래서 늘 공부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찾고, 탐구해야 한다.


둘째, 아이와 교감하라. 부모가 주고 싶은 것을 일방적으로 아이에게 쏟아 부으면, 효과도 떨어지고 심지어 아이를 다치게 할 수도 있다.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내고, 스스로 원하게 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줄 때에, 부모의 사랑이 가장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대화도 중요하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도 중요하다. 아이는 모든 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부모가 찾아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을 위해서는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충분해야 한다.
꼭 아이를 위해 봉사할 필요는 없다. 그냥 아이와 같은 공간을 사용하고, 아이의 곁에 함께 있어주면 된다. 물론 눈과 귀를 기울이고, 아이에게 마음을 써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셋째, 원칙을 가져라. 불안정은 일관성이 없는 것에서 비롯된다. 어떨 때에는 허락되었다가 어떨 때에는 금지되는 것은 아이에게 도덕과 선, 규범을 배우게 하는 것에 결정적 방해가 된다.
부모의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기준이 확고하고, 또한 설득력이 있을수록 아이는 안정감을 가지고 자라게 된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기준을 삼아야 한다. 성경의 말씀을 생활의 원칙으로 삼도록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다면, 아이의 정서와 도덕, 그리고 신앙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선택이 될 것이다.
늘 어머니가 성경을 읽고, 그 성경으로 말하고, 그 성경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에, 아이는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느끼게 된다. 이런 유산을 물려줄 수 있다면, 그 아이의 인생은 복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라. 아이를 위해 살라. 그것이 모든 부모들의 사명이다. 하지만 이 말이 단지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것으로만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아이를 위해 사는 부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인생을 아이의 모범으로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부모가 아름다운 삶을 살지 못한다면, 아이는 어떤 면으로든지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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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은발

목회/목양칼럼 / 2011. 6. 21. 17:00



2011-06-21 목양칼럼

capture-0009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본래 억울하고 슬프기만 한 일은 아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육신의 노쇠함 이상으로 그의 정신과 인격이 풍요할 수 있다면 나이를 먹어가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며 행복할 수도 있는 일이다.

결국 세월에 대한 한탄은 흘러간 세월에 비하여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다는 자각에서 나온다. 나이만 먹었지 도대체 인생에 발전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우리는 정신적으로 추락하는 비행기처럼 곤두박질친다.

성경에는 나이 먹은 사명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아브라함이 새출발을 결단한 것이 75세였고,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타는 사명의 나무를 보았던 것은 80세였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여호수아와 갈렙도 70세가 훨씬 넘어서 가나안 전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물론 더 일찍 믿음을 가지고 순종했다면 더 많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섭리와 사명의 준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극히 인간적인 생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셉과 다윗의 인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설사 아주 늙은 나이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압축된 세월 속에서 사명자를 ‘나이 먹게’ 하신다. 속된 말로 ‘애늙은이’를 만드시는 것이다. 이러한 숙성의 과정이 없이 사명자는 만들어질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준비이다. 하나님은 사명자에게 능력이 아니라 인격을, 지능이 아니라 지혜를, 기술(skill)이 아니라 경륜을 원하시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특별한 은혜 속에서, 보낸 세월(나이)보다 훨씬 깊은 것을 얻었으며, 그로 인하여 시대를 변화시키는 탁월한 사람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나이 먹는 것이 두렵지 않다. 이룬 것이 적지만, 그래도 괜찮다.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고 정리된 것이 늘어갈수록 언젠가는 이것들이 꼭 요긴하게 사용될 때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왜냐하면 사명자로서의 내 세월은 결국 하나님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하루는 목회로 인하여 많이 속상했다. 가슴에서 눈물이 났다. 속상함을 달랠 길이 없어 우두커니 창가에 서 있다가, 결국에는 기도자리에 앉았다. 가슴에서 펌프질을 계속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이 말씀을 들었다.

(이사야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 일은 그냥 억울한 일이 아니다. 나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세월일 뿐이다. 결국 이 슬픔도 내 재산이 될 것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내 인생의 상처들을 통해 오히려 하늘의 진주들을 만드실 것이다.

깨달음의 순간에 나는 손을 들고 감사했다. 문제는 잊혀졌고, 은혜만 남아 빛이 났다.

흰머리에 부끄럽지 말자. 세월은 나를 익어가게 한다. 역경과 고난은 그분의 사랑이다. 내가 그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분은 나를 중요하게 사용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이 시대를 향한 내 안의 메시지이다. 공허한 말이 아니라, 피 묻은 복음이 필요하다. 비루한 것들을 단칼에 날릴 수 있는 날카로운 말씀의 검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지금 이 광야에서 나에게 그 검의 길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가치 있는 길을 가고 있다면 세월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세상이 무어라고 말하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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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목양칼럼

capture-0008서로 사이 좋게 지내는 비결은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잘 싸우고 잘 화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가치관이 다른 사람이 함께 지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유발한다.

특별히 일본에 와서 그것을 더 확인하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한국에서 아주 친한 친구들이 함께 일본에 와서 룸메이트로 지내다가 문제를 겪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약간은 과장된 이야기가 되겠지만, 친구로 와서 원수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사람을 사귀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깨어진 관계를 봉합하고 다시 친구가 되는 방법, 곧 ‘화해’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사소한 문제를 두고서도 극단적으로 대치하다가 결국에는 좋은 사람을 잃는 경우가 많은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화해(和解)’란 서로 조화를 찾고 문제를 푼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먼저 암묵적인 전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싸움을 했더라도 잘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뜻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서 충돌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잊지 못할 수준의 모욕이나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망각은 불편한 약점이기도 하지만 은혜로운 축복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에게 어떤 기억은 평생 잊혀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가해자는 잊더라도 피해자는 잊지 못하기 쉽다. 그리고 그런 기억을 남기게 되면 아무리 화해를 위해 노력해도 완전한 회복이 불가능할 수 있다.

물론 싸울 때에는 감정에 취해서 다시는 안 본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신중해야 한다.

‘만약’이라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에 두고 싸워야 한다. 좀 더 발전한다면, ‘화해’할 것을 미리 계산하면서 싸우는 노련함이 필요하다. 우리가 나중에 화해할 것을 미리 생각하면서 싸울 수 있다면, 우리의 표현과 방법이 당연히 많이 순화되게 될 것이다.

화해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니다. 사실은 화해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인격적인 결함이며, 잘못이다. 어떤 사람에게서도 완전함을 기대할 수 없듯이, 우리가 만나는 갈등에서도 어느 한 편의 일방적인 잘못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많고 적음은 있겠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화해의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자기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성숙함이다. 미련한 사람은 갈등 속에서 상대방의 잘못만을 계속 생각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를 개선해야 할 내용을 생각한다. 심지어 타인의 잘못이라도, 그것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는 것[타산지석(他山之石)]이 참된 지혜이다.

화해하라. 되도록이면 사람을 잃지 말아라. 설사 헤어지더라도 화해하고 헤어지라. 야곱과 에서도 화해했지만 그들이 이후로 함께 살지는 않더라. 하지만 계속 미워하며 떨어져 사는 것과 서로를 향한 좋은 감정을 가지고 떨어져 사는 것은 전혀 다르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화해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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