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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경 국립신미술관에서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전을 보다.

아침부터 시내에 나갈 일이 있어서 외출한김에 녹본기(六本木)에 있는 국립신(新)미술관에 다녀왔다.
모르고 갔지만, 오늘의 메인 기획전은 [워싱턴 내셔널 캘러리전]이다.



물론 서양미술은 유럽이 그 중심이지만, 돈 많은 나라인 미국에 가치 있는 작품들이 의외로 많이 수집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리고 오늘 그것을 확인했다.
이번에 일본에 들어온 작품은 모두 83점이다. 작품의 분류는 인상파, 포스트 인상파의 작품들이다.

마네, 모네, 드가, 르누와르… 그리고 고흐의 그림이 걸렸다.
하나같이 쉽게 보지 못했던 작품들이다.
특히, 좋아하는 고흐의 그림 두 점은 완전히 첫만남이다. 나는 그 앞에서 다리가 붙어 버렸다.



고흐의 초상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무래도 프랑스의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된 위의 작품이 아닐까 한다.
1890년 7월에 권총으로 자살했던 고흐가 1889년 9월 즈음에 생레미의 정신병원에서 그린 그림이다.
사람들은 지중해의 물결을 연상시키는 배경의 무늬와 색감에서, 그리고 마르고 강렬한 눈빛의 표정에서 고흐의 정신과 조우한다.
그런데 오늘 이 작품과 거의 같은 시기에, 거의 같은 구도로 그려진 다른 그림을 보게 되었다.



이 작품도 역시 1889년9월 즈음, 그러니까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그린 자화상이다.
컴퓨터 사진으로는 표현이 되지 않는데…
음, 이 그림의 느낌을 말로 표현 할 수가 없다.
아마도 이래서 사람들이 진품을 보기 위해 멀리 유럽까지 가는가 보다.
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그냥 그림 앞에서 숨을 죽이게 하는… 작품이다.

고흐는 1889년 5월8일에 스스로 생레미 정신병원에 들어갔다고 한다.
지독한 우울증 때문이었다.
파리에서 고갱과 싸우고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은 그 이전이다.
이후로 그의 우울증이 점점 심해져 갔던 것 같다.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들어가서도 고흐는 그림을 놓지 않았다.
모델을 구할 수 없었던 고흐는, 이 시기에 자신의 자화상을 집중적으로 그렸다.
그래서 무려 40여 점 이상의 자화상을 남겼다.
고흐는 이 시절에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한 사람에게서 여러 성격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자화상을 통해 고흐가 그렸던 것은, 자기의 얼굴이 아니라 자아였다는 생각이 든다.
점점 잃어가는 자신을 그림을 통해 붙잡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붓의 터치가 굵었다. 어깨는 산맥처럼 뻗어 내렸다.
그는 왼손에 팔레트를 들고 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있다.
눈동자도 파랑이다.
곱쓸의 머리는 마치 태양의 이글거림을 연상시킨다.
무엇보다 그 눈빛이 강렬하면서도 우울하게 빛나고 있다.
마른 얼굴과 강조된 광대뼈가 창백한 푸른 빛의 안색과 조화되고 있다.
굳게 다문 입은 오래 말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눈은 계속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배경에는, 지워진 주변의 일렁거림… 그건 시간처럼 느껴진다.
겹겹이 고흐를 덮고 눌렀던 시간… 그리고 그 텁텁한 우울함.

나는 한 시간은 이 그림을 보았던 것 같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나이 지긋한 부부가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미술관을 찾아 함께 그림을 보는 풍경은 부럽기만 하다.
그러나 이 전시회에는 젊고, 어린 사람들도 많았다.
그 군중 속에 멈춰서 그림 속의 고흐와 눈을 마주치고. 묻고 대답하고… 한참을 생각했다.
다리가 아팠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거기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붙들렸다.
아직은 고흐와의 이야기를 끝내지 못했다.
그래서 이 글을 쓰지만, 아직 무슨 말도 하지 못하겠다.
한참을 그의 자화상 앞에 서 있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일렁였다.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말들,
아마도 다시 고흐의 책을 읽으며 그와의 대화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

 

빈센트 반 고흐 (1853.3.30 ~ 1890.7.29)

1853년 - 3월30일 네덜란드의 흐로트쥔데르트지역 목사의 아들로 태어남
1857년 - 5월1일 동생 테오가 태어남. 반 고흐는 테오와 아주 가깝게 지냈으며, 평생 테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음
1869년 - 8월 고흐는 구필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 들어가 일하게 됨
1873년 - 1월에 고흐의 동생 테오도 구필 화랑의 뻴기에 지점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반고흐는 런던 지점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2년간 일함
1875년 - 반고흐는 구필 화랑의 지점에서 파리 지점으로 또 다시 자리를 옮김. 그러나 그는 파리에서 미술관을 다니고 책과 성경을 읽느라 화랑의 일을 소홀히 함
1876년 - 구필화랑에서 해고를 당하고 영국으로 감, 그리고 12월에 부모님이 계신 네덜란드의 에덴으로 돌아감
1877년 - 도르트레히트에 있는 서점에서 일하다가 신학공부를 하려고 5월에 암스테르담으로 떠남
1878년 - 목사가 되려고 신학을 공부하던 반 고흐는 이 계획을 포기하고 브뤼셀에서 3개월간 복음 전도사 교육을 받음. 그러나 그는 복음 전도사로 임명받지 못했고 벨기에의 탄광지대인 보리나주로 가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며 선교 활동을 했음
1880년 - 보리나주에서 열심히 선교 활동을 했으나 종교권위층에서 그의 지나친 열의를 달가워 하지 않아 그는 선교 활동을 그만둠 . 그래서 그는 브뤼셀로 갔고 그곳에서 네덜란드 화가 안톤 반 라파드를 만나고 친구가 됨. 그 당시에 동생 테오가 조금씩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함
1881년 - 고흐는 헤이그로 감. 그리고 다음해 그곳에서 창녀인 시엥을 알게 되지만 동생 테오의 반대로 헤어짐
1883년 - 고흐는 드렡네에서 몇 달간 머무르다가 아버지가 새로 옮겨 간 누에넨으로 가서 작품활동을 시작함
1885년 - 3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남. 고흐는 그림의 모델이었던 한 여인과 연애설이 퍼지자 누에넨을 떠나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으로 가게 되었고, 다시는 네덜란드로 돌아가지 않음
1886년 - 안트베르펜에 있는 동안 고흐는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 작품 공부를 몰두, 그러나 전통 아카데미의 화풍과 달랐던 그의 작품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함.
그는 결국 동생 테오가 있는 파리로 가서 코르몽의 화실을 다니며 에밀 베르나르,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루이 앙크탱 등을 알게 됨
1887년 - 친구가 된 베르나르와 함께 파리에서 멀지 않은 아니에르에 가서 센강의 풍경을 자주 그림. 그는 드가의 그림 모델이기도했던 이탈리아 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를 알게 되어 사귀게 됨 . 또한 고흐의 미술품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된 미술재료 상인인 페르탕기와도 친구가 되었음
1888 - 파리가 싫어진 반 고흐는 프로방스의 아를로 감, 그리고 그곳에서 예술가들의 모임을 만들 생각으로 <노란집>을 빌려 장식했음. 10월에 폴고갱도 아를로와서 노란집에서 머뭄. 그러나 고흐와 고갱은 성격이 많이 달랐기 때문에 자주 싸웠으며, 결국 성탄절 전날밤에 고흐는 고갱과 싸운후 자신의 한쪽귀를 잘라 버리는 사건이 발생함
1889년 - 테오의 친구인 여동생 요한나 봉거와 결혼했으며 아들을 낳아 반 고흐의 이름을 따 빈센트라고 이름을 지음.
그해 5월8일 고흐는 스스로 생레미에 있는 정신 병원에 입원함
1890년 - 동생 테오의 노력으로 고흐는 파리 근교에 있는 오베르로 옮기게 되었고 가셰 박사에게 치료를 받음. 그러나 7월27일 권총으로 자신을 쏘고 마지막으로 동생 테오를 만난후 7월29일 세상을 떠남
1891년 - 1월25일 고흐가 세상을 떠난지 6개월 후에 동생 테오도 세상을 떠남 , 그리고 오베르에 있는 반 고흐의 묘지 옆에 묻힘
* 살아 생전에 이름을 알리지 못했던 반고흐의 그림은 화랑에서 일하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졌고 테오는 고흐와 고갱의 그림을 미술 재료 상인인 페르 탕기에게 싼값게 팔게 되면서 후에 고흐가 죽고 나서 페르탕기에 의해 많은 고흐의 그림들이 깨끗한 상태로 소장이 되어있었다고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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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1 목양칼럼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은 모든 부모의 소망이다. 

잘 키운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각자 다르게 해석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공통점은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좋은 영양상태를 통해 발육과 체력을 양호하게 하는 것,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것, 교육을 통해 지적 수준을 발전시키는 것 등과 같은 것들 말이다.
처음에는 아이를 돌보는 일이 매우 단순하지만, 아이가 자랄수록 점점 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이 나타난다. 그래서 아이가 장성한 부모들은 아직 어린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그 때가 좋았다!”고 흔히 말하는 것이다.
물론 밤잠을 설치며 아이의 젖병을 물려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아이의 자존감을 지켜주고, 친구관계를 신경 쓰고, 나쁜 버릇을 고치고, 때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반항에도 대처하는 일은 그런 일들보다 분명히 더 어렵다.
더구나 아이의 부모도 처음부터 부모는 아니었다. 부모가 되는 일에 대하여 당혹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부모’는 자식을 키워가는 과정을 통해 함께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 속에서 좌충우돌(左衝右突),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부모는 부모답게 변하고 세워진다. 때문에 부모가 되도록 시행착오를 덜 하는 것이 아이를 잘 키우는 비결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위해 약간의 조언을 드리고자 한다. 이름하여 좋은 부모의 조건이다.


첫째, 넓고 깊게 배우라. 직감이나 추측으로 하기 보다는 경험을 찾고, 지식을 공유해야 한다. 역시 제일 좋은 것은, 자신의 부모님에게서 부모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과거의 대가족 제도는 그런 점에서 큰 이점이 있었던 것 같다.
젊은 부모들은 책이나 인터넷의 지식을 너무 과신하는데, 이것이 함정이 되기도 한다. 참고하더라도 너무 확정적으로 받아들이지는 말라. 어떤 것들은 아무 근거도 없으면서 그럴 듯하게 포장된 지식들도 많이 있다. 그래서 늘 공부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찾고, 탐구해야 한다.


둘째, 아이와 교감하라. 부모가 주고 싶은 것을 일방적으로 아이에게 쏟아 부으면, 효과도 떨어지고 심지어 아이를 다치게 할 수도 있다.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내고, 스스로 원하게 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줄 때에, 부모의 사랑이 가장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대화도 중요하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도 중요하다. 아이는 모든 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부모가 찾아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을 위해서는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충분해야 한다.
꼭 아이를 위해 봉사할 필요는 없다. 그냥 아이와 같은 공간을 사용하고, 아이의 곁에 함께 있어주면 된다. 물론 눈과 귀를 기울이고, 아이에게 마음을 써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셋째, 원칙을 가져라. 불안정은 일관성이 없는 것에서 비롯된다. 어떨 때에는 허락되었다가 어떨 때에는 금지되는 것은 아이에게 도덕과 선, 규범을 배우게 하는 것에 결정적 방해가 된다.
부모의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기준이 확고하고, 또한 설득력이 있을수록 아이는 안정감을 가지고 자라게 된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기준을 삼아야 한다. 성경의 말씀을 생활의 원칙으로 삼도록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다면, 아이의 정서와 도덕, 그리고 신앙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선택이 될 것이다.
늘 어머니가 성경을 읽고, 그 성경으로 말하고, 그 성경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에, 아이는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느끼게 된다. 이런 유산을 물려줄 수 있다면, 그 아이의 인생은 복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라. 아이를 위해 살라. 그것이 모든 부모들의 사명이다. 하지만 이 말이 단지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것으로만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아이를 위해 사는 부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인생을 아이의 모범으로 보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부모가 아름다운 삶을 살지 못한다면, 아이는 어떤 면으로든지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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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은발

목회/목양칼럼 / 2011. 6. 21. 17:00



2011-06-21 목양칼럼

capture-0009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본래 억울하고 슬프기만 한 일은 아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육신의 노쇠함 이상으로 그의 정신과 인격이 풍요할 수 있다면 나이를 먹어가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며 행복할 수도 있는 일이다.

결국 세월에 대한 한탄은 흘러간 세월에 비하여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다는 자각에서 나온다. 나이만 먹었지 도대체 인생에 발전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우리는 정신적으로 추락하는 비행기처럼 곤두박질친다.

성경에는 나이 먹은 사명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아브라함이 새출발을 결단한 것이 75세였고,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타는 사명의 나무를 보았던 것은 80세였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여호수아와 갈렙도 70세가 훨씬 넘어서 가나안 전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물론 더 일찍 믿음을 가지고 순종했다면 더 많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섭리와 사명의 준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극히 인간적인 생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셉과 다윗의 인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설사 아주 늙은 나이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압축된 세월 속에서 사명자를 ‘나이 먹게’ 하신다. 속된 말로 ‘애늙은이’를 만드시는 것이다. 이러한 숙성의 과정이 없이 사명자는 만들어질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준비이다. 하나님은 사명자에게 능력이 아니라 인격을, 지능이 아니라 지혜를, 기술(skill)이 아니라 경륜을 원하시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특별한 은혜 속에서, 보낸 세월(나이)보다 훨씬 깊은 것을 얻었으며, 그로 인하여 시대를 변화시키는 탁월한 사람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나이 먹는 것이 두렵지 않다. 이룬 것이 적지만, 그래도 괜찮다.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이고 정리된 것이 늘어갈수록 언젠가는 이것들이 꼭 요긴하게 사용될 때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왜냐하면 사명자로서의 내 세월은 결국 하나님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하루는 목회로 인하여 많이 속상했다. 가슴에서 눈물이 났다. 속상함을 달랠 길이 없어 우두커니 창가에 서 있다가, 결국에는 기도자리에 앉았다. 가슴에서 펌프질을 계속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이 말씀을 들었다.

(이사야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 일은 그냥 억울한 일이 아니다. 나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세월일 뿐이다. 결국 이 슬픔도 내 재산이 될 것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내 인생의 상처들을 통해 오히려 하늘의 진주들을 만드실 것이다.

깨달음의 순간에 나는 손을 들고 감사했다. 문제는 잊혀졌고, 은혜만 남아 빛이 났다.

흰머리에 부끄럽지 말자. 세월은 나를 익어가게 한다. 역경과 고난은 그분의 사랑이다. 내가 그분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분은 나를 중요하게 사용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이 시대를 향한 내 안의 메시지이다. 공허한 말이 아니라, 피 묻은 복음이 필요하다. 비루한 것들을 단칼에 날릴 수 있는 날카로운 말씀의 검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지금 이 광야에서 나에게 그 검의 길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가치 있는 길을 가고 있다면 세월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다. 세상이 무어라고 말하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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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목양칼럼

capture-0008서로 사이 좋게 지내는 비결은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잘 싸우고 잘 화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가치관이 다른 사람이 함께 지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갈등을 유발한다.

특별히 일본에 와서 그것을 더 확인하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한국에서 아주 친한 친구들이 함께 일본에 와서 룸메이트로 지내다가 문제를 겪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약간은 과장된 이야기가 되겠지만, 친구로 와서 원수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사람을 사귀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깨어진 관계를 봉합하고 다시 친구가 되는 방법, 곧 ‘화해’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사소한 문제를 두고서도 극단적으로 대치하다가 결국에는 좋은 사람을 잃는 경우가 많은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화해(和解)’란 서로 조화를 찾고 문제를 푼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먼저 암묵적인 전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싸움을 했더라도 잘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뜻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서 충돌을 하더라도 상대방이 잊지 못할 수준의 모욕이나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망각은 불편한 약점이기도 하지만 은혜로운 축복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에게 어떤 기억은 평생 잊혀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가해자는 잊더라도 피해자는 잊지 못하기 쉽다. 그리고 그런 기억을 남기게 되면 아무리 화해를 위해 노력해도 완전한 회복이 불가능할 수 있다.

물론 싸울 때에는 감정에 취해서 다시는 안 본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신중해야 한다.

‘만약’이라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에 두고 싸워야 한다. 좀 더 발전한다면, ‘화해’할 것을 미리 계산하면서 싸우는 노련함이 필요하다. 우리가 나중에 화해할 것을 미리 생각하면서 싸울 수 있다면, 우리의 표현과 방법이 당연히 많이 순화되게 될 것이다.

화해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니다. 사실은 화해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인격적인 결함이며, 잘못이다. 어떤 사람에게서도 완전함을 기대할 수 없듯이, 우리가 만나는 갈등에서도 어느 한 편의 일방적인 잘못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많고 적음은 있겠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화해의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자기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성숙함이다. 미련한 사람은 갈등 속에서 상대방의 잘못만을 계속 생각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를 개선해야 할 내용을 생각한다. 심지어 타인의 잘못이라도, 그것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는 것[타산지석(他山之石)]이 참된 지혜이다.

화해하라. 되도록이면 사람을 잃지 말아라. 설사 헤어지더라도 화해하고 헤어지라. 야곱과 에서도 화해했지만 그들이 이후로 함께 살지는 않더라. 하지만 계속 미워하며 떨어져 사는 것과 서로를 향한 좋은 감정을 가지고 떨어져 사는 것은 전혀 다르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화해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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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7 목양칼럼

요즘 찬혁이가 시험기간이다. 본인의 말로는 시험공부를 매일 5시간 정도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외에도 시험에 임하는 준비가 남다르다. 우선 밤 10시가 넘으면 무조건 잠자리 준비를 해서 늦어도 11시에는 잠자리에 든다. 잠자기 직전에 샤워를 하고 꼭 따뜻한 우유를 한 잔 마시는데, 이것은 숙면을 위한 처방이다. (평소에는 따뜻한 우유가 아니라 날씬한 몸매를 위해 감식초를 넣은 우유를 마신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다시 샤워를 한다. 물의 온도가 중요한데 40도 정도가 적당하다. 이 정도 온도라야 온 몸의 세포가 깨어나 최선의 컨디션을 발휘하게 된단다. 또한 뇌를 위해서 꿀물을 한 잔 마셔준다. 적당한 당분은 뇌세포를 활성화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찬혁이는 말한다.
아들 녀석의 호들갑(!)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저 녀석이 뭐를 해도 하겠구나! 온 식구들의 눈치를 받으면서도 저렇게 컨디션을 챙기고, 자기를 아끼는 것을 보면 시험결과도 분명 나쁘지 않겠구나…’
사람은 믿음 속에서 성장한다. 특별히 자신에 대하여 어떤 믿음을 가지는가에 따라서 인생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자기를 믿는 사람은, 결코 자기를 함부로 하지 않는다. 자기 인생을 소중하게 여기면 타인의 인생도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그 상호작용에 의하여 사람은 위대하고, 아름답게 세워지는 것이다.
미래는 결코 불쑥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어제와 오늘의 결과이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굴곡(屈曲)이 있지만, 그 과정에서도 자기를 향한 믿음을 지키고 스스로 자기를 소중히 여길 때에, [=자중자애(自重自愛)] 마침내 희망의 해가 떠오른다. 어려운 때가 지나고 기회가 왔을 때에, 그는 그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실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관계를 되도록 넓게 하라. 항상 노력하고, 기회 앞에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후회 없도록 살아야 한다. 그러나 기억하라! 이 모든 것의 근원은 밖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내가 나를 믿고 사랑하지 않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를 편안함 속에 방치하며 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돌아갈 희망은 없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을 때에도 거울을 보고 말하라. 너는 소중하다. 너는 할 수 있다. 너의 꿈은 현실이 될 것이다. 그 날을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하자. 함부로 살지 말고 가장 소중한 사람답게 훌륭하게 하루를 살자!
유명한 처칠의 연설처럼,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이미 절망이다. 그러나 자기를 지키면 언젠가는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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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6 목양칼럼

먹구름이 짙게 일어난다. 계절이 바뀌고, 기후가 변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오래 살다 보니 모든 자연이 당연하게만 보이기도 하지만, 가끔 창가에 서서 사색에 잠기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놀란다. 자연은 내게 경외심을 불러 일으킨다. 세상이라는 것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광대한 대상이라는 것과 그 광대한 세상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여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조건들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한다.
하나님은 결코 멀리 계시지 않는다. 빌딩 사이로 푸른 잎사귀 무성한 나무가, 다가오는 먹구름이, 장마가, 들꽃이 내게 그분을 느끼게 한다. 그분이 얼마나 섬세하고, 아름다운 분인지, 그리고 그분의 목소리가 얼마나 우렁차고, 열정적인지 자연이 계속 말해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소중히 여기듯이 자연도 가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 논리와 철학의 신이 아니라, 만물의 아버지시며 지금도 자연을 통해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배우기를 바란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하나님과 동산을 거닐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건물과 첨탑을 세우시지 않았다. 거기에는 자연이 있었다. 자연은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이며, 계시였다. 그 안에서 사람은 태어나고, 자라고, 성숙했다.
성경을 보면, 다양한 자연의 현장이 신앙의 중요한 깨달음과 함께 등장한다. 빈들이나 광야, 들판, 산자락, 산의 정상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었고 하나님을 경험했다. 그러나 오히려 거대한 성전이나 건축물에서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매우 적다.
물론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는 훈련 받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을 다치게 한다. 아주 조심해도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한계인 것 같다.
다친 마음과 정서를 편안하게 하고, 치유하는 능력이 바로 자연 속에 있다. 나무 가득한 숲길을 산책하고, 시원한 들판의 바람을 느끼고, 눈을 감고 빗소리를 듣고, 따뜻한 볕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꽃을 감상하고, 흙을 만지고, 동물과 대화 나눌 때에 사람은 사람답게 회복된다.
기도하기 위해 산에 가라. 성경을 들고 숲으로 들어가라. 한가한 공원의 벤치나 나무 많은 고궁이라도 좋다. 그곳에서 성경 한 구절을 읽고, 자연을 응시하라. 생각하라. 느껴라.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실 기회를 드려라. 그리고 당신의 지친 영혼과 마음을 그분이 자연으로 어루만지시게 하라. 조용히 찬양을 부르라. 감사하라. 또 감사하라.
사람은 외면적으로 강하다고 강한 것이 아니다. 많이 웃고, 울고, 감정적으로 풍부할 때에 오히려 더욱 강해진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기 위해 자연으로 부르신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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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5 목양칼럼
한 해병이 있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이 병사는 언제나 작전에서 목숨을 걸었다. 그는 다른 병사들이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보면 화가 났다. 나약한 모습이야말로 수치라고 생각했고, 어떤 경우에도 떨지 않는 자신에 대하여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던 그가 한 전투 지역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평소에 극히 존경하던 전쟁영웅을 만나게 되었다. 해병은 자신의 새로운 상관에 대하여 무한한 존경심과 신뢰를 느꼈다.
얼마 후, 전투가 벌어졌다. 해병은 더 용감하게 적진으로 돌진했다. 자기의 영웅 앞에서 인정 받고 싶은 마음이 그를 아주 흥분시켰다.전투가 끝나고 밤이 되었을 때에, 보초를 서고 있는 이 병사 옆으로 영웅이 다가왔다.
“자네는 용감하더군. 죽음이 무섭지 않는가?”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저는 언제라도 명령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훌륭하군. 나는 아직도 두려운데…” 
순간 병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기의 영웅이 이런 나약한 소리를 입에 담다니… 하지만 그의 영웅은 미소 지으며 계속 말을 했다.
“이봐, 전투에서의 두려움은 그렇게 나쁘고, 부끄러운 것이 아니네. 나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렀지. 그럼에도 내가 아직까지 살아남아 전우들을 도울 수 있었던 것은, 두려움을 몰랐었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을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라네. 우리는 죽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것이네. 난 자네가 좀 더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행동했으면 하네. 꼭 죽어야 한다면 정말 중요한 일을 위해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병사는 홀로 남아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는 진정한 용기가 적진을 향한 ‘전진’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약한 병사들을 조롱하던 자신의 어리석음도 후회했다. 승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흥분된 감정이 아니라, 침착함과 인내심, 그리고 전우들을 믿고 자기를 희생하려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자기의 생명과 전우들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오히려 적에게 이용만 당할 수 있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하나님께서는 불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다.

그래서 때로는 부정적인 감정들도 우리에게 유익하다. 그런 감정들은 우리 자신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사인(sign)이거나, 경고(siren)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감정들에 대하여 좀 더 신중을 기한다면, 잘못된 판단과 행동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요즘 느낌이 좋지 않은가? 그렇다면 신중하라. 그 느낌 안에 숨겨진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라. 경솔함을 용기라고 착각하지 말라. 꼭 죽어야 한다면 죽을 만한 일을 골라서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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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9 목양칼럼

사람이 중요하다. 사람이 모든 문제의 본질이며, 해답이다.
그러나 완전한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용서를 필요로 하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용서 받지 못하는 사람은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친구의 도움이 없이는 누구도 위대해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여야만 하는 것이다.
사람은 평생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어쩌면 그게 교육의 본질이며, 사회생활의 요점이 아닌가 한다. 여기에는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위해 적절한 거리를 찾아내고, 조화를 유지하고, 나의 감정과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배려하는 것이 포함된다.
사람이 가깝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알고 항상 함께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과 상대방이 줄 수 있는 것 사이의 조절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귄다는 것은 설득과 이해의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설득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변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으면 내가 변하지 못한다.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감정이 아니라 설명이 필요하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 주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가 사랑의 관계에서 흔히 가지는 과욕(過慾)이다. 설사 사귐에서 그런 단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많은 설득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해도 중요하다. 인격적인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많이 좌절하고 힘들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며 인내할 때에 변화가 일어난다. 여기 요점이 있다. 결국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사람은 자신부터 변해야만 하는 것이다.
목회는 내가 생각해도 모순적이다. 비슷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변화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불완전함은 너무도 명백하다. 결과적으로 그가 말하는 논리, 주장, 신앙과 그의 삶은 어느 정도 부조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약점으로 인하여 교우들에게 갈등이 생기고 공격을 받는다는 것도 어느 정도 당연해 보인다. 목회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갈등의 상황에서 아파하고, 힘들어 하고, 자기 방어적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끝까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러한 부조리를 아시면서도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다는 사실이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섭리의 산물이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목회자와 교우들은 모두 자기의 정의를 고집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성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교회를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간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며, 미래의 희망이다.
그리스도인의 주권은 언제나 주님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성경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것만이 우리의 약점이 우리를 완전히 주관하지 못하도록 하고, 분열에서 교회를 지켜낼 수 있는 비결이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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