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2~~25 (2: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일본의 정치가 막장으로 가고 있다. 코로나19의 팬데믹(pandemic)이 발생하기 전부터 수상인 ‘아베’를 둘러싸고 터져나오는 스캔들로 인하여 일본은 시끄러웠다. 지지율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중에서도 다른 대안이 없다는 일본의 빈곤한 정치적 환경으로 인하여 아베는 권자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런데 팬데믹이 터졌다. 이제는 세계적인 유머 코드가 되어버린 ‘아베노 마스크’를 제외하고라도, 일본은 정상적인 국가들의 방역대책을 따라가지 못했다. PCR 검사는 제한되고, 병원은 환자를 받을수록 재정적으로 악화되는 상황이다. 의료용품의 부족을 돕겠다고 나선 정부의 알선으로 병원에 공급된 소독용 알콜액은 기존 가격의 4~8배가 되어 “사기다!”라는 탄성을 자아냈다. 일본이 사회적 혼란에 빠지지 않고 이만큼 유지되는 현실은, 분명히 높은 시민의식이 그 바탕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높은 시민의식은 정치적 참여로 이어지지 못해, 가장 뛰어난 시민들이 가장 멍청한 정치인들의 지도를 받고 있다.
아베는 이미 최장기의 총리라는 경이적인 이름을 예약했다. 그러나 그 이름이 과연 명예가 될 것인지, 수치가 될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그가 장기적으로 고집했던 ‘아베노믹스’는 꺼져가는 일본의 경제적 심장을 다시 살리지 못했다. 오히려 그 무지막지한 재정정책이 앞으로의 일본을 더 비참하게 하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는 현실이다. 2020년의 동경 올림픽은 어떠한가? 팬데믹 상황을 예측할 수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결단이 신속하고 단호해야 했다. 올림픽을 후쿠시마 부흥의 선전의 장으로 이용하려던 욕심 때문에, 일본은 코로나19를 거의 방치 수준으로 관리했다. 결과적으로 시간과 돈도 잃고, 목숨도 잃는 선택이었다.
정치권력에서 이런 류의 문제들이 터져나온다는 것은, 이미 정권의 생명이 다했다는 뜻이다. 적어도 이런 징조들을 높은 시민의식이 읽었다면, 지난 몇 번의 선거들의 결과가 달랐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은 지독하게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로 인하여 정치가 외면받고 있다.
아베 총리가 이번에는 G7의 중국 때리기에 행동대장을 자처할 모양이다. 이것이 분명 G2로 성장한 중국의 극렬한 반감을 살 것을 알면서도, 일본과 일본 총리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하여, 그리고 새롭게 초대된 한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기꺼이 악역을 감당하겠다는 모양새이다. 사실, 일본은 과거에 G2의 영화를 누렸었다. 그러다가 미국의 한 방으로 인하여, 장기적인 침체와 몰락을 경험했다. 그런 과거의 교훈(?)에서 일본은 지나칠 정도로 미국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이번의 중국과의 충돌도, 일본이 미국의 편에 서는 한 별일 없이 무사하게 지나갈 것이며, 오히려 중국의 몰락을 통해 일본의 새로운 기회가 생겨날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보기에 이는 몽상이다. 왜냐하면 중국은 이미 일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 오래 지속된 미국의 패권에 대하여 권태감과 반감을 가진 나라들도 세계에는 이미 많다. 결국 미국의 뜻대로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중국의 뜻대로도 되지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중국은 만만한 나라가 아니며 일본에 치명적인 손해를 가할 정도의 위력은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곧 정권을 내려놓고 물러날 아베가, 일본의 국제적 위상에 지극히 중요한 결정을 미리 내려놓고 퇴임하려 한다는 사실은, 대단히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마치 한국에서 탄핵을 당해 식물 대통령인 상황에서도 미국의 대중국 위협인 ‘사드’를 성주 땅에 들여와 골프장에 설치했던 박근혜 대통령을 떠오르게 한다. 그 무책임한 결정으로 한국은 한동안 중국의 다각적인 보복을 당해야 했고, 외교적인 멸시를 참아야 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한국은 계속해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위기는 사람을 드러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아베는 일본의 총리감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합리적인 비전이 없었으며, 그의 주변은 무능력했다. 권력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부패도 문제지만, 그 부패를 교정하려 하기 보다는 은폐하고 대충 넘어가려 하는 의지가 더 문제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 일본은 전후(戰後) 최고의 위기를 당하고 있다. 미국의 한 방을 먹고 잃어버린 10년을 전전긍긍했지만, 지금의 위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지금의 위기는 누구의 탓이 아니라 일본 스스로의 위기이며 동시에 전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으며, 또한 이미 일본의 국력이 예전같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과연 일본은 이대로 침몰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저력을 보여줄 것인가? 그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을 과연 얼마나 많은 일본인들이 알고 있을까? 노쇠한 이 아시아의 나라가, 탈아입구의 꿈에서 깨어, 주변국과 협력하고 좋은 이웃으로 상생하는 미래를 다시 설계하게 되기를 바란다.
전에도 느껴왔던 사실이지만, 위기는 진짜 얼굴을 드러나게 한다. 코로나19의 상황에서 한국의 교회가 보여준 사회적 책임감과 현실감각은 (개인적으로)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이번에도 그랬다. 소규모 교회모임을 통해 바이러스가 번져갈 때에, 교회를 통해 터져나온 소리는 결코 교회답지 못했다. 지난 7일 <중앙일보>에 '예배 봐도, 안봐도 망한다… 코로나에 개척교회 생사기로'라는 기사가 나왔다. 소수의 인원으로 간신히 버티는 소위 '개척교회'의 경제적 상황을 잘 알고 있다. 아니, 아는 바가 아니라 지금도 내가 체험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기사의 이면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목사들의 입장은 무척 송구하다. 방역을 위해 당장 예배를 드리지 못하면, 연보가 없어 교회가 문을 닫아야 한다는 볼멘 소리이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교인들의 안전을 다소 양보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종교에서 돈에 대한 집착이 화두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런 종교인들의 태도에 분노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3:16~17) (23: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23:17)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신약의 교회는 각각의 교인들이 걸어다니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가르쳤다. 그 결과 기독교는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을 극복하고 보이지 않는 영성을 깊이 추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임대료를 내지 못해 쫓겨나는 것과 교인 한 사람을 위험하게 만드는 것 중에서 무엇이 더 목회에 치명적일까?
일본에 와서 몇 년을 높은 임대료에 시달렸다. 그야말로, 교인들이 모두 허리가 휘도록 연보를 드렸지만, 목사는 먹을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 예배의 장소를 유지하는 것이 교회를 지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때는 그랬다. 그러나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왔다. 2011년도 대지진 때에 교인들 대부분이 흩어지면서 임대료 감당이 당장 불가능해진 것이다. 더 이상 장소를 빌릴 수 없었던 그 시절에, 나의 결정은 내가 사는 집으로 교회를 옮겨온 것이다. 그리고 수 년 동안 그렇게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교인들이 주일 아침에 와서 저녁에 가기까지 찬양하고, 아이들은 뛰고, 사람들은 시끄러웠다. 결국 집 주변에서 불만이 표현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 알아보고, 공공기관의 교실을 빌려서 예배를 드렸다. 공공기관이라 1년의 몇 주는 주일에 휴관을 했다. 그리고 공적 행사가 있을 때에는 교실의 대여가 불허되었다. 그럴 때에는 다시 목사의 집으로 모이거나, 아예 야외일정을 잡아 야외예배를 드렸다. 이런 방식의 적응은, 한 가지 각오 때문에 가능했다. 그것은 교회를 연보가 아니라 교인들의 믿음으로 세우겠다는 각오였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기도했고 지금도 기도하는 바이지만, 만약에 이렇게 하여도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그 때는 나도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겠다는 각오였다.
목사들은 부흥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종종 그 부흥은 개인적인 '성공'과 구분되지 못한다. 그러나 진정한 부흥은 목사가 실패하고, 교회가 망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진정한 믿음을 주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동경드림교회가 문을 닫는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 동경드림교회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과 만났던 소중한 추억이 살아있고, 그래서 평생 어디에 가서든 그 시절의 신앙생활을 잊지 못한다면, 나는 동경드림교회의 간판이 어느 건물에 붙어 있든지, 혹은 없든지 상관없이 그것이 우리 교회의 부흥이라고 생각한다.
교인들은 목사의 맘을 모른다. 그러나 결국 알게 된다. 이것이 30여년 목회의 길에서 배운 교훈이다. 비록 목사의 마음을 다 헤아리는 교인들은 없더라도, 결국 목사의 설교와 결단은 교인들에게 그가 추구하는 신앙의 비전과 인격을 드러나게 만든다. 무서운 일이지만, 이것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때문에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인격의 감화는 말이 아니라 세월에서 나온다. 목사가 교인들의 곁에서 인내하며 평생을 살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가? 아니면 더 귀한 것이 돈인가? 명예인가? 성공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리고 이 대답이야말로 나는 목회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한 사람을 위기에 빠뜨리는 것에 대하여 죄의식이 없는 사람은, 천하를 위험하게 하고도 가책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늘 한 사람의 가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서야 한다. 나는 그것이 교회이고, 목회라고 생각한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