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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6 :: 목양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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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받는 질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라는 대답이 일반적이지만, 그럼에도 충분하지는 않다.

성경을 읽다가 어느 부분에서 자기에게 주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구절을 찾았다고 하자. 과연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자기의 욕망이 투영된 것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도하는 중에 마음에 어떤 감동이 일어났다고 하여서 그것이 하나님이 응답으로 주신 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마음이 너무나 간절히 원한 나머지 스스로 지어낸 것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들은 나름 확신을 가지고 어떤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정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것이라고 다시 확정한다. 그러면 이제 혼란과 불안만이 남는다. 다시 또 하나님의 대답이 필요한 경우 앞에 서게 되었을 때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무언가를 하기는 해야 하겠는데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기 때문이다. 들판에서 길을 잃은 양처럼,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면서도 마음이 결코 편안하지 못한 신자들이 의외로 많다. 당신의 경우는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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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한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확실한 방법 따위는 세상에 없다. 마치 자기가 하나님과 직통(直通)하고 있는 것처럼 신령함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거의가 무당 비슷한 존재들이다. 어쩌면 그들 역시 자기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완전히 담을 사람은 지금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지식과 소통의 방법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성경이 이미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죄의 담이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를 가로 막는데, 그것은 기도 조금 하고 성경 얼마를 안다고 하여서 해결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새롭고 산 길을 여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길에 들어선 자이지, 그 길을 완주한 자가 아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지금은 청동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지만, 그 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처럼 명백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즉, 장차는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명백하게 듣고 이해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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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을 확실하게 한다고 하여서, 지레 포기하거나 겁 먹을 필요는 없다.

하나님을 마치 자기의 전유물인 것처럼 자기에게 오면, 혹은 자기의 방법을 따르면 언제나 확실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자칭 예수인 사람들의 확신을 부정하는 것이지 다른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면, 제일 중요한 것은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이다.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 그분이 말씀 하실 수도 있고, 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 다만 모든 경우에 있어 하나님은 선하시며 옳으시다. 말씀을 하실 때에도 이유가 있고, 하지 않으실 때에도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잘 설명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왕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는 끝이 없어서, 사실 소상하게 설명해 주신다고 하여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필요한 경우에는 반드시 말씀 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을 가진다면, 또한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다. 

문제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들리지 않을 때에는 들리지 않는 대로 최선을 다하면 족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뭔가를 말씀하실 때에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이 글을 쓰는 요점을 말해야 하겠다. 성경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것은 유익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통해,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나 상황, 자연, 생각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하신다. 그렇지만 기도와 말씀은 가장 확실한 통로이며, 가장 효율성이 높은 방법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우리와 만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신약의 신자들이 지성소와 법궤를 가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릎을 꿇어 기도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묵상 하는 것은 지성소와 법궤보다 더 확실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방법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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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붙는다. 성경을 잘 읽어보면, 그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 음성을 듣는, 기도와 성경묵상의 방법이 따로 있는가? 있다. 가장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다. 이 조건은 우리가 제일 약한 취약점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것을 극복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인내’ 혹은 ‘성실함’이다. 나는 두 단어를 같은 내용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성실함을 지키되 끝까지 지키는 것이 바로 인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은가?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음성임을 확신하고 그것을 따라 살아보는 결단을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성경과 기도를 붙들어야 하는데, 성실하게 해야 하고, 인내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해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응답이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다. 나는 이 인스턴트적 사고가 신앙적 혼돈의 가장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신앙의 초보에 있어, 이런 식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절박한 필요, 혹은 절박한 상황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간청하게 되는 경험 말이다.

마치 한밤에 떡을 빌리러 이웃집의 문을 크게 두드리며 잠을 깨우는 것과 같이, 우리는 염치 불구하고 도움을 청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이런 방법이 습관이 된다면 어떨까?

한 번 그런 경험을 했다면, 다음에는 미리 떡을 준비하는 각성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혹시 빌린다고 하더라도 좀 더 일찍, 잠자리를 방해하지 않도록 배려하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 아니겠는가.

급박한 기도를 통해 응답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경험했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은혜를 받은 자로서 변해야 한다. 그것은 다른 변화가 아니다. 성실한 기도생활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성경 속에서 답을 찾았다면, 이제는 다윗처럼 성경의 말씀을 송이꿀처럼 여기고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다시 성경을 덮어버리고 기도는 멈춘 채 자기 맘대로 살다가, 어떤 위기와 답답한 상황을 만나서야 다시 그것을 찾는다면, 이는 불신앙의 사람들이 문제 앞에서 점(占)집을 찾아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그분이 우리 안에 우리가 그 분 안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답을 안 하실 때에조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마치 오래 살아온 가족이 서로의 의도를 그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굳이 어떤 음성이 들리지 않아도 그냥 아는 것이다.

느헤미야서를 읽어 보았는가? 신기한 것은, 거기에는 기적도 없고 응답도 없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음성이 느헤미야에게 전달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래서 느헤미야의 기도는 혼자 하는 넋두리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탄식하는 그 모든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신비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현실 속에서 함께 하셨다. 돕는 사람들을 붙이시고, 때로는 대적의 실수와 결정을 통해서도 느헤미야의 길을 도우셨다.

하나님의 뜻을 꼭 말로 해야 알 수 있다면, 느헤미야서는 성경에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차원보다 더 깊은 신앙의 차원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차원 말이다. 그것이면 족하다. 그러면 말씀을 해주실 때에도, 말씀을 안 하실 때에도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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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유’에 대하여 늘 감사한다. ‘예정’이라는 교리를 믿거니와 그 예정이 하나님의 깊은 지혜의 일부라는 사실을 믿는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내게 어떤 선택을 강요하는 분이 아니다.

이렇게 해야만 하고 저렇게 하는 것은 절대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독선적 리더십의 횡포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나는 이런 횡포가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음성’을 가장하고 있는 것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우리가 설사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그것을 결국에는 의도하신 방향으로 이끌어 가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에 있다. 마치 요나의 경우처럼 말이다. 요나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도망했지만, 다윗의 시편과 같이 그는 결코 한 시도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예정을 가장 절묘하게 보여주는 성경의 예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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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선택은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선택은 결국 우리의 실존을 드러내는 기회일 뿐이다.

우리가 얼마나 신앙이 깊어졌고 지혜가 늘었으며 자신에 대하여 이해를 가지게 되었는지 매번의 선택을 통하여 드러난다. 그러나 그 선택이 우리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선택을 통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선택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나타낼 뿐이다. 인생은 결국 전능자의 손에 있다.

먼 길을 돌아서 가든, 아니면 직선으로 가든... 인생은 그분의 지혜가 예정한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빨리 응답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충분하게 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주하도록 만들고, 그것을 지속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신앙의 내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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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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