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4-08 목양칼럼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다. 그리고 무덤에 놓인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의 시체를 누군가 훔쳐갔다고 생각했다. 부활에 대한 예고가 그렇게 많이 있었지만,아무도 십자가에 죽은 예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예수를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이 차례대로 예수의 무덤을 방문했다.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기적 중의 기적이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똑 같은 현실을 본다. 매주마다 성경을 강론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믿으라고 설교해 왔지만, 정작 사람들의 현주소는 무덤가 어슬렁거리기, 그 언저리다. 부활의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아니, 믿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기 보다는, 믿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무력함을 본다. 그래서 슬프고, 안타깝고, 아프다.
목회를 한다는 것은 그 짐을 대신 지는 일이다. 양을 비난하는 목자는 없다. 설사 잠시 책망을 하더라도 결국에는 그 양의 문제가 목자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의 실천을 위해 십자가에 오르셨다. 그분의 모범을 따르겠다고 결심하고 목자의 길에 들어선 목회자라면, 양이 목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이 역설적인 진리를 엄숙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양들이 무덤가를 어슬렁거리는 무력함의 책임은 목자에게 있다.
다시 말한다. 예수의 부활은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부활이다. 예수가 고난의 십자가를 진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성경에 쓰여 있다. 그 고통의 크기와 넓이만큼 반대로 우리는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때문에 성경은 곳곳에서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항상 험난한 고생과 위기를 겪는다. 그러나 안심해도 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주인공은 안전하다. 그가 없는 영화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은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반드시 잘 되게 되어 있다. 믿음을 가지고 제대로만 산다면 결과는 이미 보장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이다.
그러니 무덤 언저리에서 어슬렁거리지 말고, 생명이 넘실거리는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시체가 아닌 예수를 만나라. 다시 사명을 받으라. 다시 사랑을 확인하라.
성경을 펴고 새벽을 맞는다. 어스름한 새벽 빛이 창가에 스민다. 아직은 싸늘한 기운이 냄새처럼 온 몸에 풍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겨울은 가고 봄이 오고 있다. 부활절은 항상 그 변화의 무렵에서 나를 깨닫게 한다. 예수는 이미 세상을 이겼다. 때문에 나도 이길 것이다. 그것은 찬바람이 어쩔 수 없는 봄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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