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고려장(高麗葬)은 부끄럽지 아니한가!
[ 高麗葬 ]
고려장. 늙고 쇠약한 부모를 산속에 버리고 돌아왔다는 모진 자식들의 장례법.
그러나 고려장은 전설로 전해질뿐, 그 실제적 고증이 이루어진 내용은 아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전설은 아시아 국가들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다.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감독의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 (楢山節考(유산절고)는 이러한 일본의 고려장을 내용으로 한다.
본래 후카자와 시치로(深澤七郞)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고 하는데, 1982년에 개봉되었고 아직까지도 수작으로 일컬어지는 영화이다.
이 영화 또한 리메이크작품이다. 1958년 기노시타 게이스케(木下惠介) 감독이 같은 이름의 영화를 이미 만들었다. 가부키 양식에 맞춘 추상적인 영화였다고 하는데, 쇼헤이 감독의 작품에는 그 명성이 미치지 못한다.
고려장이 사실처럼 민간에 알려진 것은 일제시대의 일이다. 이 또한 조선의 역사를 부끄럽게 하려는 식민지 사관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부끄러움의 역사로 확대재생산된 것이라면, 보다 구체성을 가진 일본의 기로풍습(棄老風習)이 존재했고 그것이 현대에까지 소설과 영화로 확인된다는 사실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일본은 조선을 부끄럽게 만들기 전에, 과연 자신들에 역사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꼈었을까? 아니면 이 또한 돌을 던지는 자의 맹목(盲目)으로 가려졌을까?
요즘 사회를 '능력사회'라 부른다. 때문에 젊은이들은 서로 경쟁하며 능력이 많은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경쟁은 좋은 점도 있다. 능력의 최대치를 끌어낼 뿐만 아니라 성취감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쟁의 그늘도 분명하다. 그것은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없으며, 누군가는 상대적으로 무능력한 사람으로 낙인 찍힌다는 사실이다. 이들에 대하여 사회는 패배자, 혹은 루저(looser)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들은 처절하게 열매에서 소외된다.
사회적 소외는 분명히 또 다른 고려장이다. 아직 남겨진 가능성의 불꽃을 꺼 버리는 잔혹함이다. 농경사회 속에서 그 잔혹함은 노동력의 일부가 되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부어졌다면, 이제는 젊더라도 상대적으로 실패자의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면 누구나, 연령과 성별과 인종과 민족에 상관 없이 부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정상적일까? 과연 세상은 승자들이 독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만 할까? 그렇다면 약육강식의 밀림과 인간의 사회가 다른 점이 무엇인가? 혹자는 결코 다를 수 없고, 달라서도 안 된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 적어도 나 같은 목사가 성경이라는 안경을 통해 볼 때에, 이 세상은 극히 부끄러운 세상에 불과하다. 그것은 창조주가 본래 의도한 세상도 아니며, 우리가 역사 속에서 이루려고 했던 세상도 아니기 때문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숭고하다. 장애를 가진 사람과 장애가 없는 사람의 삶이 다르지 않고, 여자와 남자의 삶이 다르지 않고, 능력이 있는 사람과 능력이 부족한 사람의 삶이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당신의 형상을 부으셨다. 똑똑한 사람은 좀 더 하나님께 가깝고, 부족한 사람은 좀 더 하나님과 멀리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니다.
이 만인 평등의 사상이 역사 속에서 꿈틀거려서 차별을 철폐하고 인류를 진보시켜 온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만나는 또 하나의 그릇된 생각, 곧 현대판 고려장은 다시 한 번 성경의 세례를 받아야만 하는 우리 시대의 ‘누룩’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경영자라면, 사람을 잘 선택하여 고용하되 고용된 사람들이 성장의 부속이 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능력이 있는 사람과 능력이 부족한 사람의 차별을 과감히 철폐하고, 일용할 양식을 위해 포도원에 들어온 노동자들에게 평등하게 대우하였던 관대한 농장주의 경영을 시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모든 차별을 다 없애자는 과격한 주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는 복합적이고 고려할 조건들이 많다는 것도 안다. 다만,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인간의 존엄을 믿고 지키려는 의지를 가질 필요가 있고, 또한 그러한 의지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대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성경은 주님의 나라에서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뒹군다고 했다. 이것이 상징은 아닐까? 사자처럼 유능한 사람과 어린 양처럼 무능한 사람이 함께 존엄을 지키고 친구가 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이 곧 주님의 나라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 나라를 결코 우리의 일생에 이룰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만들어 가려고, 그런 세상을 내 현실에 실현하려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고려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고려장은 무슨 이유를 대고, 어떤 합리화의 과정을 거쳐도 여전히 부끄러운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며, 스스로 자신을 황금의 부스러기로,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불행이 우리 시대에 조금이라도 우리를 통해 해소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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