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이름의 괴물
2012-07-15 목양칼럼
남의 떡은 거대하다. 단순히 '크다'는 단어를 바꾸어 '거대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떡의 크기에 대한 재고(再考)가 아니라 욕망의 크기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진실로 이 막무가내의 몬스터(monster)가 한 마리씩 도사리고 있다.
기회를 보아서 우리 마음을 단숨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 몬스터의 존재는 누구나 버겁고 껄끄러운 현실이다. 그래서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기 전까지 우리는 이 괴물을 부정하거나, 사소하게 여기거나, 외면하려고 한다. 마치 자기의 마음에는 전혀 괴물이 살지 않는 것처럼, 남의 '욕망'에 대하여만 비판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모든 욕망은 위험하다. 욕망에게 '비전'이니 '긍정'이니 하는 알록달록한 옷을 입혀준다고 하여서 안전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치 사나운 불독에게 우스꽝스러운 애완견의 옷을 입혀 놓는다고 하여서 성격이 온순해지거나 이빨이 덜 날카롭게 되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나는 내 마음에 있는 욕망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에 '마흔'의 해가 걸린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로하는 것은, 주변을 둘러봐도 여전히 내 또래와 혹은 연배가 더 되는 사람들 중에서 아직도 자기 마음의 욕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또한 우스운 일이다. 이 놈을 남보다 조금 더 안다고 하여서 이 괴물을 다루는 것에 전혀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욕망은 언제나 자기가 가진 것은 사소하게 보고 상대적으로 남의 것은 크게 보게 만든다. 욕망은 꽃을 그대로 놔두지 못하고 꺾어야 직성이 풀린다. 욕망은 간절함을 주지만, 그와 함께 시기의 마음도 준다. 욕망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서도 마치 모든 것을 가져야 마땅하다는 식의 어리석은 생각을 끓어오르게 한다. 욕망은 책임감이 없으며 언제나 다른 사람과 환경을 탓한다. 욕망은 자기를 희생할 만한 가치가 밖에 있다고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때문에 욕망 안에서는 결코 희생이 있을 수 없다. 욕망은 먹어도 배가 고프며 얻어도 가난하고 입어도 추우며 올라가도 비천하다. 욕망은 아귀(餓鬼)와 같아서 언제나 허허롭다.
욕망은 의식보다 무의식을 좋아한다. 때문에 의식을 거치지 않는 습성(習性)은 욕망이 활약하기 좋은 조건이 된다. 자기 마음을 깊이 살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욕망은 작아지지만, 바쁘고 산만하며 즉흥적인 사람에게서 욕망은 태산(泰山)처럼 압도한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욕망 앞에서 두 가지로 갈린다. 십자가를 경험하고 그리스도께 주권을 온전히 위임하는 기도는 욕망을 죽이지만, 십자가 없는 기도는 욕망의 먹잇감이 된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오히려 욕망이 강성해지고 그 욕망을 이루어주시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가득해지는 신자들이 생긴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도 기도를 거듭하는 것은, 신앙 때문이 아니라 욕망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투쟁(鬪爭)이다. 참으로 슬프고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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