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3-18 중보기도
2007-03-18
우리는 흔히 ‘중보기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중보’라는 말은 그의 입장에 스스로 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라는 것은 내 입장에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입장에서 그를 이해하고 탄원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아무도 진정한 ‘중보’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이해력의 한계가, 사랑의 한계가, 능력의 한계가 우리 기도를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중보는 우리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을 사용하고, 또한 좋아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한계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예수님처럼 남을 이해하고 위하여 기도하고 싶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내 지체의 아픔을 나의 가슴 깊이로 느끼고, 그를 위하여 내가 눈물로 탄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영성에도 비할 수 없는 축복이 될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기도를 받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복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중보의 기도를 받는다고 하여도 그것이 우리 자신의 기도를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기도의 부탁을 참 많이 받습니다. 목사라는 ‘직업’이 어떤 의미에서는 설교보다 기도에 더 많은 의무를 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지체들은 그렇게 기도를 부탁하고 나서 정작 자신은 기도하지 않는 모습을 봅니다. 본인에게 소원은 있으나 그 소원을 위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성실하게 기도할 믿음은 없는가 봅니다.
이런 지체를 위한 중보의 기도는 솔직히 회의적입니다. 본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데, 주변에서 아무리 많이 기도해 주고 그를 위하여 눈물 흘릴지라도 그것이 어떻게 결정적인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강제로 은혜를 주시고, 강제로 구원을 주시고, 강제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분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몸소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기도의 응답이 있기까지 최선을 다해 기도하려 하지만 사실 우리의 연약함은 성실한 기도생활을 방해합니다. 언제나 마지막 고비에서 2%를 채우지 못해서 하나님의 응답하심에 이르지 못하는 지체들이 많습니다.
중보는 그 결정적인 2%를 채우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였으나 믿음과 인내가 조금 부족할 때, 누군가 나를 위하여 기도하는 그 기도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스스로 기도하지 않는 분들은 저에게 ‘중보’의 기도를 부탁하지 마십시오. 하지도 않을 기도 약속은 피차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됩니다. 신앙인이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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