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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1 가장 큰 사람



꿈은 광야에서 자란다. 거칠은 광야는 인재(人材)의 산실(産室)이다. 안락한 자리가 아니라 바로 불편과 결핍이 있는 광야로부터 인간은 비로소 성숙하게 된다. 광야에서 사람은 자기를 검증하고 세상을 생각하며 단지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가치 있게 만들 무언가를 궁리한다. 

그 궁리(窮理)함의 무수한 밤을 지나지 않고 어떻게 한 사람의 세움이 있을 수 있을까?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눅 1:80)


세례요한은 무수한 결핍을 안고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날 때에 너무 나이 들어 있었다. 원래 그의 생업은 부모를 좇아 당연히 제사장의 직무를 잇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부모를 설득하셨고, 하나뿐인 아들을  빈 들로 보내도록 하셨다.

성경은 여기까지만 요한의 부모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에 대하여 언급한다. 빈 들에서 자란 요한에게 딱히 부모로서 해줄 것도 없었겠지만, 아마도 그 사명을 다하고 노쇠한 생을 마감했던 것 같다. 

당연히 아이는 제도권의 그 어떤 혜택도 누리지 못했다. 다만 당시의 상황으로, 엣세네파 라는 소수 계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광야에 그들의 거처를 만들고 평생을 성경을 필사하며 메시야를 고대하며 살았다. 아마도 빈 들에서 세례요한이 만나고 함께 했을 사람들은 이 칙칙한 수도사들이 가장 유력하다.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마 3:4)


요한의 삶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본문이다. 사람의 삶의 질은 그 의식주로 대변된다. 그런데 특별히 요한의 옷과 음식은 그가 살아왔던 척박한 삶을 증거하고 있다. 그는 부모의 안락한 품을 잃었고, 정규교육과 안정된 생업을 잃었고, 연애와 친구와 입을 설레게 하는 맛 있는 음식들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애절하게 하나를 붙들었다. 그것은 그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하나님을 구하는 참 신앙이요, 그가 광야로부터 들었을 메시야에 대한 대망의 기다림이었다. 그 한 가지에 그의 삶이 집중되었을 때에, 이 모든 삶의 결핍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는 남과 비교하며 부러워하지 않을 만큼 심령이 강해졌고, 드디어 그가 세상에 나타났을 때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헤롯의 반칙을 공개적으로 지적했다. 학교에서 바른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 바른 것을 실천하며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 대부분은 배운 대로, 아는 대로 살지 못하고 타협한다. 우리는 물러서고, 누군가가 그 일을 대신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요한은 인간의 위대함이 무엇인지를 웅변한다. 그는 우리가 보기에 극히 불편하고 척박한 삶을 살았지만, 그것으로 불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일생과 설교에는 숨기지 않는 정직함과 알고 배운 대로 살아가는 성실함과 참된 신앙의 매력들이 가득 차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마 11:11)


예수님도 그를 아름답다고 하셨다. 그의 인생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직접적으로 받지 못했던 구약시대의 사람으로서 최정점이었다. 그래서 그의 사역과 삶은 많은 부분에서 예수님과 닮아 있다. 심지어 예수님이 그 사역으로 명성을 얻으셨을 때에, 더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시 살아난 세례요한'이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이 점은 더욱 명백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그리고 우리 자녀의 인생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기독교 강단이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세속화에 물들었는지, 설교하며 축복하는 목사의 입장에서도 과연 내가 바라는 것이 '성공'인지, '순교'인지에 대하여 의문이 들곤 한다.

물론 기독교 신앙을 블루(우울함)로 물들일 필요는 없다. 기쁨과 만족, 행복의 메시지가 이 시대에 큰 호응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기독교 신앙이 우리의 욕망을 부채질하거나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행복의 길을 말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삶으로부터의 열매이지, 결코 그저 예배당 안에 들어온 자의 형통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 교회는 광야를 지나 현재에 이르렀다. 얼마나 많은 탄압과 심각한 가난과 고통을 감수하고 교회를 세워 왔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장막절을 잊었다. 우리는 그 고난의 과정 속에 함께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우리의 자녀들을 광야로 보내기를 주저했다. 

아버지 목사가 자식에게 대형교회를 상속하고, 성도들은 세금을 탈세하며 십일조를 드렸다. 말은 신앙적이지만 삶은 전혀 신앙적이지 못한 현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비극이다.

그리고 그 비극으로부터 우리는 서서히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가고 있다. 참담한 일이다!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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