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13 설교와 설교자
2009-12-13 설교와 설교자
하나님의 말씀이 상실된 시대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상실된 것을 의미한다.
비록 성경의 완성과 함께 기록자로서의 선지자와 사도는 끝이 났지만,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사실을 의심하고 부정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것은 자칭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너무 많은 피해와 상처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강단이 개인의 숭배를 위한 독설로 가득 차고, 근거도 없는 축복과 저주의 논리들이 사람들을 농락하는 광경은 불행하게도 이 시대에 너무 흔한 모습이다. 사람들마다 하나님을 빙자하여 말하는 습관을 가졌지만, 정작 어디서도 진정한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고통의 경험은 마음을 닫게 하고, 그러기 때문에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설교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보다는 필터링 하려는 태도를 흔히 가진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자의 말을 구분하여 들으려는 이러한 태도는 원래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녹음기와 같은 단순한 도구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단지 차갑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설교의 동기는 목양(牧羊)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양떼를 사랑하는 마음이 설교의 동기가 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양떼들은 그가 사랑하고 돌봐야 할 대상이지 믿고 의지하여야 할 대상은 아닙니다.
청중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설교자 / 김남준 / 생명의말씀사
(본문 P. 130)
설교자를 설교자가 되게 하는 것은 설교의 기술이 아니라 설교자의 마음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채우시는 경험을 통해 설교자 자신을 변화시켜 이루신다. 때문에 변화된 설교자만이 온전한 설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이 점이 바로 설교자를 특별한 소명의 사람들로 우리가 인식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그가 아무리 박식한 지식과 다양한 논리로 긴 시간을 말한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부으신 설교자의 마음이 없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그의 행위는 설교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성경과 자기의 생각과 시대의 지식들을 적당히 버무린 잡탕 강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강단을 존중하라는 말을 들어왔다. 때문에 강단에 서고 거룩한 가운을 입으면 일단은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간주하려고 하고, 웬만하면 비판하지 않으려는 터부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을 가장 존중하는 태도는 그의 말을 믿는 것이다. 그를 인간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려는 태도야말로 강단과 거기 선 하나님의 사람을 가장 존중하는 경건한 태도인 것이다.
속으로는 그의 설교를 비판하고, 자기의 생각으로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듯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분류하는 속셈을 품고서 겉으로만 가만히 앉아 고개를 끄덕거린다고 하여서 어찌 그것이 존중과 경외라는 것인가!
설교자와 싸우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진짜 설교는 아무에게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설교자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설교와 설교자 앞에 무릎을 꿇고 거룩한 말씀의 세례를 경험하라는 것이다.
혼돈된 세상을 살기에, 처음 그 설교를 듣는 동안 자기의 신앙과 성경적 토대를 가지고 검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출신 신학교도, 소속 교단도, 그를 파송한 유명한 교회도 믿을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과 성령 가운데 설교자를 분별해야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설교자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드러났다면, 우리는 이 모든 인간적 잣대를 모두 버려야 한다. 이 모든 것은 그를 검증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이었을 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종을 향하여 마땅히 가져야 하는 경건의 태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그 설교자를 믿지 못하면서 그에게 영혼의 목양을 받는다는 말인가? 그를 통해 증거되는 말씀을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험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죄와 싸워 자기를 변화시키며,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지킨다는 말인가?
<300>이라는 인상적인 영화는 스파르타의 영웅들이 시리아의 대군을 물리치는 영웅담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 영화 속에서 스파르타의 군인들은 서로 등을 맞대고 적을 맞는다. 그 순간 두 병사는 한 몸이다. 인간은 모두 자기의 앞에 최적화 되어 있고, 반대로 뒤편에는 약하다. 뒤는 볼 수 없으며, 찌를 수 없고, 발로 찰 수도 없다. 하지만 두 병사가 서로 등을 맞대고 싸울 때에 그들의 약점은 서로의 강점으로 보완된다. 그들은 단지 전력을 다해 자기 앞에 있는 적에게만 집중함으로써 자기의 등을 자신에게 맡긴 파트너를 보호한다.
설교자와 신자도 그러해야 한다. 설교자를 계속해서 의심하고 회의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공멸하는 길이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그런 교인들이 넘쳐난다. 자기에게 매주일 설교하는 설교자를 비판하고 못마땅해 하면서도 똑 같은 자리에 앉고, 설교자의 성품과 신앙에 대하여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그의 축도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뭐 하는 짓인가? 이런 종교생활을 과연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반복이 과연 당신의 영혼을 살리고 당신의 성품을 거룩하게 변화시킬 것 같은가? 아니면 서서히 고사시켜 마침내 하나님에 대하여도 영적으로 무감각해지도록 만들 것 같은가?
너무나 자명한 미래 앞에서, 사람들은 이런저런 핑계와 변명으로 자기를 기만하고, 신앙을 퇴락시키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작지 않은 죄악이다!
하나의 설교자가 모든 사람의 해답일 수는 없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시지만, 설교자는 결코 그런 존재는 아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시대에 다양한 말씀의 종을 세우시고, 구원의 문을 되도록 넓게 여시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양이라면 자기 목자의 음성은 분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교회가 집에서 멀다느니, 큰 교회는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논리는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당신은 지금 취미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거룩한 신앙생활을 위해 교회를 찾는 것이다. 당신이 그 교회에 가려는 것은 시설과 사람들이 초점이 아니라, 바로 거룩한 예배가 초점이고, 그 예배를 가능하게 하는 중심이 설교자와 설교이다.
이 초점을 흐리고 교회를 찾는 사람들은, 결국 그 대가를 치를 때가 많다.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경험하지 못할 때 설교자를 대하는 교인들의 태도는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설교 없이도 살아가는 교회생활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면 목양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청중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설교자 / 김남준 / 생명의말씀사
(본문 P. 130)
우리 시대의 맹점과 불행을 본다. 그것은 분별력을 잃어버린 양떼들이 목자 없이 유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로운 듯이 생각하지만 가장 미련하다. 자기를 목양할 설교자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그들의 생각은 명백하게 잘못된 생각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숙하여 그 어떤 도움도 필요 없는 자립된 하나님의 군사로 굳게 서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골방에서 홀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 목표를 위해 진력해야 한다. 또한 그 과정을 돌보고 이끌도록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목회자를 의지해야 한다.
목회자를 가장 훌륭하게 의지하는 방식은, 목회자와 개인적인 친분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설교를 진심으로 듣는 것이다. 그 설교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로부터 사도들이 다른 모든 일을 뒤로 하고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專務)하려고 했던 이유이다.
말씀의 영광이 그립다. 강단 아래의 신자들이 그 말씀 한 마디에 눈물을 쏟고 자기를 부인하던 성경의 장면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지식이 아니라 영적 감동과 은혜가 지배하는 예배가 너무너무 드리고 싶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온전한 목양의 관계 없이 온전한 예배를 지속적으로 드리는 일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거기 서는 사람이나, 거기서 말씀을 듣는 사람이나 좀 더 경외심을 가지고 강단을 대해야만 한다. 우리가 정말 그것을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아멘!
'목회 > 목양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9-12-27 새로운 기독교를 기대하며 (0) | 2014.04.30 |
---|---|
2009-12-20 영원한 동행 (0) | 2014.04.30 |
2009-12-06 이제 다시 시작이다 (0) | 2014.04.30 |
2009-11-29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1) | 2014.04.30 |
2009-11-22 진정 응답을 기대하는가? (0) | 2014.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