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05 목양칼럼 :: 만년필(萬年筆)
저에게는 20년쯤 묵은 만년필이 하나 있습니다.
Parker Sonnet France라는 모델인데, 아주 고가품은 아닙니다. 그래도 금도금의 닙(nib,펜촉)에 고전스러운 스타일로 대략 10만원이 넘는 제품입니다. 제가 구입한 것은 아니고 사실은 저의 외조부님께 받았습니다.
이것으로 보통 초고를 씁니다. 요즘은 어깨 통증이 생겨서 자판 사용을 되도록 삼가다 보니, 이 녀석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친구 같은 펜입니다.
만년필을 사용한다는 것은 손에 잉크를 묻히는 일입니다. 그것은 거의 피할 수 없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대상처럼 순순히 반응하다가도, 갑자기 토라져서 잉크를 내놓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한참 글을 쓰다가도 펜촉을 붙들고 씨름을 해야 합니다.
보통 이런 경우는, 오래 방치한 죄가 있습니다. 매일 써야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만년필의 특징입니다. 관리를 잘해주고 좋은 잉크를 사용하면 덜하지만, 혹여 질 나쁜 잉크를 먹이거나 관리를 소홀히 하면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심통을 부립니다.
어떻게 관리를 하냐고요? 대략 한 달에 한 번은 미지근한 물로 만년필의 모든 묵은 잉크를 씻어내야 합니다. 익숙하면 간단하지만, 그래도 꽤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한 마디로 무지 번거로운 필기구를 비싼 돈 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편리를 신봉하는 세상에서 잉크를 계속 넣어줘야 하고, 찌꺼기를 청소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며 이 녀석을 왜 사용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 녀석의 매력이 있습니다. 서걱거리는 필기감이 주는 손맛은 물론이고, 그렇게 까탈을 부리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지를 못합니다. 펜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니, 글에 정성이 베이는 것에 도움이 됩니다. 또한 펜이 그려내는 자신의 글씨를 보면서, 성급함을 자제하고 생각의 꼬리를 한 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쉽고 깔끔한 것만이 미덕(美德)은 아닐 것입니다. 조금 불편하고 덜 깔끔해도 그 위에 스며드는 한숨과 땀이, 눈물이 더 인간적인 무엇을 탄생하게 만듭니다. 그 미완의 불편함이 좋아서 저는 만년필을 사용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오래 사용하는 과정을 통해 이놈이 나를 닮고, 내가 또 이놈을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감정적인 글을 토해내려고 할 때 이 녀석이 브레이크를 걸기도 하고, 좋은 글을 쓸 때에는 술술거리며 저를 격려하기도 합니다.
만년필을 사용한다는 것은 펜과 사람 모두에게 성장하고 길들여지는 과정 같습니다.
펜이 사람에게 그러하듯, 사람 또한 펜에게 그러합니다.
만년필은 번거롭고, 고통스러우며, 고단하고, 냉철합니다. 그래서 펜은 마음을 강하게 합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 같습니다.
아마도 크게 망가지지 않는다면, 이 녀석은 저와 평생을 갈 것 같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녀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의 생각을 지금까지도 묵묵히 받아 적어 주었던 이 녀석의 수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어린 왕자의 장미가 특별하듯, 저에게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이 펜과의 동행에 이미 담겼으니, 제가 펜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과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펜은 언제나 저에게 대화의 상대이며, 설득의 처음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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