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쉬운 길로 가지 마라! makarios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896)
목회 (632)
인생 (179)
동경in일본 (35)
혼자말 (50)
추천 (0)
09-11 00:00
Total
Today
Yesterday

달력

« » 2014.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2014/04/10'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4.04.10 올해 벚꽃의 뒷모습을 기념하며
  2. 2014.04.10 교회는 신자의 어머니다
  3. 2014.04.10 불평을 불평하다

아마도 이것이 동경에서 보는 올해 벚꽃의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이제는 나무마다 푸른 싹이 돋아서... 꽃과 초록이 어우러지고, 조그만 바람이 불어도 꽃비가 내린다.
새들도 꽃이 지는 것이 아쉬운지, 꽃나무 속에서 가지를 오고가며 소리를 지른다.
돌아오는 길에는 붉은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떨어진 나무를 보았다. 
붉은 조각들이 어지러이 떨어져 있는 나무의 모습은 무언가 숙연한 느낌이 들게 했다.

햇살과 꽃은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꽃은 초록의 배경에도 좋지만, 파란 하늘색 배경에도 참 좋다.
아직은 순한 초록이라... 눈도 편하고 마음도 느슨하다. 그래서 바람도 성기게 부는가보다...


-- by mAkaRios
































 

Posted by makarios
, |



[ 교회는 신자의 어머니다 ]


종교개혁자들의 이 말은, 교회가 건전한 신학과 신앙으로 신자들을 훈육하여 자라게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하고 실현하는 주요한 수단이며 은혜의 통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교회가 불완전하고 수많은 약함을 가진 경우에도 그러할까? 

교회를 통해 건전한 신앙의 훈육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의 상처가 늘어나며,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커져간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교회를 떠나 독자적인 생존(?)을 모색하는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는 현실을 단지 잘못된 선택이라고만 매도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신자들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사람'이 필요하듯이, 교회를 통해 생겨난 신자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하기 위해서는, 역시 다른 무엇이 아니라 좋은 '교회'가 필요하다. 

건강한 교회만이 왜곡된 신앙의 물줄기를 바로잡고 신자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어머니가 아닌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아닌 교회들이 많아진 현실이다. 비유를 하자면 도박에 찌들고, 술에 인박히고, 심지어 집을 나간 어머니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결손가정'을 체험하고 있다.

시대적인 비극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하고 헌신해야 할 사명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목사가 중요하다. 목사는 교회의 어른[長]이 아니라, 교회의 문지기다. 교회의 파수꾼이다. 교회의 건전함을 위해 부름 받은 종[slave]이다. 그래서 교회의 문제와 목사는 절대로 다른 몸일 수가 없다. 

설사 교회가 '암'에 걸렸다 하더라도, 그것은 목사의 암이다. 남의 일처럼 얘기할 수 없는 것이다. '가나안 성도'는 들어봤어도 '가나안 목사'는 들어봤는가? 

말 자체가 모순이고 코미디다. 가끔 목사라는 감투를 좋아해서, 도피와 세탁을 위해 '목사'가 되는 사람들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야 그야말로 별종이고,  목사는 교회와 함께 태어나고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크고 부유한 교회가 아니라, '좋은 어머니'로서의 교회를 목적으로 하는 교회들이 함께 많아지기를 바란다. 그래야 이 땅에 희망이 있을 것이다. 그래야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영광이 회복될 것이고, 교회의 주인이며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춤 추실 것이다. 그 사명을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하자! 

'목회 > 목양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배를 삶의 중심에 (礼拝を生活の中心に)  (0) 2014.04.29
'와친남'을 아십니까?  (0) 2014.04.13
불평을 불평하다  (0) 2014.04.10
심정적 경건은 오히려 위험하다  (0) 2014.04.08
실패에서 자유하기  (0) 2014.04.06
Posted by makarios
, |




[ 불평을 불평하다 ]


'불평'이라는 말은 아니불(不), 평평할 평(平)을 쓴다.

직역을 하면 평평하지 않다는 뜻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사전에서는 세 가지 뜻을 찾아볼 수 있다.


「1」마음에 들지 아니하여 못마땅하게 여김. 또는 못마땅한 것을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냄.

「2」마음이 편하지 아니함.

「3」병으로 몸이 불편함


결국 평평하지 않다는 것은, 자기 마음의 소리다. 그 소리가 표정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이 불평이다. 그래서 그 불평의 뿌리는 환경이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 결국 자기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불평은 미숙함의 열매이다. 자기 마음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미성숙의 결과다. 그래서 사람이 책임감이 없고, 사려가 깊지 못하며, 남의 탓을 잘 하는 '어린' 수준에서 불평은 흔하게 발현된다.

반대로 자기 감정을 잘 갈무리하고 깊이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은 불평을 사라지게 만든다.

흥미롭게도, 한글 성경에는 '불평'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개역개정판에서 6회 등장하는데(아직 원어로 찾아보지는 않았다), 그 중에서 3번이 시편37편이다. 그리고 그 세 번 모두가 "악한 자(의 형통)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시 37:1, 개정)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시 37:7, 개정)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시 37:8, 개정)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의인은 의인의 길을 소신껏 걸어가면 그뿐인데, 그러지 못하고 자꾸 눈을 돌려 악인의 형통과 자기를 비교할 때에, 그만 연약한 마음의 올무에 걸려서 스스로 비참하게 되고, 그 병든 심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불평'의 정체인 셈이다.

결국 불평하는 자신을 불평해야 마땅하다. 누구라도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불평할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같은 상황에서도 성숙한 사람은 불평하지 않고 감사를 꽃 피울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불평'이 흔한 것은 그만큼 조급하고 저열한 신앙의 수준에서 머무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더 깊은 인격과 신앙으로 자라가려는 노력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리 나이를 먹고 머리털이 희어져도 불평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불평에 대한 진지한 불평이 필요해 보인다. 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지하게 기도할 제목이 아닐까...

'목회 > 목양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와친남'을 아십니까?  (0) 2014.04.13
교회는 신자의 어머니다  (0) 2014.04.10
심정적 경건은 오히려 위험하다  (0) 2014.04.08
실패에서 자유하기  (0) 2014.04.06
흉내낼 수 없는 것들  (3) 2014.04.04
Posted by makario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