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적인 감동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습니다
구에르치노 / 다윗을 공격하는 사울왕
없는 것 보다는 낫겠지만....
성령의 감동이 일시적일 때에, 그것은 전혀 신앙의 성숙에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속담에,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삼상 10:12) 사울 왕이 한 때는 성령의 감동으로 가득 차서 선지자들처럼 예언을 했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충만함을 순종과 경건으로 지속하지 못했고, 결국 과거의 경험만 붙들고 살아가는, '나도 한 때는 그랬었지'라는 추억의 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성경이 우리를 섬뜩하게 하는 것은, 심지어 그는 악신(惡神)이 들려 고뇌하며 정상을 벗어나는 반미치광이로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제 정신이었을 때는 너무나 인격적이고, 따뜻하고, 신실한 것 같았던 그는, 악신의 충동과 지배 하에서는 폭력적이고, 비열하며, 교만한 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입니다.
12: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12: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12: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이 본문을 가지고, 귀신론에 입각하여 귀신의 성품을 논하는 분들도 있겠으나, 본래 초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45절에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악한 세대'의 결론에 대한 예고입니다. 여기서 세대는 곧 '사람'입니다.
밥을 하다 실패하면 삼층밥이 됩니다. 밑에는 타고, 중간은 익고, 위는 설익거나 생쌀이 그대로 있는 것이 삼층밥입니다. 쌀도 아니고 밥도 아닌 이것은, 먹자니 탈이 나고 버리자니 아까운 '무엇'입니다. 소위 계륵(鷄肋)이라고나 할까요...
신앙도 삼층밥 신자, 혹은 계륵신자가 있다는 경고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울왕입니다. 그는 믿었으나 믿다가 말았습니다. 성령을 경험했지만, 악신도 경험했습니다.
말하자면, 성령의 감동 속에서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죄를 멀리하며, 신랑을 위해 준비하는 신부처럼 살아야 할 신자가 악한 충동에 넘어져서 자기의 포악한 성질을 내지르고 욕망을 좇았을 때에, 악한 사탄은 그 기회를 틈타 그의 마음과 인격을 지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그릇된 신앙생활로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들의 특징은, 가책은 있으나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런 날들이 더 오래 지속되면, 바리새인들처럼 양심마저 굳어져서 그 '가책'마저도 사라지고, 나중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며 거짓을 행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었던 산헤드린 회의이고, 대제사장이고,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던 군중들의 모습입니다. 가장 신앙적인 외양 속에 가장 추악한 죄가 역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정거장이 아니라 집입니다.
'벧엘(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이 그런 의미이고,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로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에게 '보헤사(위로자, 돕는 분)'을 보내신 것은, 사울 왕처럼 잠시 신비로운 경험을 가지게 하심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중심은 역시, 방언도 아니고 병 고치는 은사도 아니고, 경건의 지식도 아니고, 오랜 경륜은 더더욱 아닙니다.
신앙의 중심은 냉혹하게도 '현실'입니다. 내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느냐? 하는 바로 그 질문과 대답 속에서,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살피고 변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모르는 신앙인이 너무 많습니다. 큰일입니다. 여전히 자기가 살아서 활어(活魚)처럼 퍼득거리면서, 심지어 자신이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까지 합니다.
돈도 좋고 하나님도 좋습니다. 그럴 수 없다고 분명하게 못 박은 예수님의 말씀 쯤은 들리지도 않습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는 말씀도 들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화내는 것은 '정의'이며, 당연한 것이며,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약 1: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말씀 앞에 굴복하지 않는 이런 신자의 모습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미신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호와 축복을 빨아 먹으려는 '진딧물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살고자 하는 것은, 가족의 개념이 아니라 기생(寄生)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항상 하나님이 불편하고, 섭섭하고, 화가 나는 것입니다.
병든 신앙에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의 가족이 되십시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고, 마음의 분노를 성령의 지배 아래 굴복시키십시오. 사랑을 좇아 행하고, 자기를 돌아보아 겸손하십시오.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마음을 버리지 마십시오. 가난한 마음이 복된 마음입니다. 신앙은 자기에 대한 연민과 갈망이 없어지면 쉽게 타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눈물이 마른 신자는 건강한 신자가 절대로 아닙니다.
기도의 골방에서 자기를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말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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