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없는 내면과 무력한 신앙
정신의 고통을 몰아내주지 못한다면
철학은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는다-- 에피쿠로스의 경구 --
꼭 실용적인 입장이 아니라도, 실용성에서 완전히 이탈된 지식이란 그 가치를 인정하기 힘든 법이다.
성경에서 '알다(know)'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는 심지어 '성관계'를 암시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 만큼 지식과 체험은 그 경계를 명확하게 단정하기 힘든 공통의 무엇이다.
선지자가 '하나님을 알자!'라고 외쳤을 때에, 그것은 당연히 머리와 지식의 권면만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옳다. 그것은 다분히 경험적이다.
신앙이 현실을 지배하고 해결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것이 한 가지 이유라고 감히 주장한다. 그것은 신앙이 가지는 변곡점, 그러니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경험하는 것의 전환점을 지나지 못한 까닭이다.
물론 이렇게 신앙의 차원이 달라진다고 하여서 항상 기적이 일어나고 바라는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램프의 요정, 지니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곡점을 지나서 하나님을 경험한 신앙은, 적어도 무력하지 않다.
일단 이 전과 후로 사람이 변한다. 옛날의 소원이 더이상 소원이 아닌 것이 되고, 옛날에는 결코 바란 적이 없는 것을 너무도 간절히 바라는 변화가 생겨난다.
그리고 소원의 변화는 응답과 직결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소원을 가지는 자는, 간단하게 말해 하나님의 동업자이다. 하나님과 동업하는 자의 사업이 망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바라는 자의 소원이 실패할 수 있겠는가?
많은 경우에 있어, 신앙의 문제는 교활함이다. 하나님의 뜻을 바라는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그 실체는 자기의 욕망에 뿌리 내려 있는 소원이 사람을 주장할 때에, 강렬한 소원이 심지어 하나님마저 압도하고 마는 것이다.
때문에 거룩해 보이는 소원과 상관 없이 그 사람의 내면은 전혀 변화하지 않으며, 변하고 성장해야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저 자기의 소원이 거룩하기 때문에 자기도 거룩하고, 그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맹목적인 주장이 신앙의 모든 과정을 집어 삼키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소원을 가졌다고 그 사람의 실체가 거룩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런 신앙의 당연한 결과는, 아무 것도 열매가 없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우상'이라는 말의 어원은 '헛되고 허무하다'라는 의미이다. 없는 신을 향해 빌고 정성을 드렸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없는 것이 유의미한 결과를 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모양은 거룩하지만 전혀 거룩함이 없는 소원이 심지어 신앙과 하나님을 지나쳐서 질주했을 때에, 그 결과가 유의미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주여', '거룩', '교회', '사명' 등의 이름을 가진 우상에 불과하다.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 하나의 '철학'은 될 수 있어도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아닌 것이다.
참된 신앙은 다르다. 하나님을 경험한 신앙은 현실의 변화 이전에 자신의 변화를 겪으며, 또한 변화된 자신을 통해 현실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그것이 반드시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밖에 없는 것은, 신앙을 가진 사람의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사람의 소원은 실로 무서운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원인이며, 이미 잉태된 미래이다. 어떤 역경과 방해가 있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지는데, 이는 하나님의 열정이 바로 그것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언할 수 있다. 무력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사람과 현실 사이에 상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반드시 현실로 나타나는 '능력'으로 신앙은 증명되게 되어 있다. 잔잔한 수면에 돌이 떨어지면서 파장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하늘의 신앙이 현실에 들어오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무력한 신앙, 변화 없는 신앙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열렬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없을 때에, 그 원인을 고요히 말씀 속에서 진단하고 자기를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져야 마땅한데,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이미 무력한 신앙에 길들여져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수용은 절대로 믿음이 아니다. 물론 어떤 소원은 포기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신앙이 우리로 소원을 포기하게 할 때에는 오히려 더 열렬한 감동을 준다. 하나님께서 '포기'를 인도하실 때에, 그 포기의 과정은 더 깊은 깨달음과 더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경험케 한다. 냉소적이고 무력해지는 결과는 절대로 은혜가 아니다.
신앙을 오해하고, 오해한 신앙에 길들여진 신자들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들은 정말 우상을 섬기듯이 하나님을 섬긴다. 열정은 간혹 보지만, 감동도 없고 보람도 없다. 왜 그렇게 믿는지 모르겠다. 나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신데...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오해하는 일이 너무 화나고 때로는 슬프다.
익숙한 광고카피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무엇을 기대하였든지간에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정말 우리의 신앙에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고 기대하였든지간에, 하나님은 언제나 그 이상이시다. 그분이 주는 위로와 평강, 은혜는 말로 형언할 수 없고, 그분 안에 있는 응답은 언제나 우리를 놀라게 한다. 때문에 신앙은 현실이다. 경험이다. 능력이다.
이것에 아직 동의할 수 없다면, 이제라도 신앙을 찾아 나서시라. 진실로 열심을 가져 보시라. 진심으로 하나님께 묻고 대답을 기대해 보시라. 마음의 밑바닥부터 신앙을 다시 시작해 보시라. 무엇보다 성경을 진심으로 펴고 민낯으로 말씀 앞에 서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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