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요즘에 와서 외부의 교회를 다니다 보니, 교회마다 반듯해 보이는 성도들이 있다.
그런 성도들을 보는 것은 기쁨이고 감사이다. 또한 나의 마음에 부러움도 슬쩍 일어난다. 왜 우리 교회에는 저런 성도가 없을까? 하는 생각에 슬퍼지기까지 한다.
목사에게 성도는 그야말로 애증의 대상이다. 깊이 사랑하지만 끊임없이 아파하게 되는 이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그것과 비슷하다. 잘 되면 계속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불안하고, 못 되면 그 못 되는 것이 자기 탓인 것만 같아서 아프다.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마음에는 늘 뭔가 아쉬움이 끓어 넘치는 것도 사실이다.
‘엄친아’라는 말이 있지 않나. 엄마의 친구 아들은 슈퍼맨이란다.
공부도 잘 하고 말도 잘 듣고 거기다가 잘 생기고 운동도 잘한다. 심지어는 돈도 잘 벌고 결혼도 잘 한다.
물론 엄마의 모든 친구의 아들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항상 자기 아들을 비교하는 대상으로 여러 사람 중에서 최상의 장점들만을 가져오기 때문에 생겨나는 모순이다.
모든 것을 잘하고 모든 면에서 탁월한 사람은 있을 수 없는데, 자기 자식에게는 그 불가능한 소망조차 무모하게 품는 것이 부모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부모 마음에는 자식이 흰 머리가 생겨도 항상 ‘어린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곧잘 하는 성도라도 목양하는 목사의 눈에는 부족함이 보인다.
이 부분만 좀 고치고 달라지면 참 좋겠다는 소망이 있다. 이것이 목사의 욕심이라면 욕심이고, 소망이라면 소망이다.
이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성도에게 참 유익하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성도를 망치는 이유가 된다. 목사의 기대를 통해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심하고, 분노하고, 망가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참 어려운 것이 목회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만 하는 것이 목회자의 처신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이미 알거니와, 모든 그리스도인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살다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게 되어 있다. 밖에 있는 성도들이 매너 좋고 훌륭해 보여도 막상 같이 한 두 해 신앙생활을 해보면 성깔 죽은 사람이 드물고, 언행에 모순이 없는 사람이 없다. 그것은 목사들도 마찬가지다. 가끔 보는 관계 속에서는 다 멋지고 훌륭해 보이지만, 겉옷을 벗고 속살을 마주하면 인간은 다 특유의 자기 냄새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한 가지 결론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옳으시다. 그분이 만나게 하신 섭리에 실수가 없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부족함이 없는 법이다. 당장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그 사람도, 내게 보내시지 않고 거기 두신 것은 거기가 가장 적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지금 만족하지 못하는 그 사람들이라도, 그들을 내게 보내신 것은 그들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야기는 성경으로만 들려지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가장 확실한 은혜의 통로인 것은 확실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온 세상에 가득 차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환경과 만남을 통해서도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고 골방에서 신비한 체험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금 주신 현실을 지혜롭게 잘 바라보고 깊이 생각하면 거기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 있다. 감히 말하건데, 정말 늘 그러하다.
하나님을 믿어드린 후에, 내게는 모든 것이 편안해졌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조차 답답해 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이해하려고 안달하는 것조차 잊어가고 있다.
어차피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과 뜻은 내 적은 머리와 마음으로 다 담을 수 없다. 그분은 광대하시다. 그뿐만 아니라 선하시다. 나보다 훨씬 나를 잘 아시는 그분이 선하시다면,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은 선한 것이다. 그것은 이해의 차원에서 나오는 결론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에서 나오는 결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러울 것도 없고, 안타까울 것도 없다. 안 주신 것에도 이유가 있고, 주실 것이라면 반드시 때에 적절하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기다림이라는 것이 그렇다. 기다린다고 마음을 먹고 기다리면 너무 지루하고 힘들다. 제일 잘 기다리는 방법은 기다린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 마음 한편에 갈무리하고 다른 일에 우선 몰두하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기다림의 시간에 제일 적당한 선물이 고난이다. 고난을 만나면 사람은 기다림을 잊는다. 고난과 싸우는 것에 몰두하여 세월을 훌쩍 보낸다.
그러는 동안에 약속과 소망을 잊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잊어도 잊지 않는 분이 계시다.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약속은 신실하며 언제나 적당하다. 가장 빛나는 타이밍에 가장 선한 방법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고난은 놀라운 은총이다. 하나는 기다림을 채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시간을 통해 내적인 성장을 돕는 것이다. 하여,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저주가 아님이 분명하다.
남의 인생을, 남의 목회를, 남의 형편을 부러워하지 말라.
가까이 보면 다 거기서 거기에 불과하다. 소망의 대상은 환경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 오직 선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만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신다. 그분을 통해서만 우리는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고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다. 다른 모든 것은 부수적이다.
그래서 시편기자의 이 외침은 우리를 뭉클하게 한다...
(시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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