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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8 목양칼럼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남기신 교훈이 세족식이었다. 그 안에 담긴 겸손과 섬김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묵상할 때마다 여전히 감동적이다.

기독교의 요체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사랑'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의 모호성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유행가 가사부터, 연인들의 이별의 이유도 사랑이고, 심지어 인격적이지 못한 교사가 아이들에게 폭행을 가할 때에도 사랑이라는 말로 자신을 포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증거를 요구한다. 마치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인 것처럼, 진정한 사랑이라면 사랑을 진심으로 나타내는 행위가 따라야 한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랑의 반대편으로 행하는 것은 결국 그가 말하는 사랑이 진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사도요한은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 증명되었다고 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결코 말뿐인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혹은 독생자)을 십자가에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그 사랑을 깨닫고 확인할 때마다 감동받고 행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족식을 통해 주셨던 것도 바로 그것이다. 교양적인 가르침과 도덕적인 모범만을 찾는다면 우리는 세족식의 껍질만 씹는 격이다. 그런 것이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본질은 아니다.

사도요한은 그 밤에 거기 있었다. 예수님께서 12명의 사람들, 심지어 가롯 유다의 발까지 정성스럽게 씻어 주시던 날을 그는 평생 잊지 못했다. 물론 그 날의 감동 때문에 그는 평생을 겸손하고, 섬기려 노력했을 것이다. 목회를 하다가 신자들이 거역하고, 배반하는 일을 당하더라도 요한은 그 밤에 자기 앞에 무릎을 꿇으셨던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결코 험해질 수 없었다. 그는 낮아지고 또 낮아지며, 섬기고 또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요한의 삶이 단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교훈이 정당하기 때문에 가능한가?

인간의 부조리는 몰라서가 아니라, 바른 것을 알면서도 다른 선택을 한다는 것에 있지 않던가!

우리는 겸손이 아름다운 미덕이며, 섬김이 감동적이라는 것을 몰라서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겸손과 섬김 속에 담겨 있는 인내와 희생과 자기 부인의 고통을 알기 때문에 그 길로 걸어가기를 망설이는 것이다.

결국 요한에게 이 세족식이 특별했다면, 그것은 다른 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토록 특별하신 이유는, 그분처럼 진심으로 모든 것을 다해 요한을 사랑해준 분이 다시는 없기 때문이다.

 

정의는 아름답다. 하지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희생이 필요하다. 그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이라는 위대한 이름의 능력이다. 때문에 사랑이 없으면 정의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바가 바로 그것이다. 샬롬~

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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