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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30 목양칼럼

한국의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맞았습니다. 

교회에서는 추수감사절이라는 절기를 지킵니다만, 그 시기가 미국의 절기에 맞춘 것이라 한국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풍성한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자 한다면 늦은 가을, 혹은 겨울의 문턱에 위치하는 추수감사절을 한국의 명절인 추석과 동기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추수감사절을 조금씩 당기는 추세입니다. 

교회가 이런 절기를 기념하는 것은, 그 날에 얽매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날의 의미를 기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떤 날짜를 지키느냐 하는 것보다 그 날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이냐에 보다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가위는 풍성한 열매를 통해 우리가 받은 은혜를 다시 돌아보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생활을 점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람들은 노동을 통해 열매를 얻습니다. 비록 농사를 짓는 직업에 종사하지 않더라도 이 원리는 마찬가지입니다. 농부가 수고를 통해 곡식과 열매를 거두는 것처럼 현대인은 그것을 금전으로 대신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노동의 결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거둔 결실이 결코 노동만의 결과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농사를 지어도 이 논과 저 논의 소출이 다릅니다. 사람의 노동도 이와 같아서, 같은 수준의 수고를 하지만 얻는 소득은 천차만별(千差萬別)입니다. 심지어 수고만 하고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극단적인 상황도 일어납니다.

물론 수고한 대로 적당히 거두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 불합리한 세상에서는 그 당연한 원리가 적용되지 못하여서 사람의 생존이 위협을 받고 억울한 원성이 쌓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점에서 우리가 수고하고 거둔 것은, 당연하면서도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땀 흘린 노동의 대가이지만 동시에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존할 수 있도록, 더 나아가서는 선한 일에 사용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소유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다고 설교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얻은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눔을 실천한다면 하나님께 반드시 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얻은 것을 내 것으로만 여기고 이기적으로 산다면 하나님도 그에게 엄격한 정의를 찾으실 것입니다.

감사하고 있습니까? 감사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나눔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득이 결코 전부 나의 것만이 아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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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3 목양칼럼

 

신앙과 삶을 구분하여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진정한 믿음은 살아가는 것과 일치한다. 믿음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의 전부이다.

살아가는 것과 믿는 것을 구분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위선’을 경험한다.

위선은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악(惡)이다. 아무리 열렬한 종교행위를 하더라도 위선을 품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다.

한 청년이 잠시 컴퓨터를 내게 맡겼다. 컴퓨터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몇 가지 업데이트를 하기 위해서였다. 가난한 목사가 뭔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그런데 작업을 하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낯선 이름의 폴더에 포르노가 잔뜩 들어 있었다.

서른이 훌쩍 넘은 청년이었다. 사적인 영역이기에 모른 척 하고 넘어갈까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 청년은 중요한 고민을 앞에 두고 하나님 앞에 작정기도를 하는 중이었다. 매일 시간을 정하여 기도를 하고, 그 사실을 목사인 내게 알려서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중이었다.

갈등이 일어났다. 민망한 이 사실을 그냥 지나갈 것인지, 아니면 목사로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 충고할 것인지 며칠을 고민했다.

그리고는 청년을 교회로 불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했다. 얼굴이 붉어졌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다음에 우리는 ‘응답 받는 기도’에 대하여 더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청년은 자기를 인정하고 기도생활을 위해 잘못된 습관을 고치기로 결심했다.

사람은 잘못을 한다. 그것이 실수이든, 고의이든 잘못을 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완벽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그런 잘못으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의미한다. 삶을 리셋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잘못을 품고서 하나님과 대화하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더 열렬한 종교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설득하거나 강제하려는 경향까지 나타난다. 그러면서 삶과 믿음이 분열된다.

포르노가 문제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더 추악한 문제들도 많다. 이 문제들에 대하여 당연히 양심이 찔려야 한다. 나는 목사로서 여기에 대하여 위로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사람들이 다 그렇다거나, 그 정도는 가볍다는 식의 위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위로를 계속하는 동안, 영혼은 파선하고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진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 동안 아파야 한다. 믿음이 동맥경화처럼 막혀서 지배하지 못하던 삶의 영역들에 믿음이 들어가 지배하려면 눈물은 필수이다. 찔리고 아프고 고민할수록 영혼은 힘을 얻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개선된다.

위기는 이런 역동적인 작용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신앙생활이다. 그것은 겉으로 평온해 보이지만, 실상은 죽은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을 살면서도 전혀 이질감 없이 종교행위를 할 수 있다면, 심지어 사람에게 보이려고 더 열렬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영혼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부디 이런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혹시 있다면 빨리 자기를 점검하라. 병이 깊어지면 약도 소용이 없는 때가 온다. 희망은 기회가 있을 때에 붙잡아야 자기의 것이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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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율법적인 태도가 싫다. 율법적이라는 말은 금지, 제한, 규제, 강제의 이미지를 가진다. 본래 율법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상과 벌을 통해 선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폭력이다.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 행동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다. 복음은 일단 모순적이다. 죄를 지은 분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처벌하지 않고 구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관용과 용서의 뒤편에는 오히려 행동만이 아니라 그 정서와 생각까지 판단하는 치밀함이 숨어 있다.

 

예수님의 설교를 가만히 들어 보라. 율법이 살인이라는 행위를 정죄하였다면, 예수님의 복음은 살인의 원인이 되는 미움에서부터 이미 간섭하기 시작한다. 다만 그 미움과 살인을 인하여 사람을 포기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통하여 속사람을 새로 창조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때문에 복음은 필연적으로 인내의 기다림과 무제한의 투자를 동반한다. 설사 은혜를 깨달은 죄인이 회개를 하더라도, 그 회개가 삶의 실천으로 이어지고 정서를 충만하게 하기까지는 시간과 돌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로교의 교리에서는 이를 ‘신자의 견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단 번에 완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변화라는 과정을 통해 다루어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의 신앙생활에서 사람들은 율법적 권위를 카리스마 혹은 리더십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신앙적 리더십이 신자들에게 금지, 제한, 규제, 강제를 효율적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세속적인 인사관리 형식을 그대로 교회 안에서도 차용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그래서 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반대로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페널티를 가해서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방식이 성경적인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루시는 방법에서, 초대교회가 보여준 리더십에서 이런 모범을 찾아볼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목회자가 강한 책망으로 금지할 행위들은 성경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예루살렘교회가 이방인의 교회들을 받아들이며 제시했던 최소한의 요건들을 고려하더라도, 1세기의 초대교회는 매우 열린 사고와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관용적이었다. 왜냐하면 교회를 탄생시킨 ‘복음’ 자체가 바로 관용의 바탕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신자들이 설교를 듣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고 믿는다. 비록 당장은 지지부진(遲遲不進)하고 답답하더라도 그런 과정을 통해 신자 스스로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책임감 있는 신앙을 성장시켜 가야 한다.

그래야 시간이 걸려도 좋은 그리스도인이 만들어지고 세상의 풍조에 요동하지 않는 든든한 신앙으로 세워질 것이다.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고 스스로 생각하라. 그 과정을 게을리 하는 자는 아무리 훌륭한 교회를 다녀도 결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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