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쉬운 길로 가지 마라! makarios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896)
목회 (632)
인생 (179)
동경in일본 (35)
혼자말 (50)
추천 (0)
09-12 19:43
Total
Today
Yesterday

달력

« » 2012.8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용서의 조건

목회/목양칼럼 / 2012. 8. 29. 09:10

image_00008

 

용서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다. 아무리 용서를 해주려고 하더라도 그 용서를 받아들이는 이가 제대로 수용하지 않으면 용서는 완성되지 않는다. 용서에 앞서 용서를 구하는 사죄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다.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용서를 해주겠다고 하면 그 자체가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을 용서하겠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기분 나쁜 모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용서 받은 죄인이다. 복음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용서의 소식’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복음의 난제(難題)가 떠오른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용서를 전할 것인가? 결국 복음의 선결과제는 사람이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고백하게 하는 일이 된다.

 

사람은 태생적으로 자기 잘못의 인정을 회피한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원죄의 장면부터, 변명과 핑계는 죄인의 가장 큰 특징이다.

사람은 대개가 남의 잘못은 잘 보지만 자기 자신의 잘못은 맹인(盲人)과 같이 보지 못한다. 남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이성이 자기 잘못을 반성하는 겸손한 자성(自省)이 되지 못하는 것은 죄인의 분명한 자기 한계이다. 그리고 이 한계 때문에 위대한 용서의 가능성이 처음부터 거절된다. 도대체 용서를 구할 줄 모르는 죄인이라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때때로 사람들은 십자가의 참혹한 장면에서 눈을 돌리며,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용서’를 나타내시는가에 대하여 질문한다. 십자가는 그만큼 불편하다. 거룩하고 따뜻한 하늘의 위로를 기대했건만 참혹한 피로 얼룩진, 처절한 고통의 십자가라니… 이게 과연 전능한 하나님,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내미시는 화해의 손길이란 말인가?

하지만 모르는 소리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용서에 있어 대문과 같다. 그 십자가 위에 내가 달려야 마땅하다는 고백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용서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고통스러운 영혼의 거울이다.

 

아직도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가?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느껴지는가? 적어도 저 사람보다 내가 낫다고 자신하는가?

십자가를 보라. 예수가 피 흘리는 자리에 그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 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 고백이 없이 하나님의 용서는 당신과 상관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역시 파렴치한 죄인일 뿐이다. 다른 죄인을 향해 손가락질 하며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하는 우매한 죄인 말이다.

'목회 > 목양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기를 점검하라.  (0) 2012.09.23
기다리시는 은혜  (0) 2012.09.02
소소한 일생의 행복  (0) 2012.08.19
은혜는 값싸지 않다  (0) 2012.07.28
명예로운 권위  (0) 2012.07.21
Posted by makarios
, |

The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LQ. 1. What is the chief and highest end of man?

A. Man's chief and highest end is to glorify God, and fully to enjoy him forever.

 

대1. 인간의 제일되며 가장 높은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의 제일되며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아담’은 고유명사이면서 일반명사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어원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붉은 흙(아다마)’에서 왔다는 견해를 나는 좋아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가장 훌륭한 해석이 아닐까 한다.

 

창조는 목적을 가진다. 그 이유는 창조주가 맹목의 비인격적 신이 아니라, 바로 깊은 지혜와 계획 가운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인격적 하나님이 아무 이유와 목적 없이 창조라는 거대한 일을 하실 리가 없지 않는가!

그 중에서도 ‘사람'의 목적은 모든 세상의 창조 목적을 수렴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바로 ‘사람’을 창조의 꽃으로, 모든 하나님의 창조의 핵심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심 되고(chief), 최고의(highest end) 목적이라는 언급 또한 깊이 새길 만하다.

이 말은 사람의 목적에는 근본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이 있음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말하는 답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필수적인 가치를 지닌다면,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사람을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는 주변적인 목적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예수님은 돌들로 떡을 만들라는 마귀의 시험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물론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이 사람을 살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는 사실에는 추호의 의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당장의 생존을 위하여 필요로 하는 ‘떡’의 존재 역시 부정되지 않는다.

자기가 믿는 믿음의 도리에 대하여 과도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모든 이외의 것을 배타적으로 보는 견해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런 견해는 대부분 세상을 망가지게 한다. 과격해진 주장은 분쟁을 만들며, 미움과 증오의 씨앗을 뿌린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열매를 통해 확증하건데 알곡이 아니라 가라지이다.

그런 점에서 폭력은 결코 정의를 이룰 수 없으며, 미움과 분노가 결코 선을 이룰 수 없다는 확신을 우리는 가져야 마땅하다.

 

반대로 진리의 자부심은 포용적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남편 다섯을 두었으나 지금도 역시 남편이 아닌 사내와 동거하고 있는 여인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셨을 때, 만약 그 여인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혹은 이후로 새 삶을 살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얼마나 불편한 입장이 되셨을까?

예수님의 주변에는 유난히 ‘용서받은 죄인들’이 많았다. 삭게오도, 마태도, 죄 많은 여인도… 모두 사회적으로 깊은 트라우마를 가져서 전혀 회복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친구가 되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모험이었다. 만약 그들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헌 신짝처럼 여기며 살게 된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얼마나 치명적인 모욕의 대상이 되었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모험하셨다. 자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음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그 어떤 편견과 굴레와도 상관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여셨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옳은 일에 대한 확신, 진리가 반드시 자유를 줄 것이라는 믿음… 그런 자신감이 없이 어떻게 미지의 영역을 향해 첫 발을 내디딜 수 있으랴! 예수님께서 자기와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믿음의 힘이었다.

 

사람은 복합적인 존재이다. 복합적이라는 것은, 많은 주변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정치적 결정에 민감하고, 어떤 사람은 이익에 민감하다. 어떤 사람은 감성적이고, 어떤 사람은 매우 현실적이다. 그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두 하나로 통일되고 획일적이 될 필요는 없다.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과 추구하는 목적은 존중 받아 마땅하다.

다만 성경은 그 모든 가치의 가장 중심에 계시된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통해 하나의 기둥을 세우기를 원한다. 그 기둥이 바로 믿음의 뿌리이며,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기초이다.

그리고 그것을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은 ‘중심 되고 최고의 목적’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의 제1문의 질문은, 이미 매우 함축적인 내용을 담아낸다.

첫째, 창조주 하나님이 인격적이고 지혜로운 분이라는 것.

둘째, 사람이 모든 창조물의 가장 대표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

셋째, 사람에게 있어 중심 되고 최고의 목적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성경의 목적이라는 것.

넷째, 사람은 이 목적을 중심으로 다른 모든 목적을 수렴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이번에는 대답을 보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토록 충만하게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두 개의 대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이다. 왜일까?

남산에서 최고로 높은 나무는 몇 그루인가? 높은 나무는 많지만 ‘최고로’(highest end)라고 한정하면 그것은 반드시 하나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중심 되며 최고의 목적은 하나이다. 다만 그것이 두 개의 문장처럼 보여지는 것은, 그 양편의 날개가 서로 보완하여 서로를 설명하고 온전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영원히 하나님을 향하여 충만한 기쁨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존귀하게, 합당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때문에 영광을 돌린다는 말과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말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로 묶여야만 하는 것이다.

왜 예배가 축제여야 할까? 실제로 성경은 구약부터 신약까지 계속해서 ‘잔치’의 이미지를 계속 천국과 연결시킨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필연적인 것이다.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에는 반드시 충만한 기쁨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서 ‘회개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에서 주어지는 기쁨이 아니다. ‘회개’라는 말이 사람 안의 욕망을 죽이는 것이 아니던가.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속에서 사람이 얻게 되는 ‘충만한 기쁨’이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사람이 반응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최고의 예우요, 영광인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는 사람이 하나님의 노예로 창조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자유롭게 대우하셨으며, 그 결과 죄의 유혹과 타락조차 허용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아브라함과는 친구와 같다고 하셨고, 모세와는 얼굴을 대면하셨다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에서, 예수님은 ‘언제나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셨다.

이 모든 것은 창조의 목적이 바로 ‘친밀한 교제’라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낙원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나님과 누리던 기쁨의 관계, 하나님의 보람이 되는 사람으로서 누리던 충만한 기쁨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다른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기쁨이며, 하나님과의 기쁨이다.

복음은 죄를 해결한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 자체는 아니다. 죄를 해결하는 까닭은, 그렇게 해서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목은 필연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기쁨을 가져오고, 그러한 사람의 반응은 곧 하나님을 지극히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우리 신앙에서 눈물은 극복의 대상이다. 눈물이 최상의 은혜가 아니다. 요한계시록에도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으신다고 되어 있다. 눈물은 아무리 긍정적인 것이라도 한시적인 과정이며 그 자체가 극복의 대상이다.

신앙에는 고통이 있다. 그러나 고통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사도들이 교회를 위한 핍박을 찬양하며 받아들인 것은, 그 핍박을 참고 인내했을 때에 주어지는 승리를 믿었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기쁨이 그 고통보다 훨씬 강하고 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실의 신앙을 보라. 은혜 받은 사람들은 가볍다. 무겁고 침울하며 한숨의 그늘에 살아가는 자는, 입으로 어떤 거룩한 언어를 내더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자가 아니다. 은혜는 사람을 아이처럼 만든다. 은혜는 삶의 질서를 단순화시키며, 복잡한 계산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 집중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그래서 범사에 감사한 것이며, 항상 기뻐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삶의 무게가 줄어들거나 모든 일이 형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더러 의인의 고난도 있어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십자가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는 고통보다 크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고통에, 절망에, 어둠에 눌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삶을 산다. 그것은 그들의 의지가 아니다. 그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때문에 하나님을 이기지 않는 이상 그들의 가슴에서 일어나는 열정과 소망을 꺾을 힘은 세상에 없다.\

'목회 > 교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큐티강의 -02- :: RESET 2013  (0) 2013.01.23
큐티강의 -01- :: RESET 2013  (0) 2013.01.22
RESET 2013 두번째 과제 발표  (0) 2013.01.20
교회가 도대체 뭐야?  (0) 2012.11.10
시간에 대하여 :: 조급함과 믿음  (0) 2012.11.09
Posted by makarios
, |

2012-08-19 목양칼럼



인생은 사실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으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거창한 목표를 두고서 노력하는 삶이 아름답지만, 그런 삶의 태도가 가진 함정도 분명히 있는 것이다.

사람은 사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아내고 삶의 동력(動力)을 얻어내지 못하면, 무슨 거창한 일이든 그리 오래 집중할 수 없다. 설사 오랜 시간을 견디어 내더라도 그런 삶은 행복하지 못하다. 그리고 행복하지 못한 것은 결과적으로 아주 나쁜 것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의 인생관은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쓰자는 한 문장으로 함축된다.

다소 경박스럽기는 하지만 현실감이 참 탁월한 표현이다. 공정하지 못한 세상에서 정직과 성실의 한계를 절감하며, ‘생존이라는 절박한 목적을 위해 자기의 양심과 자존심을 어느 정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 부모님의 세대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정신 없이 살았다. 서양이 두 세기에 걸쳐서 이룩한 산업화를 50년 만에 따라잡았으니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정신 없었겠는가? 아마도 4배속으로 돌리는 비디오 속의 세상처럼 세상이 흘러갔을 것이다. 그래서 생존은 절박했고, 정승 같은 성공을 위해서라면 개처럼 사는 것도 불사하는 각오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한 평생을 보내고, 적지 않은 결과를 손에 쥐었다. 집이 생기고, 차가 생기고, 금융자산과 인맥이 생기고, 좋은 음식을 먹기 위해 천 리를 마다하지 않는 주머니가 생겨났다.

그러나 그 잉여의 자산들은, 여전히 마음의 여유는 되지 못하고 있다. 부지런한 것도 좋고 자기를 바꾸는 노력도 좋은데, 그 일상에서 삶의 시간은 늘 모자라고 관계의 기쁨과 공감은 바싹 메말라 버린 것이다. 결국 그렇게 손에 넣고자 했던 것들, 이를테면 눈에 보이는 물질을 차지하는 것은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행복한 자기를 완성해가는 인생에서는 낙제한 것에 틀림없다.

 

소유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소유가 주는 잠시의 기쁨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것을 가지면 잠시는 기쁘다. 그러나 사람은 소유한 것에 금새 적응하고 빨리 싫증을 낸다.

소유한다는 것은 마치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배가 터질지언정 만족함을 얻지는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 인생을 발견하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린 후에야, 비로소 행복을 얻는다.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바로 바람 부는 저녁의 산책을, 비 오는 날의 커피 한 잔을, 뜬금없이 불러낼 수 있는 친구를, 출출한 저녁의 냄비라면을 발견하는 사람이라야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좋은 날도 있고 어려운 날도 있다. 역시나 어려운 날들을 견디게 하는 힘은, 과거의 좋은 날들에 대한 추억이며 동시에 앞으로 다시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일 것이다. 그러나 행복을 이렇게 과거와 미래에서만 찾을 필요는 없다. 사실, 마음의 눈을 뜨면 가장 어려운 날들에도 가장 행복한 일상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발견하고 누리는 마음이야말로 인생의 진정한 지혜가 아닐까?

지금을 개처럼 살지 말라. 개처럼 살다 보면, 정승 같은 날이 오는 것이 아니라 정말 개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을 정승 같은 마음으로 살아라. 설사 정승이 못되면 어떠랴! 꼭 정승이 되야 행복한 것도 아닐진대, 정승이 되겠다고 사람이 개가 될 각오까지 해서야 쓰랴

'목회 > 목양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다리시는 은혜  (0) 2012.09.02
용서의 조건  (0) 2012.08.29
은혜는 값싸지 않다  (0) 2012.07.28
명예로운 권위  (0) 2012.07.21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0) 2012.07.15
Posted by makarios
, |

시부야에 새로 생긴 Picolo 라는 과자점에서 쇼콜라(Chocolat)를 사왔다. 
'쇼콜라'는 '쵸콜릿'의 프랑스어이다. 슈크림빵처럼 빵 안에 쵸콜릿을 넣은 것이 특징이다... 아래 사진이 있다.
주소와 전화번호가 사진에 등장하니까... 궁금하신 분들은 구글맵의 도움을 받아 방문해 보시라.

맛을 품평 한다면...
쵸콜릿은 달콤하고 빵은 약간 짠맛이 특징적이다. 그 두 가지 맛이 어우러진 것이 비결인 것 같다.
하나의 가격은 191엔. 
쇼콜라와 함께 슈크림도 있다고 한다. 같은 빵에 안의 내용이 갈린다. 

제빵의 본고장이 유럽이라고 한다지만, 일본의 제빵 역시 그 역사와 기술에 있어 못지 않다. 특별히 '스위트'라고 분류하는 조각케잌이나 푸딩, 그리고 이런 류의 빵이 정말 다양하게, 그리고 엄청 고급스럽게 개발되어 있다. 동경에서 살면서 누리는 몇 가지 특혜(?)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원두커피와 함께 먹는 쇼콜라 맛있다! ^^ 










Posted by makarios
, |

本当は危ない首都圏(사실은 위험한 수도권)
http://goo.gl/idL91

정부 고관과 친인척 관계인 유통업계 큰손이 수도권에서 탈출하고, 교토의 지사는 왕족들이 수도권을 벗어나 교토로 이주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수도권 지진에 대비하자는 게 공식적인 이유였지만, 실은 방사능오염 때문이 아니냐고 지적한 기사입니다. 

http://goo.gl/7kZfk  (번역본, 위의 링크는 원본기사)

【기사 전문】

●7월말에 잇따른 탈출 움직임
슈퍼마켓 유통대기업 이온그룹이 지바현에 있는 본사의 대체기능을 아이치현 고마키시에 마련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교토부 지사 등이 관방장관을 방문해, 일부 왕실을 교토로 이전해달라는 요청서를 전달했다. 양쪽 다 수도에서 직하형 대지진이 발생할 것을 상정한 예방조치라 했지만 그 진의를 의문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오카다 부총리 일가가 오너인 이온그룹이 탈출
이온그룹은 민주당 오카다 가츠야 부총리와 관계가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총리의 친형이 이사 겸 대표집행역 사장인 오카다 모토야씨이며, 아버지인 오카다 다쿠야씨가 그룹 창업자이다.
그러한 이온그룹이 본사기능의 대체 시설을 아이치현 고마키시에 설치한다는 소식이 7월 28일자 아사히신문의 보도로 전해졌다.

수도권 직하형 지진에 대비한 조치라 했다지만, 정부 핵심과 인연이 깊은 기업인만큼 독자적인 위험 정보를 입수한 게 아니냐는 억측을 부르고 있다.

●사실은 세슘? 왕실에도 탈출을 권고
그 이틀 전인 7월 26일에는 교토부 야마다 게이지 지사가 후지무라 관방장관을 방문해, 일부 왕족의 주거를 교토로 옮기자는 요청서를 전달했다. 왕족 대부분이 도쿄에 살고 있는 상황은 안전/안심이라는 관점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여기서도 표면상의 이유는 수도권 직하형 지진 대책이라 했지만, 시기적으로 이온그룹 보도와 겹치다 보니 불안시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진보다 더 크게 의심 받고 있는 것은 세슘을 비롯한 방사성물질로 인한 오염이다. 식품을 다루는 이온그룹과 남계 유전자를 통해 승계되는 왕실 모두 방사성물질 오염에는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후쿠시마 핵)사고 직후에 "즉각적인 영향은 없다"고 외치면서도 정작 자신은 'full armor(중무장)'이라고 야유 받을 정도의 완전장비 차림으로 피해지를 방문했던 에다노 경제산업상. 후쿠시마로 들어갈 당시 헬리콥터 비행경로까지 예민하게 신경 썼던 간 나오토 전 총리...

이러한 과거를 돌이켜본다면, 정부관련 인사들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실제의 위험성'을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탈원전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동경은 이미 안전하지 못한 땅이다. 그러나 직접 동경에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무엇보다 식품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 직접적인 방사능 피폭의 위험은 차치하고라도, 후쿠시마 사고의 범위 안에 들어가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야채, 우유, 고기, 생선이 모두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세슘농도 제한이 이루어지고 있겠지만, 절대로 안전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후쿠시마의 야채를 직접 시식하며 '안전하다'고 외치는 연애인들의 광고를 볼 때면 탄식이 나오고 소름이 돋는다.


아래의 지도는 후쿠시마현에서 직접 실측하여 제작한 오염지도이다. 후쿠시마현의 울타리 안에 빽빽하게 오염을 나타내는 점들이 자리하고 있다. 물론 경계선은 인간들의 약속이지, 방사능 물질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때문에 대략적으로 훨씬 넓은 지역이 오염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생활 자체가 복마전이다. 슈퍼에 가면 되도록 후쿠시마에서 먼 지역의 식품을 구입하려고 하지만, 이미 그 산지와 공장지역의 표기가 무력화 되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후쿠시마 근교의 생산물이 타지의 공장에서 가공되거나, 다른 지역의 것으로 둔갑하여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동경은 전혀 안전하지 못하다. 그러니 부자들이 엔고(円高) 현상을 이용하여 자산을 정리하여 말레이지아나 싱가폴로 탈출하고 있으면, 거대기업들은 동경 수도권의 직하지진 위험성을 이유로 지방으로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물론 동경의 밀집으로 수도권 분할은 오래 전부터 논의가 이루어졌던 이야기지만, 최근의 위험으로 인하여 보다 가속화 되고 있으면 구체화 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후쿠시마의 한 주부가 쓴 시를 소개한다. 제목은 '후쿠시마에 산다는 것은' 이다.

후쿠시마에 산다는 것


내가 후쿠시마에 산다는 것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 심호흡 하는 습관이 없어진 것

예를 들어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방사선 선량계와 마스크를 챙겨나가는 딸의 뒷모습에 

가슴이 아프다는 것

예를 들어 후쿠시마에 산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때 

"그래도 우리 지역은 선량이 낮다"며 

묻지도 않은 설명을 한다는 것

예를 들어 6살 딸이 

장래에 결혼은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것

매일 화내는 것. 매일 비는 것...


Posted by makarios
, |


- 지난 7월21일, 동경의 요요기 공원에서는 원전반대 시위로 17만명이 운집했다. 또한 원전제로 정책을 위한 천만명 서명 운동에 지금까지 800백만명 이상의 시민이 서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의 반원전 정책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과거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뜨겁다. 실제로 후쿠시마 원전사태는 아직도 진행중이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일본의 동경에서 8년째 살고 있는 시민으로, 보이지 않는 이 당혹스러운 적에 대한 공포감이 적지 않다.
지금 관동지방에서는 방사능 피폭과 이로 인한 각종 질병에 대한 괴담이 끊임없이 양산되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와 매스컴이 일절 정보를 공개하지 못하는 현실로 인하여, 오히려 불안감은 더 커지고 있다.

만약 방사능 오염으로 인하여 이런저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그 소식을 바탕으로 대충의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절 위험을 부인하고 '안전하다'는 말만 계속 반복하는 현실로 인하여, 시민들은 오히려 더욱 끝도 알 수 없는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밖에 대응하지 못하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고려하면, 이미 후쿠시마와 인근의 피폭 위험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들어선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일본을 경험하는 시민으로 생각할 때에, 한국은 결코 일본의 투명성과 안전의식을 따라오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가장 최악의 원전사고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한국이 아무리 주의를 하고 기술적으로 최선을 기울여도 '원전사고'를 완전히 피하고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살아있는 증거이다. 

일본 국민 68% 2030년 안에 원전제로 정책 지지
http://goo.gl/uomY3


때문에 오늘 일본의 원전제로 정책에 대한 68%의 지지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
이곳의 사람들 대부분은 국가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기업과 경제를 위해서라면 다소의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68%의 원전 반대 여론이 조성되는 것은, 정말 대단히 심각한 위기의식을 사람들이 현실에서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과연 건강하게 노년을 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것보다 더 큰 불안은, 내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전쟁도 아닌 상황에서, 이처럼 한 국가의 모든 세대를 기한도 없는 막연한 불안에 빠뜨리고 건강한 삶을 실제적으로 위협하는  것이 바로 원전사고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원전이라면 촛불을 켜고 견디는 한이 있더라도 퇴출시켜야하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대선을 통해 현명한 결정이 시급하게 내려져서, 부디 이러한 위험을 모면하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기대한다.



Posted by makarios
, |


당신의 인생에 단 하루만 남겨져 있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우리가 흔히 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한 남자의 대답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는 영화이다.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한 분을 위하여 스포일러는 삼가하겠다.

다만 예상치 못한 감동을 받으며 보았던 영화이기 때문에, 아직 못 보신 분이 있다면 꼭 추천해주고 싶다. 영화의 스토리도 다음을 궁금하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특히 사만다를 연기한 Jennifer Love Hewitt 의 모습이 아주 인상적으로 오래 남았다. 



우리는 '하루'의 가치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 같다. 

영화는 하루에 얼마나 가치 있는 많은 일들을, 특별히 사랑에 대하여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빛나는 하루로 인하여 우리가 얼마나 가슴 아프게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하여도 생각하게 만든다.

사랑할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내일로 미루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소중한 기회를 놓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우연, 혹은 계시...로 우리가 인생의 가치를 깨닫는다면, 단지 하루를 통해서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다만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하다.



이프 온리 (2004)

If Only 
 9.2
감독
길 정거
출연
제니퍼 러브 휴이트폴 니콜스톰 윌킨슨다이아나 하드캐슬루시 데이븐포트
정보
로맨스/멜로, 코미디 | 영국, 미국 | 96 분 | 2004-10-29
다운로드




'인생 > 영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관상, 그래서 어쩌라고?  (0) 2014.07.03
로빈 후드 (Robin Hood 2010)  (0) 2012.07.11
Posted by makarios
, |

소바(そば:메밀국수)의 나라 일본… 일본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소바를 즐긴다.

가는 곳마다 소바 전문점이 자리하고 있는데, 공장이 아닌 손으로 만드는 소바는 만드는 사람의 자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오늘은 그 소바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한다.

 

 

지난 주일에 부름을 받아 섬겼던, 나가노교회(長野教会)에서 한 권사님을 만났다.

일본인이신 남편 분이 평생 소바 기술자로 살아오신 분이라 한다. 경기가 침체되면서 소바 전문점들도 인건비 절감을 위하여 사람들을 해고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소바의 질이 떨어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소바의 맛을 최고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바를 만드는 사람뿐 아니라 그것을 끓이는 사람도 기술자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 남편께서 직접 추천해 주신 소바 전문점이 두 개 뿐인데, 그 중의 하나에서 소바를 맛보게 되었다.

가게의 이름은 소바노미(そばの実)이다.

 

 

오전 11시부터 오픈인데, 10시 50분 정도에 도착을 했다.

이미 대기표에 이름을 쓰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차장이 꽤 넓어서 한적한 시골식당을 생각했지만, 정작 식사를 할 때가 되니 빈자리가 남지 않고 대기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역시 한국이나 일본이나 맛있는 음식점은 인기가 좋다. 기다려서라도 기꺼이 좋은 음식을 먹으려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인가보다.

교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내부는 정갈했다.

종업원의 표정도 밝고 친절하다. 어디를 가나 그렇지만, 친절한 손님접대는 참 일본에서 배울 점이 아닌가 한다.

내부는 천정이 높은 목조건물로 실링팬이 돌아가고 있었는데,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시원했다. 창 밖으로는 푸른 숲이 보여서 시야를 맑게 하는 곳이었다.

권사님의 추천을 따라 자루소바 (ざるそば)와 튀김을 주문했다.

 

 

개인적으로는 소바를 좋아한다. 그래서 여름이면 집에서 자주 먹는 음식이다.

동경에서 몇몇 소바 전문점을 찾아 보았는데, 개인적으로는 실패였다. 간장(つゆ)가 너무 짜거나 면이 입에 맞지 않아서 가격에 비하여 실망스러운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집의 소바, 정말 맛있다. 가까이 살았으면 자주 왔을 것 같다. 먹어볼 수 있도록 기회를 얻은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맛에 매력이 있었다.

 

백문불여일견이라. 맛을 어찌 글로 표현하랴. 다만 갈 수 있는 사람들은 가보라고 권하는 것이 제격이다.

 

 

나가노에 가면 꼭 한 번 맛을 보기를 권한다. 특히, 소바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아울러 좋은 구경 시켜 주시고, 맛있는 음식까지 대접해 주신 나가노교회의 조수진 권사님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모든 것이 풍성하신 주님의 은혜이다…

 

Posted by makarios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