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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간섭들


정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일반적 혹은 이교적 의미를 기독교 안에서 차용하는 것은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학생 시절, 교회에 나온 한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평생을 절에 다니다가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온 할머니는, 절에 다니던 믿음에 그대로 교회의 옷을 입히려고 하셨습니다. 새벽이면 추운 계절에도 찬물로 목욕을 하고 새벽예배를 나오시고 기도를 밤새워 하시면서 한 가지 말만을 주문처럼 반복하셨습니다. 할머니는 하나님께 벌을 받을까 두려워했고, 모든 고난을 본인이 하나님께 정성을 기울이지 못해 생기는 일이라고 자책했습니다. 

이 할머니는 복음을 믿은 것일까요? 물론 나이들면 사람이 굳어지고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과거의 습관이 어느 정도 지속되고 영향을 끼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내적 변화입니다. 의외로 더 나이드신 분들도 기독교 신앙에 제대로 입문(?)하면 표정이 편안해지고 행동과 생각에서 은혜의 꽃이 피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외람되지만, 그 할머니는 교회에 나오기는 했지만 복음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고 회고합니다...


또한, 우리가 성경적으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용이나 신뢰, 혹은 공자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믿음에 대한 정의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비슷하고 참고할 만한 내용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의 '믿음'을 그런 안경을 통해 풀이하는 것은 부적당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먼저, 믿음에 대한 정의와 이해에 있어 성경적인 것을 받아들이려는 결심을 해야 마땅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그대로 가지고 추측을 하면, 성경과 경험 혹은 미신이 짬뽕이 되어서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혼돈에 빠뜨리게 됩니다.

요즘은 강단에서도 인문학의 책을 인용하여, 역으로 그것을 통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매우 부당합니다. 인문학은 성경을 설명하는 참고는 될 수 있어도 성경을 풀이하는 해석자는 될 수 없습니다. 그 한계를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많은 지식이 사람을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2)

믿음을 계량할 수 있나요?


믿음은 성경 속에서 가장 유구한 주제입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믿음은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흐르는 강물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날까지 존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는데, 이는 믿음과 소망이 언젠가 폐하여진다는 뜻이 아니라, 결국 사랑으로 수렴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가볍지 않은 주제입니다. 다시 말해, 한 마디로 정의 하거나 심플하게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혹은 그런 식으로 접근했을 때에 필연적으로 많은 헛점을 가지는 주제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당연히 심플한 것을 좋아합니다. 복잡한 것은 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의 몫이고 자신들은, 아주 적당하고 간결한 진리를 얻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욕구는 자칫 그릇된 확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믿음에 대하여 치명적 오류, 혹은 오해를 평생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일단 한 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믿음'을 사람이 계량할 수 있습니까? 이를테면,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을 나누거나 분별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하여 생각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해 이새의 집을 찾았을 때입니다. 


삼상 16:6~7

(16: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 엘리압을 보고 반하였습니다. 사무엘 같은 선지자가 단지 정말로 외모만 보았을까요? 사무엘은 깊이 감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Surely)'이라는 말로 드러납니다. 이는 사무엘이 가지고 있는 모든 오감이 엘리압을 통해 만족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외모(the outward appearance)'라고 이해하는 것은, 7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라고 언급하셨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여기서 외모라고 해석된 히브리어 '아인'은 본래 '눈(eye)'을 의미합니다.  눈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나타내는 가장 좋은 지표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때문에 엘리압에 대한 사무엘의 만족은 경솔하거나 가벼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울을 버리는 슬픔과 현실적인 왕을 배반하는 반역의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새로운 왕을 찾아나선 사무엘이 어찌 이 일을 가벼이 여겨 경솔하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찾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무엘의 미스(miss)는 인간의 한계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무엘의 모든 경험과 능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게 판단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의 내적인 심연, 곧 '중심(the heart)'을 보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누구나 그릇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중심은 모든 인간의 공통적 요소입니다. 그것은 사울과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버림을 받고 다윗은 선택을 받았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그릇 안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무언가가 있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결국 무엇입니까? '믿음' 이외에 하나님께서 이처럼 절대적으로 가치를 인정하시는 것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인격적 결함이나 지식의 부족이나 심리적 트라우마는 모두 하나님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으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창세기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무엘도 믿음은 계량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모든 지식과 경험을 총 동원해도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적 관점에서 '외모'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부여 받은 인간의 내면은 가벼이 엿보고 판단할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 내면의 그릇에 담긴 '믿음'이라는 가치 또한 사람의 판단을 벗어나 있습니다. 그걸 확실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령함 속에서 추측은 가능하지만, 그것 또한 사무엘 선지자의 미스(miss)처럼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 안에서 흔히 사람들끼리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을 논하고, 판단하고, 칭찬과 비난을 하는 것은 대단히 경솔한 일입니다. 특별히 목회자가 신자들의 믿음을 그렇게 규정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알게 하시지 않습니다. 목사가 함부로 사람을 판단해서 자기 발등을 찍는 일이 얼마나 흔히 일어납니까? 그리고 그런 판단의 근저에 대부분, 그 사람의 믿음에 대한 경솔한 확신과 판단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런 경험들이 잘못 전달되어, 신자들은 목사가 사람들의 믿음을 계량할 수 있다고 흔히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사의 신뢰를 자신의 믿음 좋음의 표지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나타납니다.


우리는 믿음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자기 믿음을 제일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자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말씀 앞에서) 정말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볼 때에,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그 실체를 발견하고 어느 정도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외에 외적인 환경,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의 평판이나 직분, 혹은 기능적인 업무에 의존하여 '믿음'을 가늠하는 것은 대단히 그릇된 결과를 주게 됩니다. 


(3)

믿음은 정말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가?


한 가지 질문을 받았습니다. 좋은 믿음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교회에서 흔한 구호에 그런 것이 있지요. 큰 믿음을 가져라.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믿음을 통해 쟁취하라. 등등...

심지어 '믿음'의 한 단면이 하나님과의 씨름이라고 해석되기도 하는데,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씨름은 스포츠가 아니라 전투기술을 뜻합니다. 그대로 해석하면 하나님과 전투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이 되는데... 참 곤란한 무대포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 오셨을 때에 제자들은 귀신 들린 한 아이를 앞에 두고 그야말로 씨름(전투)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아이에게 들어 있는 귀신은 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세대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귀신을 쫓아내셨지요. 이 본문은 복음서 저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지요? 바로 마태, 마가, 누가 복음 모두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마 17:17, 개정)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막 9:19, 개정)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눅 9:41, 개정)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보통 마가의 본문이 가장 처음이고, 마태와 누가의 복음이 그 다음을 따르는 시대적 순서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거의 신약성경의 마지막을 담당합니다.

흥미롭게도 마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기억했고, 마태와 누가는 그 본문에 '패역'이라는 단어를 삽입했습니다.

기록의 시대적 순서가 그렇다고 해서 마가의 본문만이 원문이고 나머지는 기록자의 부연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자체가 거룩한 성령의 감동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함께 짝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 34:16)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이것이 성경입니다. 때문에 믿음 없음의 한 단면이 패역입니다. 서로 다른 본문이 아니라 서로 보완을 이루는 본문입니다. 

마태와 누가의 본문에서 '패역'은 '디아스트레포'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이미 70인경(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던 유태인의 성경, 당연히 신약은 없다)에서부터 39회나 사용된 전례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것은 타락을 의미하는데, 특별히 인간의 본성이 뒤틀리고 구부러져서 거기로부터 나오는 죄의 행위를 뜻합니다.


귀신 들린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의 귀신을 쫓아내고자 합니다. 선한 일입니다. 그리고 전에도 이런 일을 했던 경험이 제자들에게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실패했습니다. 왜 실패했을까요?

후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살피면, 마태복음에서는 '겨자씨 만한 믿음'을 말씀하시고, 마가복음에서는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사본에 따라서는 '기도와 금식'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


(마 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막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누군가 틀린 것입니까? 아니라고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의 바른 독법은, 그 다름이 조화와 보완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이 내적인 내용이라면, 기도(와 금식)는 그 형식입니다. 

결국 제자들의 실패는 믿음의 실패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실패를 마태와 누가는 '패역'이라고 특정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패역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구부리다, 뒤틀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면 됩니다. 가위가 있습니다. 날이 서서 아주 잘 자르는 가위입니다. 그런데 충격이 가해져서 뒤틀어졌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생겨납니까? 그 날카로운 날이 서로 맞지 않아서 자르지 못하게 됩니다. 본래의 용도, 유용성에서 이탈되는 것입니다. 이게 패역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가치 있는 것을 무가치 하게 만드는 악한 경향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신 32:5, 잠 8:13)

그러니까 선하고 거룩한 일이라도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간섭하면 즉시로 매우 통속적이고 저열한 것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본문에는,  이 사건의 직후로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크냐는 변론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 9: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해석한다면, 제자들이 귀신 들린 아이와 아버지를 불쌍히 여겨 구원하고자 했다기보다 서로 이번 기회를 통해 자기의 능력을 드러내고 입지를 견고하게 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심적 상태가 겉으로 들어나지 않았겠지만, 제자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지 못했고, 귀신은 귀신 같이 제자들의 패역한 상태를 파악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마태복음의 본문에서 '겨자 씨 만한 믿음'을 말씀하실 때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산을 옮긴다'는 거대한 결과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거스려 순수한 믿음에 이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에 대한 깊은 자성입니다. 

정말 믿음이 있습니까? 그 믿음이 자기를 자랑하거나, 자기의 유익을 구하거나, 자기의 욕구를 충족하거나, 자기의 생각을 고집하는 모든 '패역'에서 벗어나 있습니까? 그런 믿음은 겨자 씨 만한 것으로도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그 믿음을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너무나 가난하지 않습니까?


믿음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냐고요? 아니라는 말도, 그렇다는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진짜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까? 만약 그것을 이해하고 안다면, 위의 질문은 저절로 풀리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논지에서 조금 벗어난 부연입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은혜로 주셨지만, 은혜 받은 자에게는 은혜 받은 자다운 삶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믿음이 선물로 주어졌지만, 그 믿음에 부응하는 삶은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패역에 넘어간 현실을 기도(와 금식)의 부재로 진단하셨습니다. 좀 더 넓게 이야기 한다면, 경건을 상실한 믿음은 무력한 말장난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음은 평생에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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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kar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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